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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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소설가가 자신의 일생에서 세 편의 대하소설을 남긴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사실 대하소설은 소설가의 인생에서 단 한 편도 남기기 쉽지 않은 영역이다. 세계 문학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을 한국의 소설가 조정래는 이루었다. 이백자 원고지 오만 장이 넘는 거대한 서사 물결은 조정래 문학의 장엄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장은 누구나 길게 쓸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무나 길게 쓸 수 없는 법이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저자 조정래는 그의 문학적 풍성함과는 달리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껏 써오지 않았다. 세 편의 대하소설을 써오면서 한 사람의 소설가로서,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많은 번민과 난관이 있었겠는가. 그는 대하소설을 쓰면서도 단·장편과 산문집 집필도 꾸준히 병행해왔다. 그야말로 글로 '감옥'을 살아왔던 것이다. 신간 『황홀한 글감옥』은 글로 감옥을 살아왔던 소설가 조정래의 내면과 철학을 담은 자전 에세이다. 

  책의 얼개는 간단하다. 문학에 관심있는 대학생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저자의 답변으로 구성되었다. 수준있고 구체적인 다양한 질문들은 평소 꾸준히 저자에게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가장 의미있고 글로 남길만한 가치가 있는 84개의 질문을 추려서 정리했다. 아직까지 작품 외의 다른 텍스트로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는 저자이기에 문학 청년들로서 궁금함이 적지 않았을 게다. 저자 개인의 신상에서부터 세 편의 대하소설 집필을 비롯한 문학 전반에 걸친 궁금증, 더 나아가 인생 철학에 이르기까지 풍성한 질문들이 이 책의 가치를 추동한다.

  이 책이 자못 긴요한 이유는 일반 독자를 아우르면서도 문학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안내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삶과 문학에 대해 설파한다. 자신의 문학 인생 40년을 통해 경험하고 느끼고 깨달은 지혜의 보물들을 풀어놓고 있다. 조정래 특유의 강한 어조와 뚜렷한 철학이 책 곳곳에 잘 배어 있다. 

  이 책이 주는 가장 강렬한 울림은 '글'에 대한 소설가 조정래의 경외심이다. 저자는 글쟁이로서 글에 대한 자못 진지한 자세를 견지한다. 누구나 처음부터 글을 잘 쓸 수 없으며 각고의 노력과 투혼으로부터 훌륭한 글쓰기는 완성된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신념이다. 세계 문학사를 다시 썼던 굴지의 작가들은 모두 그 '고통'을 감내했다. 질문자들의 질문 중에 맞춤법과 어법이 틀린 것을 교정해주고, 우문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을 달아놓는 저자의 엄숙함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조정래의 문학 신념이 웅숭깊다. 그것은 바로 '진실'이다. 형태와 방법은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문학인은 반드시 진실만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비인간성과 불의와 편법으로 점철된 작금의 세계에서 결코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을 위하여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하고 맞서야 하는 것이 작가의 소임이라고 외치는 조정래의 모습에서 대작가로서의 무게감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의 말대로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며 그 시대의 산소인 것이다.

  책 곳곳에 시詩에 대한 작가의 애틋한 선망을 엿볼 수 있다. 아내 김초혜 시인에 대한 저자의 사랑도 시에 대한 선망과 함께 자주 표현되고 있다. 세계의 모든 소설가들이 시인을 질투했던 것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시인들이 소설가에 대해 우월감을 가졌던 것을 저자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저자는 한용운, 김소월, 조지훈, 김영랑, 서정주, 박목월의 시 한 문장씩을 인용하며 시인이 지닌 천부적인 문학적 역량을 부러워한다. 시가 갖는 '응축'의 힘은 소설의 '전개'를 압도하며 포괄한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시인은 소설보다 시가 우월한 문학이라고 거만할 수 있는 것이고 소설가는 회복할 길 없는 열등감을 시인에게 느끼는 것, 이라며 시인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를 보내는 저자의 시샘을 이해할 만하다. 본래 세계의 모든 시인은, '천재'였기 때문이다.

