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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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서른'은 두려운 숫자였다. 나이 서른이 된다는 것에 소름이 돋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비순수성에 대한 대한 의심이자 우려였다. 주변에서는 나이가 서른이 넘으면 몸과 마음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작동방식과 빠른 속도로 쇠퇴한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이십 대에 그토록 반복해서 읽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더 이상 매력적으로 와 닿지 않는 나이. 인간과 사물을 관찰하는 내면의 감도가 보다 '세상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나이. 경험의 축적으로 청춘 때와는 다른 차원의 사회적 노련함을 갖게 되는 나이. 바로 서른. 그랬다. 나는 서른이, 두려웠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결혼을 했고 서른을 한참 넘겼다. 돌아보건대 서른은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젊은 시절 내게는 절대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서른을 관통하면서 나는 많이 성숙해졌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특히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는 자세와 경각에서 비본질보다 본질을 추구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내면과 정신을 지향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경험화를 통해 고양된 인간의 사회적 성장방식의 산물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매우 놀랄 만한 매혹적인 진화가 있다. 바로 '사랑'에 대한 것이다.

  천재 시인 괴테의 명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몇 번이나 읽었던가. 젊은 시절 나는 괴테의 심정을 이해해보고자 했다. 괴테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이 책을 썼다. 그의 자전적 고백이 투영된 책이었기에 나는 스물다섯의 나이 즈음에 수차례를 반복해서 읽었었다. 당시 나는 첫사랑과의 이별 후 그녀를 잊지 못한 그리움으로 삶을 둥개고 있던 시기였다. 현실의 내 사랑이 버겁고 힘들어서 감당할 수조차 없던 때였다. 그렇기에 이백여 년 전 문학으로 봉인된 베르테르의 사랑을 내 가슴에 담아낸다는 것은 과히 역부족이었다. 괴테를 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렀다. 서른이 넘었고 그토록 날 힘들게 했던 첫사랑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괴테의 명작을 다시 손에 잡았다.

  괴테가 그려낸 베르테르의 슬픈 이야기는 비극 이전에 희극이며 희극이 될 수 없는 비극이다. 어느 한 대상이 세계의 전부이자 자신의 실존 근거가 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사랑. 그 열정적 사랑에 베르테르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자신의 전존재全存在를 혹사시킨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자신의 현존을 부정하는 사랑이다. 사랑의 최고 수준 '아가페(agapē)'는 자아의 실존을 부정할 때 발현된다. 사랑의 궁극은 아가페이며, 아가페의 속성은 절대선絶對善이다. 그렇기에 자기를 부정하고 타자를 사랑하는 행위는 희극적이다. 세계의 어떤 사랑이든 본질의 선상에서는 희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서 절대선을 유지한다. 요컨대 사랑 자체는 분명 '희극'이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사랑은 결국 비극이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순전했지만 끝내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해서도 안되는 도덕적 일탈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더욱 참혹한 것은 일방성이다. 작품 속에서 로테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베르테르의 팬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만약 둘의 사랑이 쌍방향으로 전개되었다면 불멸의 고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테르는 과히 슬펐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슬픔보다 더 슬픈 슬픔이었다. 그것은 인간 심연의 처절한 괴로움이자 실존을 파괴하는 매머드급 고통이었다. 결국 베르테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중지시킴으로써 로테에 대한 자신의 비극적 사랑을 종결시킨다.

  나는 베르테르의 연인 로테에게 불만이 많다. 정말 화가 나는 인물이다. 시종일관 불분명한 태도와 애매한 감정처리로 베르테르의 사랑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로테는 작품 속에서 베르테르에 의해 꽤 매력적인 여자로 묘사되지만 애정관계라는 측면에서 가장 저급하고 위험한 존재의 전형이다. 로테의 불명확성은 작품 속 갈등의 동기이자 전부이다. 괴테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베르테르의 말을 빌어 이를 암시한다. "오해와 태만이 간교함과 악의보다 세상에서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말이다. 로테의 사랑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을 의식하는 사랑이다. 타자와 외부로부터 발현된 모든 사랑을 종국적으로 자기애自己愛의 충전으로 대체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런 태도와 이와 동류적同類的인 관계에 놓여있는 모든 행태들을 혐오한다. 정말 싫다. 사랑에 불분명한 여자가 발생시키는 갈등의 악마성을 나는 철저히 증오한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 해석한다. 사실 괴테가 그렸던 베르테르의 열정과 성실은 한 개인의 애상愛想을 넘어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맹렬한 분투로 은유된다. 괴테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봉건 질서의 염증과 새로운 인간상의 기대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베르테르의 헌신적이고 순교적인 사랑은 기독계 세계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오롯한 사랑의 일방성과 그 대가로 지불되는 죽음의 운명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자적 삶과 상통한다. 하지만 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사회적 혹은 종교적으로 읽어내는 것에 대해 거부한다.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슬프고 치열하며 열정적인 사랑만으로도 눈물의 양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선사받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문학적 밀도와 중량은 충분하다.
  
