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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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王)'은 무엇인가. 사전은 왕의 의미를 "군주 국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우두머리"로 풀이한다. 왕에게 대항할 자는 없다. '백수의 왕' 사자에게 덤벼들 동물이 없듯이 왕의 권위는 강력하고 절대적이다. 인간의 정치제도 안에서도 왕의 권한은 무한대다. 입법 사법 행정을 한 손에 주무를 수 있는 초월적 권력자인 것이다. 그렇다. 왕이란 존재는 심히 매혹적이다.

  왕의 매력은 인간의 내면적 속성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강한 집념이 왕을 선망케 했고 결국 만들어냈다. "짐은 곧 국가"라고 외쳤던 프랑스 절대왕정의 어느 군주처럼 왕은 인간성을 넘어선 신의 위치에 서길 원하는 인간의 교만이 아이콘화되어 있다. 인간의 끊임없는 권력 추구의 속성이 만들어낸 산물이기에 왕이라는 존재는 '두려움'과 '의심'을 기본적으로 함의한다. 인간이 왕을 만들어냈고 왕이 된 인간은 인간 이상의 초월성을 끊임없이 누리려 했다. 그러다 결국 파멸되기도 했다. 파멸된 왕은 다시 인간이 됐으며 그 파멸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왕이 가진 힘은 충분히 매혹적인 것이었지만 그 매혹만큼이나 위험했다. 그랬기에 인류사 이래로 대부분의 왕은 결국 '파멸'을 맞이했다.

  우리 시대가 낳은 최고의 입담꾼 성석제는 자신의 첫 장편소설을 통해 힘과 권력에 집착된 인간의 본성을 깊이있게 탐구한다. 15년 만의 개정판으로 독자를 찾은 소설가 성석제의 거침없는 서사는 왕의 매력만큼이나 매혹적이다. 도시를 벗어난 한 지역사회 건달들이 뿜어내는 거칠고 굵직한 이야기가 성석제 특유의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독자의 가독력을 속도화한다. 

  소설가 성석제의 『왕을 찾아서』는 제목 그대로 왕을 찾는 이야기다. 그 '찾음'의 일차적인 의미는 주인공 장원두가 어린 시절에 영웅으로 추앙했던 동네 건달두목 마사오를 향한 경외와 그리움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보다 입체적으로 소설을 조망해보면 등장인물 대부분의, 어쩌면 모든 인간의 내면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왕을 향한 욕망의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힘과 권력을 갈구하는 인간의 태초적인 속성과 그것의 사회적 인과성, 그리고 권력의 비영속성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소설을 읽는 내내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성석제표 입담에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 장원두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그토록 경외했던 고향의 건달두목 마사오의 부고를 접한다. 개인적인 상처로 고향을 떠났던 원두는 마사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고향을 찾는다. 장례식에서 그는 마사오와의 추억과 자신의 친구였던 몇몇 건달들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게 된다. 아무도 넘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마사오의 빈 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우고 또 다른 사람이 다음을 채우는 권력의 지속성에 원두는 놀란다. 그는 깨닫는다. 왕으로 대변되는 힘과 권력의 양태는 그 주체만 바뀔 뿐 계속적으로 순환되고야 마는 것을.

  인간은 힘을 갖고 있는 상태를 유지할 때만 온전한 왕이 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유신조, 마사오, 조창용, 박재천으로 이어지는 왕권 교체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기는 원두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원두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 세희도 이 남자 저 남자를 거쳐 결국은 최후의 왕 재천의 여자가 된다. 권력의 가장 강력한 속성은 소유욕을 장악하는 데 있다. 돈과 인간뿐만 아니라 사랑까지도 소유하고야 마는 강력한 힘이 인간의 권력 속에는 존재한다.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어렵게 한 걸음 한 걸음 사랑의 발걸음을 내디뎠던 세희를 향한 원두의 성실함은 왕이 될 가장 능동적인 '세자'였던 친구 재천의 권력성 앞에서 처절하게 짓밟히고 만다. 그렇다. 왕은 힘이 세다. 그리고 매혹적이다. 사랑의 진실과 성실을 뒤엎고 호도시킬 만큼.

