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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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신경숙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한국 소설가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 표절 사태에 휘말리게 되어 종국적으로 어느 정도 사실로 정리되는 과정을 본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외딴 방』을 쓴 작가가 표절이라. 당시의 멘붕은 대단했다. 더욱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태도로 슬그머니 넘어가려는 신경숙의 비겁한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그래서 당시 별도의 칼럼을 통해 "진실은 신경숙 안에 있다. 지금은 엄마를 부탁할 때가 아니다. 부디, 진실을 부탁해!"라고 일갈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신경숙의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표절 파문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소설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를 주제로 삼았다. 어머니의 입원 때문에 홀로 남은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고향을 찾은 딸이 아버지의 인생을 되짚는 내용의 소설이다. 250만 부 넘게 팔렸고 전 세계 수십여 개 나라에 번역 수출된 초대형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에서 어머니를 이야기했던 작가가 이제는 아버지의 삶을 조명한다. 소설 속 화자인 딸의 고백과 관찰, 회상과 사유가 아버지의 오래고 지난한 삶을 훑고 천착한다. 몰랐던 사실을 알아가고 과거 무의미하게 넘어갔던 것의 의미를 곱씹는 딸의 독백이 잔잔하다.

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몇 해 전 자식을 사고로 잃었다. 그 상실의 아픔에 먼지가 묻을까봐 가족들은 딸에게 연락하는 걸 주저하고 피한다. 딸 자신도 가족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류가 없다가 어머니의 입원을 계기로 소설 속 배경 'J시'에 혼자 남은 아버지를 돌보러 가는 장면이 바로 소설의 도입부다. 빈 우사에 갔다가 아버지가 중동으로 파견 나간 큰 오빠와 주고받은 편지를 읽기도 하고, 아버지와 관계된 여러 사람들을 통해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또 다른 내면과 객관을 발견하기도 한다. 특히 아버지에게도 은밀한 첫사랑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참혹한 전쟁(6.25)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준 자책을 극복하며 재회한 친구 박무릉과의 이야기는 큰 상실에 빠진 딸에게 위안을 준다.

소설 곳곳에 아버지의 일생과 함께 흘러간 파란만장한 대한민국의 현대사의 주요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한국전쟁의 참혹함부터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혁명,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피땀 흘려 농사짓고 소를 키운 그 시대 농촌 가장의 힘겨운 역경 등이 그려졌다. 195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가 오롯이 담겼다. 하지만 화자는 그 시대ㅡ산업화 시대ㅡ의 아버지를 대변하는 거대 담론에 묻히지 않는다. 개별자로서의 아버지를 인식한다. 자식을 잃은 깊은 상실감을 아버지에 관한 재해석을 통해 극복해나간다. 개별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란 존재를 발견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간다. 그 과정이 애잔하고 감동적이다.

세상에서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나에게 이 소설은 특별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소설 속 아버지의 모습과 나의 아버지의 자화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1947년생이신 내 아버지는 한국전쟁 직전에 태어나서 두 살에 아버지(나의 할아버지)를 잃고 남의 집 머슴을 하며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랐다. 가끔 듣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은 눈물겹다. 그 시대 모든 아버지들이 공유한 보편적 훈장이라고 말하기에는 한없이 고단하고 찬연하다. 지독한 가난과 전염병, 참혹한 전쟁과 서슬 퍼런 독재 정권의 유린을 관통하며 자기 삶을 뒤로 미룬 채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위대한 헌신자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찬양받아 마땅하다. 가끔 젊은 세대들이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선배 세대의 노고와 희생을 가볍게 여기고 조롱할 때마다 분노가 치민다.

우리는 아버지란 존재를 평가할 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아버지는 신(神)이 되어야 본전이다. 각 시대가 갖는 시대의 특질이란 게 있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타락하지 않은 것만으로 위대했다. 순결하고 완벽하기에는 시대의 곡절이 너무 고약했고 지난했다. 바람피우지 않고 놀음하지 않으며 끝까지 가족을 부양해낸 것만으로 숭고하다. 에세이 작가 오소희의 말대로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쉬운 것을 못한 게 아니라 어려운 것을 못한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 우리의 위대한 아버지들에게 신이 되지 못했다고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말라. 이 소설은 그 사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웅숭깊다. "살아냈어야,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살아냈어야,라고." 그렇다. 아버지도 헌신자 이전에 인간이며 개별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삶이란 '산다'가 아니라 '살아낸다'로 사는 것임을 일깨운 것이다. 그래서 위로하고 격려하겠다. 과거 어느 시절에, 그리고 지금 어디선가 "살아냈어야"라고 독백하면서 비루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위대한 아버지들을.

