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여행 - 약속의 땅을 향한 삶의 로드맵
이동원 지음 / 두란노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어느날 천사가 나타나서 성경의 역사 한가운데로 시간여행을 하게 해준다면 당신은 어느 시대로 답변하겠는가. 만약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물론 그럴리야 없겠지만――나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 답변은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이끌었던 출애굽의 시대이며, 다른 하나는 다윗으로 대변되는 이스라엘 왕정시대의 시작기다. 전자는 성경 역사상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거대하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역사였으며, 후자는 하나님 마음에 가장 합한 자가 출현했던 역사였다. 이 두 시대에 대한 내 경도됨은 언제나 농밀했다.

  출애굽의 핵심은 약속의 실현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약속하셨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겠다는 것을. 그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의 400년 동안의 이집트 종살이를 거친 이후에야 성취될 준비가 시작된다. 모세라는 전무후무한 지도자를 전면에 내세운 하나님께서는 결코 쉽지 않은 훈련과 모험의 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단련시키셨다. 그리고 출애굽을 완성하셨다. 출애굽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기막힌 섭리와 역사를 면밀히 관찰하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한국에서 가장 설교를 잘 하는 목사로 손꼽히는 이동원 목사가 '약속의 땅을 향한 삶의 로드맵'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 『인생여행』을 통해 출애굽의 의미와 가치를 현대인들에게 강의한다. 인생이 하나의 여행이라는 점을 인지시키고, 출애굽 과정에 녹아있는 삶과 신앙의 원리를 추출하여 교훈한다. 두껍지 않은 분량 안에서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인생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를 다양하고 깊이있게 들려주고 있다.

  책의 얼개는 정갈하다. 출애굽 여정을 시간순의 21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이집트에서의 고된 종살이로 고통의 한계에 다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가신다. 지도자 모세를 선택하여 고통에 허덕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길고 긴 여정을 지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길갈에서 온전함을 성취하기까지를 단계적으로 나눠서 풀이한다. 각 파트에는 출애굽 과정 동안 있었던 다양한 사건과 그 사건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잘 정리해놓고 있다. 무엇보다 현대인의 감각에 맡게끔 손쉽게 풀이한 점이 이 책의 강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목사는 인생이 여행이라는 점을 주지한다. 그 여행에는 성공과 실패, 아픔과 위로, 미소와 눈물이 항상 등장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렇기에 성공적인 여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옛 역사는 인생 여행의 전형으로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곱씹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부언한다. 고된 여행길을 떠나는 이 땅의 수많은 친구들에게 가장 모범적인 여행 로드맵이 어떠한 것인지를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외침은 단호하다. 이 목사는 출애굽 여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셨음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실행하셨다.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셨고, 완벽한 스케쥴로 출애굽을 완성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저 순종하는 일만이 출애굽을 완성하는데 그들이 쏟은 유일한 에너지였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다.

  이는 우리 인생의 원형에 그대로 적용된다. 현재라는 시공간에 구속된 인간의 과학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미래를 정확히 알고 계시다. 하나님의 시간대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상이하다.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현재라는 시간대에서 온전하게 통합된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전지전능 앞에 인간은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시며 절대선의 태동이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우리네 인생여행의 감독자가 되실 유일무이한 적임자임은 자명하다.

  출애굽의 의미를 곱씹는다.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이시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닌 하나님이 될 때 그 인생은 성공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내가 품는 꿈과 비전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길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임을 고백한다. 이동원 목사의 『인생여행』은 이 명료한 진리를 깔끔하게 교훈하고 있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란제리 소녀시대
김용희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을 쓸 때 가장 큰 고민이 있다. 개인적 기준에서 별 한 개 주기도 아까운 텍스트를 만날 때다. 이럴 때 리뷰어의 번민은 크다. 저자나 작가가 응당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작품일진대, 독자의 주관적 평가라는 이유로 텍스트를 향한 조소와 비판을 함부로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뇌가 든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은 종국 냉정함으로 회귀된다. 어차피 서평은 글쓰는 자의 주관적 판단으로 쓰여지는 게 아니던가. 서평으로 쓰여진 글에 글쓴이의 주관적 판단이 배제된 채 일방적인 긍정 문구만 있다면 간접광고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시 냉철한 주관으로 돌아가 텍스트를 씹는다.

