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 광개토 태왕 코드 27
윤명철 지음 / 마젤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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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내 고구려 열풍은 아직도 가실 줄을 모른다.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주몽」을 위시하여 「연개소문」, 「대조영」 등의 사극은 고구려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역이기도 하다. 더욱이 9월에 방송될 「태왕사신기」는 배용준이라는 한류스타와 더불어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어 당분간 고구려 열풍은 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우경화와 중국의 동북공정 등 동아시아 강대국들의 위험한 역사인식 가운데 '고구려'라는 민족사 최대의 중흥기에 대한 조명이 한국인들에게 강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현재성의 본질을 깊이 사유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은근히 '약자 콤플렉스', '크기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한다. 지난 수 천 년동안의 민족사를 반추하면 이런 한국인들의 콤플렉스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외세의 침략을 당하기에 바빴고, 작은 반도국가로서의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현대사는 이마저도 절반으로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작은 나라이자 약소국으로서의 한맺힌 유전자가 한국인들의 몸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에 고구려 향수가 만연하게 퍼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구려는 '약한 것', '작은 것'으로 대변되는 보편적인 한민족 DNA와는 역설적으로 동아시아의 중핵이자 초강대국이었기때문이다. 바로 그 찬란했던 초강대국 고구려의 중심에는 광개토 태왕이라는 위대한 군왕이 있다.

  광개토 태왕을 모델로 삼아 새로운 세계와 이상향을 실현시켜가는 완벽한 리더의 자세를 현재적 환경에서 재조명한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를 읽었다. 이 책은 '광개토 태왕 코드 27' 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더욱이 책의 띠지에 '꿈을 실천한 완전한 인간모델', '잃어버린 땅, 만주의 광활한 대륙을 달린 광개토 태왕을 따르라!' 는 문구가 적혀 있어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신감을 은근히 발산시키는 듯 하다. 저자는 역사학과 교수답게 1,600여년 전의 광개토 태왕의 혼과 지혜의 유전인자를 현재의 시간대로 타임워프시키고 있다. 광개토 태왕의 지혜와 경험을 창조, 개방, 조화라는 3가지 측면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27개 코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역사학자로서 고구려를 공부하면서 광개토 태왕이란 존재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그가 태어나 성장하고 왕이 되어 고구려를 다스렸던 시기가 우리가 사는 현시대와 꼭 닮아 있다고 언급한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21C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시대이다. 예측하지 못했던 신지식의 탄생, 정보과학이나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달, 세계화의 이름으로 세계질서의 전면적인 재편 등이 그 동안과는 너무나 다른, 낯선 환경으로 점철된 시대임을 증명한다. 특히 한국, 중국, 일본 및 러시아 일부 지역의 경우, 자국의 안녕을 지키고 서구인들과 경쟁할 수 있는 힘을 갖추기 위해 동아시아공동체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가 반면, 동아시아 내부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팽창하고, 특히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 작업을 통해 중화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꾀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국력과 세계화라는 논리가 절대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작금의 혼란스러운 시대에 고구려라는 국가, 그리고 광개토 태왕이라는 인물의 존재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광개토 태왕이 누구인가? 그는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소국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중핵으로 만든 불세출의 영웅이다. 사실 그가 태어난 당시의 고구려 사정은 좋지 못했다. 백제와 벌인 대결에서 패배한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데다,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북방에서 내려온 선비족과 요동지방을 놓고 군사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나라는 어지러웠고 백성들은 굶주렸다. 그런 어려운 시대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백제와 거란을 공격해 국민들의 패배감을 씻어주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또한 신라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가야까지 세력권에 넣으려 했다. 요동지방을 완벽하게 장악했고 북부여지역까지 직접 통치하기도 했으며, 동으로는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남부를 차지했다. 

  광개토 태왕은 정복자를 넘어서는 영웅이었다. 강력한 국가의 건설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군사까지 아우르는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창조해냈다. 그는 만주벌판을 누비는 정복자이기에 앞서 훌륭한 정치가였으며, 담덕이라는 그의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 철학자였으며 종교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예술가적인 섬세한 감성과 뛰어난 학자 못지않은 지성을 함께 갖고 있었으며,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21C 작금의 혼란스럽고 변화무쌍함 속에서 광개토 태왕의 이러한 다양한 리더쉽의 편린들이 재조명되고 연구해야 할 가치가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나는 고구려 시대의 역사를 잘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 광개토 태왕 하면 영토를 넓힌 왕, 정복자 정도로 각인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리더쉽이 큰 것과 작은 것을 동시에 추구했던 균형적이고 조화의 리더쉽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크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이 느껴진다. 큰 것은 선이 굵고 장엄하다. 뭔가 한계를 뛰어넘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유가 분명치 않은데도 벅찬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큰 것을 지향하는지 모르겠다.   <p20>
  작은 것은 귀엽다. 못나도 아름답다. 괜스레 안아주고 싶어진다. 포악한 맹수일지라도 새끼는 귀엽에 느껴지지 않는가. 또한 보는 사람을 위축시키지 않고, 편안하게 한다. 목표지향적인 큰 그림가ㅗ 함께 때로는 잠시 앉아서 쉬어갈 수 있는 작은 그림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큰 것만 추구하다 보면 작은 것을 보지 못하기 쉽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큰일 또한 이룰 수 없게 된다. 결국 그랜드 디자인에는 비전과 함께 작은 그림을 포함하는 함축적이고 포용적인 내용이 함께 들어가야 한다.   <p22>


