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만인가. 헤세의 불멸의 작품 <데미안>을 다시 만난 지가. 이십 대 초반 처음 만난 <데미안>은 나에게 지독한 소설이었다. 융의 심리학과 소설의 멀티구조를 알 리 없었던 그 시절의 <데미안>은 무의미한 관념과 철학의 산더미로 내게 다가왔다. 그 산더미가 무너지고 내 속에서 '새로운 <데미안>'이 세워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새로운 <데미안>은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히면서 내 머리와 가슴을 내 진본 속으로 하염없이 밀어넣었다.

   <데미안>은 신비한 소설이다. 성장소설이 분명한데도 청소년이 읽기는 부담되고 벅차다. 초반은 어려움 없이 읽힌다. 그러다가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는 지점부터 헤세의 문장은 쉽지 않은 사유의 심연 속으로 잠수한다. 선악의 이중성, 신성神性의 양면적 고찰, 자아로의 끊임없는 침잠,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상 등 소설은 적지 않은 소재를 관통하면서 참다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냈다.

   주지하다시피 <데미안>의 핵심주제는 '자기탐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내면에서 샘솟는 울림을 경청하고, 그것을 통해 '참 나'를 찾아가며, 그 찾아감 속으로 실제 나아가는 삶, 을 지향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야기 전개방식은 싱클레어의 회상으로 진행된다. 철저히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플롯 구도 가운데 데미안을 위시하여 싱클레어가 흠모하고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관계맺기를 통해 이야기를 생성시킨다.

   싱클레어의 관계맺기는 유의미성 측면에서 세 인물로 연결된다. 친구 데미안, 오르간연주자 피스토리우스, 데미안의 엄마 에바 부인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시종 싱클레어의 정신세계를 압도하며 이야기를 추동한다. 소설에서 제기된 종교, 관념, 철학, 사유, 의식 등의 모든 실타래들은 이 세 인물을 통해 제시되고 공유된다. 싱클레어와 그들 사이의 묘한 종속성과 신비한 거리감, 그리고 약동적 피드백성은 소설을 이루는 주요한 뼈대가 되고 있다.

   내가 <데미안>에서 가장 깊게 고찰한 부분은 '신성의 양면적 천착'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 새가 날아가야 할 궁극은 '아프락사스'라는 신"이라고 얘기한다. 이전까지 싱클레어에게 신성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 선'으로서의 통속성·관습성·교조성의 의심없는 수용이었다. 그러나 아프락사스는 선과 악이 엄연하게 공존하는 신이다. 요컨대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실제의 나'가 되어가는 과정은 병립적竝立的 관계로서의 선악세계를 받아들임으로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철저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헤세의 이단적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는 소설 속에서 '카인과 아벨',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야곱의 씨름'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미안의 풀이를 통해서도 은연히 드러난다. 기존 진리의 불변성을 전복시키는 데미안의 해석은 기독교에 대한 헤세의 반항적 도전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끝내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헤세의 의지를 추론해보건대, 소설 속의 데미안 식 해석은 본질적으로 신성 모독을 통한 교리의 파괴가 아닌 신성 재해석을 통한 인간 내면의 명징화·개성화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사실 선과 악은 이분법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의 본체가 아닌 이상 전제적前提的으로 악의 일면을 내재한다. 심리학자 융의 말대로라면 아프락사스는 선악을 공유하면서도 엄연한 '창조주의 본질本質'이다. 즉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스스로 존재했던 신성 속에 선과 악이 함께 병립했다는 것이다. 융의 이 말은 절반의 논리를 완성시킨다. 신의 허용 속에 악함이 없었다면 창세 후 인간이 행했던 죄의 근원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반은 논리적 생명력을 잃는다. 신과 악의 상관관계는 '신의 불가해성不可解性' 안에서 용해되고 분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락사스는 신비주의적 전일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가지고 있는 신성"이다. 소설 전반부에 문제가 되고 있는 기독교적 관점의 양극성의 문제를 후반부에서는 아프락사스라는 신비주의적 신성의 상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모든 신비주의는 일원론을 그 근간으로 한다. 이 아프락사스는 <데미안> 이후 헤세가 일생 동안 지향하는 양극성 너머의 전일사상 및 일원론적 신비주의 종교사상을 보여 주는 문학적 상징인 것이다. 소설 <데미안>이 헤세의 '영혼의 전기'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지점에서 소설 <데미안>의 보다 정밀한 주제가 추출된다. "'완전한'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선악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선의 무조건적 지향은 상대성 안에서 궤멸된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말했다. 피레네 산맥 이쪽의 정의가 저쪽에서는 불의가 된다는 것을. 문학과 철학을 넘어 보다 넓은 카테고리에서 '정의'와 '선'의 의미를 조망하게 되면 둘이 동의적同意的 성격을 띤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파스칼의 일갈은 자연스럽게 선악의 병존성으로 연결된다. 헤세가 하나님(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이 아닌 아프락사스라는 고대 희랍의 신으로 후퇴(혹은 갈음)하여 자신의 세계를 전달한 것도 바로 이런 의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소설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격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끝맺음된다.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싱클레어는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데미안과 대면한다. 이제 떠나야 한다고 말하며 싱클레어에게 키스하는 데미안의 마지막 현현顯現은 어쩌면 처음부터 실존하지 않았던 싱클레어의 '참자아眞我'였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참자아를 찾았던 싱클레어의 지독한 여행에서 데미안의 존재는 독립된 실체 이전에 오롯한 내면화 과정으로서의 싱클레어의 진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합일은 다시 한 번 이 소설의 메세지를 가감없이 표출한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 스스로 자기 실존의 내용과 목적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꼭 그 길로만 가야 한다는 것을.