  조정래의 네 번째 대하소설을 기대하기는 무리인 것으로 보인다. 조정래 자신이 이제 더 이상 대하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세 편의 대하소설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서 조정래가 쳐올린 공의 높이는 결코 낮지 않다. 이 땅의 많은 독자들은 『태백산맥』을 통해 알았고, 『아리랑』을 통해 느꼈으며, 『한강』을 통해 깨달았다. 충분하고 풍성하며 모자람이 없지만, 그래도 '한 편 더'를 기대하는 것은 저자의 인권(?)을 생각지 않은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

  나는 본래 세상의 모든 글쟁이들을 존경하고 경외해왔다. 온라인상에 책을 읽고 글로 남기는 서평쓰기의 기본 전제는 작가에 대한 존경이다. 물론 지나친 혹평으로 작가와 텍스트를 지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기본적인 존경심 속에 포괄된다. 문인들 사이에서 "시 쓰다 안 되면 소설 쓰고, 소설 쓰다 안 되면 평론 쓴다"는 말이 있다. '창조'적 텍스트는 '비판'적 텍스트를 압도한다. 리뷰어로서의 오래된 신념이다. 이를 다시 한 번 곱씹게 했다는 점에서 조정래의 신간 『황홀한 글감옥』은 나에게 매우 소중한 책이다. 일독을 자신있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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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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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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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롤로그

  한 권의 소설을 읽고 두 번 서평을 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작품이 매우 훌륭한 경우나 남들이 전부 대작이라고 하는데 내가 그 의견에 동조하지 못하는 경우에 이런 수고는 발생된다. 하지만 그 '수고로움'은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다. 문학에 대한 리뷰어로서의 진지한 자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즐겨하는 내 모습에 흐뭇해 한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자의식인가.

  하루키의 신작 『1Q84』는 현재 매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기상천외한 선인세라든지 폭발적인 판매량과 같은 이 소설에 대한 비본질적인 수식어구를 끌어다 쓰고 싶지는 않다. 분명한 건 소위 '하루키 현상'이 일본을 넘어 한국에까지 전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20년 전 『상실의 시대』의 뜨거운 반응 이후 하루키 현상은 한국 문학계의 큰 이슈가 되어왔다. 유난스러울 것은 없다. 하루키의 신작이 출간될 때마다 발생했던 일관된 반응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지난 서평에서 『1Q84』에 대해 아낌없는 박수를 선사했다. 평단과 대중의 반응과는 별도로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이 소설을 찬탄했다. 한 사람의 아마추어 리뷰어로서 타인의 반응은 내게 독립적이다.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서평이란 본래 객관과 주관의 싸움이다. 비평의 시스템이 적용되는 카테고리는 무조건 '주관적'이어야 한다. 비평에서 객관은 수단이 되지만 주관은 목적이 된다. 객관적 사실로 자신의 주관을 얼마나 명쾌하게 담아내는가는 모든 논설이 갖는 핵심이다. 

  지난번 올린 서평을 되돌아봤다. 미천한 사유와 볼품없는 필력으로 힘없고 매력잃은 글이 되었다. 드러내고 싶은 것을 드러내지 못했다. 다양하고 방대한 하루키의 세계관을 너무 지엽적인 관점에서 풀이했다. 결락된 것을 삽입하고 부족한 표현을 다듬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해서 지난 서평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컨덴츠를 두 번째 서평을 통해 보완하고자 한다.


  <2> 하루키의 '나'

  하루키는 자신의 문학적 과제를 환멸로 가득한 이 세계 속에서의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추구를 끊임없이 퍼올리는 일로 규정한다. 열정의 이데올로기 시대를 지나 무료한 고도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이 느끼는 '존재의 가벼움'이 그의 문학적 주요 관심사다. 『1Q84』에서도 자본주의를 표상하는 소재와 배경이 많이 나타난다. 하루키는 이 소설에서 매우 다양한 소재들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독자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기존의 지식이나 정보나 문화가 산재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하루키 자신의 것, 실제로 존재했던 유명작가의 것,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온갖 유통상품들, 다양한 음악들 등등의 온갖 잡동사니와 같은 것들이다. 마치 소설이 예술의 터미널이 된 것 같다. 기실 이런 방식의 집필은 타작가의 소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하루키의 그것은 확실히 다른 차이가 있다. 그 '잡다한 것'이 세계가 아닌 개인의 것이라는 점이다. 하루키 소설에서 드러나는 오만가지 잡동사니들은 결코 세계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개인의 전유물이다. 그것들은 세계의 역사가 될 수 없는 개인의 역사나 우주, 생각이나 경험에서 존재한다. 


  소설 속 소재와 장치를 개인의 전유물로 구속시키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항상 강력한 매력을 발산해왔다. 그렇다면 하루키의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세계 속의 '나'가 아닌 자아 속의 '나'로 규명된다. 하루키의 '나'는 아무런 목적 없이 무의미한 것에 지나친 열정을 보임으로써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갖고 있는 '너'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는 자세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이다. '나' 외의 객관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의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또 타인의 자아도 '나'의 의식 내용과 나란히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