  소설은 마사오 이후 권력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한 지역 건달들의 야욕과 패권싸움을 적나라게 그려나간다. 조폭세계에 대한 스케치는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가 수없이 그려왔던 레퍼토리이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신뢰성을 상실한 건달세계의 모습은 인간이 지향해야만 하는 '아름다운 세상'의 조건들과는 철저히 대척점에 서 있다. 성석제는 태생적으로 권력욕에 지배당한 인간세계의 한계를 가장 낮은 바닥의 이야기를 통해 묵묵히 그려내고자 했을 것이다. 거짓과 파괴, 간교와 악의가 득실대는 깡패세계의 모습이야말로 왕의 영광과 파멸의 대극(對極)을 가장 역동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강점은 성석제 특유의 문체에 있다. 선굵은 지역 건달들의 이야기가 건조하지 않게 한 숨에 읽히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역량 덕분이다. 가독력이 가히 발군이다. 독자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성석제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작가는 주인공 장원두를 통해 자유자재로 시점을 이동시키며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유머, 재치, 익살, 해학으로 점철된 개성있는 문체는 가벼우면서도 서사의 권위를 흠집내지 않고 독자에게 여운을 남기는 힘이 있다. 쉽게 읽히지만 흡입력 있는 서사는 흐트러지지 않은 채 소설의 말미까지 안전하게 당도한다. 쉼없이 이야기에 몰두한 독자의 집중력은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에는 무언가의 깊은 여운을 확인하는 에너지로 자연스럽게 대체된다. 성석제의 힘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사회는 그곳 건달들이 힘의 논리로 겨루는 작은 공간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은유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인간세상 전체를 풍자해놓은 공간이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비단 지역 깡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에 해당되는 엄연한 약점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곧 '지구'였던 것이다. 동시에 소설의 제목 '왕을 찾아서' 또한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암시를 함의한 배치일 것이다. 왕 마사오에 대한 원두의 방향성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나 갖고 있는 '강한 것'에 대한 야심을 메타포한다. 왕을 찾아서. 그렇다. 인간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왕을 찾아서' 헤매며 갈등하는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간만에 성석제의 소설을 만나서 즐거웠다. 놀랐던 것은 성석제가 이토록 소설을 매력적으로 쓰는 작가였나 하는 점이다. 그간 몇 편의 작품에서 그의 가벼운 입담에 거리감을 느꼈던 내가 그의 첫 장편소설에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누린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을 게다. 좋은 작품은 언젠가는 독자를 찾아가게 되어 있다.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된 소설이 15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독자를 찾은 필연이 그것을 넌지시 증명한다. 한 작가에 대한 오해가 오늘로서 풀리게 됐다. 독자로서 흐뭇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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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통 을유세계문학전집 3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현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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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서른'은 두려운 숫자였다. 나이 서른이 된다는 것에 소름이 돋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비순수성에 대한 대한 의심이자 우려였다. 주변에서는 나이가 서른이 넘으면 몸과 마음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작동방식과 빠른 속도로 쇠퇴한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이십 대에 그토록 반복해서 읽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더 이상 매력적으로 와 닿지 않는 나이. 인간과 사물을 관찰하는 내면의 감도가 보다 '세상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나이. 경험의 축적으로 청춘 때와는 다른 차원의 사회적 노련함을 갖게 되는 나이. 바로 서른. 그랬다. 나는 서른이, 두려웠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결혼을 했고 서른을 한참 넘겼다. 돌아보건대 서른은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젊은 시절 내게는 절대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서른을 관통하면서 나는 많이 성숙해졌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특히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는 자세와 경각에서 비본질보다 본질을 추구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내면과 정신을 지향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경험화를 통해 고양된 인간의 사회적 성장방식의 산물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매우 놀랄 만한 매혹적인 진화가 있다. 바로 '사랑'에 대한 것이다.

