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바보 - 대양 육대주에서 만난 사랑하는 영혼들과의 대화
오소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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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가 의미있는 공간인 것은 바로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광활한 대자연의 규모와 화려한 동식물의 향연도 한 사람의 존엄을 압도하지는 못한다. 과학과 종교는 한 목소리로 일갈한다. 인간 이외의 만물은 결국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물질을 발견하고 다스리는 인간 정신의 고차원성은 이 세계가 곧 인간의 시공간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입증한다. 지구의 존재 이유. 그것은 바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를 지닌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치있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은 어디에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바로 '사랑'이다. 인간이 지구를 의미있는 공간으로 존재케 한다면 인간이 발현해내는 사랑이라는 초월적인 자기력은 지구를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있는 차원의 선상 위에 올려놓는다. 여기서 신의 존재는 명징해진다. 인간은 신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저차원적 현현顯現이었고 사랑은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아가고자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인류사는 결국 사랑사다. 크고 작은 인간사의 굴곡은 사랑에 대한 각각의 이해와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서 창조 또는 진화된 존재다. 인간은 사랑한 만큼 행복했고 사랑하지 않은 만큼 불행했다. 사랑했기 때문에 선善을 완성했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惡에 함몰되었다. 사랑이 가득 찬 사람은 두려움을 망각했고 그 망각 가운데 시간을 가장 빨리 흘러가게 했다. 그렇다. 사랑은 아름답고 위대하며 궁극적인 힘인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사랑은 이론화나 구조화가 불가능한 초자연적 에너지다. 만물의 영장이자 강력한 이성理性을 지닌 인간조차도 사랑이 가진 거대한 포스의 원리를 오롯하게 이해하고 사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인간이 사랑에 실패한다. 어쩌면 이것은 신의 장난질일 것이다. 신은 절대고차원에서 생성·사용되는 힘을 인간의 시공간, 즉 한낱 3차원의 세계 속으로 유입시켰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모습 속에서 당신의 형상을 찾고자 했다. 신의 장난은 인간을 둥개게 한다. 한없이 낮아지게 하고 결국, '바보'가 되게 한다. 요컨대 인간은 사랑 앞에서 모두 바보가 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사랑받는 에세이 작가 오소희는 신간 『사랑바보』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만난 인연들에게서 발견한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소개한다. 이 책은 국적과 지역, 언어와 문화가 다르더라도 결국 인간은 사랑 안에서 동일해진다는 진리를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들려준다.

  작자가 소개한 사랑의 카테고리는 가히 폭넓다. '자기애'로 시작하여 '타자애'와 '모성애'를 넘어 '동성애'와 '노년애'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양한 사랑의 색상을 발굴하고 음미한다. 작가가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경험했던 사랑에 빠진 다양한 영혼들과의 대화는 각각이 소중한 의미를 지님으로써 독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저 바라만 봐도 심금을 울리는 영혼이 있는가 하면 직접 개입하여 사랑학개론을 나눠야만 하는 영혼도 있다. 사랑에 빠진 세계 각지의 많은 영혼들과의 교감을 통해 저자는 과거로 돌아가고 현재를 응시하며 미래를 상정한다. 이러한 시점의 이동은 작가와 독자 모두를 사랑이라는 웅대한 신적 발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게 한다. 겸손치 못한 자. 사랑할 수 없다.

  작가 특유의 감성적인 문체는 여전히 돋보인다. 총 다섯 편의 에세이를 써오면서 작가는 어느덧 시인이 다 되었다. 사랑을 테마로 한 책인 만큼 문장 곳곳에 작가의 감정선이 생명력 있게 꿈틀거린다. 간혹 눈에 띄는 비유와 묘사를 음미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시인' 오소희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게 된다. 시는 언어의 정점인 동시에 언어를 넘어선 세계다. 세계의 수없이 많은 글쟁이들이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던가. 작가에게 기대한다. 언젠가 시를 써볼 것을. 갑자기 『욕망이 춤추는 곳 라오스』에서의 짧디 짧은 응축된 문장이 뇌리를 스친다.