  광개토 태왕의 그랜드 디자인에 큰 것만이 들어갔다면 그는 아마 지금의 평가보다는 절하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영토의 팽창이나 국가의 부강만을 목표로 하는 큰 그림만 그렸다면 다른 전제군주나 성공한 폭군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뛰어난 전략가나 영토를 넓힌 정복군주 정도로 후세에 기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이 풍요롭도록 농사를 발전시키고,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했고,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평양에 9개의 절을 세우기도 했다. 큰 것과 작은 것의 가치를 정확히 통찰했고, 우선순위를 제대로 세워 실행한 유능한 왕이었다. 큰 그림을 우선으로 하되, 여기에 작은 그림을 잘 섞어서 그려놓은 태왕의 리더쉽을 본받을 필요가 있음은 당연하다.

  고구려는 다민족국가이자 다문화국가였다. 주변국가들과 속국들을 최대한 흡수했다. 그리고 각기의 장점들을 균형있게 조화시키는 힘이 태왕에게는 있었다. 유목민과 농경민, 수렵민과 해양민의 강점들을 조정하고 정리하여 국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승화하였다. 한때 '노마드'라는 단어가 메스컴에서 유행을 했었다. 이동과 가속의 논리로 대변되는 유목민들의 특장점이 무조건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21C는 기동성만 갖고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은 물론이요, 특히 국가나 기업은 말 그대로 안정과 정착을 최고 목표로 삼고 있다. 전근대사회에서의 농경문화의 중흥과 21세기 디지털문명도 정착문화의 산물임을 기억하자. 정답은 자명해진다. 유목민의 기동성과 수렵민의 민첩성, 농경민의 안정성, 해양민의 회귀성을 접목한 광개토 태왕의 혜안과 통찰력은 '노마드'의 그들보다 훨씬 선진적인 것이다. 섞임의 문화, 나눔의 문화가 바로 고구려를 이루는 근간이었던 것이며 이는 20세기 초강대국 미국이 다시한번 입증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광개토 태왕의 자존심 회복 정신에 크게 매료되었다. '자의식'이라는 것의 개념이 무엇인가? '내'가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 내가 바로 내 삶과 일의 주체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철저하게 조선(고조선)의 후예임을 자각했다. 고구려의 정체성이 명확했던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고구려 창업정신인 '다물'은 '되찾자', '회복하다'의 뜻이라고 한다. 광개토 태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바로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왕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전무후무한 자존심의 상처를 회복키 위해 4만대군을 이끌고 남으로 향해 할아버지의 원수이며 오랜 숙적이었던 백제를 쳐서 석현 등 10여 성을 빼았었다. 위축된 국민들의 사기는 한껏 진작되었고 고구려 사회를 자신감으로 불질렀다. 또한 거란을 정벌했고 요동을 되찾았으며 신라를 속국으로 두기도 했다. '다물' 정신의 승리이자, 국민적 자신감의 만연함이었다.

  최근 고구려 향수의 열풍 속에서 광개토 태왕의 강력한 힘이나 정복정신, 카리스마에만 초점을 맞추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이는 태왕의 리더쉽을 잘못 이해했거나 지엽적으로 일반화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작금의 시대에는 박정희식 리더쉽이 필요하지도 않으며 통하지도 않는다. 어설픈 영웅주의나 마키아벨리즘적인 생각이 한국민들에게 만연해 있는 이상 더이상 발전이 없다고 하겠다. 새로운 리더쉽이 필요하다. 더 이상 영웅이나 군주, 혹은 총수 같은 특별한 사람이 군림하면서 전체를 끌어가는 시대가 아니다. 허브코헨의 협상의 법칙에 따르면 세상의 8할은 협상이다. 협상을 통해 파국을 막고 서로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온갖 자유의 만개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조화와 설득의 리더쉽, 더 나아가 깊은 통찰력과 공동체를 향한 희생의 리더쉽이 필요한 시대다. 1,600년 전의 광개토 태왕의 리더쉽은 바로 이러한 리더쉽의 가치와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는 무게감이자 존재감이다.


