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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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롤로그

  한 권의 소설을 읽고 두 번 서평을 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작품이 매우 훌륭한 경우나 남들이 전부 대작이라고 하는데 내가 그 의견에 동조하지 못하는 경우에 이런 수고는 발생된다. 하지만 그 '수고로움'은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다. 문학에 대한 리뷰어로서의 진지한 자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즐겨하는 내 모습에 흐뭇해 한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자의식인가.

  하루키의 신작 『1Q84』는 현재 매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기상천외한 선인세라든지 폭발적인 판매량과 같은 이 소설에 대한 비본질적인 수식어구를 끌어다 쓰고 싶지는 않다. 분명한 건 소위 '하루키 현상'이 일본을 넘어 한국에까지 전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20년 전 『상실의 시대』의 뜨거운 반응 이후 하루키 현상은 한국 문학계의 큰 이슈가 되어왔다. 유난스러울 것은 없다. 하루키의 신작이 출간될 때마다 발생했던 일관된 반응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지난 서평에서 『1Q84』에 대해 아낌없는 박수를 선사했다. 평단과 대중의 반응과는 별도로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이 소설을 찬탄했다. 한 사람의 아마추어 리뷰어로서 타인의 반응은 내게 독립적이다.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서평이란 본래 객관과 주관의 싸움이다. 비평의 시스템이 적용되는 카테고리는 무조건 '주관적'이어야 한다. 비평에서 객관은 수단이 되지만 주관은 목적이 된다. 객관적 사실로 자신의 주관을 얼마나 명쾌하게 담아내는가는 모든 논설이 갖는 핵심이다. 

  지난번 올린 서평을 되돌아봤다. 미천한 사유와 볼품없는 필력으로 힘없고 매력잃은 글이 되었다. 드러내고 싶은 것을 드러내지 못했다. 다양하고 방대한 하루키의 세계관을 너무 지엽적인 관점에서 풀이했다. 결락된 것을 삽입하고 부족한 표현을 다듬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해서 지난 서평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컨덴츠를 두 번째 서평을 통해 보완하고자 한다.


  <2> 하루키의 '나'

  하루키는 자신의 문학적 과제를 환멸로 가득한 이 세계 속에서의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추구를 끊임없이 퍼올리는 일로 규정한다. 열정의 이데올로기 시대를 지나 무료한 고도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이 느끼는 '존재의 가벼움'이 그의 문학적 주요 관심사다. 『1Q84』에서도 자본주의를 표상하는 소재와 배경이 많이 나타난다. 하루키는 이 소설에서 매우 다양한 소재들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독자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기존의 지식이나 정보나 문화가 산재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하루키 자신의 것, 실제로 존재했던 유명작가의 것,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온갖 유통상품들, 다양한 음악들 등등의 온갖 잡동사니와 같은 것들이다. 마치 소설이 예술의 터미널이 된 것 같다. 기실 이런 방식의 집필은 타작가의 소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하루키의 그것은 확실히 다른 차이가 있다. 그 '잡다한 것'이 세계가 아닌 개인의 것이라는 점이다. 하루키 소설에서 드러나는 오만가지 잡동사니들은 결코 세계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개인의 전유물이다. 그것들은 세계의 역사가 될 수 없는 개인의 역사나 우주, 생각이나 경험에서 존재한다. 


  소설 속 소재와 장치를 개인의 전유물로 구속시키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항상 강력한 매력을 발산해왔다. 그렇다면 하루키의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세계 속의 '나'가 아닌 자아 속의 '나'로 규명된다. 하루키의 '나'는 아무런 목적 없이 무의미한 것에 지나친 열정을 보임으로써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갖고 있는 '너'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는 자세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이다. '나' 외의 객관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의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또 타인의 자아도 '나'의 의식 내용과 나란히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

  결국 하루키의 '나'는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나'가 된다.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극도 공허와 절대 고독의 자장에서 움직인다. 이해할 수 없는 판타지 사건들을 통해 이들은 기존 지식의 한계나 인식의 다양성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자신이 잃어버린 무엇, 즉 결락 내지는 타자화한 내면의 또 다른 자아를 찾아 외부세계로 한걸음 내딛게 된다. 즉 다양한 자아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1Q84』에서 펼쳐지는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10살 때 한 소녀가 한 소년의 손을 잡음으로써 시작된다. 거기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한 소년의 행동이 세계가 일그러지는 모든 판타지 현상을 추동한다. 즉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종교, 문화, 관념, 철학, 현실, 상실, 고독 등은 '나'라는 실존성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1권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의 지류들이 2권에서는 한 줄기 본류로 통합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종내 사랑으로 귀결되고야 마는 것이다. '나'와 다른 또 하나의 '나'를 연결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인간의 구체적인 '사랑'이다.