  전세대를 감동시킨 불후의 명작이지만 번역의 문제만은 넘어서기 어려운 것 같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국내에 제일 많이 번역된 고전 중 하나다. 각 출판사별로 다양한 역자들의 손을 통해 번역되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민음사판으로 이 책을 만나는 것 같다. 하지만 민음사판은 번역과 교정에 흠결이 많은 편이다. 예전에 <파리대왕>, <암흑의 핵심>, <나사의 회전> 등을 읽을 때에도 조악한 번역과 형편없는 교정으로 눈살을 찌푸린 바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쳇말로 '발번역'의 수준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서간체 소설이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자신의 고백을 일기형식으로 전달하는 편지글이다. 이런 방식은 전달받는 상대가 엄연히 존재하면서도 반응은 하지 않는 경청자의 입장에 머무르기 때문에 전달자의 고독이 더욱 애절하게 드러나는 효과를 이끌어낸다. 괴테는 혼자서 생각하는 것도 타인과의 대화로 변화시키는 것을 즐겼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원작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네"와 "~다"를 규칙없이 마구 섞어서 번역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또한 출간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간혹 눈에 띄는 오타를 발견할 때면 작품의 몰입도는 급하락된다. 민음사판은 정말 추천하기가 힘들다. 

  번역에 민감한 독자를 위해 추천하자면 나는 을유문화사 번역본을 일 순위로 꼽고자 한다. 을유세계문학전집 리스트에 있는 번역본으로서 제목부터 독일어의 본래성에 가장 가깝게 번역되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으로 배치했다. 이미 잘못된 발음으로 검증된 '베르테르'를 올바른 표기법의 '베르터'로 수정했다. 또한 원어가 담은 의미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많은 '슬픔'을 가장 적합한 단어인 '고통'으로 대체했다. 베르테르의 고통이 개인적인 연애사를 넘어 봉건 질서 내에서의 사회적 번민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내외면적 함의에서 더욱 적확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문장 또한 전반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깔끔한 번역이 돋보인다. 통속적 관행을 타파하고 독일어 본래의 의미로 올바르게 번역한 역자와 출판사의 용단이 멋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반드시 을유판으로 만나보길 바란다.  

  서평을 정리하자. 글이 좋은 것은 변하지 않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고 책이 위대한 것은 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고전은 인류사적으로 가치가 있으면서 동시에 '성공한 글'이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읽어야 할 불멸의 고전들이 있다. 고전의 공통점은 시대를 초월해내는 저력에 있다. 작품이 만들어질 당대의 인간 삶의 다양한 문제와 그것에 대한 천착은 시대를 넘어 후세에까지 변질되지 않고 오롯하게 당도한다. 그것이 고전이 갖는 근원적인 힘이자 존재성이다. 

  괴테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임이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시인은 천재라 했다. 하물며 인류사에서 가장 강렬한 획을 그은 시인 괴테의 작품을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으랴. 서두에 언급했지만 나는 서른이 넘으면서 사랑의 본질에 더욱 진지하게 접근해가고 있다. 사랑의 모든 동기와 형태는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찬란하다. 서른 이전에는 사랑의 현상에 주목하고 서른이 넘어서는 사랑 자체에 경도된다. 나이차가 만들어내는 사랑에 대한 역설적 수용은 매우 흥미롭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청춘시기에 한 번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서도 꼭 한 번 읽어야 한다. 반드시.

