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1 소설 조선왕조실록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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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사회를 진보시키는가. 왜 역사상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는가. 혁명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혁명은 선한가. 숭고한 것인가. 요컨대 '혁명'이란 단어는 이런저런 질문을 실타래처럼 엉키게 하며 깊은 사유 속으로 밀어넣는 힘을 가졌다.

   우리시대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김탁환이 '혁명'을 말한다. <불멸의 이순신>, <열녀문의 비밀>, <나, 황진이> 등 그간 역사소설로 사랑을 받아왔던 그가 조선왕조 500년 전체를 소설로 재구성하는 거대한 작업을 위해 펜을 들었다. 김탁환의 신작 <혁명>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끝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의 내면세계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는 순간(1392년 3월 17일)부터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당하는 순간(1392년 4월 4일)까지 18일간의 비망록이다.

   소설의 구성은 일관적이다. 매 장마다 이성계, 왕(공양왕), 정몽주, 정도전의 순서로 화자가 교차되며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더욱이 문체의 변화무쌍함과 편재성은 소설의 재미를 입체적으로 폭발시키는 원동력이다. 작가는 편지, 가전체 등 당시 신진사대부들이 애용한 다양한 문체를 통해 각 인물의 내면을 관통한다. 특히 유배지 영주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화자 정도전의 유쾌한 내면을 엿보는 맛은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작가는 특유의 공력으로 '이성계-정도전-정몽주' 사이의 공통된 꿈과 이상, 그러나 분명히 달랐던 혁명의 방법론적 성격에 대해 탐구한다. 동시에 앞선 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꾼 또 하나의 혁명가 이방원의 외면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소설의 시종을 일관되게 지배하고 있는 네 인물들 사이의 공통과 대척의 내외면적 대비는 이야기의 긴장감을 증대시키는 일차적인 구조가 된다.

   주지하다시피 정도전과 정몽주는 혁명 동지다. 같은 스승에게 배웠고, 같은 곳을 바라봤으며, 같은 뜻을 품었다. 두 사람은 맹자의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리학적 이상국가, 누가 왕위에 오르든 건강하게 돌아가는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루려 했다. 왕이 아닌 백성을 위한 국가여야 한다는 점에서 정도전과 정몽주는 하나였다. 정도전이 정몽주였고 정몽주가 정도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상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정몽주는 고려라는 체제 안에서 그것을 이루고자 했고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소설은 동일한 것 같으면서도 확연히 다른 두 혁명가의 대조점을 극히 절제된 내적 번민의 언어로 박진감있게 그려낸다.

   소설의 주인공은 단연 정도전이다. 정도전 자신의 내면을 공개하는 일기체가 정도전 외의 인물들을 이끌어가는 편년체를 압도한다. 소설의 시공간적 시점과 사건의 전개방식은 유배지에서 혁명 과업의 디테일을 사유하는 정도전의 내면세계에 종속되어 있다. 그만큼 소설 속에서 정도전의 아우라는 독보적이다. 이성계, 정몽주, 이방원 등은 한참 뒤로 밀려나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작가는 주인공인 정도전을 유독 부각시키며 그에 대한 애착을 직선적으로 내뿜는다.

   그래서인지 소설 <혁명>은 인물 갈등에 있어 구도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대비를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혁명의 본질적인 대척점이라 할 수 있는 이방원의 존재감을 후퇴시킨 것이다. 본래 혁명의 균열은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비에 있다. 왕이 아닌 백성이 주인되고 재상이 정치하는 나라, 이를 위해 법과 제도를 정립시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나라를 건설하려 했던 '정도전 혁명'에 대한 궁극의 보이콧은 절대왕권주의를 역설한 이방원이었다. 정몽주의 죽음까지만으로는 정도전 혁명의 명암을 입체적으로 천착하기 힘들다. 최소한 '1차 왕자의 난'과 함께 정도전의 죽음까지 다뤘다면 훨씬 더 세밀한 혁명성의 전후를 살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서평의 서두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혁명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혁명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가. 김탁환은 왜 지금 혁명을 말하고 있는가. 21세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작금의 상황에서 과연 혁명은 누구를 위한 주제인가. 소설 속에서 정도전은 혁명은 '절망을 먹고 자라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어 그는 "혁명을 도모한다는 건 절망의 끝에 다다랐다는 뜻일세. 지금 여기의 사람과 제도로는 도저히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확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절망에서 싹튼 혁명이 무조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정도전은 일갈한다. 혁명의 성공에는 힘이 필요하기에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가 혁명가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혁명의 본질에 관한 이러한 여러가지 질문들은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그러나 혁명의 태동에 관한 분명한 진실이 있다. 역사적으로 반복 입증된 결론은 명징하다.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가진 자가 교만할수록, 사회가 부조리할수록, 그래서 그것에 '분노'하고 '실패'하며 '절망'하는 자들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혁명을 원했다. 명확한 사실이다. 소설 <혁명>의 시의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혁명이 무엇을 먹고 자라는 줄 아는가. 절망이라네. 분노에 뒤이은 실패 그리고 절망. 이 셋을 반복하는 동안 혁명은 싹이 트고 뿌리와 줄기가 뻗고 가지가 펼쳐진 뒤 꽃이 피고 열매가 매달리지." (1권,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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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
복거일 엮음 / FKI미디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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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는 우리사회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는 자유주의자들(自由主義者, liberalist)의 고백집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당연 '경제적 자유주의(economic liberalism)'를 의미한다. 총 스물한 명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소설가 복거일을 위시하여 <대한민국역사>의 저자 서울대 이영훈 교수,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번역한 김이석 박사, 전교조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명지대 조전혁 교수(전 국회의원) 등이 눈에 띈다. 공저자 대표는 복거일이 맡았다.