[인상깊은 구절]
현재는 미래라는 희망과 무한한 가능성의 대평원에서 빌려온 목표이며, 과거는 미래가 찾아가 본받고 가르침을 청해야 할 스승이다.   <p42>
위기란 성공과 실패라는 이란성 쌍둥이다.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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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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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읽었다. 지난 번 린드그렌님께서 책여행으로 보내주신 4권의 책 중 한  권이다. 어떤 책을 먼저 읽을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가장 먼저 출간되었고 얇은 두께의 이 책을 선택하였다. 더욱이 린드그렌님께서 성석제 작가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고 언급하셨고 나 또한 평소 그의 걸죽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바 기대감이 남달랐다. 얇은 두께의 부담없는 분량과 코믹한 이야기들이 한달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책은 소설집이다. 총 32편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다. 소설집이라고는 하나 에세이 같은 느낌이 강하다. 작가 자신의 소소한 일상가운데 한 순간 한 순간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포착한 것을 이야기의 소재로 삼았다. 불법 사냥에서부터 군대 라면, 딸기 찬가, 술버릇 나쁜 사람, 동네 강아지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들을 그리고 있다. 또한 각 단편의 분량도 굉장히 짧다. 저자 자신의 조카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단편 『가지』의 경우 단 한 페이지에 불과할 정도다. 공간적 배경의 경우도 도시보다 농촌과 외지를 주로 선택했다. 농촌민들의 소소한 일상과 구수한 입담들이 발견되면서 유쾌한 웃음을 불러 일으킨다. 32편의 단편 중에서 인상 깊은 몇 가지만 간단히 소개하자.

  『군대 라면』은 군대 취사반장과의 요상스런 만남가운데 얼떨결에 먹게 되는 라면을 회상한다. 당시 먹었던 라면이 사회에서 먹었던 어떤 라면보다 감동적이고, 기념비적이고, 호소력 그 자체였으며 그 라면 때문에라도 다시 군대에 가고 싶을 정도라 고백하는 저자의 말에 문득 공감이 형성된다.

  『딸기』도 흥미로운 단편이다. 세상에는 무조건 맛있는 과일이 두 종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딸기라고 언급하고 있다. 딸기라는 과일에 상당히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친구의 초등학교 동창 고모의 사촌동생의 아랫집에 살던 사람의 사돈이 딸기농장을 하는데 성공적인 장사수반 이면에 비양심적인 농약살포가 있음을 꼬집기도 한다. 시종일관 딸기에 대한 찬가가 이어진다.

  『소리』는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질과 비본질의 몰이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인간상을 소개하고 있다. 내 자신이 변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남과 세상이 변했다고 믿는 것이야 말로 지독한 고난의 지름길일게다.

  『말과 말귀』 또한 교훈적이다. 가납사니 주인공과 당나귀의 일화는 말에 대한 깊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말하는 대로 이뤄진다고 해서 모두 예언자가 될 수는 없다.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당나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

  『찬양』은 매우 흥미있는 단편이다. 초등학교 시절 글짓기 대회에서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여자라는 종족에게 당했던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찬양한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그들의 놀라운 적응을. 찬양한다, 여성이 만들어가는 세상의 아기자기함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것인 지 조소가 섞인 표현인 지 알 바가 없다.

  『도선생네 개』는 유쾌하고 상쾌하다. 이웃들 간에 벌어진 애완견 싸움이 흥미롭다. 내력과 겉치레를 중시하는 부잣집 한씨의 풍산개, 그리고 세퍼트와 토종개의 잡종인 도선생의 애완견 두만이의 싸움은 내포적 힘과 외면적 겉치레와의 대결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는 듯하다. 

  사회풍자적인 내용도 적지 않은 편이다. 속도문화, 짝퉁문화, 경쟁의식, 학연과 지연, 음주문화, 운전문화, 불신과 비양심 등의 한국인의 다양한 습속들을 단편들에 녹여놓고 있다.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 그리고 있고 작가 자신이 외적으로 표현하진 않지만 절제미와 유머로 비아냥거리는 느낌을 준다. 

  제목을 생각했다. 소설집에서의 제목은 단편 제목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다반사다. 하지만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의 단편 제목은 없다. 아마도 '번쩍, 하고 열리는 황홀한 세상!'이라는 책 표지의 수식어구가 말해주듯이 이 책의 특질을 대변하는 문구일게다. 사실 그렇다. 일상에 대한 관찰력과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 그곳에서 번쩍과 황홀을 목도하고, 거침없이 터지게 만드는 유쾌한 웃음체로 그린, 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바로 그런 책이다.
 