표절 파문과 별개로 신경숙은 신경숙이다. 이런 소설을 써내는 작가의 "과거의 허물과 불찰을 무겁게 등에 지고 새 작품을 써 가겠다"라는 말이 부디 진심이자 진실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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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도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댄 윌리엄스 그림, 명혜권 옮김 / 스푼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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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을 맞이해 첫째 딸 다인이에게 몇 권의 책을 선물했다. 그중 할레드 호세이니의 신간 『바다의 기도』는 단연 눈에 띈다. 호세이니가 동화를 냈다고 해서 딸과 함께 읽어보고 싶었다.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서점을 찾았다. 작가의 인기 때문인지 방문한 서점 대부분에서 대여섯 권 이상을 비치해두고 있었다. 신간 동화(그림책)라는 특징 때문인지 견본 없이 비닐로 둘러놓기도 했다. 국내 최대 온라인 서점의 '오늘의 책' 코너에 당당하게 오른 걸 보면 호세이니의 이름값은 여전하다 싶었다. 출판사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듯했다.

 

할레드 호세이니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 작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미권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명성만큼 많지는 않다. 『연을 쫓는 아이』, 『천 개의 찬란한 태양』, 『그리고 산이 울렸다』 단 세 편의 소설로 단숨에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슬프면서 감동적인 서사로 전 세계 5500만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 그의 첫 소설 『연을 쫓는 아이』는 영화로 개봉돼 수많은 영화팬들의 가슴을 적시기도 했다. 그의 소설은 읽기 쉬운 문장과 복잡하지 않은 서사 구조에 조국 아프가니스탄의 굴곡진 현대사를 감동적으로 그려낸 것이 특징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인간성의 숭고함과 여성성의 위대함을 묵묵한 문체로 그려낸 아름다운 이야기다. 『연을 쫓는 아이』는 한 남자의 성장통이라는 테마를 조국 아프가니스탄의 처절한 현실에 녹여낸 거대한 서사시다. 『그리고 산이 울렸다』는 1인칭과 3인칭 시점, 편지글, 잡지 인터뷰 등의 다양한 형식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의 반세기를 훑는 숨 막힌 이야기다. 세 편의 소설은 각기 다른 주인공과 서로 다른 이야기로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적 민낯을 웅대하게 전달한다. 나는 세 편의 소설을 통해 할레드 호세이니에게 완전히 매료되었고 주변 지인에게 끊임없이 추천해왔다.

 

신간 『바다의 기도』는 동화이다. 얇은 두께의 그림책이다. 대략 10분이면 읽을 수 있다. 텍스트를 읽는 것보다 그림을 감상하는 게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정도다. 책 두께는 얇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두껍고 무겁다. 호세이니의 간결한 문장을 댄 윌리엄스의 유려한 그림이 적확하게 수식했다. 2015년 9월 터키 해변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크루디(Aylan Kurdi)'의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 소설은 아들 마르완을 위한 아버지의 독백과 기도로 이루어졌다. 죽음의 고비에서 아들을 보다 안전한 세상으로 구출하기 위한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가 처연하고 숭고하다. 감사와 기도, 사랑과 희생, 역사와 현실 등을 폭넓게 생각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동화다.

 

난민 문제로 지구촌이 여전히 시끄럽다. 시리아의 꼬마 난민 크루디가 바닷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사진이 공개되면서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의 비극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후 국가마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난민의 유입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도와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문제일까,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난민 문제의 디테일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인종적인 문제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어른의 문제다. 어른들의 탐욕과 불관용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만 죽어나가고 있다.

 

내가 이 짧은 그림책을 통해 딸 다인이와 나누고 싶었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인간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것, 어른들도 실수를 많이 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는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 이것들을 딸아이가 알고 느끼기를 원했다. 이해하고 공감하길 원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자격이란 '감사'와 '겸손'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기를 원했다. 인간은 분명 뛰어난 종족이되 완전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항상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현실적 조건이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지를 알고 그것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걸 일깨우고 싶었다. 흠이 많고 불완전하지만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상을 도전해 주고 싶었다. 과연 다인이는 어떻게 읽었을까.

