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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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을 싫어하지 않는다. 여기서 '좋아한다'는 표현보다 '싫어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쓴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유시민은 대중들로부터 소위 '안티코드'로 읽히는 지식인이다. 국회의원 김영춘은 유시민에 대해 "옳은 말도 싸가지 없이 한다"고 평했다. 그만큼 부정적 이미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이 유시민이다. 그는 말도 잘 하고 글도 잘 쓰는 유능한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논리적인' 견해를 펼친다. 하지만 대중이 보기에는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다.

  그는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현재는 집필 활동과 대학 강의에 집중하고 있다. 본래 자신의 업으로 돌아간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재차 선택받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유시민 자신은 지난 5년간의 현실 정치에서 적잖이 상처를 받은 듯 보인다. 비상식과 편견이 가득하고 비방과 불관용이 판을 치는 곳이 그가 목도한 한국 정치의 현실이었다. 대통령은 불행한 자리였고, 국회는 싸움터였으며, 언론은 인신공격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1987년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많은 성숙을 이루어왔다. 1948년 7월 17일 제헌의회가 첫 헌법을 공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민주공화국이라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대한민국은 진짜로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은 진짜로 국민으로부터 나올까. 이러한 문제제기는 당위와 존재 사이의 상치에 연원한다. 이에 대해 유시민은 일갈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기본 질서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을 다 지불하지 않은 '후불제 민주주의'였다는 것을.

  유시민의 신간 『후불제 민주주의』는 현실 한국 민주주의의 단면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대한민국 헌법의 선언들이 당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온전히 존재되지 못하고 있는 현재상을 꼬집는다. 한 때 현실 정치인으로서 국정을 운영했던 경험과 반성을 토대로 작금의 한국 사회에 내재한 민주주의의 녹록함을 분석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선언하는 대한민국 헌법 1조가 과연 우리 사회 안에서 얼만큼 실현되고 있는지 의문한다.

  '헌법의 당위'와 '권력의 실재'라는 큰 두 개의 대주제 안에서 다양한 소제목들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이 얼마나 가치있고 뛰어난 헌법인지를 저자는 명확히 논설한다. 이를 쟁취하기 위해 흘렸던 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 지불되어진 수많은 사회적 비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1부 <헌법의 당위>에서는 '행복', '자유', '주권' 등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소중한 가치들을 분석하고 천착한다. 매우 소중한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헌법의 조항들을 소개하면서 헌법의 당위가 우리사회에 얼마나 실재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복지와 법치, 차별과 인권 등의 항목에 헌법의 정신을 대입하기도 한다. 특히 미네르바 구속 사건으로 알 수 있는 현 정권의 헌법 정신의 몰이해를 지적한 부분은 고개가 실로 주억거린다.

  2부 <권력의 실재>에서는 보다 다양한 논지를 펼친다. 대통령이라는 존재에 대한 저자의 주관, 노무현 대통령과 저자와의 관계, 국회의원과 장관 재직 시절 때의 경험담, 최장집 교수와 장하준 교수에 대한 저자의 견해 등 흥미로운 주제를 통해 저자의 생각과 신념을 엿볼 수 있다. 저자 특유의 논리적이면서 재치있는 필력은 여전히 돋보인다.  

  무엇보다 흥미있는 대목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자신의 공직생활 경험담을 소개한 부분이다. 저자는 노무현 정부를 반은 성공했지만 반은 실패한 정부라고 평가한다. 대중의 인기 여부를 떠나 무엇을 실현했고 무엇을 놓쳤는지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저자의 사모함은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지식인 유시민이 국회의원과 장관에 자리에 올라 보다 다른 세계를 경험하며 국민에게 서비스할 수밖에 없었던 그 운명적 삶의 방향성에 바로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스승이 있었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숱하게 느껴온 바 있다. 최근 밝혀지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측근들의 비자금 사건을 바라보며 유시민은 어떤 생각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저자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직 공고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지난 10년 동안 민주 개혁 정권에서 이뤄놓은 자유 민주주의의 만개가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는 퇴행되고 있음을 언급한다. 이는 정확한 판단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난 1년 동안 우리사회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수배되었고, 유모차 엄마는 기소되었다. 전교조가 압수수색 되었고, 노동조합원들은 불에 타 죽었다. 인터넷 논객이 구속되었고, 방송사는 검찰 조사를 받았다. 엄연히 헌법에 명시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에 대해 이명박 정권은 법 질서 확립이라는 명분으로 공권력의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 가운데 우리 모두는 다시 헌법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위정자들은 헌법의 정신에 맞게 나라를 이끌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국민들은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가 우리사회 안에서 얼만큼 역동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이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명제가 될 때야 비로소 민주주의에 대한 값을 다 지불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이를 위해 우리 국민이 앞으로 더 지불해야 하는 노력과 시간은 얼마일까. 책 제목 '후불제 민주주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잠긴다.


그들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를 수배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민단체 회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모차 엄마를 기소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촛불집회에 가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전교조를 압수수색했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시민들을 불태워 죽였을 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철거민이 아니었으니까
마침내 그들이 내 아들을 잡으러 왔을 때는
나와 함께 항의해줄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니묄러의 인용문 패러디, p. 379>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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