   성장이라는 테마를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의 방식으로 이렇게 깊은 곳까지 언어로 표현해낸 헤르만 헤세는 과히 대작가답다. <데미안>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고전이 됐다.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은 헤세의 이 보석같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심연을 관통적貫通的으로 사색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헤세의 신비로운 문장을 통해 뜨거운 감동의 열정을 담아냈는가. 그러나, 흥미롭게도, 정작 한없이 감화된 사람은 바로 헤세 자신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문학인생은 '<데미안> 전'과 '<데미안> 후'로 정확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헤세야말로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진본을 찾았던 것이다. <데미안>은 실로 괴물과 같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는 청소년 시기에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나는 이십 대 이전에 이 두 권의 짧은 소설을 꼭 읽어내야만 한다는 데, 그것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데 내 명예를 걸겠다. 두 소설은 공히 '성장'을 주제로 한다. 다만 독자와 호흡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데미안>이 내포적이고 철학적인 방법으로 건강한 인간이 지향해야 할 선악善惡의 공유성을 탐구하는 데 비해 <수레바퀴 아래서>는 외연적이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인간 삶의 내용과 목적을 질문한다.

   십 대는 어떤 시기일까. 이 대목에서 문학평론가 강유원의 말을 빌리자. 이십 대가 다양한 자아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시기라면 삼십 대는 애써 찾은 자아를 거부하고 자신의 현존을 부정하는 시기이다. 그렇다면 십 대는 무엇인가. 나는 감히 말하겠다. 자아의 최소한의 개념조차 상정하지 못한 채 인생의 수레바퀴 아래서 외롭게 살아가는 위험천만한 비형성적 존재라는 것을.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가정과 학교와 사회의 부조리한 전통에 허덕이며 망가져가는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를 전면에 내세운다. 한스는 작가 헤세의 분신일 뿐만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닌 인생을 살아가는 이 시대 모든 젊은이들의 초상이다. 한스에게 자신을 짓누르는 바깥 세계의 모든 교조적 전통은 공포이자 폭력이다. '바깥'에 의해 한 소년의 '내면(자아)'이 굴곡되고 짓밟혀가는 소설의 줄거리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수구적守舊的 관습이 얼마나 깨기 어려운 것인지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점점 망가져가는 한스의 삶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은 전혀 없었던 걸까. 작가는 이야기 속에서 한스의 내면을 공유했던 세 친구의 존재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던 친구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난다. 고향의 소꼽친구 레히텐하일, 수도원에서 만난 문학소년 하일너, 이성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한 하일브론의 소녀 엠마, 이들은 각기 다른 존재성으로 한스의 내면을 촉촉하게 적셨던 인물들이다. 한스는 이들과 있을 때 만큼은 자기의 삶을 살았고 자기의 내면에 정직했다. 세 인물과 이별할 때마다 자기 삶을 잃어버리며 고독의 자장에 허덕이는 한스의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고 쓰라리다.