 

완독한 다인이가 감상평을 남겼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아빠 손을 꼭 잡고 있으면 잘 될 거라는 믿음을 얻었어." 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지 못한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어른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는 걸 새삼 인식했다. 그렇다. 자식에게 부모는 신(神)과 같은 존재다. 자식이 커가면서 아빠-엄마의 힘(권력/권위)은 점점 약해지지 마련이지만 아래로 흘러내리는 영향력은 과히 압도적이다. 그렇기에 자식이 나를 믿는다면, 바라본다면, 의지한다면, 사랑한다면, 나는 어떤 마음과 책임으로 인생을 살아야 할까, 생각했다. 묵직한 사유가 내 현존을 억누른다. 마음이 거룩해진다. 예배당으로 달려가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싶어진다. 책 한 권이 주는 기쁨에 흐뭇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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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 여행자 오소희 산문집
오소희 지음 / 북라이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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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품에 세월이 입혀지는 걸 매 책에서 확인하는 것이 리뷰어에게 기쁨이라면, 리뷰어의 작품에 세월이 입혀지는 걸 매 리뷰에서 확인하는 것 또한 작가에겐 큰 기쁨이다."

 

그렇다. 작가 오소희는 알고 있다. 한 사람의 독자이자 북리뷰어로서 내가 얼마나 자신의 글과 생각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사실 그랬다. 14년 전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떠난 그녀의 터키 여행기(『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는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획으로나 내용으로나 여행 에세이 분야에 한 획을 그은 그녀의 첫 에세이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사랑을 받았다. 당시 정치·사상 관련 서적에 함몰되어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던 나에게 오소희의 산문은 촉촉한 밀크티와 같은 것이었다. 내 리뷰를 보고 인상적이라며 만남을 요청한 그녀의 제안으로 광화문의 큰 서점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이후 차곡히 쌓인 서로 간의 '평가와 우정의 양립'은 지난 십수 년 동안 변질되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위 전작주의(全作主義)를 통해 한 작가를 오랫동안 관찰하다 보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작가의 변모 혹은 성장과 같은 발전 단계의 흐름을 포착할 때가 있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작가로 한정하면 소설가 공지영은 '산문성의 축소에 따른 소설력의 강화'라는 측면으로, 하루키는 '개별 사랑을 우주적 관점으로 확대해가는 시각'이란 측면에서 작가적 세계관을 확대해갔다. 반면 작가 오소희는 '떠남'이란 소재를 '보편 인간성의 찬란함과 비루함'이라는 코드로 풀어내면서 그 장르와 문체를 끊임없이 변화시켜갔다는 점이 독특하다. 에세이로, 소설로, 동화로, 육아서로, 페미니즘으로. 다양한 형태(외연) 속에서 생명력 있게 뽑아내는 작가의 사유와 텍스트는 그 특유의 울림과 진폭을 통해 독자의 가슴을 적셔왔다.

 

오소희의 신간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은 '여행'에 관한 사색을 그 대척점인 '집'의 재발견으로 아름답게 연결한 산문집이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떠나지 못할 것을 명령했지만 역설적으로 새삼 집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떠남에 익숙한 작가에게 코로나19는 느닷없는 불청객이었을 게다. 그러나 작가는 여행작가로서의 자신의 실존 성찰을 멈추지 않는다. 작가에게는 떠나지 않고도 보이고 사유할 것들이 있었다. '떠남'을 보충하고 완성하는 것들이었다. 바로 '머묾'이었다. 작가는 이번 신간을 통해 '떠남'과 '머묾'이라는 서로 배치된 개념을 대구적(對句的)으로 양립시키며 여행의 의미를 탐색한다.