  <3> 사랑 I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에는 구원이 있어. 그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해도."   <1권, P408>

  하루키의 작품들을 조망해보면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추출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랑'이다. 신의 사랑이나 인류애와 같은 포괄적인 사랑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사이의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사랑이다. 하루키는 그의 작품에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왔다. 그것은 관념이 아닌 실재의 사랑이다. 근본 사랑의 본체는 태생적으로 반관념성으로 존재한다. 하루키 세계의 크기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우주 거리로 환산된다. 하루키가 그의 작품 속에서 '한 사람'에 대한 다른 '한 사람'의 사랑을 집요하고 구체적으로 조명해왔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루키적 사랑은 얼핏 보면 관념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실재가 관념을 압도하는 사랑이다. 차원의 한계에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시공간성의 구속을 초월한다. 본래 사랑은 발현체와 대상체가 같은 시공간 안에 존재해야 함을 전제하지 않는다. 동일한 실존성의 구속을 타파함으로써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집대성시킨다. 만약 현실 세계가 11차원의 우주로 존재한다면 사랑은 11차원이라는 절대 고차원에서 그 완전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서로 다른 은하계를 관통하는 힘이다. 사랑은 공간을 무력화하고 시간을 굴절시킨다. 『1Q84』에서 덴고와 아오마메가 일그러진 세계를 달리 살아가면서도 결국 '어린이공원'이라는 하나의 실재하는 공간에서 만나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하루키적 사랑의 의미를 가장 단면화한 장면이다.

  사실 덴고와 아오마메는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외톨이였다. 그런 두 아이가 서로의 마음을 잠시 공유한 뒤 그 마음을 20년 내내 지속하였지만 그것을 외부에 표현하지는 않는다. 둘은 공통적으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 덴고의 부모는 아들을 NHK 수금원 일에 동참시킴으로 아들에게 적지 않은 수치와 모멸감을 주었다. 아오마메의 부모는 증인회에 빠져 딸아이를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소외시켰다. 누구도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러던 어린 시절의 어느날, 둘은 잡힌 손과 잡혀진 손에서 교감한다. 그 짧은 교감의 감각만을 의지한 채 20년의 시간이 흐른다. 어느날 우연히 비상구(출구)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지만 아오마메는 자신이 죽어야 덴고가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아오마메는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끝내 스스로 죽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한다. 이것이 소설 속 다양한 이야기 가운데 끝까지 희석되거나 훼손되지 않았던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자기성氣性이다.


  <4> 사랑 II

  현실이 뒤틀린 1Q84의 세계는 불가해한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소설 속 1984는 어떠한가.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009년은 어떠한가. 현재 우리들은 매일 아침마다 쏟아지는 기상천외한 사건사고들로 인해 심장을 공격당한다. 어린 소녀를 성폭행해 평생의 장애자로 만든 치악무도한 범죄자가 법에 의한 따뜻한 '배려'를 받았다.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죽이는 세상이 되었다. 거짓이 진실을 추월하고 부조리와 비상식이 정의를 압도하고 있다. 반인륜적 범죄와 온갖 부조한 현실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만 하는 당위적 명제가 온갖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소설 속 초자연적인 판타지들보다 더 받아들이기 쉽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핍과 외로움의 공간인 1984와 온갖 판타지 상황이 펼쳐지는 1Q84는 서로 극과 극의 관계에 놓여있지 않다. 또한 선과 악이라는 명백한 이분법으로 가름할 수도 없다. 한 사람이 두 개의 공간에 동시로 존재할 수 있으며 개인의 각자 진입 또한 가능하다. 그렇다면 두 가지 상이하면서도 유사한 공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 내면의 저 어둡고 공허한 심연으로부터, 이 혼돈과 무질서의 시공간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인가. 스스로를 치유하고 누군가를 구원하는 힘은 어디서 발현하는가. 그것은 결국, 또한, '사랑'이다.