  괴테는 말했다. 작가는 여든의 나이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이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는 것은 삶과 사랑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진리를 배우는 것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독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차원적인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사랑의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을 기점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재독하고 고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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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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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기계발서를 멀리하는 편이다. 엇비슷한 구조와 천편일률적인 내용으로 씌어진 계발서의 범람이 마뜩잖다. 물론 사람마다 책을 선택하는 기호와 읽는 습관은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책이 주는 지혜와 깨달음이 비단 '나'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까지 닿아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자기계발서의 효용성은 하락될 수밖에 없다. 너를 알고 세계를 알아야 비로소 나 자신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발서로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눈에 띄는 자기계발서가 있다. 신선한 형식과 가볍지 않은 메시지로 당찬 울림을 선사하는 계발도서가 간혹 목도되곤 한다. 최근 베스트셀러 1위에 안착한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그중 한 권이다. 매력적인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청춘이 태생적으로 아픈 시기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다양한 주제로 흥미있는 메시지를 풀어내며 청춘시절의 곡절을 위로하고 보듬는다. 

  저자의 외침은 단호하다. 청춘은 아프기 때문에 청춘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불안함', '막막함', '두근거림', '흔들림', '외로움' 등은 청춘시절의 범상성에 속해있는 것이라고 조언한 뒤 이에 대한 겸허한 수용과 바른 행동양식을 주문한다. 교수로서의 학식과 인생 선배로서의 경험담이 적절히 어우러져 청춘시절의 아픔을 힘있고 담백하게 격려한다.

  무엇보다 저자의 필력이 녹록지 않다. 같은 메시지라도 필자의 내공에 따라 독자가 빨아들이는 흡입력은 다르게 나타나는 법이다. 깊은 독서와 인생의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개성있는 저자의 필치는 청춘의 올곧은 약동을 힘있게 견인한다. 저자가 설파하는 조언의 영역은 풍성하다. 공부와 재테크를 넘어 연애와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구체적인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총 네 파트로 구성되었는데 각 파트가 끝날 때마다 <그대에게 쓴 편지>를 통해 자기 자신과 제자들에게 진심어린 편지말을 전달하는 감성적인 구조도 나쁘지 않다. 

  이 책이 온·오프라인 모든 서점의 종합 베스트셀러 1위까지 오른 가장 큰 동력은 저자의 힘있는 전달력에 있다. 저자는 자기 자신의 실패와 방황을 먼저 털어놓음으로써 젊은이와의 소통에 한결 부드럽게 다가간다. 가르치기 이전에 이해하고 위로하려는 겸손한 스승의 면모가 글 곳곳에 잘 스며있다. 젊음이 지닌 오류와 굴곡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오롯하게 누리며 살아가기를 조언하는 저자의 외침에서 많은 젊은 독자들이 공감하며 위로를 얻고 있는 것일 게다. 많이 읽히는 책은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청춘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전존재를 걸기 때문이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꿈이든, 우리는 청춘 시절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불태운다. 그것이 청춘의 심미적 원리이자 역설적으로는 청춘의 한계점이다. 아름다운 만큼 아프고 무지하며 몽매한 시기. 바로 그 시기를 관통하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진본을 찾아나갈 수 있게 된다. 저자가 건네는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하나로 통합된다. 내가 나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내 모습의 그대로를 유지하며 청춘의 아픔을 겪어내는 것에 대한 위로와 격려가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궁극이다.

  내 주위에도 아파하고 좌절하는 젊은 후배들이 적지 않다. 아픈 만큼 성장하는 청춘시절의 아름다운 원리를 그들도 미리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글은 말보다 강한 공력으로 상대를 압도한다. 그렇기에 책을 나누는 일은 긴요하다. 소중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한 권의 책을 건네는 것만큼 아름다운 선물이 어디 있으랴.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내 주변의 인생의 후배들에게 부담없이 한 번 읽어보라고 건넬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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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말에 오소희 작가를 만났다.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와이프와 함께 만났다. 오랜만에 성취된 만남이었다. 내 결혼식에 오지 못한 죄값(?)을 저녁식사로 대신한다는 그의 대응이 나쁘지 않았다. 꽤 오랜만에 만났지만 그의 내·외면적 아우라는 바뀐 것이 없었다. 수차례 그를 만났지만 항상 일관성을 견지하는 그의 모습에 난 흠모를 느꼈다. 물론 타자에 가려진 그의 속깊은 내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는 모르는 것이겠지만.