  비평의 역할은 소중하다. 비평은 비평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피드백 시스템(Feedback System)이다. 작품에서 잘 된 부분을 부각하여 격려하고 미흡한 부분을 비판하여 후에 보다 나은 창작물을 만들어달라는 요구와 기대가 비평 속에 오롯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평론가 해럴드 블룸의 글을 즐겨 읽는다. 하지만 그의 모든 논지가 내 신념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평론만큼 '주관'의 만개가 전제된 곳은 없다. 이는 어느 장르에서나 마찬가지다. 책도 당연하다. 책이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의 손에 들어온 이상 그 책은 독자의 것이다. 작가는 없다. 독자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천착을 매우 중요한 포인트로 삼는다. 문학은 결국 인간 성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차원에서 인간의 구체성을 잘 그려낸 소설은 분명 좋은 소설이다. 인간의 총체성과 사상성은 내가 소설을, 더 나아가 문학을 읽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형편없는 소설들이 있다. 나는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소설의 형태나 구성 등의 외연적 뼈대와는 거리가 있는 얘기다. 흔히 문학의 기능으로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되는 '유희'와 '교훈'의 교과서적 문구를 인용치 않더라도 소설은 독자에게 무언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독자에게 전달해야 하는 최소한의 '울림'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최저점의 무게감이 결락된 소설들로 인해 종이는 낭비되고 독자는 불쾌하다. 

  문학평론가 김용희 씨의 첫 장편소설 『란제리 소녀시대』는 밋밋하고 별 볼 일 없는 텍스트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 어떤 재미와 감동도 없다. 더욱이 공감조차도 없다.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는 한국 내의 굴곡진 시대를 담고 있지만 시대성은 온데간데 없고 극도의 가벼운 상황들만 연이어 펼쳐진다. 한 시대를 담아내는 수고로움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1970년대를 2009년의 방법과 색채로 포장해놓았을 뿐이다.

  이 소설은 분명 성장소설이다. 작가는 한 여인의 사춘기를 솔직하고 발랄하게 담아내려고 한 듯하다. 1인칭주인공시점의 화자 정희의 학창시절이 서사의 본류를 이룬다. 가정과 학교에서의 일, 친구들과 남자아이들과의 관계, 고3 수험생 시절과 대학 입시 등이 소설의 주된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굴곡진 시대적 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진정성이나 그 시대를 거쳐야 했던 사춘기 소녀의 원형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작가의 과거 일기를 현재의 문체와 방식으로 덧칠한 듯하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어설픈 성장소설과 싸구려 칙릿을 짬뽕해놓은 수준이다.

  각 장이 시작될 때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짤막한 문장 몇 개가 굵은 글씨체로 삽입되어 있다. 작가가 왜 이와 같은 장치를 해놓았는지 의문스럽다. 소설의 내용이나 얼개 등 그 어떤 것과도 매치되지 않는 불필요한 요소다. 어차피 이 소설은 시대적 배경인 1979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문체와 분위기를 담고 있지 않은가. 시대의 구체성을 짤막하게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로 보기에는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부적합하다.

