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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얼마만인가. 헤세의 불멸의 작품 <데미안>을 다시 만난 지가. 이십 대 초반 처음 만난 <데미안>은 나에게 지독한 소설이었다. 융의 심리학과 소설의 멀티구조를 알 리 없었던 그 시절의 <데미안>은 무의미한 관념과 철학의 산더미로 내게 다가왔다. 그 산더미가 무너지고 내 속에서 '새로운 <데미안>'이 세워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새로운 <데미안>은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히면서 내 머리와 가슴을 내 진본 속으로 하염없이 밀어넣었다.
<데미안>은 신비한 소설이다. 성장소설이 분명한데도 청소년이 읽기는 부담되고 벅차다. 초반은 어려움 없이 읽힌다. 그러다가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는 지점부터 헤세의 문장은 쉽지 않은 사유의 심연 속으로 잠수한다. 선악의 이중성, 신성神性의 양면적 고찰, 자아로의 끊임없는 침잠,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상 등 소설은 적지 않은 소재를 관통하면서 참다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냈다.
주지하다시피 <데미안>의 핵심주제는 '자기탐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내면에서 샘솟는 울림을 경청하고, 그것을 통해 '참 나'를 찾아가며, 그 찾아감 속으로 실제 나아가는 삶, 을 지향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야기 전개방식은 싱클레어의 회상으로 진행된다. 철저히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플롯 구도 가운데 데미안을 위시하여 싱클레어가 흠모하고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관계맺기를 통해 이야기를 생성시킨다.
싱클레어의 관계맺기는 유의미성 측면에서 세 인물로 연결된다. 친구 데미안, 오르간연주자 피스토리우스, 데미안의 엄마 에바 부인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시종 싱클레어의 정신세계를 압도하며 이야기를 추동한다. 소설에서 제기된 종교, 관념, 철학, 사유, 의식 등의 모든 실타래들은 이 세 인물을 통해 제시되고 공유된다. 싱클레어와 그들 사이의 묘한 종속성과 신비한 거리감, 그리고 약동적 피드백성은 소설을 이루는 주요한 뼈대가 되고 있다.
내가 <데미안>에서 가장 깊게 고찰한 부분은 '신성의 양면적 천착'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 새가 날아가야 할 궁극은 '아프락사스'라는 신"이라고 얘기한다. 이전까지 싱클레어에게 신성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 선'으로서의 통속성·관습성·교조성의 의심없는 수용이었다. 그러나 아프락사스는 선과 악이 엄연하게 공존하는 신이다. 요컨대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실제의 나'가 되어가는 과정은 병립적竝立的 관계로서의 선악세계를 받아들임으로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철저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헤세의 이단적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는 소설 속에서 '카인과 아벨',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야곱의 씨름'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미안의 풀이를 통해서도 은연히 드러난다. 기존 진리의 불변성을 전복시키는 데미안의 해석은 기독교에 대한 헤세의 반항적 도전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끝내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헤세의 의지를 추론해보건대, 소설 속의 데미안 식 해석은 본질적으로 신성 모독을 통한 교리의 파괴가 아닌 신성 재해석을 통한 인간 내면의 명징화·개성화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사실 선과 악은 이분법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의 본체가 아닌 이상 전제적前提的으로 악의 일면을 내재한다. 심리학자 융의 말대로라면 아프락사스는 선악을 공유하면서도 엄연한 '창조주의 본질本質'이다. 즉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스스로 존재했던 신성 속에 선과 악이 함께 병립했다는 것이다. 융의 이 말은 절반의 논리를 완성시킨다. 신의 허용 속에 악함이 없었다면 창세 후 인간이 행했던 죄의 근원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반은 논리적 생명력을 잃는다. 신과 악의 상관관계는 '신의 불가해성不可解性' 안에서 용해되고 분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락사스는 신비주의적 전일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가지고 있는 신성"이다. 소설 전반부에 문제가 되고 있는 기독교적 관점의 양극성의 문제를 후반부에서는 아프락사스라는 신비주의적 신성의 상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모든 신비주의는 일원론을 그 근간으로 한다. 이 아프락사스는 <데미안> 이후 헤세가 일생 동안 지향하는 양극성 너머의 전일사상 및 일원론적 신비주의 종교사상을 보여 주는 문학적 상징인 것이다. 소설 <데미안>이 헤세의 '영혼의 전기'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지점에서 소설 <데미안>의 보다 정밀한 주제가 추출된다. "'완전한'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선악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선의 무조건적 지향은 상대성 안에서 궤멸된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말했다. 피레네 산맥 이쪽의 정의가 저쪽에서는 불의가 된다는 것을. 문학과 철학을 넘어 보다 넓은 카테고리에서 '정의'와 '선'의 의미를 조망하게 되면 둘이 동의적同意的 성격을 띤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파스칼의 일갈은 자연스럽게 선악의 병존성으로 연결된다. 헤세가 하나님(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이 아닌 아프락사스라는 고대 희랍의 신으로 후퇴(혹은 갈음)하여 자신의 세계를 전달한 것도 바로 이런 의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소설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격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끝맺음된다.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싱클레어는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데미안과 대면한다. 이제 떠나야 한다고 말하며 싱클레어에게 키스하는 데미안의 마지막 현현顯現은 어쩌면 처음부터 실존하지 않았던 싱클레어의 '참자아眞我'였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참자아를 찾았던 싱클레어의 지독한 여행에서 데미안의 존재는 독립된 실체 이전에 오롯한 내면화 과정으로서의 싱클레어의 진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합일은 다시 한 번 이 소설의 메세지를 가감없이 표출한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 스스로 자기 실존의 내용과 목적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꼭 그 길로만 가야 한다는 것을.
성장이라는 테마를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의 방식으로 이렇게 깊은 곳까지 언어로 표현해낸 헤르만 헤세는 과히 대작가답다. <데미안>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고전이 됐다.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은 헤세의 이 보석같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심연을 관통적貫通的으로 사색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헤세의 신비로운 문장을 통해 뜨거운 감동의 열정을 담아냈는가. 그러나, 흥미롭게도, 정작 한없이 감화된 사람은 바로 헤세 자신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문학인생은 '<데미안> 전'과 '<데미안> 후'로 정확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헤세야말로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진본을 찾았던 것이다. <데미안>은 실로 괴물과 같은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