  지금의 와이프는 내 첫사랑이다. 나는 '단 한 번'의 사랑을 했고 '단 하나'의 사랑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연애사와 겨루어도 생색낼 수 있는 컨덴츠가 내 사랑사에는 밀도있게 존재한다. 십 년이 넘게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사랑해왔던 내 자신이 당시에는 너무 밉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숱한 고초와 역경을 이겨내고 결혼까지 골인한 현재의 내 모습은, 너무, 멋지다.

  결혼 전이었다. 와이프와 헤어져 있던 시기였다. 오 작가와 단 둘이 차를 한 잔 마시며 사랑을 논했던 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와이프를 잊지 못한 그리움에 마음 아파했고 결혼 적령기에 다다른 내 현재상에 큰 부담을 느꼈던 때였다. 주변에서는 결혼과 연애는 다른 것이라며 결혼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과 기술을 남발했다. 그들은 역설했다.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결혼생활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볼륨은 절대적으로 작다는 게 그들의 논설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의심하기도 했다. 사랑은 대체 무엇이며 결혼과는 어떤 방정식에 놓여 있는 걸까. 사랑이 결락된 채 세상이 열거하는 다양한 조건들만 갖고 결혼은 가능한 것일까. 이런저런 자못 진지한 질문에 이르렀다. 그러던 터에 오 작가를 만났던 것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오 작가의 입장은 단호했다. 결혼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혼에서 사랑은 필수이자 전부이며 궁극이라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말. 맞는 말 아니던가. 사랑 없이 어떻게 결혼이 가능하겠는가. 당연한 진리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고도자본주의는 물질적인 것들이 과잉되어 인간 본연의 가치가 굴곡되고 호도되는 염치없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가치가 비본질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의해 본래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 변질성에 내 순수함이 흔들리기 시작할 무렵 작가 오소희는 따끔한 일깨움으로 나를 본질의 선상으로 다시 데려다 준 것이다.

  오 작가의 조언과 격려에 난 힘을 얻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와이프를 다시 만났고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되었다. 그 후 몇 달이 흘러서 당시 내 눈물의 원인이었던 와이프를 오 작가에게 처음으로 소개시켜준 것이다. 두 시간이 넘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잊지 못할 좋은 만남을 가졌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오 작가의 다음 작품이 바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고를 이미 출판사에 넘긴 상황이며 3월 중에는 신간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신간도 신간이지만 주제가 사랑이라니. 이게 왠 일인가. 가슴이 두근거렸고 맥박수가 빨라졌다.

  사실 오 작가가 쏟아낸 모든 저서들의 주제는 사랑이었다. 몇 권 되지 않는 오 작가의 비블리오그래피는 한결같이 사랑을 말해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고, 아들을 향한 사랑의 메신져였으며, 세계에 대한 사랑의 학습과정이었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카테고리가 워낙 굵어서 텍스트의 본질이었던 '사랑'의 주제성이 다소 작게 와 닿은 것뿐이었다. 본격적으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그의 신간이 나는 너무 기다려진다. 삼 월의 내 모습이 그려진다. 자주 가는 온라인서점의 검색창에 매일같이 '오소희'라는 이름 석 자를 타이핑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의 이러한 태도조차도 전혀 다른 사랑의 한 형태이리라. 그랬다. 난 사랑했다. 진지하고 인간적이며 열정적인,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에 대해 기적같은 일말의 가슴 두근거림을 자신의 심장에 담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아름다운 작가를.

  기다리는 건 힘든 일이다. 인간은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에 두렵고 우울한 것이다. 누가 말했던가. 우울증은 기다림을 망각하는 병이라는 것을. 사랑의 속성에는 태생적으로 '기다림'이 함의되어 있다. 사랑한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와이프를 기다렸던 것처럼. 오 작가와의 만남을 기다렸던 것처럼. 그리고 그의 신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리는 순간은 쓰고 아프지만 결국 삶과 사랑에는 달다. 그것이 기다림의 작동원리이다.

