지식인의 두 얼굴 - 위대한 명성 뒤에 가려진 지식인의 이중성
폴 존슨 지음, 윤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은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대표적인 우파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선정한 지식인들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저자의 비판 수준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근거없는 험담이 아닌 사실을 갖춘 공격이라는 데 있다. 저자는 사실적 논거와 탄탄한 논리를 특유의 힘있고 맛있는 문체로 잘 버무려냈다.

   저자가 공격하는 지식인의 범위는 폭넓다. 철학자와 사상가, 작가와 평론가에 이르기까지 꽤 다양하다. 저자의 칼날이 닿는 대상은 가장 유명한 교육론 <에밀>의 저자이자 '사회계약론'의 창시자 장 자크 루소를 시작으로 다양한 좌파 철학자와 작가들을 관통하면서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 노엄 촘스키까지 도달한다. 거론된 지식인들은 그들이 제기했던 사상과 이론, 저서와 삶의 태도 등 내·외면적 존재성을 저자에 의해 처참하게 난자 당한다.

   내가 이 책에 주목한 이유는 저자의 논증이 내 입장과 대부분 일치한다는 데 있다. 특히 카를 마르크스,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에 대한 저자의 비판논리는 내 견해와 완벽하게 부합한다. 개인적으로 변형되고 변질된 '좌파적 사고'를 싫어했고 멀리해왔다. 본래 좌파적 사고의 뿌리는 인간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휴머니즘이다. 19세기 원류 좌파들은 휴머니스트가 많았다. 그러나 20세기에 쉬지 않고 분출하던 좌파 운동은 폭력적인 집단 광기에 불과했다. 그것은 나치즘과 똑같이 통제되지 않은 야수성을 드러내면서도 또 다른 전체주의全體主義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지식인과 독재자들에 의해 20세기는 철저히 유린당했다.

   고백하자면, 일례로 사르트르를 보자. 그에 대한 나의 강한 분노는 오래된 경험에서 비롯됐다. 이십 대 초, 종교적(기독교적) 교리에 구속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나에게 실존주의實存主義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철학이었다. '신神의 예정'이라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사르트르의 행위의 철학이 안내한 매혹적인 '자유의지(free will)'에 의해 멀리 떠나갔다. 시간이 지나 사르트르식 실존철학은 허울뿐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까지 나는 많은 것을 잃었고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했다. 지금 생각하면 쓰레기와 같은 <존재와 무>를 여러 해설서와 함께 오기로 읽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참으로 안타깝다. 불과 십수 년 만에 발생한 내 변화의 본질은 '진실의 깨달음'에 있다. '마르크스'와 '휴머니즘'을 절대적인 선善이자 정의正義라 여겼던 내 청춘시절의 조악한 지성과 경박한 정신력이 사르트르를 우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지금의 시점에서, 무엇보다 인문학적 사고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에게 사르트르는 행동없는 양심의 전형이자 사이비 지식인의 대표가 됐다. 그 사람의 책을 읽은 시간이 아까워 한탄하고, 그로 인해 야기된 내 신앙의 상흔에 치를 떨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르트르를 위시하여 20세기의 유럽 젊은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좌파사상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이들에 대한 내 견해를 피력하는 일은 언젠가는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나름의 정리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 열정이 소원해질 즈음 <지식인의 두 얼굴>은 적기에 내게 찾아와 나의 의지를 부추겼다. 이들 지식인이 가진 추악함의 본질은 좌·우파의 이념 대립이 아니라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궁극의 정직함 속에 있다.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이율배반하는 양면적 태도, 지식인으로서 양심을 저버린 거짓과 부도덕성, 인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어두운 역사의 인과관계, 내·외면을 지독한 방식으로 호도시킨 기만성 등은 이들의 공통된 오류이자 암연暗然한 한계이다. 바로 이점을 증명해내는 저자의 식견과 논리 전개에 나는 깊은 공감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폴 존슨은 지식인들이 가진 오류와 허구를 검증된 팩트와 탄탄한 논리로 꾸짖는다. 저자가 그들을 비판하는 방식은 대부분 비슷한 경향을 띤다. 우선 작품과 사상의 오류를 지적한다. 그 다음 삶과 태도를 꾸짖는 방식이다. 말미에는 감춰진 사생활을 신랄하게 파헤치기도 한다. 저자의 이러한 비판방식은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삶과 사상의 일치로 대변되는 도덕성의 안정감'이라는 점을 주지했을 때 충분한 설득력을 띠며 어렵지 않게 수용된다.

   그러나 저자의 모든 비판에 고개가 주억거리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톨스토이와 헤밍웨이에 대한 비판은 수긍하기 힘든 면이 있다. 그들의 작품이 가진 문학적 성취와 특별한 삶이 만들어낸 예술의 본래적 가치를 감안한다면 다소 지나친 부분이 있다. 작가를 지식인의 범주에 넣어야 할 지 의문이지만, 사상가(철학자)와 동일한 잣대로 작가의 내·외면적 존재성을 재단하는 건 동의하기 힘든 기준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작가에게 '진실'은 지나친 요구다. 허구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추출해내는 작가에게 진실은 비본질의 영역이다. 작가적 생명력의 원천은 허구의 세계를 발군의 창조력으로 그려내 독자로 하여금 의미와 감동을 전달하는 데 있다. 바로 이 점이
철학자의 정직성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7.28 ~ 1872.9.13)의 말대로 "철학에 있어서는 신성한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 책의 후기를 짧은 리뷰로 갈음하는 것이 마뜩치 않았다. 보다 많은 글과 논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용단했다. 책에 수록된 지식인 중 내 나름의 견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다섯 명을 추려서 리뷰를 세분화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 디테일한 작업의 동기는 언젠가는 실천해야 할 정리의 한 방식이자, 이 책을 입체적으로 갈무리하는 방법의 한 형태 속에 놓여 있다.

   서설이 길었다. 카를 마르크스, 레프 톨스토이, 어니스트 헤밍웨이,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 이렇게 다섯 인물을 택했다. 지금까지 이들에 대해 견지해왔던 내 입장을 이 책의 리뷰를 다는 형식으로, 각기 독립적인 글로써, 나름의 주관으로 밀도있게 소화해보기로 했다. 이런 취지에서 이 글은 그 고된 작업을 예고하는 간략한 인트로에 불과하다.

 

 

 

① Intro : 본격 리뷰에 앞서
② 카를 마르크스 : 저주받은 혁명가
③ 레프 톨스토이 : 하느님의 큰형
④ 어니스트 헤밍웨이 : 위선과 허위의 바다
⑤ 버트런드 러셀 : 시시한 논쟁
⑥ 장 폴 사르트르 : 행동하지 않는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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