  결국 하루키의 '나'는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나'가 된다.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극도 공허와 절대 고독의 자장에서 움직인다. 이해할 수 없는 판타지 사건들을 통해 이들은 기존 지식의 한계나 인식의 다양성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자신이 잃어버린 무엇, 즉 결락 내지는 타자화한 내면의 또 다른 자아를 찾아 외부세계로 한걸음 내딛게 된다. 즉 다양한 자아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1Q84』에서 펼쳐지는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10살 때 한 소녀가 한 소년의 손을 잡음으로써 시작된다. 거기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한 소년의 행동이 세계가 일그러지는 모든 판타지 현상을 추동한다. 즉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종교, 문화, 관념, 철학, 현실, 상실, 고독 등은 '나'라는 실존성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1권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의 지류들이 2권에서는 한 줄기 본류로 통합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종내 사랑으로 귀결되고야 마는 것이다. '나'와 다른 또 하나의 '나'를 연결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인간의 구체적인 '사랑'이다.



  <3> 사랑 I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에는 구원이 있어. 그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해도."   <1권, P408>

  하루키의 작품들을 조망해보면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추출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랑'이다. 신의 사랑이나 인류애와 같은 포괄적인 사랑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사이의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사랑이다. 하루키는 그의 작품에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왔다. 그것은 관념이 아닌 실재의 사랑이다. 근본 사랑의 본체는 태생적으로 반관념성으로 존재한다. 하루키 세계의 크기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우주 거리로 환산된다. 하루키가 그의 작품 속에서 '한 사람'에 대한 다른 '한 사람'의 사랑을 집요하고 구체적으로 조명해왔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루키적 사랑은 얼핏 보면 관념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실재가 관념을 압도하는 사랑이다. 차원의 한계에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시공간성의 구속을 초월한다. 본래 사랑은 발현체와 대상체가 같은 시공간 안에 존재해야 함을 전제하지 않는다. 동일한 실존성의 구속을 타파함으로써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집대성시킨다. 만약 현실 세계가 11차원의 우주로 존재한다면 사랑은 11차원이라는 절대 고차원에서 그 완전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서로 다른 은하계를 관통하는 힘이다. 사랑은 공간을 무력화하고 시간을 굴절시킨다. 『1Q84』에서 덴고와 아오마메가 일그러진 세계를 달리 살아가면서도 결국 '어린이공원'이라는 하나의 실재하는 공간에서 만나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하루키적 사랑의 의미를 가장 단면화한 장면이다.

  사실 덴고와 아오마메는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외톨이였다. 그런 두 아이가 서로의 마음을 잠시 공유한 뒤 그 마음을 20년 내내 지속하였지만 그것을 외부에 표현하지는 않는다. 둘은 공통적으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 덴고의 부모는 아들을 NHK 수금원 일에 동참시킴으로 아들에게 적지 않은 수치와 모멸감을 주었다. 아오마메의 부모는 증인회에 빠져 딸아이를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소외시켰다. 누구도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러던 어린 시절의 어느날, 둘은 잡힌 손과 잡혀진 손에서 교감한다. 그 짧은 교감의 감각만을 의지한 채 20년의 시간이 흐른다. 어느날 우연히 비상구(출구)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지만 아오마메는 자신이 죽어야 덴고가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아오마메는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끝내 스스로 죽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한다. 이것이 소설 속 다양한 이야기 가운데 끝까지 희석되거나 훼손되지 않았던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자기성氣性이다.


  <4> 사랑 II

  현실이 뒤틀린 1Q84의 세계는 불가해한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소설 속 1984는 어떠한가.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009년은 어떠한가. 현재 우리들은 매일 아침마다 쏟아지는 기상천외한 사건사고들로 인해 심장을 공격당한다. 어린 소녀를 성폭행해 평생의 장애자로 만든 치악무도한 범죄자가 법에 의한 따뜻한 '배려'를 받았다.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죽이는 세상이 되었다. 거짓이 진실을 추월하고 부조리와 비상식이 정의를 압도하고 있다. 반인륜적 범죄와 온갖 부조한 현실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만 하는 당위적 명제가 온갖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소설 속 초자연적인 판타지들보다 더 받아들이기 쉽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핍과 외로움의 공간인 1984와 온갖 판타지 상황이 펼쳐지는 1Q84는 서로 극과 극의 관계에 놓여있지 않다. 또한 선과 악이라는 명백한 이분법으로 가름할 수도 없다. 한 사람이 두 개의 공간에 동시로 존재할 수 있으며 개인의 각자 진입 또한 가능하다. 그렇다면 두 가지 상이하면서도 유사한 공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 내면의 저 어둡고 공허한 심연으로부터, 이 혼돈과 무질서의 시공간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인가. 스스로를 치유하고 누군가를 구원하는 힘은 어디서 발현하는가. 그것은 결국, 또한, '사랑'이다.