 

은 여행과 집에 관한 사유와 통찰이 대구를 이루는 구조로 쓰였다. 작가는 수시로 우붓(발리)과 부암동(서울)을 오가며 서로 다른 시공간의 차이와 조화를 꾀한다. 가령 부암동 집 옥탑방에서 동쪽 창밖을 내다보는 작가의 시선은 어느덧 파리 시내에서 종일 신문을 돌리다 옥탑방으로 돌아온 신문팔이 소년에게로, 가로등 하나 없는 필리핀 팔라완의 바닷가 마을로, 콜롬비아 보고타의 산기슭 빈민가의 미로로 옮겨간다. 옮겨진 시선은 자못 진지하고 차분한 사색을 거쳐 여행자의 내면 속으로 잠입한다. 세상 모든 여행자의 '운명적 형벌'에까지 다다른다. 그리고 작가는 선언한다. "맘대로 떠났다 돌아온 자, 너는 연옥에 머물라." 독자는 작가의 해석을 통해 여행자의 본질적 외로움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지면은 작가가 책 곳곳에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을 고백한 부분이다. 책은 크게 2개의 방(챕터)으로 나눠져 있는데 첫 번째 방이 여행과 집에 관한 작가 내면의 사색이 주를 이룬다면 두 번째 방은 작가 주변 사람들, 대부분 가족에 관한 작가적 고백이 다수를 차지한다. 남편, 아들, 아버지, 오빠의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특히 남편 이야기가 상당히 감동적이다. 작가의 부부관계도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무려 열아홉 장을 할애해 오랜 시간 동안 깎이고 다듬어진 부부애의 발전사를 아름답게 기록했다. 어느덧 안정 궤도에 오른 수십 년 차 중년 부부의 영혼의 아우라가 잘 담겼다. 각자 완전히 다르지만 서로 온전히 사랑한다는 걸 문장 곳곳에서 느낀다. 매일 손잡고 부암동 골목을 걷는 작가 부부의 현재상이 멋지다. 작가의 말대로 부딪힘도 간절한 소통이다. 연마되고 버려진다. 작가보다 한참 인생 후배지만 행복한 부부관계는 반드시 이 대목을 관통한다는 걸 알기에 흐뭇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또 하나 인상적인 감상은 집의 의미와 가치를 보다 깊이 있게 고찰해보게 된 것이다. 사상 초유의 세계적 전염병의 창궐로 우리 모두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과거에 비해 늘어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집의 의미를 지나치게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치환해왔다. 지역, 층, 평수, 가격, 인테리어 등 한국적 의미에서의 집은 크기와 가격이라는 수학적 가치에 함몰되었다. 나도 그랬다. 2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우리 부부가 우선적으로 고려한 건 멋진 전망과 인테리어 퀄리티였다. 좋은 집이란 외적인 미(美)의 화려함이 극한까지 확보된 공간으로 이해했다. 이사 심방을 온 목사님의 일갈이 있기 전까지. 진리는 전혀 달랐다. 좋은 집을 결정하는 건 집주인이었다. 좋은 집은 좋은 주인이 사는 곳이었다. 좋은 집에 대한 작가적 정의도 바로 여기에 맞닿아 있다. 작가가 직접 짓고 꾸민 부암동의 새 집은 나만의 공간이 아닌 타자와의 나눔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살롱이었다. 여성들의 문화 공간 '부암살롱'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곳을 통해 작가는 '엄마들을 옭아맨 역할억압을 하나씩 해체하는 처방들'을 공유했다. 그것은 '언니공동체'로까지 확장되어 '구덩이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고 싶어 한 여성들'의 영혼의 항구가 되어주었다. 좋은 집에 대한 가장 적확하고 아름다운 예라 할 수 있다.

 

작가의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신간 또한 감사와 행복의 테마를 진지하게 탐색한다. 작가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것이다." 즉 여행의 외재적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이 있던 자리를 떠나야 한다. 떠나지 않는 여행은 성립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하는 부분이다. 과거의 책들이 떠남으로써 머문 곳을 사색했다면 이 책은 머문 곳에서 떠남과 머묾을 동시에 천착한다. 그래서 둘은 단절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재조명하고 피드백하는 관계임을 알려준다. 작가는 독자에게 질문한다.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일깨운다. 결핍이든 풍요든 결국 행복의 문제는 해석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그리고 그 오래고 낡은 세상 모든 종교와 지혜의 키워드 '감사'가 항상 그 앞에 붙는다는 것을.

