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좋은 책은 항상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변화하게 한다. 책이 세계를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변혁의 동기를 부여하고 고취한다. 인류사에 남겨진 수많은 고전을 보라. 그것들은 인간을 탐구하고 시대를 조명하면서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왔다. 한 시대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적 화두를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고전 속에는 오롯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없는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않는다. 그러기에 고전은 뜨겁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인간의 당위적 가치와 그 시대의 고민에 직면하게 된다. 대작가의 혼과 숨결은 텍스트 곳곳에서 읽는이의 머리와 가슴을 진동시킨다. 고전은 '입증'된 텍스트다. 한 시대의 명품 텍스트가 후손으로부터 계속해서 읽히고 또 읽혀옴으로써 그 입증을 더욱 공고히 한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고전을 통해 참된 길이 무엇인지를 교훈받는다.

  '지식소매상'임을 자처하는 우리시대 대표 진보 지식인 유시민은 신간 『청춘의 독서』를 통해 고전에 대해 얘기한다. 저자 자신이 젊은 시절 읽고 느꼈던 고전 중 14편을 선정하여 독자에게 소개한다. 저자가 전하는 14편의 고전들은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의 시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찬란한 명저들이다. 저자는 저작마다 담긴 웅숭깊은 가치와 다양한 시대성에 대해 수준높은 식견과 진지한 자세로 풀이한다.

  유시민은 역시 진보 지식인답다. 훌륭한 명저였지만 서슬퍼런 정권의 칼날로 인해 공개적으로 읽기가 어려웠던 시대의 금서들을 리스트 위에 올려놓았다.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책 속에 담긴 빛나는 가치와 정신 때문에 오히려 제도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작품들이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이 확실히 좋은 시대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수십 년 전의 '그때'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아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이제 『전환시대의 논리』를 숨어서 읽고, 『공산당 선언』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남산에 끌려가는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젊은 시절 어렵게 구해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서 위대한 금서들을 탐독했다는 저자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진실'이 역사를 어떻게 압도해가는지를 새삼 실감한다.

  이 책의 가치는 다양함에 있다. 인간, 역사, 철학, 정치, 사회, 과학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다채로운 각도와 방법으로 관류했던 고전들을 선택했다. 도스토옙스키에서 카(E. H. Carr)에 이르기까지 세기의 천재들이 뿜어내는 텍스트는 하나같이 역동적이며 찬란스럽다. 기존의 사상·관습과의 단절을 필두로 고전을 만든 위대한 천재들은 항상 새로운 것으로써 기존의 것들을 들추어봤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무엇'을 생산 또는 재창조했다. 이러한 고전의 혁신성은 항상 시대성의 전복과 맞물려 발생했던 특징이다.