내 인생은 순간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어느 순간은 노다지처럼 귀하고 어느 벽돌은 없는 것으로 하고 싶고 잊어버리고도 싶지만 엄연히 내 인생의 한 순간이다.
나는 안다. 내 성벽의 무수한 돌 중에 몇 개는 황홀하게 빛나는 것임을.
또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 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 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
- '작가 후기'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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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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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MBC 100분 토론」은 꽤 흥미있었다. 개인적으로 정치와 시사에 관심이 많아 토론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이다. 지난 주에 방송된 「MBC 100분 토론」의 경우 심형래 감독의 『디-워』 논쟁을 주제로 하였는데 주제도 주제거니와 토론 패널로 참석한 진중권이라는 한 지식인의 존재감이 방송 내내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진중권이 누구인가? 유시민과 더불어 글빨과 말빨로는 절대로 당해낼 자가 없다는 시사평론가가 아닌가? "글 싸움에서 시사평론가 진중권 씨에게 이길 사람이 없다면, 말싸움에서 유시민 씨에게 이길 사람은 없어 보인다."라는 어느 기사의 구절은 진중권이라는 한 지식인의 기질과 위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유시민 씨는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장관을 거친 이후 강연과 집필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특유의 독설과 조소 섞인 입담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인으로서 품의를 지키자는 차원에서는 반갑다고 할 수 있으나 그래도 무언가 아쉽기는 하다. 보건복지부장관으로 내각 밥을 먹은 이후 유시민은 이전 자신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과거에 정지시켜 놓고 있는가 반면, 진중권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단 유시민과 진중권의 현재적 교집합이 있다면 극렬팬과 강렬한 안티로 아직까지도 철저하게 양분되어 평가받고 있다는 것 하나 뿐이다.

  진중권은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굉장히 지식적이고 전문적인 경향이 강하다. 앞서 언급한 「MBC 100분 토론」에서 상대 패널과의 논지 전쟁은 싱겁기만 했다. 상대 패널들은 애당초 진중권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비합리적인 정념주의와 어설픈 논지 주장으로 답답하기 그지 없던 『디-워』 긍정 패널들은 시니컬하고 날카롭고 학구적인 진중권의 공세에 초토화된다. 2500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작술부터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대중들이 소화하기 힘든 용어에 이르기까지 진중권의 공세는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토론 후반 한 여성 시민논객과 진중권과의 일대일 토론은 그날 방송의 압권이라 할 만했다. 예기치 않은 방청석의 날카로움에 심히 당황한 진중권은 얼굴을 붉히며 감정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심형래 영화를 왜 평론해야만 합니까? 그게 무슨 국가보안법입니까?"라는 강한 조소의 외침으로 말이다. 진중권은 그런 사람이다.

  진중권의 신간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읽었다. 예상했던대로 쉽지 않은 책이다. 술술 읽히는 곳도 있지만 앎과 지혜의 부족과 지극히 전문적인 용어들의 즐비함 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어렵게 책장을 넘긴 곳도 적잖았다. 진중권은 이 책에서 한국인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날카로운 비판을 감행한다. 한국인의 '국민성'이나 '정체성'보다는 '하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습속'이라는 것인데 특정 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의미이다. 즉 진중권은 이 책을 통하여 한국인들의 사고방식과 감정의 구조, 행동양식을 최대한의 낯선 시각으로 관찰하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진중권이 소재로 삼은 한국인의 습속들은 거의 대부분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다. 군대적 기질, 빨리빨리 문화, 박정희 신드롬, 거짓말 문화, 냄비근성, 정념성, 체면문화, 명품족, 짝퉁문화 등은 이미 대한민국의 국민적 특성을 알려주는 충분히 인지된 것들이다. 다만 이에 대한 접근방식이 신선한데 다분히 시대 분류적이다. 한국인의 이러한 '습속'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원인을 설명하고 이를 서구사회의 그것과 대조하고 있다. 중세에서 전근대와 근대로, 그리고 탈근대에 이르는 시대적 구분을 통해 매우 자세하고 학구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앞서 열거한 한국인의 특성 중 가장 독특한 한국인 브랜드는 뭐니뭐니해도 엽기적인 속도감일 것이다. 진중권은 사회 전반에 걸쳐 습속화되어 있는 한국인들의 놀라운 속도감은 박정희식 산업주의의 산물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효율적 스피드는 낮은 차원의 것이라 강변한다. 
  비릴리오를 따라 속도를 두 종류로 구별하는 게 좋겠다. 하나는 신체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속도. 이를 '외연적 속도'라 부르기로 하자. 다른 하나는 발명, 발견, 개발, 디자인과 같은 창의성의 속도. 이를 '내포적 속도'라 부르자.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기에 신체를 가속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가속화의 특정한 단계에서 양적인 속도는 질적인 속도로, 외연적 속도는 내포적 속도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발전이 내포적 속도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신체의 동작은 굳이 빠를 필요가 없다. 그런 사회는 또한 내포적 가속화의 성과를 번잡한 생활의 외연적 속도를 떨어뜨리는 데에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로써 삶의 질을 높이려는 것이다. 서구 사회의 느림은 게으름도 아니고, 비효율도 아니고, 경쟁의 배제도 아니고, 역동성의 결여도 아니다. 그저 속도의 다른 차원일 뿐이다. 그리고 삶은 전쟁이 아니다.   <p68>