대부분 대학 교수로 구성된 공저자들의 다양한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다. 각기 다른 자유주의에 이른 배경과 원인이 소개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위 '진화적'으로 자유주의자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회주의의 허구를 학문적으로 깨달은 후 자유주의로 전향한 사람도 있다. 또한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유사성을 파헤치며 논증한 사람도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가지각색의 에세이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자유주의의 숭고한 정신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로 대변되는 집단주의의 허구를 생생하게 경청할 수 있게 된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첫 장의 서울대 이영훈 교수 편이다. <수량경제로 다시 본 조선후기>를 위시하여 평소 그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녹록지 않은 내공을 갖춘 학자라는 인식을 견지해왔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해서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했는지는 나에게 자못 흥미로운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 교수는 학자답게 실증적인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이탈했다. 그는 18~19세기 농민들의 계층별 동향을 분석하면서 농민층이 부농과 빈농으로 분열되는 게 아니라 표준적인 경작규모의 소농 계층으로 수렴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또한 양반가의 15~16세기 상속문서에 적힌 노비들의 수를 연구하면서 조선시대를 봉건사회로 규정해서는 곤란하다는 깨달음에 도착한다. 조선시대 경제사를 세밀한 실증으로 연구해가면서 그는 사적 유물론을 중심으로 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뼈대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 교수뿐만 아니라 각 공저자들은 각기 다른 학문적 입장에서 범사회주의를 비판하며 자유주의의 올곧은 가치를 설파한다. 미제스(Ludwig Mises), 하이에크(Friedrich Hayek), 프리드먼(Milton Friedman), 뷰캐넌(James Buchanan) 등 저명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과 사상도 각 편마다 몇 토막씩 간략히 소개된다. 디테일은 떨어지지만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학문적 입장을 가볍게 훑어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성은 충분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주의를 오해한다. 아마 자유주의의 밑바탕인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利己主義, egoism)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유교권으로 속해 있던 한국과 중국,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후 군사적 집단주의에 함몰된 일본 등의 동아시아 지역은 개별 인간에 대한 철학을 흡수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세계의 모든 문제를 '집단(공동체)'으로 묶어 사고하는 습관이 은연 중 몸에 배었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개인주의를 자연스럽게 수용한 서구사회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다. 자유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류 보편의 가치이다. 밀(John S. Mill)이 주장했듯이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개인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곧바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로 구분되어 정의된다. 17~19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은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의 토대를 이룬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이 둘을 모두 포함해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라 명칭한다. 20세기가 되어 자유주의는 앞에 '진보', '질서', '신新' 등의 이름을 붙이며 그 형태와 의미를 변화시켜갔다.

21세기에 당도한 지금의 시점에서 자유주의를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토론이 불가한 보편적 통념으로서 자유주의의 역사성 속에 선언적으로 녹아있다. 문제는 경제적 자유주의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주의 = 경제적 자유주의'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자유주의 논의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프리드먼이 강조했듯이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역사적으로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에서만 가능했다. 물론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아닌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그런 전례가 없다. 즉 정치적 자유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으로서 자본주의가 놓여 있는 것이다.