  천재 시인 괴테의 명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몇 번이나 읽었던가. 젊은 시절 나는 괴테의 심정을 이해해보고자 했다. 괴테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이 책을 썼다. 그의 자전적 고백이 투영된 책이었기에 나는 스물다섯의 나이 즈음에 수차례를 반복해서 읽었었다. 당시 나는 첫사랑과의 이별 후 그녀를 잊지 못한 그리움으로 삶을 둥개고 있던 시기였다. 현실의 내 사랑이 버겁고 힘들어서 감당할 수조차 없던 때였다. 그렇기에 이백여 년 전 문학으로 봉인된 베르테르의 사랑을 내 가슴에 담아낸다는 것은 과히 역부족이었다. 괴테를 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렀다. 서른이 넘었고 그토록 날 힘들게 했던 첫사랑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괴테의 명작을 다시 손에 잡았다.

  괴테가 그려낸 베르테르의 슬픈 이야기는 비극 이전에 희극이며 희극이 될 수 없는 비극이다. 어느 한 대상이 세계의 전부이자 자신의 실존 근거가 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사랑. 그 열정적 사랑에 베르테르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자신의 전존재全存在를 혹사시킨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자신의 현존을 부정하는 사랑이다. 사랑의 최고 수준 '아가페(agapē)'는 자아의 실존을 부정할 때 발현된다. 사랑의 궁극은 아가페이며, 아가페의 속성은 절대선絶對善이다. 그렇기에 자기를 부정하고 타자를 사랑하는 행위는 희극적이다. 세계의 어떤 사랑이든 본질의 선상에서는 희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서 절대선을 유지한다. 요컨대 사랑 자체는 분명 '희극'이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사랑은 결국 비극이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순전했지만 끝내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해서도 안되는 도덕적 일탈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더욱 참혹한 것은 일방성이다. 작품 속에서 로테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베르테르의 팬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만약 둘의 사랑이 쌍방향으로 전개되었다면 불멸의 고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테르는 과히 슬펐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슬픔보다 더 슬픈 슬픔이었다. 그것은 인간 심연의 처절한 괴로움이자 실존을 파괴하는 매머드급 고통이었다. 결국 베르테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중지시킴으로써 로테에 대한 자신의 비극적 사랑을 종결시킨다.

  나는 베르테르의 연인 로테에게 불만이 많다. 정말 화가 나는 인물이다. 시종일관 불분명한 태도와 애매한 감정처리로 베르테르의 사랑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로테는 작품 속에서 베르테르에 의해 꽤 매력적인 여자로 묘사되지만 애정관계라는 측면에서 가장 저급하고 위험한 존재의 전형이다. 로테의 불명확성은 작품 속 갈등의 동기이자 전부이다. 괴테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베르테르의 말을 빌어 이를 암시한다. "오해와 태만이 간교함과 악의보다 세상에서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말이다. 로테의 사랑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을 의식하는 사랑이다. 타자와 외부로부터 발현된 모든 사랑을 종국적으로 자기애自己愛의 충전으로 대체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런 태도와 이와 동류적同類的인 관계에 놓여있는 모든 행태들을 혐오한다. 정말 싫다. 사랑에 불분명한 여자가 발생시키는 갈등의 악마성을 나는 철저히 증오한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 해석한다. 사실 괴테가 그렸던 베르테르의 열정과 성실은 한 개인의 애상愛想을 넘어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맹렬한 분투로 은유된다. 괴테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봉건 질서의 염증과 새로운 인간상의 기대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베르테르의 헌신적이고 순교적인 사랑은 기독계 세계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오롯한 사랑의 일방성과 그 대가로 지불되는 죽음의 운명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자적 삶과 상통한다. 하지만 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사회적 혹은 종교적으로 읽어내는 것에 대해 거부한다.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슬프고 치열하며 열정적인 사랑만으로도 눈물의 양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선사받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문학적 밀도와 중량은 충분하다. 
  