  자신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은 거대한 힘의 존재를 인식하고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내린 아오마메의 선택은 사랑이었다. 본인의 '레종 데트르'를 찾지 못하고 그저 단지 살아가고 있을 뿐인 자아의 죽음 대신 사랑을 위해 내린 그녀의 결정이 비극적이지 않은 것은 진정한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영원성으로 물리적 시간의 유한성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오마메는 목숨을 버림으로써 사랑을 지켜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해버리는 소모적 판타지를 뛰어넘어 자신의 저항이 패배주의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20년 전 단 한 번 주고받은 짧은 온기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랑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한 순간의 영원이 사랑을 완전하게 하는 단 하나의 지렛대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덴고와 아오마메의 20년을 이어온 사랑이야말로 두 개의 달보다, '리틀 피플'이나 '공기 번데기'보다 더 현실 속에서 일어나기 힘든 판타지적 요소는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혼재 속에서 자신의 방향감각을 상실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나침반으로의 사랑이 바로 1Q84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아닐까.


  <5> 하루키의 소설론

  하루키는 그의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글쓰기의 고통을 말해왔다. 소설가로서의 쓰기에 대한 원칙과 철학을 은밀한 방법으로 소설 속에 암시해왔다. 그는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실존하지 않은 소설가 '데릭 하트필드'를 창조함으로써 소설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 전달 수단으로 활용한다.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는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명문장을 사용하며 글쓰기의 고통을 마라톤에 대입시킨다. 소설(글쓰기)에서는 천재가 없으며 모든 소설가들은 창작의 연단과 고통의 과정을 반드시 통과한다는 게 하루키의 신념이다. 이러한 그의 메시지는 『1Q84』 속에서도 은밀한 형태로 숨어있다.

  『1Q84』 내에는 또 다른 소설이 존재한다. 액자의 형태로 <공기 번데기>라는 소설이 들어가 있다. 후카에리가 말하고, 아자미가 받아쓰고, 그걸 덴고가 다시 리라이팅함으로써 <공기 번데기>는 만들어진다. 여기서 <공기 번데기>가 『1Q84』 안에서 매우 독특한 역할을 지닌 텍스트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공기 번데기'로부터 '리틀 피플'이 생성되고, 그것은 결국 소설 속 판타지를 추동하는 상징적 존재로서 위치한다. 길지 않은 한 편의 짧은 소설을 '말'로 하고, '받아서' 쓰고, 다시 '리라이팅'으로 이어지는 삼단 작법으로 탄생시킨 <공기 번데기>는 소설에 대한 하루키의 진지한 성찰과 겸허한 자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평소 마감 기일을 철저히 지키고 마감 기한 이틀 전까지 원고가 완성되지 않으면 정서적으로 진정이 되지 않는 하루키의 글쓰기 스타일은 그로서는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일상생활은 차치하더라도 소설가로서 글에 관해서는 대단히 엄격한 하루키다.

  하루키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소설을 쓸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온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 대한 작가의 독재성은 사르트르에 의해 제압되며 통제되었다. 사르트르의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e)' 이래로 요즘은 작가의 의도보다는 텍스트 자체, 혹은 독자의 해석이 중시되는 추세다. 하루키는 누구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소설가다. 그가 그의 텍스트에서 소설가로서의 진지한 존재론적 고민을 끊임없이 제기해왔던 것도 그러한 그의 내면적 앎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공기 번데기'나 '리플 피플'과 같은 소설 속 판타지 작동 매개체는 하루키의 소설론을 보조하며 함의하는 외재적 메타포일 수 있는 것이다.


  <8>노벨문학상

  하루키의 노벨문학상 수상 전망이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해마다 10월 둘째주 목요일이 되면 한국의 문학 관계자들은 스웨덴 한림원을 예의 주시한다. 고은 시인의 노벨상 수상은 이미 전 국민적인 여망이 되었다. 매년 노벨상 발표에 맞춰 안성시 고은 시인의 댁에 새벽부터 죽치고 있는 기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에서 하루키의 노벨상 수상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는 얘기의 사실 진위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그의 수상 가능성이 항상 최고 순위에 올라있는 것 만큼은 사실이다.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러시아까지 뻗어있는 하루키의 명성을 감안한다면 친유럽 성향이 강한 노벨문학상 심사위원의 선택에 곧 도달하지 않을까 예측된다. 더욱이 '프란츠 카프카 상'과 '예루살렘 상' 수상을 통해 노벨상의 언저리까지 도달해있는 하루키다. 죽기 전에는 반드시 받지 않을까.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과 하스미 시게이코는 하루키 비판의 전면에 서는 사람들이다. 고진이 절대적인 관점에서 하루키를 재단한다면 시게이코는 비평가의 의무론적 입장에서 하루키를 비판한다. 시게이코는 주창한다. 동시대 비평가의 임무는 시대를 선도해가는 소설가를 죽이는 것임을. 이는 이야기의 '해체'를 의미한다. 오에 겐자부로 이후 소설같은 소설을 보기 힘들다는 일본 내 '근대문학의 종언' 담론에서 하루키만이 그나마 가장 자유로운 위치에 있다. 어쩌면 가라타니 고진, 하스미 시게이코, 고모리 요이치 등과 같은 일류급 평론가들이 쏟아내는 하루키에 대한 지대한 비판은 소설의 종언을 바라보는 비평가로서의 안타까움인 동시에 한 줄기의 희망섞인 역설이라 할 수 있다. 그 적확한 위치에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가와바탸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주창했다. 그로부터 26년이 흘러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말했던 것은 '애매한 일본의 나'였다. 야스나리가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외쳤을 때 '아름다운 일본'과 '나'는 종언을 맞이하고 있었다. 겐자부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이 '나'를 규명했을 때 일본인 안에서 명확한 '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만약 하루키가 노벨문학상 수상대에 선다면 그는 과연 무엇으로 '나'와 일본을 연결지을까. 자못 궁금하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만약'이다.