 

서평을 정리할 시점이 왔다. 내가 오소희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랑에 관한 입체적 천착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오소희는 사랑꾼이다. 그녀가 쌓아올린 십수 권의 책 더미는 한결같이 인간 사랑의 실재적 디테일을 주목하고 관통한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내 눈앞의 한 사람'을 향한 진짜 사랑말이다. 우리는 결코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세상 모든 사랑은 완전히 평등하고 고결하다. 그리고 연결되어 있다. 그녀가 떠남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내가 그녀의 글을 사랑하는 것까지. 이 숙연한 인식과 감동의 최전선에 신간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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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펭귄클래식 2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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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상치되는 걸까. 인류 고전사(사상사)를 새로 쓴 위대한 사색가들은 삶과 죽음이 본질적으로 동일선상에 있는 것임을 일갈해왔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출구에서 볼 때 너무 짧다"라고 했고 헤르만 헤세는 "맨 마지막 한 걸음은 자기 혼자 걸어야 한다"라고 했다. 부처는 "진실로 삶은 죽음으로 끝난다"라고 했고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영원히 잠을 자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삶의 종국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삶과 죽음이 단절된 게 아니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에 쉽게 도달하게 된다. 삶을 강렬히 추구함으로써 죽음에 도달하며 결국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사에서 삶과 죽음을 치열하게 성찰한 작가가 있다.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천착했다. 그의 모든 작품이 이 테마를 관통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삶의 예찬보다 죽음의 성찰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톨스토이 문학의 특징이다. 장편만을 보자면 『전쟁과 평화』는 삶을 긍정하는 웅대한 걸작이며 『안나 카레니나』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천착한 예술작품이다. 『부활』은 죽음의 의미를 깊이 고뇌하는 후기 톨스토이의 원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실제로 기차역에서 객사한 그의 죽음 또한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이색적인 죽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중 죽음을 다룬 가장 탁월한 작품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이 소설은 톨스토이가 산전수전을 다 겪은 후 인생 후반부에 쓴 짤막한 분량의 중편소설이다. 병상과 죽음에 관한 소설로는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독자로 하여금 어마어마한 몰입력을 선사하는데 일단 첫 장을 넘기면 도중에 정지할 수가 없다. 한달음에 달려 소설 말미에 도착한다. 소설의 3인칭 화자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한 인간의 죽어가는 과정을 고요하면서도 생생하게 들려준다.

소설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부패한 러시아 관료사회에서 승진과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판사이다.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를 했고 그에 맞춰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으며 상류층과 결혼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그렇게 결혼하였다. 남부러울 것 없이 뭐든 착착 해내는 인물이었기에 별다른 걱정과 근심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찾아든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간다. 육체적 질고에 의한 극심한 고통은 그답지 않은 고성과 울부짖음을 통해 밖으로 표출된다. 가족들은 경악한다. 그는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인생은 진정 즐거운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삶은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덧없고 의심스러웠으며 하루 살면 하루 더 죽어가는 그러한 삶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를 추적해가는 주인공 자신의 독백과 이를 묘사하는 작가의 3인칭 서술이 압권이다.

"여러분,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군요."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장 동료들은 하나같이 그의 죽음이 자신과 다른 동료들의 승진이나 인사 발령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계산하느라 바쁘다. 동료의 죽음에 겸허히 슬퍼하기보다 어떤 득실이 있을지를 먼저 챙기는 그들의 세속적인 모습이 악랄해 보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모든 사람의 내면에 내재된 인간 본성의 진실한 민낯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악인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소설 속 인물 중 주인공의 하인과 어린 아들은 선한 영혼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두 명만이 올바른 영혼의 소유자인 점은 이채롭다. 인간 됨의 본질과 원형은 부와 지위와는 무관한 것임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소설은 결말을 먼저 알려준 뒤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목에서부터 결론이 명시되어 있다. 그렇기에 반전이 있을 리 없고 이야기의 뒤틀림이나 전환도 없다. 한 남자가 병에 걸려 죽어가는 뻔한 내용이고 결론으로서도 역시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뻔한 이야기를 중편 분량으로 몰입감 있게 풀어낸다는 게 놀랍다. 모든 문장 하나하나가 읽을수록 감탄스럽다. 책의 막장을 덮었을 때는 가슴속에 무언가의 싱숭생숭함이 남을 정도다. 가장 큰 여운은 나와 죽음 사이의 간극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알 때, 아니 내가 죽어간다는 것을 피부로 체감하며 시간의 흐름을 느낄 때, 과연 나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때 심정은 어떤 색깔일까. 여러 사유가 샘솟는다. 불변의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는 것이다.