'새 정치'를 주장하며 신당을 창당한 모세력은 자신들의 이념을 '진보적 자유주의'로 명명했다. 그들이 '진보적'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도로 사용했는지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19세기말 밀을 중심으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신자유주의 1세대로서의 '진보적 자유주의(progressive liberalism = 사회적 자유주의, social liberalsim)'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아 보인다. 본래 진보주의와 자유주의는 양립 부자연 관계다. 역사적으로 용어의 혼선이 있다. 본래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말은 정치학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진보적 자유주의가 20세기 들어 서구사회에 많이 보급되면서 기존의 'liberalism'의 개념은 'progressivism'과 혼용됐다. 그 결과 요즘에는 아예 진보를 '리버럴(liberals)'로 부르고 있다. 즉 'liberals'의 의미 속에 함의된 '보수'와 '진보'의 성질이 혼용되면서 복잡성을 띠어왔다. 그래서 이와 구별하기 위한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용어 전환의 역사성을 전제한다면 고전적 의미에서의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자유지상주의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단언컨대 나는(도) 자유주의자다. 철학적이고 체질적으로 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를 싫어한다. 특히 사회주의의 원뿌리인 마르크스주의(Marxism)는 과히 증오하는 수준이다. 숭고한 개인의 개별성(individuality)을 어줍잖은 평등의 논리로 재단하여 결국 집합주의(集合主義, collectivism)로 귀결시키고야 마는 사회주의적 논리와 사상은 치를 떨 정도로 거리감을 둔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와 이기심이다. 역사의 진정한 주체는 자유를 본성으로 하는 개별 인간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이를 먹어갈수록, 현실의 문제에 치열하게 복무할수록 이는 점점 더 확연해진다.

20세기 세계사를 유심히 탐구하다보면 '사회 역할의 강조'와 '개인 자유의 보장'은 정확히 반비례로 등가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회(국가)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는 개입주의자들은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의 유혹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사회공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이 사물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인식론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플라톤과 데카르트 식으로 환원하면 '이상주의(理想主義, idealism)'와 '설계주의(constructivism)', 그리고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가 구조론적으로 병합된 세계다. 이러한 병합구조는 칼 포퍼(Karl Popper)가 말한 바와 같이 '의도하지 않는 결과의 법칙'으로 사회의 전체주의적 기작을 생산해낸다. 현대사는 이를 명징히 증명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항시 천국으로 포장되어 있다.

인간의 이성은 위대한 힘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한없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며 불완전하다. 인간 이성에 대한 교만은 밀부터 뷰캐넌까지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외쳤던 경고였다. 그렇기에 개입주의의 교주라고 할 수 있는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조차도 '하아비가의 전제'를 가정했던 게 아닌가. 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매우 불완전하게 본 하이에크의 입장에 동의한다. 또한 "인간의 인식은 의식의 주관적 산물이므로 인간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칸트(Immanuel Kant)의 인식론을 적극 지지한다. 인식을 '형식(능력)'과 '내용(재료)'으로 구분하여 경험과 이성을 동시에 강조했던 칸트 철학이 현대 고도자본주의 사회의 복잡성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칸트의 명언은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틀과 형식이 없어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간 이성의 긍정과 부정을 양립시키며 경험을 통한 끊임없는 인식 능력의 발전을 주장했던 칸트의 견해는 충분히 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는 물론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개별 시민 모두에게 말이다.

자유주의를 이러한 칸트주의(Kantianism)의 입장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유주의자라고 해서 자본주의의 폐해로 꼽히는 빈부 격차, 환경파괴, 독과점, 공공재 부족 등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궁핍한 자에게는 정부가 따뜻한 최소한의 생활권을 보장해줘야 하고, 기업거래에 있어 명확한 법치를 세워 독과점을 규제해야 하며, 균형을 잃고 파괴되는 환경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각론에 있어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사회를 보는 기본 철학이다. 자유주의냐 사회주의냐는 결국 철학의 문제이다. 자유주의자로서 내 철학은 분명하다. 내 밥은 내가 해먹는 것이고, 자식 우유는 부모가 주는 것이며, 노후는 본인이 책임지는 것이다. 그게 안 될 때에 비로소 사회가 돌보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현실의 각론에 치열하게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자유주의 철학에 대한 내 신념은 더욱 확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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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와 길을 걷다 -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동화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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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오소희를 처음 만난 건 꽤 오래전의 일이다. 당시 그는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한 터키 여행을 에세이로 출간한 직후였다. 문단에 갓 데뷔한 시기였던 것이다. 광화문의 대형서점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대면했다. 인근 삼청동의 유명한 수제비 집에서 식사를 했다. 식후엔 차를 마시며 대화꽃을 피웠다. 우리는 차츰 서로를 탐색해갔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 채 십 여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에까지 도달해 있다.