  번역본을 추천해보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국내에 제일 많이 번역된 고전 중 하나다. 다양한 역자들에 의해 출판사별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민음사를 위시한 여섯 출판사의 번역본을 읽어본 바로서 나는 을유문화사의 것을 일 순위로 꼽는다. 을유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있는 번역본으로서 제목부터 독일어의 본래성에 가장 가깝게 번역되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으로 배치했다. 이미 잘못된 발음으로 검증된 '베르테르'를 올바른 표기법의 '베르터'로 수정했다. 또한 원어가 담은 의미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많은 '슬픔'을 가장 적합한 단어인 '고통'으로 대체했다. 베르테르의 고통이 개인적인 연애사를 넘어 봉건 질서 내에서의 사회적 번민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내외면적 함의에서 더욱 적확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문장 또한 전반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깔끔한 번역이 돋보인다. 통속적 관행을 타파하고 독일어 본래의 의미로 올바르게 번역한 역자와 출판사의 용단이 멋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반드시 을유판으로 만나보길 바란다.  

  괴테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임이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시인은 천재라 했다. 하물며 인류사에서 가장 강렬한 획을 그은 시인 괴테의 작품을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으랴. 서두에 언급했지만 나는 서른이 넘으면서 사랑의 본질에 더욱 진지하게 접근해가고 있다. 사랑의 모든 동기와 형태는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찬란하다. 서른 이전에는 사랑의 현상에 주목하고 서른이 넘어서는 사랑 자체에 경도된다. 나이차가 만들어내는 사랑에 대한 역설적 수용은 매우 흥미롭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청춘시기에 한 번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서도 꼭 한 번 읽어야 한다. 반드시.

  괴테는 말했다. 작가는 여든의 나이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이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는 것은 삶과 사랑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진리를 배우는 것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독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차원적인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사랑의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을 기점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재독하고 고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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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안그림자 2011-03-17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이 있는 분석까지 곁들여 놓은<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잘 들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불후의 명작이 되어지는 괴테의 작품이 더 가치 있게 와 닿는 코드라면... 남녀간의 사랑이 절대적인 것 처럼 보여지지만 필요 충분조건에서 파생되어지는 사랑이라는 것을 몰랐을리가 없는 괴테가 아가페적 사랑의 원형질을 남녀간의 사랑 속에서도 찾고자 고뇌했던 흔적들 때문이 아닐까요! 형 이상학적 사랑을 꿈꾸었지만 그것을 얻지 못해서 자살로 생을 버린 베르테르,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거부해 버린 로테, 그런 그녀의 사랑이 비난받을 것 까지 있을까? 물음표를 조금 달아 봅니다. 로테, 그녀는, 어쩜 현실적인 사랑을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계급이 모든 것을 함깨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평등사회가 아니라 계급과 신분이 절대시 되었던 독일이라는 문화권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여인의 모델이 도었을테니까요^^ 남자 주인공 베르테르의 자살은 현실에서는 희박한 이상적 사랑을 자살로 승화시킴으로써 현실이 따라 주지 않는 사랑 뒤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암시적 장치 역할을 해 주는 것이겠지요^^ 통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처럼 말입니다.귀족제도의 부패로 신분제도가 철폐되어진 현대에 들어 서서도 여전히, 사랑은 현실과 이상을 이분법식 접근법으로 경계선을 그어 가고 있습니다.베르테르와 안나 카레리나가 살았던 세상은 선택자체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이상적 사랑에 대한 선택권은 선택자의 몫이 되어졌다는 것이 시간의 흐름이 그런대로 준 선물인 것 같습니다.. 평생, 선택의 댓가로 후뢰를 할 지라도.... 어디에서 본 듯한 "우리가 살고 잇는 세상은 신이 살아 가고 있는 영지의 모습을 그대로 투사한 곳이라고, 이데아는 우리들의 세상 속에라고... 음미를 해 보면 해 볼 수록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은 의 의미 심장한 말들,철학자이고 과학자이고, 소설가였던 괴테도 모순과 권력으로 비틀비틀 해지고 있는 조국의 민중들에게, 귀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직간적으로는 전달 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를 선동자라 칭하며 언어를 통해,전달 해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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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서른'은 두려운 숫자였다. 나이 서른이 된다는 것에 소름이 돋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비순수성에 대한 대한 의심이자 우려였다. 주변에서는 나이가 서른이 넘으면 몸과 마음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작동방식과 빠른 속도로 쇠퇴한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이십 대에 그토록 반복해서 읽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더 이상 매력적으로 와 닿지 않는 나이. 인간과 사물을 관찰하는 내면의 감도가 보다 '세상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나이. 경험의 축적으로 청춘 때와는 다른 차원의 사회적 노련함을 갖게 되는 나이. 바로 서른. 그랬다. 나는 서른이, 두려웠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결혼을 했고 서른을 한참 넘겼다. 돌아보건대 서른은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젊은 시절 내게는 절대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서른을 관통하면서 나는 많이 성숙해졌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특히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는 자세와 경각에서 비본질보다 본질을 추구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내면과 정신을 지향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경험화를 통해 고양된 인간의 사회적 성장방식의 산물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매우 놀랄 만한 매혹적인 진화가 있다. 바로 '사랑'에 대한 것이다.