  자신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은 거대한 힘의 존재를 인식하고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내린 아오마메의 선택은 사랑이었다. 본인의 '레종 데트르'를 찾지 못하고 그저 단지 살아가고 있을 뿐인 자아의 죽음 대신 사랑을 위해 내린 그녀의 결정이 비극적이지 않은 것은 진정한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영원성으로 물리적 시간의 유한성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오마메는 목숨을 버림으로써 사랑을 지켜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해버리는 소모적 판타지를 뛰어넘어 자신의 저항이 패배주의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20년 전 단 한 번 주고받은 짧은 온기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랑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한 순간의 영원이 사랑을 완전하게 하는 단 하나의 지렛대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덴고와 아오마메의 20년을 이어온 사랑이야말로 두 개의 달보다, '리틀 피플'이나 '공기 번데기'보다 더 현실 속에서 일어나기 힘든 판타지적 요소는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혼재 속에서 자신의 방향감각을 상실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나침반으로의 사랑이 바로 1Q84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아닐까.


  <5> 하루키의 소설론

  하루키는 그의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글쓰기의 고통을 말해왔다. 소설가로서의 쓰기에 대한 원칙과 철학을 은밀한 방법으로 소설 속에 암시해왔다. 그는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실존하지 않은 소설가 '데릭 하트필드'를 창조함으로써 소설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 전달 수단으로 활용한다.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는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명문장을 사용하며 글쓰기의 고통을 마라톤에 대입시킨다. 소설(글쓰기)에서는 천재가 없으며 모든 소설가들은 창작의 연단과 고통의 과정을 반드시 통과한다는 게 하루키의 신념이다. 이러한 그의 메시지는 『1Q84』 속에서도 은밀한 형태로 숨어있다.

  『1Q84』 내에는 또 다른 소설이 존재한다. 액자의 형태로 <공기 번데기>라는 소설이 들어가 있다. 후카에리가 말하고, 아자미가 받아쓰고, 그걸 덴고가 다시 리라이팅함으로써 <공기 번데기>는 만들어진다. 여기서 <공기 번데기>가 『1Q84』 안에서 매우 독특한 역할을 지닌 텍스트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공기 번데기'로부터 '리틀 피플'이 생성되고, 그것은 결국 소설 속 판타지를 추동하는 상징적 존재로서 위치한다. 길지 않은 한 편의 짧은 소설을 '말'로 하고, '받아서' 쓰고, 다시 '리라이팅'으로 이어지는 삼단 작법으로 탄생시킨 <공기 번데기>는 소설에 대한 하루키의 진지한 성찰과 겸허한 자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평소 마감 기일을 철저히 지키고 마감 기한 이틀 전까지 원고가 완성되지 않으면 정서적으로 진정이 되지 않는 하루키의 글쓰기 스타일은 그로서는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일상생활은 차치하더라도 소설가로서 글에 관해서는 대단히 엄격한 하루키다.

  하루키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소설을 쓸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온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 대한 작가의 독재성은 사르트르에 의해 제압되며 통제되었다. 사르트르의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e)' 이래로 요즘은 작가의 의도보다는 텍스트 자체, 혹은 독자의 해석이 중시되는 추세다. 하루키는 누구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소설가다. 그가 그의 텍스트에서 소설가로서의 진지한 존재론적 고민을 끊임없이 제기해왔던 것도 그러한 그의 내면적 앎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공기 번데기'나 '리플 피플'과 같은 소설 속 판타지 작동 매개체는 하루키의 소설론을 보조하며 함의하는 외재적 메타포일 수 있는 것이다.