  곧 출간될 오소희 작가의 신간을, 나는, 애타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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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천연기념물 제조가
조대호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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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소설을 왜 읽는가. 이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답변을 늘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답변들은 대부분 큰 두 가지의 본류로 정리된다. 그것은 바로 '재미'와 '감동'이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인간을 탐구하는 산문문학의 한 장르이다. 이유 없이 만들어진 소설은 없다. 모든 소설은 작가의 의식과 가치관을 담은 허구의 이야기이다. 독자는 픽션의 세계를 통해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바라보고 인간을 입체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좋은 소설은 독자에게 반드시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나에게 소설을 왜 읽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면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성찰을 위해서고 외연적으로는 재미와 감동을 위해서다. 그렇기에 나는 재미와 감동(교훈)을 함께 주는 소설을 좋아한다. 잘 쓰여진 소설은 현실을 적절히 비틀어서 세계의 변혁을 요구한다. 소설 창조의 목적은 결국 인간인 것인데 좋은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심미안의 지혜를 이끌어낸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소설을 읽는다.

  한국소설에 애착이 많은 편이다. 최근 한국문학에 흥미를 잃은 독자들이 많은 듯하다. 한국소설의 매력이 외국의 것들에 비해 객관적으로 부족함이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난 한국소설을 멀리하고 싶지 않다. 자국인의 정서로 가공된 상상력을 자국어로 전개해나가는 한국소설에 녹록지 않은 연대와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팔구십 년대의 후일담 문학을 넘어서 한국소설도 이제는 다양한 소재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참신한 변화를 이뤄가고 있다. 난 믿는다. 한국어의 위대함과 한국문학의 진보를.

  한국소설을 두루 읽다 보면 가끔씩 놀랄 때가 있다. 출간은 됐지만 유명세가 없어 서점 구석에 쳐박혀 있는 보석과 같은 소설을 만났을 때가 그렇다. 그럴 때 리뷰어의 숨은 가빠진다. 수없이 많은 책들 가운데 옥석을 구분하여 이웃에게 양서를 소개하는 의무가 리뷰어에게 있기 때문이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리뷰어의 역할은 책을 선택하고 소개하는 일이다. 좋은 소설은 재미와 감동을 주는 소설이라고 했던가. 어느덧 가빠진 숨을 몰아내고 리뷰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쓴다.

  반가운 소설을 만났다. 간만에 시간의 속도를 잊은 채 읽었다. 소설 『천연기념물 제조가』는 매력적인 제목 이상으로 나에게 흥미진진한 재미와 가볍지 않은 교훈을 선사했다. 85년생 소설가 조대호는 첫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탄탄한 구성으로 매력적인 장편소설을 완성시켰다. 장편소설은 그 형태적 특징으로 인해 독자로 하여금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을 더욱 깊이있게 들여다보게 한다. 단편보다 훨씬 긴 호흡을 요구하기 때문에 독자는 이야기를 총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소설의 메시지를 살피게 된다. 이러한 구조론적인 관점에서 소설 『천연기념물 제조가』는 흠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잘 쓰여진 소설이다.

  작가는 꽤 무거운 주제를 도저하고 엄숙한 방식에서 벗어나 매우 흥미로운 서사로 만들어냈다. 주인공 신관우가 겪는 믿기 힘든 경험을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오묘한 관계를 소름 돋는 픽션으로 그려냈다. 제목 '천연기념물 제조가'는 말 그대로 천연기념물을 제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소설 속에서 '진벽회'라는 단체로 명명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 단체인지 알게 되는데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그들은 TV드라마 <아이리스>, <아테나>와 같이 국적과 민족을 초월하는 비밀조직이다. 무엇보다 인간이 파괴한 자연을 되살리기 위해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는 무서운 집단이다. 소설 『천연기념물 제조가』는 바로 그들의 이야기다.