   행복한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행복하기 위해'라는 무언無言의 전제가 깔려 있다. 불행을 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꿈, 공부, 일, 사랑, 취미 등은 모두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자기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는 '어떻게'를 지향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와 내 주변이 밝게 빛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하지만 정말 우울한 것은 이마저도 호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십 대는, 그 시절은, 그 애매한 시기는, '자기자신'을 잘 모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 대는 정형성定型性과 비정형非定型性이 대립하는 시기이다. 정형은 고착화와 교조화의 폐단을 가진다. 반면 비정형은 무개념과 비정의의 한계를 지닌다. 자아를 명확하게 완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형과 비정형 사이에서 헷갈리며 고뇌하는 어린 시절의 삶의 무게은 분명 고약하고 지독하다. 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고 숭고한 무게이기도 하다. 그 무게는 '내'가 '나'를 알고, '내'가 '나'가 되며, '내'가 '나'로 사는 과정 속에서 점점 '질량'이 되어 보존의 법칙을 띠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질량을 알고 체감할 때 비로소 나는 온전한 '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헤세의 이 위대한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한스에게 엄마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한스의 엄마는 오래전에 죽었다. 엄마라는 존재의 결락缺落은 한스의 짓눌린 삶이 종내 회복되지 못했던 본질적인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감당하는 모든 내면적인 고통에는 사랑의 부족과 결여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인간 사랑의 가장 거대한 원형인 모성의 결핍은 소설의 시작점부터 치유의 가능성을 파괴해놓은 작가 헤세의 의도인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한스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아빠의 실존은 궁극적 사랑의 현현顯現인 엄마의 부재를 더욱 간절히 각인시키고 만다. 이로써 독자는 한스가 가진 고통의 사회성과 결핍의 본래성을 더욱 명징하게 읽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메시지를 모성과 연결짓는 사유는 유의미하다. 동시에 이 책의 필독을 청소년으로 한정해서 권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성장의 테마를 생산적으로 관통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주인공적 입장도 중요하지만 기성세대라는 권위로 전통의 벽을 만들어놓은 일차적 '피의자'로서의 부모의 입장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위부의 모든 권위에 맞서 싸운 한스의 치열한 삶은 본질적으로 가정에서 치유받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된 비극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개인과 사회를 잇는 연결고리는 항시 가정이었다.

   그 어떠한 해석이든 <수레바퀴 아래서>는 위대한 고전이다. 쉽고 간결하며, 무엇보다 이야기 자체만으로 어린 시절이 갖는 보편적인 질문을 처연하게 담아낸 걸작이다. <데미안>이 주는 철학적 무게와 관념적 천착이 싫은 독자들에게 <수레바퀴 아래서>는 가장 훌륭한 성장소설로 갈음될 수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은 지 어느새 반 년이 지났다. 반드시 서평을 남겨야 하는 작품임에도 아직까지 정리를 못한 채 둥개고 있다. 소설 자체는 쉽다. 갈무리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여태까지 나는 철학자와 사상가로서 카뮈를 대해왔다. 소설가로서의 탐구가 소소한 이상 <이방인>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나는 지금까지 카뮈를 사르트르의 반대편에서 주로 해석했다. 카뮈에 대한 내 긍정과 동경은 사르트르와 멀어진 내 변화의 크기가 추동해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음사판의 <이방인> 해설이 사르트르에서 역자 김화영의 것으로 교체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다. <이방인>을 수용하는 디테일은 사르트르와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 주관적 기호와는 별도로 <이방인>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입체적 연결고리를 이어나가야만 하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카뮈는 사르트르와 이 작품이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냐 아니냐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사실 사르트르는 카뮈가 <이방인>을 써 문단의 총아로 등장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는 카뮈의 <이방인>에서부터 <페스트> 그리고 사고로 죽기 3년 전 발표한 <전락> 등을 격찬하면서도, 카뮈가 쓴 <반항적 인간>을 두고 극단적인 논쟁을 벌였다. 더욱이 <이방인>에 대한 카뮈와 사르트르 간의 실존주의 논쟁은 20세기 문학사에서 손에 꼽힐 만한 화두였다.