  이런류의 소설을 논거로 하여 문학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다소 민망스럽다. 중요한 것은 소설의 역할이다. 가벼워도 좋고 밋밋해도 좋다. 하지만 소설은 인간과 시대에 대해 매순간 고민해야 한다. 최소한의 의미와 가치를 궁구해야 한다. 이것이 결락된 소설은 한낱 종이 쓰레기에 불과하다. 독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작가는 작가후기에서 수상한 소녀들의 사소한 사생활을 밝히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웃기면서 슬프고 유쾌하면서도 쓸쓸한 이야기. 때로 질투거나 동지애, 자유거나 혹은 솔직함에 대한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작가의 이러한 의도는 소설에서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 수상한 소녀들의 사소한 사생활은 찾아보기 힘들다. 공감되지 않는 이야기를 자신의 일기처럼 묵묵히 풀어내는 한 소녀의 의미없는 아우성만 요란하다. 한 시대를 소녀로 살아야 했던 그녀들의 원형도 없다. '란제리 소녀시대'는 소설 어느곳에도 없다. 작가의 내공 부족만 있을 뿐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물농장>은 지금도 있고 미래의 세계에도 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의 역작 『동물농장』을 번역한 도정일 교수의 평이다. 이 문장은 고전 『동물농장』의 문학적 생명력과 시의적 초월성을 정확하고 명징하게 말해주는 명문장이다. 『동물농장』의 가치를 굳이 60년 전의 소비에트연방이라는 시공간에 구속할 필요는 없다. '전체주의'로 명명되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억압은 21세기의 현실에서도 엄연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독자들이 『동물농장』이 풍자하는 세계를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이는 명확한 오독이다. 본래 조지 오웰이라는 인물 자체가 사회주의자였다. 오웰이 적으로 규정한 것은 '전체주의'였다. 개인의 모든 활동은 민족·국가와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하여서만 존재한다는 이름 아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이 전체주의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의 스탈린 정권이 보여준 행태와 이에 대한 오웰의 냉소적인 풍자는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조지 오웰은 개혁의 배반과 실패에 대해서 혐오를 보내고 있다. 민중을 위해 시작된 개혁의 방향이 지배계층의 욕심과 부패의 덫에 빠질 경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지를 잘 풍자했다. 특히 오웰은 부패 권력을 향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아부는 그 사회를 파시즘 공동체로 만드는 연유가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지배층의 올바른 인식 못지 않게 피지배층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수 노력은 인류사가 말해주는 민중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동물농장』을 읽는 내내 유독 눈에 띄는 캐릭터를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권력자의 '입' 노릇을 하며 피지배 동물들의 이견과 토론을 잠재우는 스퀼러라는 존재다. 소설 속에서 스퀼러는 전형적인 귀족 언론의 모습으로 권력자를 대변하며 대중에게 사실을 호도한다. 뛰어난 언변과 번뜩이는 설득력으로 나폴레옹(소설 속 권력자) 파시즘 국가를 만드는 일등공신이 된다.

  강력한 독재 부패와 아첨하는 언론, 그리고 무지한 대중이 만들어내는 동물농장의 풍자를 보며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실'들은 미디어라는 프레임을 통해 공급되는 것들이다. 직접 보고 느끼고 만지는 것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미디어의 의지와 기호에 따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의 사실성 여부가 결정된다.

  언론의 역할은 중요하다. 언론의 핵심은 '진실'이다. 진실하지 않은 정보를 대중에게 공급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언론은 항상 정확한 사실을 가장 빠르게 대중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러면서 권력자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언론이 권력의 시녀로서 권력의 형성과 연장에 사용되는 도구가 될 때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고통에 빠지게 된다. 이는 세계 민주주의사가 명징하게 알려주는 진리다. 고전 『동물농장』의 캐릭터 중에서 내가 유독 스퀼러에 주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20년 전의 프랑스 혁명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했다. 그것은 '자유'였고 '평등'이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유와 평등은 절대불가결한 가치다. 이는 절대선絶對善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에게 부와 권력의 문제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이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으로서의 인간다운 삶, 국가와 개인의 상관관계, 언론의 역할과 의무, 부와 권력에 약한 인간의 본성 등 시대를 막론하여 직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에 대해 날카롭고 깊이있게 풍자한 조지 오웰의 명작 『동물농장』은 반드시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임이 분명하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페딘1T 2017-08-29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동물농장을 읽어볼려고 하는데, 역시나 번역문제가 좀 있어 보입니다.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drasys&artSeqNo=7471675

여기를 참고해 보면 몇몇 부분에서 번역의 문제가 있다곤 하는데요... 솔직히 저같은 초보자는 어떤 책을 읽어도 큰 상관은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이왕이면 그나마 잘 된 번역서로 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김욱동 번역을 추천하던데요, 다윗님은 추천해 주실 번역본은 없으시나요?
 