   사석에서 작가와 단둘이 만나는 일은 독자에게는 분명한 특권이다. 그러나 그 특권은 섬세하고 예민한 수고를 담보할 때만 아름답다. 몇몇 작가들과 사석에서 교류할 기회가 적지 않았다. 그러면서 깨달은 건 '작가의 우주'를 맨얼굴의 형식으로 받아낼 때 독자는 무언가의 예민한 감각으로 무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텍스트 바깥의 현실공간에서 작가와 조우하게 될 때 독자는 반드시 이러한 수고로움을 겸손한 마음으로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작가와 독자는 '디테일의 시공간차'라는 묘한 권력관계 속에서 전쟁을 벌이는 독특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복수의 굴절력을 가진 초공간의 우주이다. 작가는 오직 '언어'라는 제약된 차원의 도구로써 '그 우주'의 각론을 '이 우주'의 총론으로 편입시킨다. 독자는 '이 우주' 속에서 '그 우주'를 탐구하며 또 다른 '저 우주'의 스펙트럼을 자신의 현실 안으로 구속시킨다. 필연성을 띤 '그 우주'의 고유한 디테일은 다수 해석성을 관통하여 개별 독자의 심연 속으로 배달된다. 이에 대한 교감과 천착이 준비되지 않은 작가와 독자 간의 '비텍스트화'는 오히려 두 존재 사이에 불균형적 애매성이 채워지는 요인이 된다. 그런 차원에서, 처음으로 고백한다. 나는 작가 오소희와의 '거리두기'에서 항시 이 모호성을 극복할만한 여백을 유지해왔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성상性狀이 바로 이 대목에서 가시화된다.

   내가 사랑한 이상으로 그는 텍스트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진보적으로 불태웠다. 오소희 전작全作을 완성해온 나에게 그의 비블리오그래피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한다. '터키'에서 '동화'까지 여태까지 쏟아냈던 그의 모든 텍스트들은 시공간의 엄연성을 무력화시키며 나에게 '현재'라는 동일선상의 사랑을 요구하며 유혹한다. 그랬다. 나는 언제나 그의 텍스트 안팍을 현재의 관점으로 사랑해왔던 것이다.

   작품의 진화적 활화活火를 끊임없이 추구해온 그의 현재성은 어느덧 동화의 세계까지 도달해 세상에 찌든 내 피로와 무력을 포근하게 감싼다. 그의 신간 <어린왕자와 길을 걷다>는 동화 리뷰집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열여덟 편의 동화를 스무 개의 리뷰로 해설한다. 작가는 각 동화마다 자신만의 주석을 달아 인간 삶의 다양한 주제를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로 걸러낸다.

   책의 얼개는 간단하다. 동화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작가의 경험을 재료로 하여 자신만의 주관적 해석을 빚어낸다. 여행과 일상에서 추출된 다양한 에피소드는 작가가 지닌 고유한 표현력을 통해 독자에게 스킨십한다. 그의 따뜻한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경탄하게 하고,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위로하게 하며, '행복한 청소부'를 경외하게 한다.

   이 책의 힘은 각 동화가 가진 메시지의 본질에 작가 자신의 삶을 녹여낸 데 있다. 책 곳곳에서 작가는 자신의 삶의 족적을 그대로 투영시킨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편에서는 시댁 식구의 이야기를, <안녕, 나의 별>편에서는 강아지 '별이'의 이야기를, <꾸뻬 씨의 행복여행>편에서는 남편의 이야기를, 각 편마다 여러 지인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동화의 아름다운 본래성을 현실세계 차원에서 승화시킨다. 이러한 작가의 시도는 동화가 비단 어린아이만의 전유물이 아닌, 오히려 어른이라서 친밀할 수 있는 텍스트라는 믿음을 직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눈물을 많이 흘리는 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내 눈시울을 적셨다. 원작 동화의 본래성은 그대로 해석자 오소희에게 전이됐고 그의 삶으로 한결 두꺼워진 감동의 피드백은 해석자의 두께를 넘어 독자 다윗에게 전도되었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나는 한동안 멈칫했다. 서른 중반을 지나 이제 마흔으로 향하는 내 인생의 중간 여정을 살폈다. 한 여자의 아내가 된, 무엇보다 두 여자의 아빠가 된 내 자신의 현존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난 어른인가. 이쯤이면 어른이 된 걸까. 혹 아직도 어린아이는 아닐까. 깊은 사유 속에서 난 간절히 기도했다. 내 영혼이 숭고한 방식으로 내 삶을 파고들어 자기공명영상 검사를 하듯이 단층으로 해부해서 '참 나'를 알 수 있기를.