  <6> 하루키의 문체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는 데 있어 소설가의 문체를 중요시 여긴다. 물론 소설이 작가의 문체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서사와 리얼리티, 소재와 상상력, 주제의식과 학구성 등등 소설가로서의 능력과 자질은 소설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그중 일순위로 문체를 꼽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을 움직이는 일련의 모든 요소들은 전부 문장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문체는 문장의 특성을 구하는 상대적 문예 양식이다. 그렇다면 문장이 소설에서 독자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문체의 중요성이 얼마나 소중한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루키 문체의 가장 큰 특징은 '간결함'이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유려하다. 그는 쉽게 쓴다. 일부 독자들은 문장의 쉬움과 문학적 가벼움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문학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다. 문장이 짧고 쉽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성이 공격받는다면 세계 문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몽테뉴, 새뮤얼 존슨, 헤밍웨이 등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쭙잖은 미사여구에 함몰된 만연한 문장보다는 쉽고 간결한 문장이 진리를 묘파하는데 더욱 적확한 방법이 된다.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말하는 바를 귀기울이게 하는 하루키의 힘은 바로 그의 문체로부터 원동력 되는 것이다.

  왕왕 느끼지만 하루키의 문장은 맑은 물과 같다. 불필요한 미사여구나 과도한 수식어구가 없다. 하루키의 글을 읽다보면 걸쭉한 것을 먹은 후 입안이 텁텁할 때 시원한 물 한 컵을 마시며 개운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장장 1,400페이지가 넘는 『1Q84』의 거대한 이야기가 시간가는줄 모르고 빠른 가독력으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루키의 맑고 고운 단문장은 소설 속 모든 판타지와 관념성을 압도하며 견인한다. 문장이 명쾌하기 때문에 사유나 철학에 짓눌리지 않으며 대상을 왜곡하거나 굴절시키지 않는다. 90년대 이후 수많은 한국 작가들이 하루키의 문체를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았던 이유를 이 대목에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9> 정리

  초반 의도와는 다르게 간결하지 못한 장황한 글이 되었다. 다시 써도 글의 난잡함은 피할 길이 없다. 어쩔 수 없는 필력이다. 서두부터 말미까지 일관되게 논설한 것은 하루키와 그의 신작 『1Q84』에 대한 찬탄이다. 『태옆감는새』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후속편이 출간된다고 한다. 문학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본질'이다. 텍스트 자체라는 얘기다. 3편으로 돈을 더 벌기 위한 수작이 아니냐, 는 혹자들의 의구심은 무의미하다. 얼마나 잘 쓴 텍스트냐, 가 본질이다. 물론 책이 나와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는 소설을 잘 쓰는 소설가다. 그리고 소설을 사랑하는 소설가다. 문학평론가 남진우의 표현대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독서나 분석의 대상이라기보다 차라리 매혹 그 자체다. 한국 독자들은 글 못쓰고 실력없는 작가에게 경도될 만큼 그리 어리석지 않다. 하루키는 뛰어난 소설가다. 『1Q84』는 그러한 하루키의 현재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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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 대통령 - 노무현, 서거와 추모의 기록 1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한걸음더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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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위의 이름 석자가 내게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 나는 한때 노무현에 울었고 노무현에 웃었다. 그의 말과 행동을 주목했고 내 가치관에 대입시켰다. 한국에 이런 정치인도 있구나, 하며 뿌듯해 했다. 물론 그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방향성만큼은 항상 옳았다. 그랬기에 그의 행적에 따라 내 울음과 웃음은 교차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크게 웃었다. 그가 탄핵되었을 때 울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엄청' '크게' 울었다.