  전작과의 차별성 또한 눈에 띈다. 이전 네 권의 에세이에서 작가는 아들 중빈을 통해 세계를 관찰했다. 세계에 대한 천착은 들여다보는 렌즈의 성격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선사한다. 작가와 아들 중빈은 세계를 쳐다보는 기준과 태도에 있어 많은 부분이 상치했다. 다른 간극의 차이만큼 이해가 필요했다. 작가가 세계를 여행하며 포착했던 다양한 글감들은 아들의 '순수'와 '열림'에 의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어린아이의 유치함에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고 때로는 진공에 가까운 순진함에 넋을 잃고 경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에세이만큼은 다르다. 아들은 엑스트라로 물러나 있다. 아들을 향한 작가의 초점과 세계에 대한 아들의 시각은 최대한 탈피되어 있다. 작가가 1인칭의 주인공이 되어 사랑하는 영혼들과의 접속을 시도한다. 시점의 고저와 방향을 철저히 작가 자신만의 것으로 자유화한 문체의 변화가 보기 좋다.

  책의 막장을 덮으며 난 생각했다. 작가가 들려준 아홉 가지 형태의 사랑 외에도 한 가지의 사랑이 더 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작가와 독자 사이의 사랑이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독자도 작가를 사랑한다. 작가에 대한 독자의 사랑은 은근히 집요하다. 돌아보건대 난 작가 오소희를 사랑했다. 그의 '자유'는 언제나 나의 '진지함'과 친구가 되었다. 사석에서 수차례 만났던 그는 항상 나에게 자유의 에너지를 발현했고 그것을 통해 나는 삶과 사랑이 결국 동의어라는 깨달음에 고개를 숙이곤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가 자유로운 만큼 나는 더욱 진지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자유를 누릴 것이다. 어느덧 작가 오소희는 내 삶에서 셰익스피어와 톨스토이의 반열에 올라서 있다.

  사랑은 참 어려운 것이다. 사랑 특유의 고통의 난해성은 인간을 바보로 만든다. 사랑은 규정될 수 없다. 다만 끊임없이 발현되고 진행될 뿐이다. 사랑에는 수식어구가 필요없다. 사랑은 그 자체로서 절대선을 유지한다. 이 세계가 물질만능주의에 찌들어 모든 정신적 가치의 굴곡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사랑의 본질만 훼손되지 않는다면 위험하지 않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진본에 근접하게 된다. 유일하게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면 바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바보가 되어도 좋다. 사랑할 수만 있다면.

  사랑 예찬론자 오소희의 신간 『사랑바보』를 이 땅의 수많은 '사랑 바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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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는 것 - 고병권 선생님의 철학 이야기 너머학교 열린교실 1
고병권 지음, 정문주.정지혜 그림 / 너머학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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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어가면 많은 것들이 변한다. 그중 하나가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다. 나이와 생각은 양적인 면에서 비례하는 것 같다. 생각이 많을수록 삶은 고달프다. 인생은 깊고 풍성한 생각의 바다에서 펼쳐지는 시간의 흐름이다. 인간이 다른 종과 구별되는 '생각'이라는 우월성이 어떨 때는 인간을 옥죄고 번민하게 만든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 아. 데카르트여. 인간은 정말 그런 존재란 말입니까.

  생각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 좋은 생각은 많이 할수록 좋고 좋지 못한 생각은 버릴수록 좋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건강하고 건설적인 생각은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동력이 된다. 반면 잡념과 사념은 인간의 마음을 불안하고 두렵게 한다. 생각 버리는 연습을 통해 평온을 유지해야 한다는 일본 모스님의 수필집이 국내 베스트셀러 1위까지 오른 현상은 생각하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하는 한국 독자들의 관심이 그대로 반영된 것일 게다. 

  '너머학교'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생각에 대한 책이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저작발굴 및 출판지원사업' 교양부문 당선작이기도 한 이 책은, 철학자 고병권이 청소년을 위해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쓴 쉽고 새로운 철학책이다. 고병권은 이 책을 통해 인류사를 위대하게 장식했던 다양한 철학자들과 사상을 소개함과 동시에 인간 삶의 본질과 행복하게 살기 위한 다양한 조건을 알려준다.