  천재 시인 괴테의 명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몇 번이나 읽었던가. 젊은 시절 나는 괴테의 심정을 이해해보고자 했다. 괴테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이 책을 썼다. 그의 자전적 고백이 투영된 책이었기에 나는 스물다섯의 나이 즈음에 수차례를 반복해서 읽었었다. 당시 나는 첫사랑과의 이별 후 그녀를 잊지 못한 그리움으로 삶을 둥개고 있던 시기였다. 현실의 내 사랑이 버겁고 힘들어서 감당할 수조차 없던 때였다. 그렇기에 이백여 년 전 문학으로 봉인된 베르테르의 사랑을 내 가슴에 담아낸다는 것은 과히 역부족이었다. 괴테를 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렀다. 서른이 넘었고 그토록 날 힘들게 했던 첫사랑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괴테의 명작을 다시 손에 잡았다.

  괴테가 그려낸 베르테르의 슬픈 이야기는 비극 이전에 희극이며 희극이 될 수 없는 비극이다. 어느 한 대상이 세계의 전부이자 자신의 실존 근거가 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사랑. 그 열정적 사랑에 베르테르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자신의 전존재全存在를 혹사시킨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자신의 현존을 부정하는 사랑이다. 사랑의 최고 수준 '아가페(agapē)'는 자아의 실존을 부정할 때 발현된다. 사랑의 궁극은 아가페이며, 아가페의 속성은 절대선絶對善이다. 그렇기에 자기를 부정하고 타자를 사랑하는 행위는 희극적이다. 세계의 어떤 사랑이든 본질의 선상에서는 희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서 절대선을 유지한다. 요컨대 사랑 자체는 분명 '희극'이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사랑은 결국 비극이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순전했지만 끝내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해서도 안되는 도덕적 일탈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더욱 참혹한 것은 일방성이다. 작품 속에서 로테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베르테르의 팬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만약 둘의 사랑이 쌍방향으로 전개되었다면 불멸의 고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테르는 과히 슬펐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슬픔보다 더 슬픈 슬픔이었다. 그것은 인간 심연의 처절한 괴로움이자 실존을 파괴하는 매머드급 고통이었다. 결국 베르테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중지시킴으로써 로테에 대한 자신의 비극적 사랑을 종결시킨다.

  나는 베르테르의 연인 로테에게 불만이 많다. 정말 화가 나는 인물이다. 시종일관 불분명한 태도와 애매한 감정처리로 베르테르의 사랑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로테는 작품 속에서 베르테르에 의해 꽤 매력적인 여자로 묘사되지만 애정관계라는 측면에서 가장 저급하고 위험한 존재의 전형이다. 로테의 불명확성은 작품 속 갈등의 동기이자 전부이다. 괴테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베르테르의 말을 빌어 이를 암시한다. "오해와 태만이 간교함과 악의보다 세상에서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말이다. 로테의 사랑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을 의식하는 사랑이다. 타자와 외부로부터 발현된 모든 사랑을 종국적으로 자기애自己愛의 충전으로 대체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런 태도와 이와 동류적同類的인 관계에 놓여있는 모든 행태들을 혐오한다. 정말 싫다. 사랑에 불분명한 여자가 발생시키는 갈등의 악마성을 나는 철저히 증오한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 해석한다. 사실 괴테가 그렸던 베르테르의 열정과 성실은 한 개인의 애상愛想을 넘어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맹렬한 분투로 은유된다. 괴테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봉건 질서의 염증과 새로운 인간상의 기대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베르테르의 헌신적이고 순교적인 사랑은 기독계 세계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오롯한 사랑의 일방성과 그 대가로 지불되는 죽음의 운명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자적 삶과 상통한다. 하지만 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사회적 혹은 종교적으로 읽어내는 것에 대해 거부한다.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슬프고 치열하며 열정적인 사랑만으로도 눈물의 양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선사받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문학적 밀도와 중량은 충분하다.
  