  글쓰기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작금의 글쓰기 열풍의 질적 배고픔을 지적하기도 한다. 대입 논술 시험 여파와 인터넷 블로그와 홈페이지의 대중적 보편화로 글쓰기의 르네상스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풍성한 글쓰기의 내면을 관찰하면 심각함이 목도된다. 오랜 사색으로 정제해낸 생각을 주옥같은 언어에 담는 독백적 글쓰기가 아니라, 반응이 오가는 상황에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곧바로 글자로 옮겨 적는 대화적 글쓰기가 팽배한 것이다. 이의 경우 21세기 사회의 주요한 소통매체가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뀌는 이른바 '도상적 전회(iconic turn)'의 시대를 맞아 큰 위험성을 내포하게 마련인데, 이는 서구와 한국의 영상문화의 연단과정의 차이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으며 아래와 같이 진중권은 얘기한다.
  한국의 영상문화는 서구처럼 문자문화의 강력한 저항을 받지 않았다. 문자문화의 전통이 약한 게 외려 신속하게 디지털 영상문화로 이행하는 데에 유리한 조건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구는 속도는 느려도 문자문화의 바탕 위에서 서서히 영상문화로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 없는 그림은 선사시대의 주술적 상상력이고, 문자로 그린 그림은 디지털 시대의 기술적 상상력이다.   <p209>

  21C는 영상문화가 지배하는 도상적 전회의 시대가 됨은 자명하다. 다만, 그 기반에 단단한 문자문화가 받침이 되느냐 안되느냐의 차이가 종국을 결정한다. 문자문화의 기본적 토양 위에 세워지지 못한 영상문화는 사람을 디지털 '기능공'으로 추락시킨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TV를 끄고 독서를 하자는 캠페인이 국가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또한 한국의 경우 기업에서 대학에게 학부생의 집필능력을 향상시키라는 요구가 많은 실정이다. 이 모두는 21C 문자문화와 영상문화의 통합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곧바로 국가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혜안에서 나온 것임을 입증한다.  진중권은 바로 이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문화가 강한 곳에서는 네트워크를 통해 지식과 정보가 오가지만, 문자문화가 약한 곳에서는 그저 뜨거운 교감과 반감이 오갈 뿐이라는 진중권의 주장은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다. 네트워크는 강하지만 콘덴츠가 약한 한국의 인터넷 문화의 가벼움과 공허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미래의 생산은 엔지니어, 아티스트, 인문학자의 삼각 컨소시엄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모할 것이라는 주장도 공감할 만하다. 엔지니어는 기술을 가지고, 아티스트는 상상력을 가지고, 인문학자는 콘덴츠를 가지고 생산 속에서 서로 결합하게 된다는 것이다. 
  21세기의 기술은 과거의 기술과 달리 '꿈꾸는 기술'이다. 꿈이 기술을 통해 현실이 되면, 기술은 예술이 되고, 상상력은 생산력이 된다. '꿈꾸는 과학 예술가'는 기술과 예술과 인문학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디지털 유리알 유희의 명인이다. 카리스마의 명령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군대식 신체가 아니라, 스스로 발명하고 창안하는 예술적 신체다.   <p228>

  박정희 향수에 젖어 파시즘적이고 개발주의적인 사고로 국민적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서 결합하려는 시도가 언제까지 여론의 대세가 되어야 하는가? 이미 시대는 바뀌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단련되어 있던 기계적이고 군대식의 신체가 아닌 창조적이고 예술적 신체가 필요한 시대다. 다윈의 진화론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진리가 한 가지 있다면 결국에 살아남는 종은 힘이 쎄거나 지적능력이 뛰어난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라는 것이다. 습속만큼 보수적인 것이 없는만큼 과거 산업사회의 낡은 전사적 신체에서 '기술적 상상력'을 갖춘 미학적 신체로 하루 빨리 거듭나야 할 것이다.