  먼저 저자는 철학의 긴요성에 대해 매우 명쾌하게 정리한다. 철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삶을 잘 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여기서 '잘'이라는 부사는 경제적이고 명예적인 풍요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보다 근원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바로 철학의 힘이 있다. 영어 공부와 수학 공부와는 다른 것이다. 삶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몸과 마음을 쓰는 방법을 배우는 학문. 그것이 바로 철학의 정의이자 이 책이 알려주고자 하는 '생각한다는 것'의 목적이기도 하다.

  책의 구성은 간명하다. 저자는 총 여덟 파트로 철학의 세계를 안내한다.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함께 관련 철학자가 각 파트마다 연이어 소개된다. 디오게네스부터 니체에 이르기까지 고결한 사상을 만들어냈던 위대한 지성들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독자의 앎은 배부르다. 또한 각 파트가 끝날 때마다 현실의 이슈 한 가지씩을 제기하여 관념이 아닌 실재의 세계에서 생각해야 함을 일깨운다.

  저자가 제기한 '북한 핵 개발', '이라크 전쟁', ' 이주노동자 문제' 등은 비단 기성세대만 고민해야 할 부분은 아니다. 사회는 변하고 그만큼 시대의 가치관 또한 변화한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변한다 하더라도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할 소중한 가치가 있다. 예컨대 '자유'와 '평등', '인권'과 '관용'은 문화와 시대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반드시 지켜져야 할 인간의 고유한 가치들이다. 청소년 때부터 이에 대한 숭고한 신념을 갖는다는 건 매우 필요하다. 지금의 아이들이 훗날 이 나라를 책임질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기성세대로서 우리의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다음 세대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줘야 하는 책임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가 그 다음 세대에게 더 좋은 세계를 물려줄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도 응당 우리 기성세대의 몫이다. 이러한 건강한 물려줌의 선순환 속에서 우리사회는 보다 희망이 있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단위 '생각'의 방향과 필요를 제시한 『생각한다는 것』은 참 좋은 책이다. 

  삶의 변성기를 겪어내는 이 땅의 십대들에게 건강한 사고와 행복한 삶의 필요성을 주문하는 저자와 철판사의 수고가 멋지다. 다만 책의 두께와 읽을 대상을 고려할 때 책값이 다소 비싼 점은 아쉽다. 동기와 노력이 좋은 만큼 책가격도 합리적으로 책정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정리하자. 고병권의 『생각한다는 것』은 철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되 대상을 명확히 하여 간단한 구성과 수월한 내용으로 쉽게 풀어낸 책이다. 청소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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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오랜만에 '톨스토이'를 읽고 있다. 요즘 내 책읽기는 늪에 빠져 있다. 최근 책을 읽을 때의 내 정신적 에너지는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거의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책에 대한 의지박약 및 열정감소 현상은 읽을 만한 책이 없다고 판단해버리는 내 자신의 추악한 교만에서 발생된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항상 그러했듯이, 이 권태를 이겨내는 매우 적확한 처방법을.

  책으로 마음에 감동을 얻지 못할 때, 읽을 만한 책이 부재하다고 느낄 때, 책읽기의 권태가 주는 고독에 번민할 때, 바로 그때 내게 긴
요한 것은 '고전'이었다. 고전은 독자를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전은 독자에게 최소한의 어렴성을 넌지시 주문한다. 태동 이후의 인류사를 매혹시켜왔던 그 장엄한 '입증'이 한낱 머리카락 하나보다도 못한 내 교만한 기호嗜好를 압도해버는 것이다. 이미 검증되어진 위대한 텍스트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깊이있게 천착해나가다보면 책읽기의 첫사랑이 어느새 회복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권태를 이겨내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러시아'다. 대학시절에 흠취했었던 '러시아문학'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를 끄집어냈다. 푸쉬킨은 나와 거리가 있었고 투르게네프는 다소 약했다. 단연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톨스토이를 집었다. 집요하고 병적으로 인간의 심연만 파고드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인간(내부)과 세계(외부)에 균형을 맞추는 그림을 건강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톨스토이가 지금의 내게 더 필요했던 것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소설가 톨스토이의 숨결을 느끼며 어제도 오늘도 <안나 카레니나>의 매력에 잠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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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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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王)'은 무엇인가. 사전은 왕의 의미를 "군주 국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우두머리"로 풀이한다. 왕에게 대항할 자는 없다. '백수의 왕' 사자에게 덤벼들 동물이 없듯이 왕의 권위는 강력하고 절대적이다. 인간의 정치제도 안에서도 왕의 권한은 무한대다. 입법 사법 행정을 한 손에 주무를 수 있는 초월적 권력자인 것이다. 그렇다. 왕이란 존재는 심히 매혹적이다.