  전세대를 감동시킨 불후의 명작이지만 번역의 문제만은 넘어서기 어려운 것 같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국내에 제일 많이 번역된 고전 중 하나다. 각 출판사별로 다양한 역자들의 손을 통해 번역되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민음사판으로 이 책을 만나는 것 같다. 하지만 민음사판은 번역과 교정에 흠결이 많은 편이다. 예전에 <파리대왕>, <암흑의 핵심>, <나사의 회전> 등을 읽을 때에도 조악한 번역과 형편없는 교정으로 눈살을 찌푸린 바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쳇말로 '발번역'의 수준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서간체 소설이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자신의 고백을 일기형식으로 전달하는 편지글이다. 이런 방식은 전달받는 상대가 엄연히 존재하면서도 반응은 하지 않는 경청자의 입장에 머무르기 때문에 전달자의 고독이 더욱 애절하게 드러나는 효과를 이끌어낸다. 괴테는 혼자서 생각하는 것도 타인과의 대화로 변화시키는 것을 즐겼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원작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네"와 "~다"를 규칙없이 마구 섞어서 번역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또한 출간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간혹 눈에 띄는 오타를 발견할 때면 작품의 몰입도는 급하락된다. 민음사판은 정말 추천하기가 힘들다. 

  번역에 민감한 독자를 위해 추천하자면 나는 을유문화사 번역본을 일 순위로 꼽고자 한다. 을유세계문학전집 리스트에 있는 번역본으로서 제목부터 독일어의 본래성에 가장 가깝게 번역되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으로 배치했다. 이미 잘못된 발음으로 검증된 '베르테르'를 올바른 표기법의 '베르터'로 수정했다. 또한 원어가 담은 의미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많은 '슬픔'을 가장 적합한 단어인 '고통'으로 대체했다. 베르테르의 고통이 개인적인 연애사를 넘어 봉건 질서 내에서의 사회적 번민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내외면적 함의에서 더욱 적확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문장 또한 전반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깔끔한 번역이 돋보인다. 통속적 관행을 타파하고 독일어 본래의 의미로 올바르게 번역한 역자와 출판사의 용단이 멋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반드시 을유판으로 만나보길 바란다.  

  서평을 정리하자. 글이 좋은 것은 변하지 않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고 책이 위대한 것은 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고전은 인류사적으로 가치가 있으면서 동시에 '성공한 글'이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읽어야 할 불멸의 고전들이 있다. 고전의 공통점은 시대를 초월해내는 저력에 있다. 작품이 만들어질 당대의 인간 삶의 다양한 문제와 그것에 대한 천착은 시대를 넘어 후세에까지 변질되지 않고 오롯하게 당도한다. 그것이 고전이 갖는 근원적인 힘이자 존재성이다. 

  괴테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임이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시인은 천재라 했다. 하물며 인류사에서 가장 강렬한 획을 그은 시인 괴테의 작품을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으랴. 서두에 언급했지만 나는 서른이 넘으면서 사랑의 본질에 더욱 진지하게 접근해가고 있다. 사랑의 모든 동기와 형태는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찬란하다. 서른 이전에는 사랑의 현상에 주목하고 서른이 넘어서는 사랑 자체에 경도된다. 나이차가 만들어내는 사랑에 대한 역설적 수용은 매우 흥미롭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청춘시기에 한 번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서도 꼭 한 번 읽어야 한다. 반드시.