독자마다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은 가지각색이다. 혹자는 이 소설에 대해 한 개인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이야기가 아니라 톨스토이가 후세의 사람들에게 남기는 구원의 메시지라고 평가한다. 이반 일리치는 초반에 출세욕만 가득 찬 인물로 그려지지만 병마와 씨름하면서 점차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그러면서 현재보다 과거의 삶이 더 선하고 아름다웠음을 깨닫는다. 그가 되새기는 유년의 빛나는 기억은 찬란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잘못된 삶을 산 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신의 존재에 관해서도 여전히 부정적이다. 병세가 깊어지며 죽음을 앞두고 성찬식을 치렀음에도 자신의 현재 삶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회개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의 코앞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참회한다. 죽음의 직면에서 결국 자신을 내려놓고 객관화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인간 유한성의 처연한 한계를 엿본다. 삶이란 그저 선하고 진실되게 살아야 한다는 걸 일깨우는 것이다.

해외문학은 항시 번역의 문제에 봉착한다. 시중에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다. 어느 출판사 어떤 역자도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서점에서 대략 대여섯 개의 번역본을 훑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잘 읽혔다. 톨스토이의 중·단편은 서사의 힘이 강하고 메시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번역의 변수를 뚫는 힘이 있다. 번역의 질에 따라 작품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대개 중·단편은 여러 작품이 함께 실리기 때문에 출판사마다 함께 실린 소설이 다르긴 하지만 번역 자체가 문제 될 만한 번역본은 찾지 못했다. 중고서점에서 눈에 띄는 것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죽음에 관한 톨스토이의 혜안을 느끼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전에는 톨스토이의 웅장한 장편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가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지금도 그 견해에는 변함없다. 이제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비록 120쪽 남짓한 작은 분량이지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여느 장편에서도 느끼기 힘든 삶과 죽음에 관한 걸쭉한 사유가 담겨 있다.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독백(3인칭 서술)만으로 이렇게 웅숭깊고 통찰력 있는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역시 톨스토이다. 이 소설이야말로 평생 곁에 두고 삶이 무료할 때마다 꺼내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죽음의 과정을 다룬 듯 보이지만 실상 삶의 희망을 맹렬히 추적한 소설이다. 고전에도 품격이 있다. 아직 안 읽은 사람이 있다면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구독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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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 세상의 아이들이 투명하게 알려준 것들
오소희 지음, 김효은 그림 / 북하우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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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힘든 시기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의 중력은 무거운 법인데 작년부터 힘들다는 곡소리가 더 늘어났다. 여기저기서 고단한 삶의 각론이 폭포수처럼 넘쳐흐른다. 고독과 우울은 덤이다. 예기치 못한 국제적 전염병의 창궐로 우리 사회는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일상을 겪어내고 있다. 걷는 존재로서의 인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는 위협받고 있다. 서로 만나지 못하고 말수를 줄이며 홀로 집에 있는 인간상은 지난 1년 동안 일관되게 지향되고 있다. 사회는 위축되었다. 우울하고 무기력하다. 많은 사람이 정신과를 찾는다.

사실 코로나 이전부터 우리 사회의 행복의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이슈였다. 일각에서는 다른 나라의 행복지수를 거론하며 우리 사회가 불행하다고 진단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경제적 외형의 확대가 해답이라며 정체된 이 나라의 GDP 성장률을 꼬집었다. 하지만 정작 행복의 최소단위이자 주체인 '개인'의 존재를 천착하는 건 부족했다. 그렇기에 남보다 내가 낫다는 상대적 우월주의를 행복의 개념으로 등치시키는 고약한 착각에 오랫동안 침잠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적인 행복 체감도가 하향평준화되면서 삶과 만족에 관한 보다 냉철한 탐구가 재조명되고 있다.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 오소희는 힘든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의 글을 전한다. '아릿하고 순도 높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매혹적인 띠지를 두르고 있는 오소희의 신간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는 세계 여러 나라의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화집이다. 작가는 각 나라의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 고된 삶에 번민하고 허덕이는 이들을 토닥이고 격려한다. 이 책은 2012년에 출간한 『나는 달랄이야! 너는?』을 일부 수정한 개정판이다. 글의 구성과 디자인이 전체적으로 달라졌다. 출판사가 바뀌었고 책표지를 흰색으로 변경했다. 표제작을 제목으로 한 예전 판과 달리 보다 웅대한 제목을 전면에 배치했다. 적확한 순간을 잘 포착한 김효은의 그림은 여전히 훌륭하다.