   주지하다시피 <
이방인>의 키워드는 '부조리'다. 하지만 그 의미와 성격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개념을 상정했다. 카뮈의 실존주의는 기존의 통설적 실존주의와는 구별된다. 엄정한 철학적인 방법론으로 구성된 학문적 이론이라기보단 그냥 인간이 가지는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인상과 대응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사르트르와 벽을 세웠던 것 아니겠는가. 카뮈 식의 부조리에 대한 개념화가 결락된 채 그저 사르트르의 대책점에서 <이방인>을 읽어내려 했던 내 천착이 오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의 깊은 이해와 카뮈 세계관의 진지한 학습이 전제되지 않고는 <이방인>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실존주의 사상의 단초가 되는 부조리 따위를 철학서 속의 사어가 아닌 실제의 삶과 일상 속에서 기묘한 괴리나 위화감과 함께 직접 느껴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방인>은 무의미한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이에 <이방인>의 완벽한 갈무리를 위해 세 가지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됐다.

   역자 김화영 교수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엄마'와 '어머니'의 번역 차이가 소설 전체의 느낌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한다. 김화영의 지적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번역판의 재독을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 이에 문학동네판으로 다시 읽기로 했다. 이게 첫 번째 과제다. 그리고 카뮈의 부조리에 깊이 침잠하기 위해서 그 전초가 되는 <시지프 신화>를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요가 생긴다. 이것이 두 번째다. 마지막으로, 실존주의의 태동성과 역사성이 담보된 실존 철학과 문학의 알맹이들에 보다 깊이 감화되기 위해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부터 살펴보아야 하는 수고로움이 발생하게 된다.

   상기
세 가지 수고로움은 나에게 소설 <이방인>을 보다 입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불가결한 과제다. 이를 통해 이 지독한 작품에 대한 내 입장정리가 보다 명료해지기를 기대한다. <이방인>은 분명 흥미로운 텍스트다. 하지만 동시에, 피곤하고 고약한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남미편 2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일생을 지배했던 '세 가지 열정'에 대해 말했다. '지식에 대한 탐구욕', '사랑에 대한 갈망',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그것이다. 러셀의 자전적 고백은 곧바로 내 책 읽기의 목적과 부합한다. 러셀의 인생이 다독多讀과 다작多作으로 점철된 책 속의 삶이었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그와 나는 책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세 가지 목적에서 일치하게 된다. 즉 나는 책을 통해 지식을 얻고 사랑을 탐구하며 박애를 반추하는, 고독하지만 행복한 독자인 것이다.

   이러한 내 독서철학은 작가 오소희의 문필철학과 보기 좋게 일치한다. 러셀의 세 가지 열정에서 뒤의 두 가지는 오소희의 텍스트와 자연스럽게 양립한다. 오소희는 떠나야 할 때 비로소 떠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항시 사랑을 말해왔다. 또한 인류를 향한 깊은 연민을 표출해왔다. 터키에서 남미로 이어지는 그의 비블리오그래피 속에는 '사랑-연민' 코드로 엮인 오소희표 휴머니즘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내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세 번째 이유다.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는 여행작가 오소희의 남미시리즈 두 번째 책이다. 1권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에 연속된 텍스트로서 '콜롬비아-에콰도르-칠레-볼리비아'로 이어지는 여행후기를 담았다. 2권은 1권에서 다루지 않은 여러 나라를 관통한다. 각 나라의 특징과 그곳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여전히 백미다. 저자의 글감을 포착하는 능력과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내는 문필력 또한 연속적이다. 무엇보다 장장 세 달에 걸친 지독한 여행의 말미가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갈무리되었다.