  고전의 태동적 진보성은 유시민의 평소 성향을 고려하면 매우 적확한 조합으로 연결된다. 저자는 한국 정치·지식계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편에 속한다. 그의 정치적 신념과 정책적 행위는 기존의 것을 혁신하는데 많은 부분 닿아 있다. 이러한 저자의 진보성은 시대 안에서 시대를 혁신하려 했던 고전의 성질과도 상통한다. 난 믿는다. 모든 고전은 태생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E. H. 카가 불후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강변했듯이 인간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에 대한 믿음이 역사의 진보를 입증하며 추동한다. 그러기에 인류사의 수많은 고전들은 각 시대마다 다르게 읽히며 후손들에게 올바른 길을 찾아줄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각 고전 속에 살아 숨쉬는 다양한 진리와 가르침을 풀어놓는다. 기존의 해설서와는 별도로 저자만의 시각과 사유로 각 고전의 단물을 빨아내는 해석이 인상적이다. 젊은 시절 날카로운 첫키스와 같은 책 《죄와 벌》을 통해 평범한 다수가 갖는 강력한 힘과 선한 수단과 목적 사이의 인과관계를 사유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배웠고, 《공산당 선언》을 읽으며 혁명의 가치와 매력에 경도되었다. 《맹자》에서 진정한 보수守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사기》를 통해 권력의 단면과 정치의 속성을 배웠다. 《진보와 빈곤》을 읽고 문명과 빈곤의 함수관계를 학습했고,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개안을 일으켰다.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부분은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편이다. 이 소설은 개인과 언론 사이의 무서운 구조적 관계성에 대해 묘파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카타리나와 신문사 '차이퉁'의 대립은 당시 독일에서 작가 자신과 일간지 <빌트>와의 대결구도를 그대로 상징한다. 판매부수 400만 부로 독일 내 단연 1위 신문 <빌트>는 논조가 매우 보수적이며 때로는 극우적이다. 하지만 많이 팔린다고 해서 '일등 신문'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비록 <빌트>보다 판매량이 많진 않지만 품위 있고 사회적 영향력을 갖춘 다른 신문들이 균형감 있고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한국의 현실과 대조한다. 1위부터 3위까지 모두 '빌트'로 점령당한, 자타가 모두 '일등 신문'이라고 부르며 읽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에 빠져 있는 한국 언론시장의 세태에 한숨을 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급받는 '정보'와 '진실'은 일차적으로 미디어의 프레임을 통해 가공된 것들이다. 신문의 헤드라인이 갖는 엄청난 '폭력'에 대해 고발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유시민이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읽었을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총 세 권의 역사 관련 책을 집필한 저자의 입장에서, 동시에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는 지식인으로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고전이다. 저자는 자신의 50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책으로 《역사란 무엇인가》를 꼽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이 전면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고백한다. 이는 저자 자신이 카(Carr)가 제기한 역사의 진보적 속성과 역사가(지식인)의 임무에 대해 전회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인간 능력의 점진적 발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는 카의 논증에 깊은 울림을 선사받은 것이다.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관으로 한국 현대사 50년을 담아내기는 역부족이다. 인간은 분명 발전했고 역사 또한 분명 진보했기 때문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이미 역사학의 교과서가 되어 있다. 비단 역사가뿐만 아니라 언론인, 지식인, 정치인, 경제인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읽어야 할 불후의 명저다. 물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카의 불후의 명저를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책으로 꼽는다는 점에서 유시민과 내 기호가 일치한다. 흐뭇한 일이다.

  나는 지쳤다. 존경했던 이들은 먼 곳으로 떠났고, 사랑하는 동료들은 시대의 삭풍에 떨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겠으나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야 할지 몰라 번민한다. 내가 받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나를 외면하고, 같은 방향을 보고 걷는 사람들과도 손을 잡기가 어렵다. 가끔 나는 내 자신이 물 밖으로 팽개쳐진 물고기 같다고 느낀다.   <p. 312>

  유시민이 고독해 보인다. 책 말미에 고백한 위의 문장은 저자가 현재 얼마나 외로운 심리상태에 빠져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책 곳곳에서 길을 잃은 한 지식인의 고독과 번민을 느낀다. 그는 왜 길을 잃었을까. 무엇이 두려운 걸까. 혹 자신의 길과 지표가 되어 주었던 한 사람의 죽음이 그를 그토록 외롭고 두렵게 만든 것은 아닐까. 자신의 삶과 정치에서 이정표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던 멘토의 부재와 같은 뜻과 이상을 지녔던 동지들의 초토화를 지켜보며 그는 얼마나 많은 혼란을 겪었을까. 어쩌면 유시민은 자신이 처한 현실의 외로움을 동일한 현실세계가 아닌 인류의 위대한 고전들 속에서 해결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많이 외롭고 두려웠던 것 이상으로 책은 정말 잘 썼다. 매우 수준있고 진지한 책이다. 유시민의 고독과 번민을 마음 깊이 이해한다. 그리고 그의 모든 저작 중 가장 잘 쓴 『청춘의 독서』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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