  진중권은 황우석 사태를 통해 큰 충격과 허무함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책 내용 중에 황우석 사건이 의견 개진의 실례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더욱이 「MBC 100분 토론」 생방송에서 심형래의 이름을 황우석으로 잘못 말했던 실수에서 알 수 있듯이 황우석 논문 파동은 그의 두뇌저장소에 무의식적인 강렬한 메세지로 각인되어 잇는 듯하다. 사실 황우석 사태는 대한민국의 저급한 정념문화를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논문을 허위 조작하는 과학자는 많아도, 논문이 허위 조작되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절대 지지를 받는 나라는 한국뿐일 것이다. 본질보다 비본질이 우선하고, 거짓말에 대해 관대하며, 지나친 정념적 근성이 빚어낸 헤프닝이 아닐 수 없다.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에서 김주하가 언급했듯이 만약 MBC가 아닌 외국의 언론이나 과학계로부터 진실이 밝혀졌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한국인의 습속과 관련된 진중권의 관찰과 접근은 다양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이르는 다양한 대상을 미학,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에 이르는 폭넓은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다. 관찰과 비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너 자신을 디자인하라, 는 강렬한 어조로 미래지향적 돌파구를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인이 어떻게 한국인을 낯설게 읽을 수 있냐는 의심이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독일 유학생활을 최대한 반영하였고 나름대로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기 위한 역사적이고 학문적 고찰이 돋보인다. 미학을 위시한 인문학을 두루 훑고 있어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적지 않지만 진중권 특유의 시니컬한 비평과 득도에 다다른 예술적 필치가 결합되어 꽤 괜찮은 인문학 도서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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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8-18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이렇게 긴 글을 쓰신 님도 대단하시네요. 감동해서 추천합니다!
저도 상당한 진중권 팬인데, 좀 어려울 것 같지만 꼭 읽어보고 싶네요.
 
혼자 있기 좋은 날 - 제136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아오야마 나나에 지음, 정유리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 문단의 신인이라 할 수 있는 아오야마 나나에의 『혼자 있기 좋은 날』을 읽었다. 「2007년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이라는 거대한 문구가 관심을 끄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 문학이 쓰나미처럼 한국 도서계를 강타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리 크게 부각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고 하겠다. 다만 무라카미 류와 이시하라 신타로를 위시한 일본 문단의 거물들과 일본 평단, 독서꾼들의 찬연한 찬사의 평이 끊이지 않는 점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아오야마 나나에를 수식하는 이러한 이례적인 현재성이 내가 그녀의 작품을 만날 수 밖에 없는 의무를 결정짓게 만들었다. 

  200 페이지가 채 안되는 하드커버의 앞 표지에 고독한 표정으로 사색에 잠겨 있는 한 여인의 얼굴이 담겨있다. 표지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마치 거꾸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들게하는 여인의 표정은 우울하면서도 목마르고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마치 누가 나를 알아줬으면 좋겠어, 하는 외로움과 두려움의 내면상태를 보여주려는 듯 양장본의 첫 표지를 넘기는 데 몇 분여의 시간을 소요케 한 묘한 비쥬얼이었다.

  엄마와 단둘이 살다가 갑작스런 엄마의 중국 교환 유학으로 인하여 이별하게 되고 먼 친척 할머니 집에서 얹혀 살게되는 1년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소 무뚝뚝하고 표현을 절제하는 할머니 깅코 씨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스무 살 치즈의 만남, 더욱이 50년이 넘는 상이한 세대의 만남은 불편하고 쉽지 않은 것이었다. 일상의 관계에서 매번 상처를 겪어왔던 치즈는 타인에 대한 겁과 두려움의 각을 세우며 살아가는 아이다. 지하철 플랫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교제한 후지타와의 만남도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두려움이 교차되면서 치즈를 압박한다. 우려했던 이별은 현실 앞에 직면하게 되고 매번 겪었던 일이지만 실연의 아픔은 크고 무겁기만 하다. 