  내가 노무현에 열광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기존의 한국 정치인과는 다른 무언가를 내재했기 때문이다. 자기를 버릴줄 아는 소신과 용기는 한국 정치에서 이론으로만 작동되었던 가치였다. 노무현이 다른 정치인과 구별되었던 것은 그것을 확고한 행동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3당 합당이라는 거대한 대세를 홀로 거슬렀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예고된 낙선을 감내했다. 어쩌면 그의 이러한 '바보'스러운 모습이 그의 자산이 되었고 결국 국민의 마음음 움직이면서 대통령의 권좌에까지 올랐던 것이리라.

  지난 봄 국민들을 통탄했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는 엽기적인 사태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통탄스러움 속에는 놀람 외의 보다 본질적인 감정이 스며있었다. 그것은 강렬한 '분노'였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촉발된 전국적인 공분憤 사태는 '기가막힘'과 '왜', '후회'와 '자기환멸'이 서로 혼합되어 만들어내는 가슴저린 공황이었다. 그렇게 전국민의 눈물바다는 일주일간 계속해서 범람했다.

  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도서 『내 마음속 대통령』을 통해 당시의 생동감 있는 사실을 정리했다. '노무현, 서거와 추모의 기록 I'이라는 표지 전면의 문구가 말해주듯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국민에게 미처 알려지지 못한 사실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공개된 글과 편지, 지인들의 풍성한 인터뷰와 전국 각지에서 펼쳐졌던 추모 열기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음은 무거워진다. 노무현의 죽음과 온국민의 추모가 교차하며 생산해내는 의미와 가치를 가슴 속 한 켠으로 밀어넣는다.

  이 책의 가장 큰 유의미성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사실들을 확인하는데 있다. 소개된 것들 가운데 가장 가슴을 뒤흔든 건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낸 노무현 전 대통령의 편지였다. 4월에 쓴 노 대통령의 편지에는 수사팀의 교체와 관련하여 자신의 진솔한 심정이 그대로 묻어있다. 진행되고 있는 수사의 부당성과 상식을 벗어나는 검찰의 태도에 대해 피의자로서의 고통과 답답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결국 그 편지는 참모진과의 협의를 거쳐 부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는 왜 청원을 포기한 걸까.

  그 뒤 계속해서 공개되는 컴퓨터 속 저장된 글을 통해 노 대통령이 느꼈을 참담함과 비애, 좌절과 굴욕감을 충분히 느끼게 된다. 그는 "남은 인생에서 해보고 싶었던 모든 꿈을 접습니다"라는 절망스러운 고백까지 하고 있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굴욕적이었을까. 그가 자신의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허덕이고 있을 때 검찰의 수사는 오리무중이었고 언론은 계속해서 호들갑이었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그때 이미 준비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노 대통령의 비공개된 글과 편지 외에도 이 책은 그의 죽음 전후의 상황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쓰고 있다. 주관적 감정 표출보다는 객관적 사실을 열거함으로써 추모집이라는 책의 성격과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있다. 노 대통령의 죽음이 어떤 배경에서 발생되었고, 전국적인 추모열기는 어떠했으며,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해 잘 정리했다. 책의 뒷부분에는 수십여 페이지를 할애해서 몇몇 추모 사진들을 수록하기도 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동안 어느덧 눈시울은 젖는다.

  나는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테마에서 검찰과 언론의 책임론을 굳이 제기하고 싶진 않다. 물론 검찰은 무리한 표적수사를 감행했고 언론은 무책임하게 보도했다. 검찰로서 과연 정당한 수사를 실시했는가, 또한 언론으로서 보도 윤리에 어긋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서 검찰과 언론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검찰과 언론에 대한 국민의 비판은 당연하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의 죽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정신과 의무이다. 그가 평생을 신념으로 안고 살아왔던 화해와 통합의 대한민국을 우리는 성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의 죽음의 의미를 한낱 공분과 책임공방으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응시하며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노무현 자신이 죽음으로써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의 핵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더라도 떳떳하게 정의를 말할 수 있고 떳떳하게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소원한다. '상식'의 크기가 인간 삶의 입증을 결정한다. 우리는 상식이 당위에서 존재로 옮겨가는 세계의 실현을 위해 힘써야 한다. 바로 그 동기부여와 연장선상에 '노무현'이라는 이름 석자가 있다. 훗날 내 아이와 후손에게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고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반드시 전하리라. 

  내가 너무 노무현의 입장에 서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가 너무 그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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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 사소한 아이의 소소한 행복
최강희 지음 / 북노마드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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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았다. 