  소설 속에서 진벽회는 매우 무서운 집단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인간 자체를 증오하고 불신한다. 인간의 이기심과 악한 본성이 자연의 질서를 훼손해왔고 이를 복원할 능력이 인간 스스로에게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을 불신하기 때문에 그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구상 곳곳에 은밀한 형태로 숨어 임무를 수행한다.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개체를 멸종시키기도 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다른 개체를 살상하기도 한다. 이 괴기한 진벽회의 행위는 엽기를 넘어서는 근원적인 무서움에까지 닿아 있다. 그 무서움은 바로 인간의 진본眞本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동물은 딱 생존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생존은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존재를 규정한다. 하지만 인간만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생존 이외의 것을 추구하는 욕심을 위해 이성理性을 작동시킨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준 그 위대한 이성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은 '악마'가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연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인간이 자랑스럽게 발전시켜온 과학기술의 편리성이 애초의 우주 자연의 순환성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엄연한 현실에서 인간은 인간 스스로 자연의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인간에게 그만한 자정능력이 있는 걸까. 작가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내리지 않는다. 인간을 멸종시킴으로써 자연을 지킬 수 있다는 진벽회와 인간의 본성 속에 지켜낼 수 있는 힘과 희망이 있다는 신관우의 대결을 암시하는 것으로 소설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결국 작가는 자신이 고민했던 부분, 즉 소설의 결론을 독자에게 토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본인의 메시지에 대해 깊게 경청하고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은밀한 외침을 독자에게 호소하는 장치가 된다. 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은 비단 어제오늘의 경고가 아니다. 국제사회 곳곳에서 환경파괴에 대한 염려와 예방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위기를 대하는 경각警覺의 밀도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인간이 위대한 것은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데 있다.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는 고결하고 고등한 이성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인간은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순전한 이성이 현실인식의 디테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고도의 경각으로 세계 변혁의 원동이 된다면,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분명 희망이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 카의 말대로 인간의 정신문명은 반드시 진보한다. 그리고 그 진보에 대한 믿음은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진행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에 연유한다. 어쩌면 지구상 대부분의 인간들은 유전자 속에 태생적으로 그것을 인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경각하고 행동하지 않을 뿐. 작가 또한 그 일말의 희망과 기대 가운데 펜을 들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자신의 소설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짐으로써 심각한 지구병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이 좋은 것은 그것이 허구의 세계라는 데 있다. 허구는 사실의 참혹한 단면을 효과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현실을 벗어난 세계이기 때문에 독자는 '만약'을 상정하고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더 나아가 독자는 문제의 단면을 인식하고 인지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태도를 설정하고 견지하게 된다. 소설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소설이 상정한 허구가 엄연한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지나친 가정법 위에서 독자는 당혹하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소설적 사고의 긴요성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가 조대호의 『천연기념물 제조가』는 재미와 감동을 두루 갖춘 잘 쓴 소설이다. 모처럼 좋은 소설을 만나 고개를 주억거렸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작가는 다음 작품으로 빈민 아동들을 위한 소설을 집필 중이라고 한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의 이기심과 무관심으로 야기된 지구상 곳곳의 어두운 문제들을 파헤치는 작가의 기백이 멋지다.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지금보다 더 진보된 상상력과 진지함으로 우리세계의 암연暗然을 밝혀주길 소망한다. 괴테는 말했다. 작가는 여든의 나이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소설가 조대호의 순수한 초심이 변질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의 펜 끝에서 세계의 변혁이 추동되기를 응원한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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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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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책 북멘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지음 / 더블유북(W-Book)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 풍성한 책읽기의 전제조건이 된다는 점에 이견을 달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책이 주는 지혜와 깨달음을 정교하고 입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기에 책쟁이들은 지금도 읽고 쓰고 생각하며 책을 벗삼는다.

  독서의 양질론을 제기할 때 삼다三多 외의 추가적인 방법들이 거론되곤 한다. 유명한 것은 정병기 교수가 설파한 '성의'와 '집중'이다. 피로 쓰라는 니체의 전언을 곱씹는 정 교수의 다섯 가지 덕목은 밀도있는 글쓰기의 전범이 된다. 나는 거기에 한가지를 더 추가하고자 한다. 보다 사회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책 읽는 인간 사이의 소통과 토론이 긴요하다. 바로 '함께' 읽는 것이다.