  나이가 갖는 공력은 절대적인 것인가? 70세가 넘는 할머니 깅코 씨의 삶은 언제나 소소하고 평온하다. 사교댄스를 배우기도 하고 남자친구를 사귀기도 한다. 치즈의 일상이 불안정하고 두렵고 냄비 같은 젊은 날의 초상이라면 깅코 씨의 일상은 안정적이고 평온한 인생의 득도 수준이다. 치즈와 깅코 씨와의 소소한 대화는 많은 것을 얘기하지 않는 최대한의 절제미로 표현된다. 발렌타인 데이, 사교댄스, 크리스마스 등의 젊은 날의 소유물이라 여겼던 것에 대한 깅코 할머니의 적극적인 영위와 자기만족은 치즈에게 요상스러운 질투심을 유발하는 동시에 정작 치즈 자신에게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치즈의 소소한 도둑질은 관계의 한 방법으로 묘사된다. 치즈는 깅코 씨의 인형, 호스케 씨의 은단, 후지타의 담배 등 얌채스런 손버릇으로 모은 이것저것들을 자신 만의 신발상자에 보관한다. 신발상자 속의 자잘한 것들은 치즈의 일상을 함께 하는 자들과의 사회성을 간접적으로 충전할 수 있게 한 소중한 보물이자 안식처와 같은 것이다. 치즈는 마지막 깅코 씨의 집을 떠날 때 어떤 물건은 제자리에 돌려 놓고 어떤 것은 자신의 방을 두르고 있던 고양이 사진 액자 뒤로 숨겨 놓는다. 자신의 존재감이 죽지 않도록, 그리고 개성이 상실되지 않기를 원하는 최소한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관계가 주는 아픔과 상처에 번민하며 약한 자로 살아야 했던 치즈.. 깅코 씨의 집에서의 1년여의 관계에 대한 인생수업을 통해 혼자서 회사의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는 버젓한 어른으로의 한 걸음을 내딛는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삶의 기쁨이자 또 다른 도전이다. 데이트를 위해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가던 중 건너편 어린 아이의 소소한 모습이 관찰된다. 신발을 벗고 지하철 창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어린 아이를 엄마가 성가시게 나무라면서 돕고 있다. 간신히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아이의 포니테일을 나부끼는 모습을 바라보는 치즈의 소설 속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치즈는 어린 아이를 관조하면서 바로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시간대를 현재에 통합하고자 했던 것을 아닐까?  

  소설의 각 장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설정하고 있다. 사계절의 풍경과 등장인물의 일상을 오묘한 담채화처럼 그린 묘사, 문체의 절제미, 뚜렷하고 분명한 표현, 인간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문구와 주옥같은 장면. 지하철역과 그 주변을 배경으로 하는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1년간의 이야기는 한달음의 진도로 완독할 수 있는 집중력을 제공한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 개인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변화되는 것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인간의 절제된 내면을 담백하게 그려낸 이 작품에 나는 평점 4개 반을 부여하는 용단을 보였다. 미래가 없어도 끝이 보여도 어쨌든 시작하는 건 자유다, 라고 외치는 주인공 치즈의 관계에 대한 상처와 치유, 회복을 담담하게 그린 『혼자 있기 좋은 날』을 '혼자 있기 좋은 날'을 즐기는 이들에게 '혼자 있기 좋은 날'에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책장을 덮은 뒤 얼마 전 당뇨로 쓰러진 외할머니를 생각했다. 지난 주말 병문안으로 대전에 다녀왔는데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외손주를 쳐다보는 외할머니의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까지 외할머니는 항상 나를 볼 때마다 10만원을 주셨다. 단 한 번도 거르시지 않았다. 설날이든 추석이든 그 외의 어떤 만남에서든지 언제나 10만원짜리 봉투를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셨다. 그리고 여느 친척 어르신들과는 달리 어떤 충고나 인생의 조언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내 얘기를 들어주시고 철저히 거기에만 반응하셨다. 그러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시며 대견해하셨고 기뻐하셨다. 외할머니에게 나라는 존재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기쁘고 흐뭇한 존재였던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혜안이 부족하여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어떨 때는 수백 마디의 말과 위로보다는 한 번의 웅숭깊은 침묵과 기다림이 더욱 많은 것을 전해줄 때가 있다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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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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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인간은 불가분의 함수관계이다. 문학은 인간에 갈증하고 인간은 문학을 창조한다. 문학은 끊임없이 인간을 탐구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시간인 시대와 인간이 존재하는 공간인 사회를 관찰하며 조명한다. 마치 X-Ray가 육체의 내부를 촬영하듯, 문학은 X-Ray로 인간의 감정과 이성을 감찰하고, 자기공명검사로 인간의 내면을 단층 단층 샅샅히 파헤친다. 문학의 존재목적이 종국에는 인간이라는 만물의 영장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이러한 함수관계에서 문학은 인간에게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한다. 여러가지 문학의 기능 중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는 데, 교화적 기능과 쾌락적 기능이 그것이다. 쉽게 말해서 문학은 인간에게 교훈과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정이현의 신작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을 읽었다. 워낙 글을 잘 쓰는 소설가이자, 최근 한국문단에서 부각받고 있는 여류작가이기때문에 그녀의 신작 소설집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출간 이후부터 첫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 온갖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점철되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제 1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고 『타인의 고독』으로 제 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 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한 이력은 그녀가 한국문학의 차세대 작가임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달콤한 나의 도시』는 나와 정이현의 첫만남이었다. 신문연재라는 연속성의 한계에서 완독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뛰어난 현재적 감각과 도시적 삶의 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날카롭고 경쾌한 필치는 꽤 인상적인 것이었다. 책 구입 시 미니북으로 증정되어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다시 한번 읽어볼 계획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번 그녀의 신작 소설집은 『타인의 고독』과 『삼풍백화점』을 위시한 총 10개의 단편소설을 소개하고 있다. 동시대인들의 초상을 전면에 내세우며 현재성이라는 그녀만의 탁월한 시간감각을 녹여놓고 있다. 누구나 한 번 쯤 고민했을 내용들을 도시적이고 현재적인 배경으로 안내한다. 서사의 하나하나가 현실적이다. 마치 일기장을 넘기는 기분으로 도시민들의 일상을 만날 수 있다. 냉소적이고 싸늘하기도 하며, 유머러스한 그녀의 문체는 뛰어난 스토리텔링과 조합되어 읽는 이에게 한달음의 속도로 읽을 수 있는 독서스피드를 지원하고 있다. 