  왕의 매력은 인간의 내면적 속성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강한 집념이 왕을 선망케 했고 결국 만들어냈다. "짐은 곧 국가"라고 외쳤던 프랑스 절대왕정의 어느 군주처럼 왕은 인간성을 넘어선 신의 위치에 서길 원하는 인간의 교만이 아이콘화되어 있다. 인간의 끊임없는 권력 추구의 속성이 만들어낸 산물이기에 왕이라는 존재는 '두려움'과 '의심'을 기본적으로 함의한다. 인간이 왕을 만들어냈고 왕이 된 인간은 인간 이상의 초월성을 끊임없이 누리려 했다. 그러다 결국 파멸되기도 했다. 파멸된 왕은 다시 인간이 됐으며 그 파멸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왕이 가진 힘은 충분히 매혹적인 것이었지만 그 매혹만큼이나 위험했다. 그랬기에 인류사 이래로 대부분의 왕은 결국 '파멸'을 맞이했다.

  우리 시대가 낳은 최고의 입담꾼 성석제는 자신의 첫 장편소설을 통해 힘과 권력에 집착된 인간의 본성을 깊이있게 탐구한다. 15년 만의 개정판으로 독자를 찾은 소설가 성석제의 거침없는 서사는 왕의 매력만큼이나 매혹적이다. 도시를 벗어난 한 지역사회 건달들이 뿜어내는 거칠고 굵직한 이야기가 성석제 특유의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독자의 가독력을 속도화한다. 

  소설가 성석제의 『왕을 찾아서』는 제목 그대로 왕을 찾는 이야기다. 그 '찾음'의 일차적인 의미는 주인공 장원두가 어린 시절에 영웅으로 추앙했던 동네 건달두목 마사오를 향한 경외와 그리움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보다 입체적으로 소설을 조망해보면 등장인물 대부분의, 어쩌면 모든 인간의 내면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왕을 향한 욕망의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힘과 권력을 갈구하는 인간의 태초적인 속성과 그것의 사회적 인과성, 그리고 권력의 비영속성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소설을 읽는 내내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성석제표 입담에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 장원두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그토록 경외했던 고향의 건달두목 마사오의 부고를 접한다. 개인적인 상처로 고향을 떠났던 원두는 마사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고향을 찾는다. 장례식에서 그는 마사오와의 추억과 자신의 친구였던 몇몇 건달들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게 된다. 아무도 넘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마사오의 빈 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우고 또 다른 사람이 다음을 채우는 권력의 지속성에 원두는 놀란다. 그는 깨닫는다. 왕으로 대변되는 힘과 권력의 양태는 그 주체만 바뀔 뿐 계속적으로 순환되고야 마는 것을.

  인간은 힘을 갖고 있는 상태를 유지할 때만 온전한 왕이 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유신조, 마사오, 조창용, 박재천으로 이어지는 왕권 교체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기는 원두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원두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 세희도 이 남자 저 남자를 거쳐 결국은 최후의 왕 재천의 여자가 된다. 권력의 가장 강력한 속성은 소유욕을 장악하는 데 있다. 돈과 인간뿐만 아니라 사랑까지도 소유하고야 마는 강력한 힘이 인간의 권력 속에는 존재한다.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어렵게 한 걸음 한 걸음 사랑의 발걸음을 내디뎠던 세희를 향한 원두의 성실함은 왕이 될 가장 능동적인 '세자'였던 친구 재천의 권력성 앞에서 처절하게 짓밟히고 만다. 그렇다. 왕은 힘이 세다. 그리고 매혹적이다. 사랑의 진실과 성실을 뒤엎고 호도시킬 만큼.