  여기서 함께 읽는다 함은 독서할 때의 시공간을 함께 하자는 뜻이 아니다. 다상량을 공유하자는 의미이다. 문장의 해석, 작가론, 책 추천, 책의 총체적 평가, 글쓰기론에 이르기까지 책읽기와 글쓰기의 전반적인 것들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고 공감하자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절대선인 '관용'과 '다양성'의 원리는 책읽기에서도 그 가치를 입증한다.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다양한 사유를 공유하고 내 생각과 해석이 정답이 아님을 자각함으로써 '함께' 읽는 책읽기가 주는 풍성한 지혜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네이버 대표 북카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하 '책좋사')은 함께 책읽기를 원하는 이들의 커뮤니티이다. 어느덧 회원수가 5만 명에 이르렀고 온라인상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북카페로 성장했다. 나도 이곳을 통해 다양한 책쟁이들을 벗삼았다.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사람을 사귀었다. 고백컨대 다양한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다수 사람들과의 소통적 책읽기를 통해 나의 책읽기와 글쓰기는 예전보다 건강해졌고 발전해왔다.

  『책 읽어주는 책 북멘토』는 '책좋사'에서 활동하는 회원들의 북리뷰를 담은 서평집이다. 이 책에는 문학에서부터 인문, 과학, 경제, 사회, 역사, 자기계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다양한 리뷰어의 색채로 소개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한 사람이 쓴 서평집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다수 회원들의 깔끔한 서평들을 엄선하여 담았다. 다양한 리뷰들을 훑어가다보면 서평을 쓴 리뷰어 특유의 사고와 필력을 확인하게 된다. 동일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개성으로 비틀고 꼬는 시각들이 이채롭다. 온라인상에서 낯익는 유명 리뷰어들의 닉네임을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과히 다양한 책들의, 다양한 리뷰어들의, 다양한 다상량의 향연이자 축제라 할 만하다.

  책의 전체적인 구성과 도서 선정 부분도 손색이 없다. 문학과 비문학을 적절한 비중으로 나눠 실었다. 선정도서 대부분이 일반인들도 쉽게 접하고 읽을 수 있는 책이여서 다수 독자의 기호에 친밀하게 부응한다. 또한 글쓴이들이 프로가 아닌 순수 아마추어 리뷰어이기 때문에 리뷰마다 소박하고 진실된 관찰과 해석을 엿볼 수 있다. 전문적이지 않고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않기 때문에 담백한 맛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소통하는 책읽기의 산물인 것이다.

  책은 반드시 소통하며 읽어야 한다. 그래야 독선적인 책읽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방에 틀어박혀 고전만 팠던 이들의 상당수가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나는 적지 않이 봐왔다. 오프라인 독서모임에서도 혼자서 책만 읽는 이들의 좋지 않은 태도와 나쁜 습관을 종종 목도하게 된다. 어떤이는 인격적인 문제에까지 닿아있기도 하다. 책읽기가 나쁜 것이 아닐진대 왜 그들의 책읽기에는 사회적인 함몰현상이 발생하는 걸까. 그 이유는 바로 소통이 결락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만이 책의 존재성을 모두 아우를 수 있다는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교만함이 소통의 부재를 통해 발생한다. 그리고 점점 고립되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성과 관용은 건강한 책읽기의 필수조건이다. 함께 읽어야만 하는 것이다.

  책 좀 읽는다고 자신감을 가진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불편한 오해를 갖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내가 참'이라는 착각의 사고방식이다. 독서의 본질적인 목적은 지식을 축적하는데 있지 않다. 독서는 아카데미시즘(academicism)이 아니다. 독서는 내 머리가 남의 머리가 되어 세계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일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인 것이다.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야말로 책이 고민해왔던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유일한 답변이다. 그렇기에 독서는 불관용을 거부한다. 그리고 타인을 이해해야만 하는 인간 본연의 당위當爲를 유도한다. 사람이 책을 만들지만 결국 책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단언컨대 이것이 빠진 독서는 모두 죽은 독서다.

  여기서 서평집 『책 읽어주는 책 북멘토』의 강점이 재차 부각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펼치는 다양한 생각과 해석이 이 책에는 오롯이 녹아 있다. 그 다양성의 힘이 이 책이 만들어진 근원적인 동기이자 책 고수들이 밀집해 있는 '책좋사'의 진정한 힘일 것이다. 다양성은 과잉되어야 하고 관용은 그 과잉을 포용할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럴수록 지구는 더욱 건강해질 수 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모두 다른 소리를 내면서도 역사를 발전시켜왔다는 데 있다. 비록 전문적인 평론과 유려한 필치는 못 되더라도 각자의 사유 밀도로 빚어낸 글모음집이기에 『책 읽어주는 책 북멘토』는 충분히 풍성하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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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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