   남미의 각 나라가 갖는 개별성은 남미국가 전체가 갖는 보편성 만큼이나 흥미롭다. 저자는 크고 웅장한 것보다 소소하고 보잘 것 없는 데서 여행의 가치를 발견하는 습관이 있다. 그 습관은 남미여행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남미의 부국 브라질은 핵심만 짚고 아르헨티나는 이구아수 폭포 때문에 잠시 들릴 뿐이다. 저자가 가장 매료된 나라는 최빈국 볼리비아로 보인다. 라파스에서 살림을 차렸을 정도로 오래 체류했을 뿐만 아니라 돌고 돌아 다시 와서 결국 볼리비아에서 남미여행을 실질적으로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비록 국력은 왜소한 나라였지만 항시 활기와 온정이 넘쳤던 볼리비아만의 매력이 저자가 그곳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남미에서도 중빈의 존재는 작지 않다. 중빈은 첫 여행지 터키에서 세 살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열 살이 됐다. 지난 7년간 아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인식하기도 전에 나는 두 권의 여행기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중빈의 존재적 크기를 무의식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남미에서 중빈은 '힐링'이었다. 중빈이 가져간 바이올린은 여행지 곳곳에서 사람을 감싸고 공간을 채우는 힐링의 아이콘이었다. 라파스에서는 거리의 악사로서, 오타발로에서는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사막의 지프차 안에서는 지친 자들을 위로하는 격려자로서 중빈의 바이올린은 쉼없이 연주됐다. 그때마다 그곳의 사람들은 평온해졌고 그곳의 온도는 따뜻해졌다. 연주실력과는 무관하게 음악이 선사하는 전우주적 공감대가 중빈의 바이올린을 통해 곳곳으로 마음마음으로 오롯하게 전파된 것이다. 중빈의 연주는 장소와 상황에 따라 변질되거나 훼손될 수 없는, 예술이 본래적으로 지닌 궁극적인 순수성을 진솔하게 발현해냄으로써 사람과 공간을 빛나게 했다.

   지난한 여행의 끝은 사막이다. 원래 사막여행이 마지막 코스는 아니었다. 볼리비아 여행 당시 버스파업으로 인해 남부로 가는 길이 전면 차단된 것이다. 저자는 라파스에서 파업 소식을 듣고 볼리비아의 아타카마 사막과 남부의 소금사막 우유니를 여행코스의 마지막으로 변경한다. 돌고 돌아 볼리비아로 다시 가는 비효율적인 코스였지만 소금사막 우유니를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한 우연이었다. 하지만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멋진 결말로 이어졌다. 경로를 수정하면서까지 꼭 가야만 했던 볼리비아의 기묘한 사막은 저자의 '긴 이완'을 완벽하게 갈무리한 아름다운 '필연'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이다.

   사막은 객관이 최대를 넘어 과잉으로 피드백되는 공간이다. 모든 외연이 허물을 벗고 자기 자신을 가장 객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구조와 계급이 파괴되고 형용사와 부사가 삭제된다. 오직 명사만 남는다. 지구라는 작은 행성을 가꾸고 책임지는 평등한 존재로서의 '인간' 말이다. 그 보통명사만이 아무런 수식 없이 담백하게 놓여질 뿐이다. 그렇기에 사막은 고독하다. 인간의 동일성과 평등성을 묵묵히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막이 선사한 실존적 고독을 깊이 음미하면서 기나긴 여행의 대미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책을 덮고 오랫동안 상념에 빠졌다. 인간에 대해 새삼 궁구했다. 항시 개인주의를 경도했던 내게 오소희의 일갈은 '내'가 아닌 '우리'를 들여다보게 했다. 그는 항시 인간을 탐구했고 조명했다. 공간은 비본질이었다. 오직 본질은 인간뿐이었다. 그가 극도의 집중력으로 인간을 관찰할 때면 여행지는 어느덧 배경으로 멀리 물러나 그 목적가치를 철저히 휘발시켰다. 그의 여행패턴은 언제나 사람이 시종始終을 지배하게 했다. 이러한 오소희식 인간학人間學은 러셀의 세 번째 열정에 그대로 침잠한다.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야말로 작가 오소희가 세계여행에서 그토록 갈급해왔던 유별난 사랑의 원류源流였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는 이 작은 행성에 공존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똑같이 2세들의 미래를 소중해하는 기본적 공통점으로 묶여 있는 동일종족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나'를 뛰어넘는 '우리'의 평화를 지향할 의무가 부여된다. 그것은 진실된 평화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평화, 단지 우리 시대만이 아닌 영원한 평화인 것이다. 작가 오소희의 에세이는 바로 그 선상에까지 닿아 있다.