  소설은 마사오 이후 권력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한 지역 건달들의 야욕과 패권싸움을 적나라게 그려나간다. 조폭세계에 대한 스케치는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가 수없이 그려왔던 레퍼토리이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신뢰성을 상실한 건달세계의 모습은 인간이 지향해야만 하는 '아름다운 세상'의 조건들과는 철저히 대척점에 서 있다. 성석제는 태생적으로 권력욕에 지배당한 인간세계의 한계를 가장 낮은 바닥의 이야기를 통해 묵묵히 그려내고자 했을 것이다. 거짓과 파괴, 간교와 악의가 득실대는 깡패세계의 모습이야말로 왕의 영광과 파멸의 대극(對極)을 가장 역동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강점은 성석제 특유의 문체에 있다. 선굵은 지역 건달들의 이야기가 건조하지 않게 한 숨에 읽히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역량 덕분이다. 가독력이 가히 발군이다. 독자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성석제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작가는 주인공 장원두를 통해 자유자재로 시점을 이동시키며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유머, 재치, 익살, 해학으로 점철된 개성있는 문체는 가벼우면서도 서사의 권위를 흠집내지 않고 독자에게 여운을 남기는 힘이 있다. 쉽게 읽히지만 흡입력 있는 서사는 흐트러지지 않은 채 소설의 말미까지 안전하게 당도한다. 쉼없이 이야기에 몰두한 독자의 집중력은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에는 무언가의 깊은 여운을 확인하는 에너지로 자연스럽게 대체된다. 성석제의 힘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사회는 그곳 건달들이 힘의 논리로 겨루는 작은 공간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은유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인간세상 전체를 풍자해놓은 공간이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비단 지역 깡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에 해당되는 엄연한 약점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곧 '지구'였던 것이다. 동시에 소설의 제목 '왕을 찾아서' 또한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암시를 함의한 배치일 것이다. 왕 마사오에 대한 원두의 방향성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나 갖고 있는 '강한 것'에 대한 야심을 메타포한다. 왕을 찾아서. 그렇다. 인간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왕을 찾아서' 헤매며 갈등하는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간만에 성석제의 소설을 만나서 즐거웠다. 놀랐던 것은 성석제가 이토록 소설을 매력적으로 쓰는 작가였나 하는 점이다. 그간 몇 편의 작품에서 그의 가벼운 입담에 거리감을 느꼈던 내가 그의 첫 장편소설에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누린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을 게다. 좋은 작품은 언젠가는 독자를 찾아가게 되어 있다.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된 소설이 15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독자를 찾은 필연이 그것을 넌지시 증명한다. 한 작가에 대한 오해가 오늘로서 풀리게 됐다. 독자로서 흐뭇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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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통 을유세계문학전집 3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현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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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서른'은 두려운 숫자였다. 나이 서른이 된다는 것에 소름이 돋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비순수성에 대한 대한 의심이자 우려였다. 주변에서는 나이가 서른이 넘으면 몸과 마음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작동방식과 빠른 속도로 쇠퇴한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이십 대에 그토록 반복해서 읽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더 이상 매력적으로 와 닿지 않는 나이. 인간과 사물을 관찰하는 내면의 감도가 보다 '세상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나이. 경험의 축적으로 청춘 때와는 다른 차원의 사회적 노련함을 갖게 되는 나이. 바로 서른. 그랬다. 나는 서른이, 두려웠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결혼을 했고 서른을 한참 넘겼다. 돌아보건대 서른은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젊은 시절 내게는 절대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서른을 관통하면서 나는 많이 성숙해졌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특히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는 자세와 경각에서 비본질보다 본질을 추구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내면과 정신을 지향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경험화를 통해 고양된 인간의 사회적 성장방식의 산물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매우 놀랄 만한 매혹적인 진화가 있다. 바로 '사랑'에 대한 것이다.