잘가요 언덕
차인표 지음, 김재홍 그림 / 살림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평소 단편소설과 거리감을 두고 있다. 솔직히 단편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단편작가는 '글쟁이'로서의 존재감에서 그리 큰 믿음을 보내지 않는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글재주만 있다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단편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단편도 엄연한 문학이며 그것 나름의 특질과 매력이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편은 무언가 결락되었고 무언가 허전하다. 이는 분량의 문제 이전에 서사 자체의 완전성의 문제이며, 소설이라는 형태의 근본 골격에 대한 문제이다.

  단편과 장편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여 각각의 맛을 재단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단편은 범상에서도 충분히 생산될 수 있는 세계라는 점이다. 하지만 장편長篇은 다르다. 전업작가가 아니고서는 완성되기 힘든 오묘하고 거대한 인고를 반드시 감내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장편은 깊고 풍성하다. 농밀하고 섬세하다. 거대하면서도 입체적이다. 인간의 삶의 총체성, 사건에 따라 변하는 인물의 입체성,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 즉 사상성性, 거대한 서사와 복잡다단한 얼개 등 장편소설은 단편소설과는 수준을 달리하는 근본적인 태생적 요건이 있다.

  소설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선천적인 재능이나 천재성과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이 대목에서 소설가 공지영은 고백한다. 유독 천재가 없는 장르가 있는데 그게 바로 소설이라는 것을. 모든 소설가들은 시간과 체력과 고통과 인내를 폭포수처럼 쏟아내야 한다는 것을. 두꺼운 종이들을 다 글자로 채워 넣어야 하는 손가락의 끈질김과 엉덩이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요컨대 소설의 힘과 소설가의 인고의 양은 대부분 정비례 함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영화배우 차인표가 장편소설을 썼다는 소식은 솔깃했다. 물론 연예인의 책 출간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포토집이나 에세이가 아닌 소설――그것도 장편――을 집필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개성있는 연기를 펼치는 것과 소설이라는 완전한 형태의 상상력의 세계를 탄생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다. 책을 읽는 데 있어 평소 차인표 부부의 잉꼬같은 부부애나 잦은 선행으로 굳어진 긍정적 이미지는 모두 던져버리기로 했다. 오직 텍스트만을 보기로 했다. 얼마나 잘 쓴 소설인가, 하는 주관적 냉철만이 차인표의 첫 장편소설 『잘가요, 언덕』을 읽는 내 유일한 기준이었다.

  작가는 독자의 시공간을 1931년 가을, 백두산의 어느 자그만 마을로 옮겨놓는다. 호랑이 마을로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제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던 오욕의 때였다. 그곳에서 평화로운 삶을 사는 순진하고 마음씨 착한 처녀 순이, 포수 아빠와 함께 엄마를 죽인 원수인 백호 사냥을 떠났다가 호랑이 마을에 안착한 용이, 일본제국주의 군인으로서 소대장의 지위로 호랑이 마을에 도착하는 가즈오, 이 세명의 인물이 이야기를 추동하는 주인공들이다. 세 주인공들의 애절한 사랑과 엇갈린 운명이 뒤섞이면서 비극의 서사는 조합된다.

  나는 소설 속에서 일본군 대위로 등장하는 가즈오 마쯔에다라는 인물에 강한 호감을 느꼈다. 작가는 따뜻한 문체로 표현된 이야기의 본류와 각 장마다 반복되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가즈오의 편지를 교차해서 들려주고 있다. 순수한 애국심에 자원 입대했지만 가즈오가 목도한 전쟁의 현실은 반인륜적 폐륜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하지만 가즈오의 내면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한 여인을 뜨겁게 사랑하는 진정성이 있었다. 양심의 문제에 직면하여 번민하는 모습과 한 여인을 절실히 사랑하여 죽음에까지 이르는 가즈오의 기구한 운명을 작가는 애절하면서도 차분하게 잘 그려냈다.