   오소희가 옳았다.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

 

 

 

 

Written By David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남미편 1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작가가 있다. 보통 독자가 작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은 고만고만하다. 처음에는 작가의 텍스트에 매료된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게 되면 작가 자체를 사랑하는 경향을 띤다. 한 작가를 오랫동안 탐구하고 사랑하다 보면 어느덧 그 작가와 그의 텍스트가 한 지점에서 합일되고 응축되는, 그리하여 자기 가슴속에 아로새겨지는 귀결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왠만해서는 이별할 수 없는 지독한 사랑이 시작되고야 만다.

에세이작가 오소희는 나에게 그런 존재다. 어느덧 그는 나에게 농밀한 존재가 되어 있다. 나는 그를 통해 내 젊은 시절을 가득 채웠던 대작가의 숨결을 읽었다. 오소희는 톨스토이다. 사랑을 말하기 때문이다. 오소희는 괴테다. 지독하게 사랑을 말하기 때문이다. 오소희는 하루키다. 사랑을 말해도 '너무'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소희는 사랑 예찬론자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첫 번째 이유다.

오소희는 나에게 항시 '신비로움'을 견지한다. '신비롭다'는 말은 "시간이 가진 권력을 이겨낸다"는 내밀한 속성을 함의한다. 신비롭기 위해서는 '과거·현재·미래'가 동일한 시간대로 통합되고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을 견디고 무료를 초월하며 실존을 관리하는 자존감은 신비로움을 발현해내는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다. 오소희는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현재라는 단 하나의 시간대로 통합시키는 신비로운 작가인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두 번째 이유다.

사랑을 예찬하고 신비를 견지하는 작가 오소희의 신간이 출시됐다. 그의 신간소식은 언제나 나를 들뜨게 했(한)다. 이번에는 남미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지 이번 신간은 두 권으로 구성됐다.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은 그 시리즈의 첫 번째다. 이 책은 '페루-볼리비아-브라질-콜롬비아'로 이어지는 남미 여행기다. 역시 아들 중빈과 함께 했다. 세 살이었던 중빈이는 이 책에서 열 살이 되었다. 벌써 7년의 시간이 흘렀다.

남미를 여행지로 삼은 저자의 선택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간 다뤄왔던 나라들을 보라. 터키, 라오스, 아프리카는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여행지가 아니다. 지금까지 저자가 보여준 세계여행의 동선은 그의 여행포인트를 잘 집약한다. 저자에게 여행지의 네임벨류는 비본질에 속한다. 오히려 그것을 거부한다. 대중의 시선이 잘 미치지 않는 곳, 인기 여행지가 되기에 부족한 곳이 저자의 목적지가 된다. 저자가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는 피로할 때였다. 일상에서 더 낮아지기 힘들어 자신의 직립을 피로하게 느낄 때 비로소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여행철학은 남미가 가진 본질적인 매력이 무엇인지를 은밀하게 암시한다.