  천재 시인 괴테의 명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몇 번이나 읽었던가. 젊은 시절 나는 괴테의 심정을 이해해보고자 했다. 괴테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이 책을 썼다. 그의 자전적 고백이 투영된 책이었기에 나는 스물다섯의 나이 즈음에 수차례를 반복해서 읽었었다. 당시 나는 첫사랑과의 이별 후 그녀를 잊지 못한 그리움으로 삶을 둥개고 있던 시기였다. 현실의 내 사랑이 버겁고 힘들어서 감당할 수조차 없던 때였다. 그렇기에 이백여 년 전 문학으로 봉인된 베르테르의 사랑을 내 가슴에 담아낸다는 것은 과히 역부족이었다. 괴테를 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렀다. 서른이 넘었고 그토록 날 힘들게 했던 첫사랑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괴테의 명작을 다시 손에 잡았다.

  괴테가 그려낸 베르테르의 슬픈 이야기는 비극 이전에 희극이며 희극이 될 수 없는 비극이다. 어느 한 대상이 세계의 전부이자 자신의 실존 근거가 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사랑. 그 열정적 사랑에 베르테르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자신의 전존재全存在를 혹사시킨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자신의 현존을 부정하는 사랑이다. 사랑의 최고 수준 '아가페(agapē)'는 자아의 실존을 부정할 때 발현된다. 사랑의 궁극은 아가페이며, 아가페의 속성은 절대선絶對善이다. 그렇기에 자기를 부정하고 타자를 사랑하는 행위는 희극적이다. 세계의 어떤 사랑이든 본질의 선상에서는 희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서 절대선을 유지한다. 요컨대 사랑 자체는 분명 '희극'이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사랑은 결국 비극이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순전했지만 끝내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해서도 안되는 도덕적 일탈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더욱 참혹한 것은 일방성이다. 작품 속에서 로테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베르테르의 팬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만약 둘의 사랑이 쌍방향으로 전개되었다면 불멸의 고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테르는 과히 슬펐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슬픔보다 더 슬픈 슬픔이었다. 그것은 인간 심연의 처절한 괴로움이자 실존을 파괴하는 매머드급 고통이었다. 결국 베르테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중지시킴으로써 로테에 대한 자신의 비극적 사랑을 종결시킨다.

  나는 베르테르의 연인 로테에게 불만이 많다. 정말 화가 나는 인물이다. 시종일관 불분명한 태도와 애매한 감정처리로 베르테르의 사랑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로테는 작품 속에서 베르테르에 의해 꽤 매력적인 여자로 묘사되지만 애정관계라는 측면에서 가장 저급하고 위험한 존재의 전형이다. 로테의 불명확성은 작품 속 갈등의 동기이자 전부이다. 괴테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베르테르의 말을 빌어 이를 암시한다. "오해와 태만이 간교함과 악의보다 세상에서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말이다. 로테의 사랑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을 의식하는 사랑이다. 타자와 외부로부터 발현된 모든 사랑을 종국적으로 자기애自己愛의 충전으로 대체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런 태도와 이와 동류적同類的인 관계에 놓여있는 모든 행태들을 혐오한다. 정말 싫다. 사랑에 불분명한 여자가 발생시키는 갈등의 악마성을 나는 철저히 증오한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 해석한다. 사실 괴테가 그렸던 베르테르의 열정과 성실은 한 개인의 애상愛想을 넘어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맹렬한 분투로 은유된다. 괴테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봉건 질서의 염증과 새로운 인간상의 기대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베르테르의 헌신적이고 순교적인 사랑은 기독계 세계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오롯한 사랑의 일방성과 그 대가로 지불되는 죽음의 운명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자적 삶과 상통한다. 하지만 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사회적 혹은 종교적으로 읽어내는 것에 대해 거부한다.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슬프고 치열하며 열정적인 사랑만으로도 눈물의 양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선사받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문학적 밀도와 중량은 충분하다. 
  