  괴테는 말했다. 작가는 여든의 나이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이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는 것은 삶과 사랑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진리를 배우는 것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독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차원적인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사랑의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을 기점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재독하고 고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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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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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자기계발서를 멀리하는 편이다. 엇비슷한 구조와 천편일률적인 내용으로 씌어진 계발서의 범람이 마뜩잖다. 물론 사람마다 책을 선택하는 기호와 읽는 습관은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책이 주는 지혜와 깨달음이 비단 '나'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까지 닿아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자기계발서의 효용성은 하락될 수밖에 없다. 너를 알고 세계를 알아야 비로소 나 자신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발서로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눈에 띄는 자기계발서가 있다. 신선한 형식과 가볍지 않은 메시지로 당찬 울림을 선사하는 계발도서가 간혹 목도되곤 한다. 최근 베스트셀러 1위에 안착한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그중 한 권이다. 매력적인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청춘이 태생적으로 아픈 시기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다양한 주제로 흥미있는 메시지를 풀어내며 청춘시절의 곡절을 위로하고 보듬는다. 

  저자의 외침은 단호하다. 청춘은 아프기 때문에 청춘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불안함', '막막함', '두근거림', '흔들림', '외로움' 등은 청춘시절의 범상성에 속해있는 것이라고 조언한 뒤 이에 대한 겸허한 수용과 바른 행동양식을 주문한다. 교수로서의 학식과 인생 선배로서의 경험담이 적절히 어우러져 청춘시절의 아픔을 힘있고 담백하게 격려한다.

  무엇보다 저자의 필력이 녹록지 않다. 같은 메시지라도 필자의 내공에 따라 독자가 빨아들이는 흡입력은 다르게 나타나는 법이다. 깊은 독서와 인생의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개성있는 저자의 필치는 청춘의 올곧은 약동을 힘있게 견인한다. 저자가 설파하는 조언의 영역은 풍성하다. 공부와 재테크를 넘어 연애와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구체적인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총 네 파트로 구성되었는데 각 파트가 끝날 때마다 <그대에게 쓴 편지>를 통해 자기 자신과 제자들에게 진심어린 편지말을 전달하는 감성적인 구조도 나쁘지 않다. 

  이 책이 온·오프라인 모든 서점의 종합 베스트셀러 1위까지 오른 가장 큰 동력은 저자의 힘있는 전달력에 있다. 저자는 자기 자신의 실패와 방황을 먼저 털어놓음으로써 젊은이와의 소통에 한결 부드럽게 다가간다. 가르치기 이전에 이해하고 위로하려는 겸손한 스승의 면모가 글 곳곳에 잘 스며있다. 젊음이 지닌 오류와 굴곡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오롯하게 누리며 살아가기를 조언하는 저자의 외침에서 많은 젊은 독자들이 공감하며 위로를 얻고 있는 것일 게다. 많이 읽히는 책은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청춘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전존재를 걸기 때문이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꿈이든, 우리는 청춘 시절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불태운다. 그것이 청춘의 심미적 원리이자 역설적으로는 청춘의 한계점이다. 아름다운 만큼 아프고 무지하며 몽매한 시기. 바로 그 시기를 관통하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진본을 찾아나갈 수 있게 된다. 저자가 건네는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하나로 통합된다. 내가 나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내 모습의 그대로를 유지하며 청춘의 아픔을 겪어내는 것에 대한 위로와 격려가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궁극이다.

  내 주위에도 아파하고 좌절하는 젊은 후배들이 적지 않다. 아픈 만큼 성장하는 청춘시절의 아름다운 원리를 그들도 미리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글은 말보다 강한 공력으로 상대를 압도한다. 그렇기에 책을 나누는 일은 긴요하다. 소중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한 권의 책을 건네는 것만큼 아름다운 선물이 어디 있으랴.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내 주변의 인생의 후배들에게 부담없이 한 번 읽어보라고 건넬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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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말에 오소희 작가를 만났다.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와이프와 함께 만났다. 오랜만에 성취된 만남이었다. 내 결혼식에 오지 못한 죄값(?)을 저녁식사로 대신한다는 그의 대응이 나쁘지 않았다. 꽤 오랜만에 만났지만 그의 내·외면적 아우라는 바뀐 것이 없었다. 수차례 그를 만났지만 항상 일관성을 견지하는 그의 모습에 난 흠모를 느꼈다. 물론 타자에 가려진 그의 속깊은 내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는 모르는 것이겠지만.