  무척 흥미로운 관점이 있다. 소설 안에서 인간의 시공간을 초월한 두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순이가 용이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밤하늘의 '엄마별'이라는 상징적 존재와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며 신적 권능으로 등장인물들의 시공간을 조망하는 '새끼 제비'가 바로 그것들이다. 순이는 볼 수 있었지만 용이는 볼 수 없었던 '엄마별'은 일차적으로 모성의 상징적인 현현을 나타내지만, 서사의 총체적 관점에서 '용서'라는 찬란한 절대선을 이끌어내는 메타포가 된다. 이야기의 뒷부분, 살아서는 용이가 볼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별'의 실재가 자신의 죽음을 넘어 70년의 세월이 지나서 순이에게 "따뜻하다, 엄마별."이라는 짤막한 고백으로 전해지는 명장면은 이 소설이 선사하는 가장 강렬한 카타르시스다. '엄마별', 그것은 '용서'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새끼 제비'의 존재 또한 소설 속에서 특이하게 작용한다. '새끼 제비'는 서사 안에 갇혀 있지만 위에서 서사를 조망하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는 독특한 캐릭터다.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순이와 용이의 러브 스토리를 응원하기도 한다. 인간의 악한 성품에 실망하기도 하고, 한순간 하늘로 치솟아 서사 속의 시공간을 광각화하기도 한다. 어쩌면 '새끼 제비'는 작가 차인표의 서사 속 개입일 수 있으리라. 소설의 말미, 70년만에 고향 호랑이 마을 찾은 쑤니(순이)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 파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제비떼들을 눈에 담는다. 어디엔가 있을 따스한 나라를 찾아 멀리멀리 날아가는 제비떼의 모습은 이 세상 모든 치유되어야 할 자들을 향해 날아가는 또 다른 차인표의 다른 형상일 것이리라.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의도적으로 존어체를 사용했다. 엄마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선생님이 학생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이 포근하고 따뜻한 문체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달한다. 만약 작가가 존어체를 탈피했다면 소설이 주는 감동은 많은 부분 희석되었을 것이다. 용서하지 못해 고뇌하고 비굴하게 살아가는 깨어지지 못한 이 땅의 수많은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로서 숭고와 경건이 차인표의 문체 속에 오롯이 녹아 있는 것이다. 

  포근한 문체와 흡입력 있는 전개, 잘 짜여진 서사와 명확한 메시지 전달 등 작가 차인표의 첫 소설 『잘가요, 언덕』은 성공한 소설의 매력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차인표의 문장은 공손했고, 따뜻했으며, 평온했다. 차인표는 작가후기에서 소설의 초고를 손볼 때 어머니로부터 들은 조언을 소개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일갈한다. 상상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을 배제한 상상력은 모래로 성을 쌓는 것과 같은 것임을.

  어쩌면 상상력과 사실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 모른다. 나는 작가 차인표의 상상력이 정지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가 원하고 갈망하는 모든 상상력이 사실이 되어 우리 앞에 현현現할 때까지, 우리 모두 한 마리의 '새끼 제비'가 되어 깨어져야 할 모든 용기없는 자들의 전도자가 될 때까지, 그의 상상력은 계속해서 춤추고 역동해야 한다. 

  뛰어난 기술로 빚어낸 차인표의 처녀작 『잘가요, 언덕』에 나는 별 다섯 개를 선사한다. 그리고 내 주변 어느곳에 위치하고 있을 '잘가요, 언덕'을 찾아 밖으로 향한다. 동시에 내 안에 결핍된 용서의 용기를 충전하며 '엄마별'이 감싸는 안정감으로 마음의 평온을 찾는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시민을 싫어하지 않는다. 여기서 '좋아한다'는 표현보다 '싫어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쓴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유시민은 대중들로부터 소위 '안티코드'로 읽히는 지식인이다. 국회의원 김영춘은 유시민에 대해 "옳은 말도 싸가지 없이 한다"고 평했다. 그만큼 부정적 이미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이 유시민이다. 그는 말도 잘 하고 글도 잘 쓰는 유능한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논리적인' 견해를 펼친다. 하지만 대중이 보기에는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다.

  그는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현재는 집필 활동과 대학 강의에 집중하고 있다. 본래 자신의 업으로 돌아간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재차 선택받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유시민 자신은 지난 5년간의 현실 정치에서 적잖이 상처를 받은 듯 보인다. 비상식과 편견이 가득하고 비방과 불관용이 판을 치는 곳이 그가 목도한 한국 정치의 현실이었다. 대통령은 불행한 자리였고, 국회는 싸움터였으며, 언론은 인신공격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1987년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많은 성숙을 이루어왔다. 1948년 7월 17일 제헌의회가 첫 헌법을 공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민주공화국이라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대한민국은 진짜로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은 진짜로 국민으로부터 나올까. 이러한 문제제기는 당위와 존재 사이의 상치에 연원한다. 이에 대해 유시민은 일갈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기본 질서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을 다 지불하지 않은 '후불제 민주주의'였다는 것을.