총 다섯 편의 동화를 담고 있다. 동화라고는 하나 픽션과 팩션의 경계에 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작가가 여행지에서 직접 만난 아이들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들을 그리워하는 과정에서 작가적 상상력이 보태지면서 쓰였다. 주인공 아이들은 가난과 질병, 전쟁과 약탈에 노출된 아시아-아프리카의 제3세계 국가에 살고 있다. 우리 기준에서는 행복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아이들이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과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채워나간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행복의 조건을 가늠하고 규정짓는 우리 시대의 많은 보편 어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라오스의 아농과 통은 배고픔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세상의 '어쩔 수 없는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엿본다. 우간다 소녀 바바라는 내전으로 부모를 잃은 슬픔과 보육원장의 지난한 핍박 가운데서도 불평 없이 달님을 친구 삼으며 누군가 돕는 일에 헌신을 다한다. 시리아의 누르와 이라크의 달랄은 전쟁과 종교로 피폐화된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작은 목소리라도 용기 내서 말해야 함을 알려준다. 아마존의 꼬마 뚜미는 자원 약탈로 점차 황폐화되고 있는 고향 숲을 배경으로 진정한 공감과 화합이 무엇인지 아름답게 들려준다. 필리핀에서 만난 타이손과 재인은 거짓 없는 순수한 마음가짐과 서로 다른 것에 대한 포용이 얼마나 큰 에너지를 만들어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섯 편의 동화는 각기 다른 이야기로 서로 다른 메시지를 말하려는 것 같지만 포괄적인 관점에서 조망하면 결국 삶과 행복의 문제를 관통한다. 행복은 외부 조건의 문제가 아닌 나 자신의 관점의 문제이며 행복한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은 정작 자기 내면에 존재해야 할 '태양처럼 빛나는 힘'에 있다는 걸 일깨운다. 작가는 책 속 우간다 편(바바라 이야기)의 서설에서 "정말로 경이로운 힘은 '사랑'과 '감사'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려준다. 자기 자신을 시작으로 타인과 세계를 사랑하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할 때에 비로소 '매일' '스스로' 내는 경이로운 힘이 우리 삶을 채워나갈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이 행복을 주제로 한 동화로 갈무리되는 걸 원치 않는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 책의 주인공 아이들이 말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그 이전의 것'이라고 후술한다. 행복보다 강한 것. 보다 근본적인 것. 그것은 바로 '삶'이다. 그렇다. 작가의 말이 옳다. 누구나 행복을 정의하고 갈망하지만 정작 그것이 펼쳐지는 트랙과 같은 우리네 일상, 즉 삶의 실재와 엄연성에 관해서는 놓치며 살아간다. 어쩌면 행복이란 찰나와 같은 것일지 모른다. 행복보다 삶이 더 진실하다. 짧고 추악하고 고단한 삶을 그냥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나이가 들면서 과거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전면에 보이는 것 같다. 능력보다 사람이 보이고 물질보다 정신이 보인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보이고 기쁨보다 슬픔이 보인다. 거짓보다 진실이 보이고 나보다 너가 보인다. 불평보다 감사가 보이고 티끌보다 들보가 보인다. 빠름보다 느림이 보이고 채움보다 여백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독서 무드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독서 속도는 더 느려졌고 독해 태도는 더 겸허해졌다. 책 읽기의 기술적인 부분은 과거를 따라가지 못하지만 꾹꾹 가슴에 누르며 읽는 태도는 더 함양된 것 같다. 그래서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몇몇 대목이 내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두껍지 않은 책을 읽는 데 오래 걸린 이유다. 오소희의 글은 언제나 좋다. 따뜻하고 정갈하되 나를 현실 자존의 직면으로 견인하기 때문이다.

작가 오소희를 만난 지 어언 14년이 되었다. 언젠가 광화문 앞 커피숍에서 그녀가 나에게 한 말을 기억난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고 다윗님의 솔직한 마음대로 살며 사랑하라고. 그렇다. 나의 나 되는 것은 내 모습 진본 그대로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데 있다. 이 참된 지혜를 재차 곱씹는 지점에 오소희의 신간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가 놓여 있다. 오랜만에 그녀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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