 

  『삼풍백화점』은 가장 뛰어난 단편이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그대로 소설 속에 재현해 놓고 있으며 그 시공간 속에 '나'와 친구 R의 일상을 결합시킨다.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친구 R의 죽음은 정작 필요할 때만 돌아보았던 친구에 대한 죄의식을 수면 위로 불러내었다. 그곳을 떠난 뒤에야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고 말하는 '나'의 마지막 고백은 계속해서 사라지지 않을 마음 속의 친구 R의 존재감을 암시한다.

  『어두워지기 전에』는 독특하다. 정이현의 소설에서 낯설다 할 수 있는 반전의 반전(?)이 펼쳐지며 섹스리스 부부 사이의 미묘하고 특별한 긴장관계를 날카롭게 그리고 있다. 살인사건의 범인은 소설 속에서 끝내 침묵으로 봉인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부의 일상도 바뀐 것은 없다. 굳이 바뀐 것이 있다면 여자 화자의 사고방식 하나 뿐이다. 지난한 희생의 과정을 거쳐야만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되며 완전한 가정을 이루려면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다, 는 노인들의 충고를 인정하며 반드시 임신을 해야한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의 변화가 가정이라는 소중한 공동체의 파괴를 차단하고 있다.

  『익명의 당신에게』도 소재의 추출이나 접근방식의 독특함에서 『어두워지기 전에』와 맥을 같이 한다. '종합병원 항문외과 새벽 항문 촬영 사건'이라는 독특하고 자극적인 설정을 통해 연애하는 두 남녀의 심리를 그렸다. 남자가 괴로워할 때는 아무것도 캐묻지 말고 무조건 위로해주어라, 라는 남자의 두뇌구조를 꿰뚫는 진리에 가까운 연애법칙이 인용된다. 익명의 당신에게 보내는 연희의 편지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믿음에서 연유한 걸까?, 아님 관용에서 온 걸까? 병원장을 못 만난다면 부원장을, 병원의 모든 보직 교수들을, 아니면 B대학 총장이라도, 국무총리라도, 대통령이라도, 그 누구라도.. 그녀의 용기는 진정한 사랑일까?

  그 외의 단편소설들도 TV 시트콤과 같은 색상으로, 드라마 단막극과 같은 느낌으로 부담없이 읽혀진다. 하지만 가볍지는 않다.

 

  정이현은 대부분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인물을 택한다. 또한 다분히 여성적이다. 여성을,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30대의 젊은 여성들이 그녀의 소설에 열광하는 것도 이러한 정이현 소설의 물리적 특질에서 오는 당연한 인과관계일 것이다. 은희경과의 차이가 여기서 목도된다. 은희경은  남성화자를 많이 택하는 편이다. 은희경은 소설을 쓸 때 방해가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남성화자를 통해 말하려 할 때 객관적인 거리 유지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은희경의 무게감을 생각하면서 정이현의 소설에서 무언가의 결핍을 느낀다면 나만의 생각일까? 아쉬운 부분이다.

 

  모두가 모른 척 해왔던 바로 그 이야기를 날카롭고 경쾌하게 그리는 것이 소설가 정이현의 강점이자 매력이다. 동시대인들의 초상을 전면에 배치하며 세태를 읽어가는 뛰어난 감각과 현재성은 당분간 정이현표 브랜드로 굳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문단에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평단과 대중들에게 정이현이라는 소설가는 작금의 한국문학의 위기에 단비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기업이 매년 매출을 증가하여 자기존재를 유지하며 보존하듯이 예술이라는 장르도 한 단계 한 단계씩 발전해야 장수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여기서 문학도 예외일 수 없다. 앞으로 펼쳐질 정이현 문학의 미래가 끊임없이 진보되고 진화되어 서두에서 언급한 문학의 교화적 기능과 쾌락적 기능을 동시에 공급해줄 수 있는 힘 있는 문학으로 서나가길 기대하며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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