신간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은 저자 특유의 문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전작과는 다른 힘이 느껴지는 책이다. 전작들은 저자의 주관적 관조를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를 읽어내는 재미가 중심이 됐다. 반면 이 책은 객관적 사실에 의거한 각 나라와 역사에 대한 서술을 이례적으로 많이 할당했다. 즉 남미국가들이 갖는 고유성, 역사성, 연계성을 적절한 분량으로 제시함으로써 여행의 에피소드와 사람들을 관찰하며 추출한 기존방식의 이야깃거리를 보다 긴밀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남미에 생소한 독자에게 나름의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그곳을 더욱 치밀하게 쳐다보게 하는 장치가 된다. 잉카의 중흥과 몰락,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정복사, 남미의 독립영웅 볼리바르, 페드로 2세와 룰라의 브라질 개혁 등 곳곳에 배치된 짤막한 역사 서술은 독자의 남미 탐구를 견인하는 안내서의 역할을 한다. 각 나라를 이동할 때마다 현재의 남미를 일군 역사적 사실에 대해 짧지만 요점적으로 정리했다. 독자는 저자의 자상한 배려로 인해 남미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저자의 발자취를 더욱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탐색한 남미의 삶은 한국의 그것과는 많이 대조적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맨살을 그대로 내보이는 남미인의 모습은 겉치레를 중시하는 한국인의 유전자와는 조화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경직'의 한국적 삶은 '이완'의 남미적 삶과는 다르다. 하지만 서로의 장단을 논하기 앞서 저자는 매우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그것은 바로 '행복'이다. 속도와 정보, 경쟁과 효율의 논리에 휩싸인 한국식 신자유주의는 세계 1위의 자살률로 대변되는 불행복한 현재상의 원인이다. 그러나 한국보다 훨씬 도태된 경제력을 가진 남미국가의 느리고 이완된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월등히 높은 행복지수의 동기가 된다. 이 대극적 차이에서 저자는 진정한 행복의 원형을 반추한다. 서울에서의 경직됨이 새삼 화두가 될 만큼 남미는 저자에게 이완됨의 극치를 보여주며 평안을 선사한 것이다.

저자는 또 사랑에 빠졌다. 매 여행지마다 저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소가 있었다. 터키의 올림포스가 그랬다. 남미 또한 저자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장소가 있다. 그곳은 세계문화유산인 페루의 마추픽추도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폭포 이구아수도 아니다. 또한 브라질의 아이콘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도 아니고, 지구의 밀림 아마존도 아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콜롬비아 외곽의 작은 마을 '빌라 데 레이바'이다. 본래 사랑에 빠지면 호기심은 증폭된다. 장소를 사랑한 자는 그곳의 모든 특징을 발견하고 싶고 모든 길을 탐험하고 싶다. 조용하고 한적하며 아늑한 도시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저자는 녹록지 않은 사랑에 빠진 자기자신의 모습을 직시한다. 마치 사랑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자인 듯, 끝내 눈물을 떨구며 상념에 잠기는 저자의 지독한 사랑이 멋지다.

저자의 사랑타령은 결국 책의 제목으로 회귀하게 만든다. 제목의 의미를 사유했다.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은 멋진 문구다. 여기서 방점은 '안아라'에 있지 않고 '내일은 없는 것처럼'에 있다. 현재의 충실을 역설하는 제목의 의미는 사랑의 원형적 기작을 암시한다. 사랑은 본래적으로 현재형이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다.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다. 과거와 미래는 교만한 시간대다. 오직 현재만이 겸손하다. 바로 지금 안아야 한다. 인간 삶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은 더욱 '지금'의 중요성을 각인시킨다. 결국 책 제목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은 작가 오소희의 사랑에 대한 실존적 세계관을 과히 집약적으로 담아낸 명문장이다.

책을 덮은 후 다시 생각했다. 나와 오소희 사이의 거리를. 다시 이 서평의 서두로 간단히 돌아갔다. 그렇다. 나에게 오소희는 언제나 사랑스럽고 신비스러운, 여전히 그런 작가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내가 그를 너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흐뭇한 마음으로 다음 권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로 손을 옮긴다.

 

 

 

 

 

 

 

Written By David

http://gilsamo.blog.m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