  유시민의 신간 『후불제 민주주의』는 현실 한국 민주주의의 단면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대한민국 헌법의 선언들이 당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온전히 존재되지 못하고 있는 현재상을 꼬집는다. 한 때 현실 정치인으로서 국정을 운영했던 경험과 반성을 토대로 작금의 한국 사회에 내재한 민주주의의 녹록함을 분석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선언하는 대한민국 헌법 1조가 과연 우리 사회 안에서 얼만큼 실현되고 있는지 의문한다.

  '헌법의 당위'와 '권력의 실재'라는 큰 두 개의 대주제 안에서 다양한 소제목들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이 얼마나 가치있고 뛰어난 헌법인지를 저자는 명확히 논설한다. 이를 쟁취하기 위해 흘렸던 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 지불되어진 수많은 사회적 비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1부 <헌법의 당위>에서는 '행복', '자유', '주권' 등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소중한 가치들을 분석하고 천착한다. 매우 소중한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헌법의 조항들을 소개하면서 헌법의 당위가 우리사회에 얼마나 실재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복지와 법치, 차별과 인권 등의 항목에 헌법의 정신을 대입하기도 한다. 특히 미네르바 구속 사건으로 알 수 있는 현 정권의 헌법 정신의 몰이해를 지적한 부분은 고개가 실로 주억거린다.

  2부 <권력의 실재>에서는 보다 다양한 논지를 펼친다. 대통령이라는 존재에 대한 저자의 주관, 노무현 대통령과 저자와의 관계, 국회의원과 장관 재직 시절 때의 경험담, 최장집 교수와 장하준 교수에 대한 저자의 견해 등 흥미로운 주제를 통해 저자의 생각과 신념을 엿볼 수 있다. 저자 특유의 논리적이면서 재치있는 필력은 여전히 돋보인다.  

  무엇보다 흥미있는 대목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자신의 공직생활 경험담을 소개한 부분이다. 저자는 노무현 정부를 반은 성공했지만 반은 실패한 정부라고 평가한다. 대중의 인기 여부를 떠나 무엇을 실현했고 무엇을 놓쳤는지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저자의 사모함은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지식인 유시민이 국회의원과 장관에 자리에 올라 보다 다른 세계를 경험하며 국민에게 서비스할 수밖에 없었던 그 운명적 삶의 방향성에 바로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스승이 있었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숱하게 느껴온 바 있다. 최근 밝혀지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측근들의 비자금 사건을 바라보며 유시민은 어떤 생각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저자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직 공고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지난 10년 동안 민주 개혁 정권에서 이뤄놓은 자유 민주주의의 만개가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는 퇴행되고 있음을 언급한다. 이는 정확한 판단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난 1년 동안 우리사회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수배되었고, 유모차 엄마는 기소되었다. 전교조가 압수수색 되었고, 노동조합원들은 불에 타 죽었다. 인터넷 논객이 구속되었고, 방송사는 검찰 조사를 받았다. 엄연히 헌법에 명시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에 대해 이명박 정권은 법 질서 확립이라는 명분으로 공권력의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 가운데 우리 모두는 다시 헌법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위정자들은 헌법의 정신에 맞게 나라를 이끌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국민들은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가 우리사회 안에서 얼만큼 역동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이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명제가 될 때야 비로소 민주주의에 대한 값을 다 지불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이를 위해 우리 국민이 앞으로 더 지불해야 하는 노력과 시간은 얼마일까. 책 제목 '후불제 민주주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잠긴다.


그들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를 수배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민단체 회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모차 엄마를 기소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촛불집회에 가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전교조를 압수수색했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시민들을 불태워 죽였을 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철거민이 아니었으니까
마침내 그들이 내 아들을 잡으러 왔을 때는
나와 함께 항의해줄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니묄러의 인용문 패러디, p. 379>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