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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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소설가가 자신의 일생에서 세 편의 대하소설을 남긴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사실 대하소설은 소설가의 인생에서 단 한 편도 남기기 쉽지 않은 영역이다. 세계 문학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을 한국의 소설가 조정래는 이루었다. 이백자 원고지 오만 장이 넘는 거대한 서사 물결은 조정래 문학의 장엄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장은 누구나 길게 쓸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무나 길게 쓸 수 없는 법이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저자 조정래는 그의 문학적 풍성함과는 달리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껏 써오지 않았다. 세 편의 대하소설을 써오면서 한 사람의 소설가로서,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많은 번민과 난관이 있었겠는가. 그는 대하소설을 쓰면서도 단·장편과 산문집 집필도 꾸준히 병행해왔다. 그야말로 글로 '감옥'을 살아왔던 것이다. 신간 『황홀한 글감옥』은 글로 감옥을 살아왔던 소설가 조정래의 내면과 철학을 담은 자전 에세이다. 

  책의 얼개는 간단하다. 문학에 관심있는 대학생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저자의 답변으로 구성되었다. 수준있고 구체적인 다양한 질문들은 평소 꾸준히 저자에게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가장 의미있고 글로 남길만한 가치가 있는 84개의 질문을 추려서 정리했다. 아직까지 작품 외의 다른 텍스트로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는 저자이기에 문학 청년들로서 궁금함이 적지 않았을 게다. 저자 개인의 신상에서부터 세 편의 대하소설 집필을 비롯한 문학 전반에 걸친 궁금증, 더 나아가 인생 철학에 이르기까지 풍성한 질문들이 이 책의 가치를 추동한다.

  이 책이 자못 긴요한 이유는 일반 독자를 아우르면서도 문학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안내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삶과 문학에 대해 설파한다. 자신의 문학 인생 40년을 통해 경험하고 느끼고 깨달은 지혜의 보물들을 풀어놓고 있다. 조정래 특유의 강한 어조와 뚜렷한 철학이 책 곳곳에 잘 배어 있다. 

  이 책이 주는 가장 강렬한 울림은 '글'에 대한 소설가 조정래의 경외심이다. 저자는 글쟁이로서 글에 대한 자못 진지한 자세를 견지한다. 누구나 처음부터 글을 잘 쓸 수 없으며 각고의 노력과 투혼으로부터 훌륭한 글쓰기는 완성된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신념이다. 세계 문학사를 다시 썼던 굴지의 작가들은 모두 그 '고통'을 감내했다. 질문자들의 질문 중에 맞춤법과 어법이 틀린 것을 교정해주고, 우문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을 달아놓는 저자의 엄숙함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조정래의 문학 신념이 웅숭깊다. 그것은 바로 '진실'이다. 형태와 방법은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문학인은 반드시 진실만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비인간성과 불의와 편법으로 점철된 작금의 세계에서 결코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을 위하여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하고 맞서야 하는 것이 작가의 소임이라고 외치는 조정래의 모습에서 대작가로서의 무게감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의 말대로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며 그 시대의 산소인 것이다.

  책 곳곳에 시詩에 대한 작가의 애틋한 선망을 엿볼 수 있다. 아내 김초혜 시인에 대한 저자의 사랑도 시에 대한 선망과 함께 자주 표현되고 있다. 세계의 모든 소설가들이 시인을 질투했던 것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시인들이 소설가에 대해 우월감을 가졌던 것을 저자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저자는 한용운, 김소월, 조지훈, 김영랑, 서정주, 박목월의 시 한 문장씩을 인용하며 시인이 지닌 천부적인 문학적 역량을 부러워한다. 시가 갖는 '응축'의 힘은 소설의 '전개'를 압도하며 포괄한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시인은 소설보다 시가 우월한 문학이라고 거만할 수 있는 것이고 소설가는 회복할 길 없는 열등감을 시인에게 느끼는 것, 이라며 시인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를 보내는 저자의 시샘을 이해할 만하다. 본래 세계의 모든 시인은, '천재'였기 때문이다.

  조정래의 네 번째 대하소설을 기대하기는 무리인 것으로 보인다. 조정래 자신이 이제 더 이상 대하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세 편의 대하소설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서 조정래가 쳐올린 공의 높이는 결코 낮지 않다. 이 땅의 많은 독자들은 『태백산맥』을 통해 알았고, 『아리랑』을 통해 느꼈으며, 『한강』을 통해 깨달았다. 충분하고 풍성하며 모자람이 없지만, 그래도 '한 편 더'를 기대하는 것은 저자의 인권(?)을 생각지 않은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

  나는 본래 세상의 모든 글쟁이들을 존경하고 경외해왔다. 온라인상에 책을 읽고 글로 남기는 서평쓰기의 기본 전제는 작가에 대한 존경이다. 물론 지나친 혹평으로 작가와 텍스트를 지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기본적인 존경심 속에 포괄된다. 문인들 사이에서 "시 쓰다 안 되면 소설 쓰고, 소설 쓰다 안 되면 평론 쓴다"는 말이 있다. '창조'적 텍스트는 '비판'적 텍스트를 압도한다. 리뷰어로서의 오래된 신념이다. 이를 다시 한 번 곱씹게 했다는 점에서 조정래의 신간 『황홀한 글감옥』은 나에게 매우 소중한 책이다. 일독을 자신있게 권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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