  개인적으로 연예인의 책 출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간 만나왔던 연예인들의 책은 나름의 개성과 예상 외의 만족으로 나를 즐겁게 했다. 신현준의 『고백』에서 그의 진지한 삶의 태도와 깊은 신앙심을 보았다. 차인표의 『잘가는 언덕』에서는 탤런트가 글까지 잘 쓸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손미나의 여행기는 여행의 외연이 아닌 내면을 조명했기에 극찬했다. 션·정혜영 부부의 에세이를 통해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색깔과 따뜻한 가족애를 탐구했다. 항상 만족스러웠다. 중요한 건 텍스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배우 최강희를 좋아한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연기를 잘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펼친 최강희의 연기는 정이현이 창조한 오은수라는 캐릭터를 자신만의 색깔로 재창조한 모습을 보여줬다. 영화 <애자>에서 그녀의 눈물연기는 작품의 완성도에 비하면 실로 아까운 열연이었다. 최강희는 항상 성실했다. '4차원'이라는 수식어는 무의미하다. 배우는 연기만 잘하면 된다. 가수가 노래만 잘하면 그만이듯이.

  지금껏 읽어왔던 연예인의 책들이 준 만족감과 배우 최강희의 성실함을 믿었기에 그녀의 신간은 어렵지 않게 내 손에 안착했다. 그것이 속은 것임을 모른채 말이다. 중고생 일기 수준의 낙서와 연결고리 없이 나열된 사진들은 진지한 독서를 차단시킨다. 이 정도 수준의 에세이를 만들기 위해 양장본을 두르고 올칼라로 돈을 바를 필요가 없다. 나무는 한정되어 있고 종이는 비싸다.

  마치 네이버 검색창에서 '최강희'라고 친 후 나오는 무수한 사진들을 보는 것 같다. 각 페이지를 도배하고 있는 사진들이 왜 그자리에 무슨 이유로 배치되어야 하는지 납득하기 힘들다. 사진과 함께 수록된 최강희의 시와 수필들도 수준 미달이다. 텍스트라 해봐야 수많은 사진들에 가려 얼마 있지도 않거니와 하나같이 유치찬란한 문장들뿐이다. 사진은 글을 보조하지 못하고 글은 사진을 견인하지 못한다. 아무리 포토에세이라곤 하지만 완성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진 이상 최소한의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결락된 책은 나무(종이)에 대한 모독이자 독자에 대한 불손이다.

  최강희의 사진을 보고 싶다면 인터넷 검색으로 충분하다. 책을 덮은 후 머릿속에 남는 것은 최강희의 뽀얀 피부와 이쁜 다리뿐이다. 완독하는데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지만 시간은 금이라는 삶의 진리를 새삼 곱씹게 된다. 이런 싸구려 에세이를 위해 지갑을 열고 시간을 낭비한 내 자신이 초라하다.

  리뷰 쓰는 것조차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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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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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계가 아름다운 것은 별과 해와 달이 있기 때문이다. 꽃과 나무와 나비가 있기 때문이다.  강과 산과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양과 젖소와 고래가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며 바람이 불기 때문에 세계는 아름답다. 하지만 자연의 것들이 부족하지 않게 넘쳐흐른다 할지라도 세계의 아름다움을 근본적으로 완전화하지는 못한다. 세계가 완전히 아름답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실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세계가 세계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세계는 정의된다. 인간은 아름답다. 세계의 아름다움은 본래 인간의 아름다움에서 전도된 것이다. 움직이는 '것'들 중에서 유일하게 직립보행을 하는 이 위대한 생명체는 끊임없이 세계를 창조해왔다. 열심히 사고했고 노련하게 행위했다. 만약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곳의 생명체들은 찬탄할 것이다. 이 세계의 영장 인간의 아름다움을.

  물론 인간의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총체적이며 포괄적인 관점에서 이해가 성립된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세분하면 역설적 편린들이 다양하게 발견된다. 거짓과 위선, 불관용과 비양심, 배신과 잔혹 등 아름다운 인간을 거부하는 내적 속성들이 인간의 포괄적 아름다움 속에 실재한다. 지난한 인류사는 악한 인간의 본성을 아름다움의 포괄로 압도해왔던 시간의 1차원이다.