  지금의 와이프는 내 첫사랑이다. 나는 '단 한 번'의 사랑을 했고 '단 하나'의 사랑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연애사와 겨루어도 생색낼 수 있는 컨덴츠가 내 사랑사에는 밀도있게 존재한다. 십 년이 넘게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사랑해왔던 내 자신이 당시에는 너무 밉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숱한 고초와 역경을 이겨내고 결혼까지 골인한 현재의 내 모습은, 너무, 멋지다.

  결혼 전이었다. 와이프와 헤어져 있던 시기였다. 오 작가와 단 둘이 차를 한 잔 마시며 사랑을 논했던 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와이프를 잊지 못한 그리움에 마음 아파했고 결혼 적령기에 다다른 내 현재상에 큰 부담을 느꼈던 때였다. 주변에서는 결혼과 연애는 다른 것이라며 결혼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과 기술을 남발했다. 그들은 역설했다.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결혼생활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볼륨은 절대적으로 작다는 게 그들의 논설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의심하기도 했다. 사랑은 대체 무엇이며 결혼과는 어떤 방정식에 놓여 있는 걸까. 사랑이 결락된 채 세상이 열거하는 다양한 조건들만 갖고 결혼은 가능한 것일까. 이런저런 자못 진지한 질문에 이르렀다. 그러던 터에 오 작가를 만났던 것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오 작가의 입장은 단호했다. 결혼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혼에서 사랑은 필수이자 전부이며 궁극이라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말. 맞는 말 아니던가. 사랑 없이 어떻게 결혼이 가능하겠는가. 당연한 진리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고도자본주의는 물질적인 것들이 과잉되어 인간 본연의 가치가 굴곡되고 호도되는 염치없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가치가 비본질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의해 본래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 변질성에 내 순수함이 흔들리기 시작할 무렵 작가 오소희는 따끔한 일깨움으로 나를 본질의 선상으로 다시 데려다 준 것이다.

  오 작가의 조언과 격려에 난 힘을 얻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와이프를 다시 만났고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되었다. 그 후 몇 달이 흘러서 당시 내 눈물의 원인이었던 와이프를 오 작가에게 처음으로 소개시켜준 것이다. 두 시간이 넘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잊지 못할 좋은 만남을 가졌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오 작가의 다음 작품이 바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고를 이미 출판사에 넘긴 상황이며 3월 중에는 신간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신간도 신간이지만 주제가 사랑이라니. 이게 왠 일인가. 가슴이 두근거렸고 맥박수가 빨라졌다.

  사실 오 작가가 쏟아낸 모든 저서들의 주제는 사랑이었다. 몇 권 되지 않는 오 작가의 비블리오그래피는 한결같이 사랑을 말해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고, 아들을 향한 사랑의 메신져였으며, 세계에 대한 사랑의 학습과정이었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카테고리가 워낙 굵어서 텍스트의 본질이었던 '사랑'의 주제성이 다소 작게 와 닿은 것뿐이었다. 본격적으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그의 신간이 나는 너무 기다려진다. 삼 월의 내 모습이 그려진다. 자주 가는 온라인서점의 검색창에 매일같이 '오소희'라는 이름 석 자를 타이핑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의 이러한 태도조차도 전혀 다른 사랑의 한 형태이리라. 그랬다. 난 사랑했다. 진지하고 인간적이며 열정적인,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에 대해 기적같은 일말의 가슴 두근거림을 자신의 심장에 담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아름다운 작가를.

  기다리는 건 힘든 일이다. 인간은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에 두렵고 우울한 것이다. 누가 말했던가. 우울증은 기다림을 망각하는 병이라는 것을. 사랑의 속성에는 태생적으로 '기다림'이 함의되어 있다. 사랑한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와이프를 기다렸던 것처럼. 오 작가와의 만남을 기다렸던 것처럼. 그리고 그의 신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리는 순간은 쓰고 아프지만 결국 삶과 사랑에는 달다. 그것이 기다림의 작동원리이다.

  곧 출간될 오소희 작가의 신간을, 나는, 애타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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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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