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가요 언덕
차인표 지음, 김재홍 그림 / 살림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평소 단편소설과 거리감을 두고 있다. 솔직히 단편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단편작가는 '글쟁이'로서의 존재감에서 그리 큰 믿음을 보내지 않는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글재주만 있다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단편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단편도 엄연한 문학이며 그것 나름의 특질과 매력이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편은 무언가 결락되었고 무언가 허전하다. 이는 분량의 문제 이전에 서사 자체의 완전성의 문제이며, 소설이라는 형태의 근본 골격에 대한 문제이다.

  단편과 장편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여 각각의 맛을 재단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단편은 범상에서도 충분히 생산될 수 있는 세계라는 점이다. 하지만 장편長篇은 다르다. 전업작가가 아니고서는 완성되기 힘든 오묘하고 거대한 인고를 반드시 감내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장편은 깊고 풍성하다. 농밀하고 섬세하다. 거대하면서도 입체적이다. 인간의 삶의 총체성, 사건에 따라 변하는 인물의 입체성,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 즉 사상성性, 거대한 서사와 복잡다단한 얼개 등 장편소설은 단편소설과는 수준을 달리하는 근본적인 태생적 요건이 있다.

  소설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선천적인 재능이나 천재성과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이 대목에서 소설가 공지영은 고백한다. 유독 천재가 없는 장르가 있는데 그게 바로 소설이라는 것을. 모든 소설가들은 시간과 체력과 고통과 인내를 폭포수처럼 쏟아내야 한다는 것을. 두꺼운 종이들을 다 글자로 채워 넣어야 하는 손가락의 끈질김과 엉덩이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요컨대 소설의 힘과 소설가의 인고의 양은 대부분 정비례 함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영화배우 차인표가 장편소설을 썼다는 소식은 솔깃했다. 물론 연예인의 책 출간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포토집이나 에세이가 아닌 소설――그것도 장편――을 집필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개성있는 연기를 펼치는 것과 소설이라는 완전한 형태의 상상력의 세계를 탄생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다. 책을 읽는 데 있어 평소 차인표 부부의 잉꼬같은 부부애나 잦은 선행으로 굳어진 긍정적 이미지는 모두 던져버리기로 했다. 오직 텍스트만을 보기로 했다. 얼마나 잘 쓴 소설인가, 하는 주관적 냉철만이 차인표의 첫 장편소설 『잘가요, 언덕』을 읽는 내 유일한 기준이었다.

  작가는 독자의 시공간을 1931년 가을, 백두산의 어느 자그만 마을로 옮겨놓는다. 호랑이 마을로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제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던 오욕의 때였다. 그곳에서 평화로운 삶을 사는 순진하고 마음씨 착한 처녀 순이, 포수 아빠와 함께 엄마를 죽인 원수인 백호 사냥을 떠났다가 호랑이 마을에 안착한 용이, 일본제국주의 군인으로서 소대장의 지위로 호랑이 마을에 도착하는 가즈오, 이 세명의 인물이 이야기를 추동하는 주인공들이다. 세 주인공들의 애절한 사랑과 엇갈린 운명이 뒤섞이면서 비극의 서사는 조합된다.

  나는 소설 속에서 일본군 대위로 등장하는 가즈오 마쯔에다라는 인물에 강한 호감을 느꼈다. 작가는 따뜻한 문체로 표현된 이야기의 본류와 각 장마다 반복되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가즈오의 편지를 교차해서 들려주고 있다. 순수한 애국심에 자원 입대했지만 가즈오가 목도한 전쟁의 현실은 반인륜적 폐륜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하지만 가즈오의 내면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한 여인을 뜨겁게 사랑하는 진정성이 있었다. 양심의 문제에 직면하여 번민하는 모습과 한 여인을 절실히 사랑하여 죽음에까지 이르는 가즈오의 기구한 운명을 작가는 애절하면서도 차분하게 잘 그려냈다.

  무척 흥미로운 관점이 있다. 소설 안에서 인간의 시공간을 초월한 두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순이가 용이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밤하늘의 '엄마별'이라는 상징적 존재와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며 신적 권능으로 등장인물들의 시공간을 조망하는 '새끼 제비'가 바로 그것들이다. 순이는 볼 수 있었지만 용이는 볼 수 없었던 '엄마별'은 일차적으로 모성의 상징적인 현현을 나타내지만, 서사의 총체적 관점에서 '용서'라는 찬란한 절대선을 이끌어내는 메타포가 된다. 이야기의 뒷부분, 살아서는 용이가 볼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별'의 실재가 자신의 죽음을 넘어 70년의 세월이 지나서 순이에게 "따뜻하다, 엄마별."이라는 짤막한 고백으로 전해지는 명장면은 이 소설이 선사하는 가장 강렬한 카타르시스다. '엄마별', 그것은 '용서'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새끼 제비'의 존재 또한 소설 속에서 특이하게 작용한다. '새끼 제비'는 서사 안에 갇혀 있지만 위에서 서사를 조망하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는 독특한 캐릭터다.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순이와 용이의 러브 스토리를 응원하기도 한다. 인간의 악한 성품에 실망하기도 하고, 한순간 하늘로 치솟아 서사 속의 시공간을 광각화하기도 한다. 어쩌면 '새끼 제비'는 작가 차인표의 서사 속 개입일 수 있으리라. 소설의 말미, 70년만에 고향 호랑이 마을 찾은 쑤니(순이)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 파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제비떼들을 눈에 담는다. 어디엔가 있을 따스한 나라를 찾아 멀리멀리 날아가는 제비떼의 모습은 이 세상 모든 치유되어야 할 자들을 향해 날아가는 또 다른 차인표의 다른 형상일 것이리라.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의도적으로 존어체를 사용했다. 엄마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선생님이 학생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이 포근하고 따뜻한 문체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달한다. 만약 작가가 존어체를 탈피했다면 소설이 주는 감동은 많은 부분 희석되었을 것이다. 용서하지 못해 고뇌하고 비굴하게 살아가는 깨어지지 못한 이 땅의 수많은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로서 숭고와 경건이 차인표의 문체 속에 오롯이 녹아 있는 것이다. 

  포근한 문체와 흡입력 있는 전개, 잘 짜여진 서사와 명확한 메시지 전달 등 작가 차인표의 첫 소설 『잘가요, 언덕』은 성공한 소설의 매력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차인표의 문장은 공손했고, 따뜻했으며, 평온했다. 차인표는 작가후기에서 소설의 초고를 손볼 때 어머니로부터 들은 조언을 소개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일갈한다. 상상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을 배제한 상상력은 모래로 성을 쌓는 것과 같은 것임을.

  어쩌면 상상력과 사실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 모른다. 나는 작가 차인표의 상상력이 정지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가 원하고 갈망하는 모든 상상력이 사실이 되어 우리 앞에 현현現할 때까지, 우리 모두 한 마리의 '새끼 제비'가 되어 깨어져야 할 모든 용기없는 자들의 전도자가 될 때까지, 그의 상상력은 계속해서 춤추고 역동해야 한다. 

  뛰어난 기술로 빚어낸 차인표의 처녀작 『잘가요, 언덕』에 나는 별 다섯 개를 선사한다. 그리고 내 주변 어느곳에 위치하고 있을 '잘가요, 언덕'을 찾아 밖으로 향한다. 동시에 내 안에 결핍된 용서의 용기를 충전하며 '엄마별'이 감싸는 안정감으로 마음의 평온을 찾는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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