  번역본을 추천해보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국내에 제일 많이 번역된 고전 중 하나다. 다양한 역자들에 의해 출판사별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민음사를 위시한 여섯 출판사의 번역본을 읽어본 바로서 나는 을유문화사의 것을 일 순위로 꼽는다. 을유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있는 번역본으로서 제목부터 독일어의 본래성에 가장 가깝게 번역되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으로 배치했다. 이미 잘못된 발음으로 검증된 '베르테르'를 올바른 표기법의 '베르터'로 수정했다. 또한 원어가 담은 의미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많은 '슬픔'을 가장 적합한 단어인 '고통'으로 대체했다. 베르테르의 고통이 개인적인 연애사를 넘어 봉건 질서 내에서의 사회적 번민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내외면적 함의에서 더욱 적확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문장 또한 전반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깔끔한 번역이 돋보인다. 통속적 관행을 타파하고 독일어 본래의 의미로 올바르게 번역한 역자와 출판사의 용단이 멋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반드시 을유판으로 만나보길 바란다.  

  괴테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임이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시인은 천재라 했다. 하물며 인류사에서 가장 강렬한 획을 그은 시인 괴테의 작품을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으랴. 서두에 언급했지만 나는 서른이 넘으면서 사랑의 본질에 더욱 진지하게 접근해가고 있다. 사랑의 모든 동기와 형태는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찬란하다. 서른 이전에는 사랑의 현상에 주목하고 서른이 넘어서는 사랑 자체에 경도된다. 나이차가 만들어내는 사랑에 대한 역설적 수용은 매우 흥미롭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청춘시기에 한 번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서도 꼭 한 번 읽어야 한다. 반드시.

  괴테는 말했다. 작가는 여든의 나이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이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는 것은 삶과 사랑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진리를 배우는 것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독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차원적인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사랑의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을 기점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재독하고 고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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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안그림자 2011-03-17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이 있는 분석까지 곁들여 놓은<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잘 들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불후의 명작이 되어지는 괴테의 작품이 더 가치 있게 와 닿는 코드라면... 남녀간의 사랑이 절대적인 것 처럼 보여지지만 필요 충분조건에서 파생되어지는 사랑이라는 것을 몰랐을리가 없는 괴테가 아가페적 사랑의 원형질을 남녀간의 사랑 속에서도 찾고자 고뇌했던 흔적들 때문이 아닐까요! 형 이상학적 사랑을 꿈꾸었지만 그것을 얻지 못해서 자살로 생을 버린 베르테르,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거부해 버린 로테, 그런 그녀의 사랑이 비난받을 것 까지 있을까? 물음표를 조금 달아 봅니다. 로테, 그녀는, 어쩜 현실적인 사랑을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계급이 모든 것을 함깨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평등사회가 아니라 계급과 신분이 절대시 되었던 독일이라는 문화권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여인의 모델이 도었을테니까요^^ 남자 주인공 베르테르의 자살은 현실에서는 희박한 이상적 사랑을 자살로 승화시킴으로써 현실이 따라 주지 않는 사랑 뒤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암시적 장치 역할을 해 주는 것이겠지요^^ 통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처럼 말입니다.귀족제도의 부패로 신분제도가 철폐되어진 현대에 들어 서서도 여전히, 사랑은 현실과 이상을 이분법식 접근법으로 경계선을 그어 가고 있습니다.베르테르와 안나 카레리나가 살았던 세상은 선택자체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이상적 사랑에 대한 선택권은 선택자의 몫이 되어졌다는 것이 시간의 흐름이 그런대로 준 선물인 것 같습니다.. 평생, 선택의 댓가로 후뢰를 할 지라도.... 어디에서 본 듯한 "우리가 살고 잇는 세상은 신이 살아 가고 있는 영지의 모습을 그대로 투사한 곳이라고, 이데아는 우리들의 세상 속에라고... 음미를 해 보면 해 볼 수록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은 의 의미 심장한 말들,철학자이고 과학자이고, 소설가였던 괴테도 모순과 권력으로 비틀비틀 해지고 있는 조국의 민중들에게, 귀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직간적으로는 전달 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를 선동자라 칭하며 언어를 통해,전달 해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