  <8>노벨문학상

  하루키의 노벨문학상 수상 전망이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해마다 10월 둘째주 목요일이 되면 한국의 문학 관계자들은 스웨덴 한림원을 예의 주시한다. 고은 시인의 노벨상 수상은 이미 전 국민적인 여망이 되었다. 매년 노벨상 발표에 맞춰 안성시 고은 시인의 댁에 새벽부터 죽치고 있는 기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에서 하루키의 노벨상 수상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는 얘기의 사실 진위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그의 수상 가능성이 항상 최고 순위에 올라있는 것 만큼은 사실이다.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러시아까지 뻗어있는 하루키의 명성을 감안한다면 친유럽 성향이 강한 노벨문학상 심사위원의 선택에 곧 도달하지 않을까 예측된다. 더욱이 '프란츠 카프카 상'과 '예루살렘 상' 수상을 통해 노벨상의 언저리까지 도달해있는 하루키다. 죽기 전에는 반드시 받지 않을까.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과 하스미 시게이코는 하루키 비판의 전면에 서는 사람들이다. 고진이 절대적인 관점에서 하루키를 재단한다면 시게이코는 비평가의 의무론적 입장에서 하루키를 비판한다. 시게이코는 주창한다. 동시대 비평가의 임무는 시대를 선도해가는 소설가를 죽이는 것임을. 이는 이야기의 '해체'를 의미한다. 오에 겐자부로 이후 소설같은 소설을 보기 힘들다는 일본 내 '근대문학의 종언' 담론에서 하루키만이 그나마 가장 자유로운 위치에 있다. 어쩌면 가라타니 고진, 하스미 시게이코, 고모리 요이치 등과 같은 일류급 평론가들이 쏟아내는 하루키에 대한 지대한 비판은 소설의 종언을 바라보는 비평가로서의 안타까움인 동시에 한 줄기의 희망섞인 역설이라 할 수 있다. 그 적확한 위치에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가와바탸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주창했다. 그로부터 26년이 흘러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말했던 것은 '애매한 일본의 나'였다. 야스나리가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외쳤을 때 '아름다운 일본'과 '나'는 종언을 맞이하고 있었다. 겐자부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이 '나'를 규명했을 때 일본인 안에서 명확한 '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만약 하루키가 노벨문학상 수상대에 선다면 그는 과연 무엇으로 '나'와 일본을 연결지을까. 자못 궁금하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만약'이다.


  <6> 하루키의 문체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는 데 있어 소설가의 문체를 중요시 여긴다. 물론 소설이 작가의 문체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서사와 리얼리티, 소재와 상상력, 주제의식과 학구성 등등 소설가로서의 능력과 자질은 소설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그중 일순위로 문체를 꼽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을 움직이는 일련의 모든 요소들은 전부 문장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문체는 문장의 특성을 구하는 상대적 문예 양식이다. 그렇다면 문장이 소설에서 독자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문체의 중요성이 얼마나 소중한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루키 문체의 가장 큰 특징은 '간결함'이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유려하다. 그는 쉽게 쓴다. 일부 독자들은 문장의 쉬움과 문학적 가벼움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문학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다. 문장이 짧고 쉽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성이 공격받는다면 세계 문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몽테뉴, 새뮤얼 존슨, 헤밍웨이 등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쭙잖은 미사여구에 함몰된 만연한 문장보다는 쉽고 간결한 문장이 진리를 묘파하는데 더욱 적확한 방법이 된다.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말하는 바를 귀기울이게 하는 하루키의 힘은 바로 그의 문체로부터 원동력 되는 것이다.

  왕왕 느끼지만 하루키의 문장은 맑은 물과 같다. 불필요한 미사여구나 과도한 수식어구가 없다. 하루키의 글을 읽다보면 걸쭉한 것을 먹은 후 입안이 텁텁할 때 시원한 물 한 컵을 마시며 개운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장장 1,400페이지가 넘는 『1Q84』의 거대한 이야기가 시간가는줄 모르고 빠른 가독력으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루키의 맑고 고운 단문장은 소설 속 모든 판타지와 관념성을 압도하며 견인한다. 문장이 명쾌하기 때문에 사유나 철학에 짓눌리지 않으며 대상을 왜곡하거나 굴절시키지 않는다. 90년대 이후 수많은 한국 작가들이 하루키의 문체를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았던 이유를 이 대목에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9> 정리

  초반 의도와는 다르게 간결하지 못한 장황한 글이 되었다. 다시 써도 글의 난잡함은 피할 길이 없다. 어쩔 수 없는 필력이다. 서두부터 말미까지 일관되게 논설한 것은 하루키와 그의 신작 『1Q84』에 대한 찬탄이다. 『태옆감는새』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후속편이 출간된다고 한다. 문학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본질'이다. 텍스트 자체라는 얘기다. 3편으로 돈을 더 벌기 위한 수작이 아니냐, 는 혹자들의 의구심은 무의미하다. 얼마나 잘 쓴 텍스트냐, 가 본질이다. 물론 책이 나와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는 소설을 잘 쓰는 소설가다. 그리고 소설을 사랑하는 소설가다. 문학평론가 남진우의 표현대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독서나 분석의 대상이라기보다 차라리 매혹 그 자체다. 한국 독자들은 글 못쓰고 실력없는 작가에게 경도될 만큼 그리 어리석지 않다. 하루키는 뛰어난 소설가다. 『1Q84』는 그러한 하루키의 현재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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