  김훈의 『공무도하』는 바로 '인간'에 대한 텍스트다. 밀도있는 김훈의 문체가 조명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김훈은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비열함, 더러움, 희망에 대해 담담하고 노련하게 써내려갔다. '비루함'과 '치사함'과 '던적스러움'이라는 인간이 당면한 시급한 현안문제들은 '이 세계(현실)'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하지만 '다른 세계(이상)'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옛 고조선 나루터에서 벌어진 <공무도하가>의 전설처럼, 백수 광부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은 것처럼, 작가 김훈은 '강'을 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소설 『공무도하』는 사회부 기자 문정수의 관점을 통해 바라본 이 세계의 이야기다. 마치 신문의 사회면을 보는 것처럼 다양한 사건사고가 소설 속 이야기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기르던 개에 물려 죽은 소년과 아들의 죽음을 버리는 그 어머니 오금자의 잠적, 소방청장 표창을 받은 소방관 박옥출의 업무상 배임과 절도, 노학연대 집행부 일급 수배자들의 은신처를 자백하고 풀려난 뒤 해망으로 떠나 바닷속 포탄 껍질과 탄두를 건져올려 파는 장철수, 방조제 도로의 교통사고로 깔려죽은 소녀 방미호와 그녀의 아버지 세습농부 방천석의 잠적 등 문정수가 기자로서 목도한 세계의 모습은 온갖 암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현실 세계를 취재하며 공급받은 지나친 피로감은 출판사 편집자 노목희와의 하룻밤을 통해 해소된다.

  소설에서 각기 독립적으로 배열된 이 세계의 인물과 사건들은 개별의 우연으로 엮여있다. 인물간의 과거 어느 지점이 현재성을 부각시키고 현재의 녹록지 않은 인연이 과거를 종속시킨다. 개별적 삶을 살아온 인물들이 새로운 지점에서 만나 특별한 의미를 공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관계의 형성들은 본인의 입장에서는 오직 현재적 우연으로만 수용된다. 이를 조망하고 조화하며 조절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문정수 한 사람뿐이다. 이 소설에서 모든 사건과 인간 사이의 연결고리를 인지하는 전지적 관점에 서 있는 가장 주요한 화자가 바로 신문기자 문정수다.

  사실을 생명으로 여기는 기자의 입장에서 목도한 세계의 모습은 어떨까. 기자 문정수가 바라본 세계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더러운 시공간이다. 난잡하고 비열하다. 슬프고 각박하다. 현실은 칠흙같은 어둠으로 차 있다. 하지만 작가 김훈은 새로운 곳을 그려내지 않는다. 인간의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현실 세계의 막막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그 틀과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희망은 현실 세계 안에 있다.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라는 것을 직시할 때 함구무언된 소설의 메시지는 가시광선과 조우하게 된다. 김훈은 일부로 '강'을 건너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다시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환원된다. 김훈은 유독 그의 소설에서 시간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출해왔다. 김훈 소설의 대전제는 시간 속에 아름다움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삶과 아름다움의 괴리적 충동을 유발시키는 해석이다. 시간이란 완성되지 못한 정신이 어쩔 수 없이 짊어지는 운명이자 필연이라고 헤겔은 말했다. 아름다움은 오로지 이같은 불완전성을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김훈은 시간을 거부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끄집어낸다. 그가 그의 소설사에서 그려온 '전쟁', '육체', '동물'이라는 키워드는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김훈식 접근이자 해석의 연결고리들이다. 강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더러운 세상에서 함께 살자고 했던 <공무도하가>의 여옥의 노래처럼 말이다.

  나에게 김훈의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애틋한 사랑을 확인하는 길이자 강렬한 희열을 맛보는 시간이다. 김훈의 소설은 인간을 자연스럽게 배경 안으로 밀어넣는 마력을 보여준다. 분명히 인간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풍경에서 담아내는 김훈의 마력적인 문장은 인간 탐구를 조명이 아닌 조망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자연에서 인간을 그려내는 것이다. 더욱이 김훈의 문체는 철저한 반관념성을 견지한다. 대상을 조작하는 어설픈 관념들을 그는 그의 문장에서 완전히 추방한다. 문장이 사유를 적확히 견인하며 의미를 명징화한다. 맑고 고운 소리는 더 이상 피아노의 전유물이 아니다. 김훈의 문장이 그러하다.

  소설가에게 문체는 매우 중요한 자의식이다. 꾸준한 집필을 통해 나름의 개성있는 문체를 일궈낸 소설가들을 보라. 자신만의 문체로 인구에 회자되는 작가들의 특징은 다른 작가의 그것들을 압도한다. 김훈이나 신경숙의 '문체'가 구효서/임철우의 '서사와 리얼리티', 김연수의 '학구적 기질', 성석제/은희경의 '이야기솜씨', 박민규의 '상상력'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문체는 문장에 대한 상대적 문예 양식 기작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문장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서 소설을 형성한다. 내가 문학에서 유독 문체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온 것도 바로 이 부분에서 해명된다.

  김훈식 허무주의는 결국 현실 세계의 희망을 발화시킨다. 세계가 아름다운 것은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도 결국 인간이 사는 세계다. 그리고 그 어떤 허무도 이 명징한 진리를 압도하지 못한다. 김훈이 '강'을 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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