   항상 그랬다. 작가 오소희는 그의 작품 속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내 속도의 점검을 주문했다. 더 나아가 시간이 가진 입체적 기작에 겸손할 것을 조언했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진정한 인생의 찬탄은 모든 시간대가 현재에서 통합되는 것이다. 삶의 감도가 높아지면 누구도 과거와 미래를 끌어당겨 현재라는 도마 위에 올려놓고 요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한 가지 맥락에서 이해되면서 감사와 기쁨과 행복의 소유가 폭포수처럼 샘솟아지는 것이다. 오소희는 항시 이 깨달음을 나에게 촉구하고야 만다.

   서평의 서두로 돌아가자. 작가와 독자는 결코 호락호락한 사이가 아니다. 둘 사이는 사랑이 있되 긴장이 있고 공감이 있되 거리가 있다. 독자는 작가의 초공간적 우주를 견뎌낼 힘을 지녀야 한다. 이 준비가 안 된 독자는 작가와의 '싸움'에서 백전백패한다. 작품에 대한 작가의 고통은 질량이 그대로 보존돼 종국 독자의 고통으로 치환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작가와 독자는 함께 성장한다. 이는 두 존재가 기묘한 사랑의 방정식 관계에 놓여있다는 명징한 알리바이가 되는 것이다. 고백컨대, 작가 오소희를 통해 나는 정말 많이 성.장.했.다.

   신간 <어린왕자와 길을 걷다>는 내게 유독 감동적이었다. 동화를 다룬 짧은 분량의 책임에도 녹록지 않은 감동을 선사받았다. 서평쓰기가 다소 힘들었다. 한 문장 쓰기도 어려웠다. 그저 시간을 담보로 해서 끈질김만으로 마지막 문단에 도착했다. 이제 서평을 정리할 때가 됐다. 전작을 모두 포괄하는 헌사로 서평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그렇다. 오소희의 텍스트는 내 마음의 해부학이며, 오묘한 정신분석학이며, 시대를 초월한 상담학이며, 인생의 진행속도를 쥐고 흔드는 영혼의 경영학이다! 그가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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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빛을 내리는 사랑은 누군가에게 빛을 가리는 그림자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뜨거운 생명은 누군가에게 차가운 사물일 뿐이다. 세상만사란 그런 절박함과 무심함 사이를 모르는 척 오가는 시간과 사건의 병렬인지도 모른다. <p59~60>

흔히 '별처럼 아름다운' 혹은 '별처럼 빛나는'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별은 아름답지만 닿을 수 없는 것의 상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가질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소유욕을 더 불태울 때가 있다. 그것을 억지로라도 꺾고 잡아 감춰두려 한다. 그런데 어쩌나. 별을 따서 집에 가져다놓으면 얼음처럼 차가워지듯. 탐스럽던 대상은 억지스런 소유와 동시에 본래의 의미를 잃는 것을. 혹은 다른 형질로 변해버리는 것을. <p93>

우리를 한계 지우는 조건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를 조금쯤 암담하게 한다. 나아가 성급한 절망을 끌어내기도 한다. 때문에 모든 선택은, 언제나 홍수처럼 밀려드는 절망을 막아내고 그 자리에 희망의 댐을 세워야만 가능해진다. 세상의 모든 선택이 축복받고 격려받아야 마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p107>

신념은 계산이 없을 때 묵묵히 지켜진다. 그리고 기적을 만들어낸다. <p142>

'노동'과 '지성'은 평등한 친구이다. 높고 낮음 없이 서로 마주보며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주는 친구. 두 친구가 생활 속에 고르게 존재할 때 우리는 보다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벽돌공이나, 주말농장에서 채소를 돌보는 연구원처럼. <p191>

여행은 그 자체로 훌륭한 마음공부이지만, 이 배움은 궁극적으로 식탁으로 되돌아와 앉았을 때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p217>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겁니다." <p217~218>

이제 나는 행복이 진흙탕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함께 부대끼는 생의 애환 속에. <P252>

진짜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 진정한 행복은 누구라도, 꼭꼭 감춰놓아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애써 힘주어 행복을 증명하고 싶은 상태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상태일지도 모른다. <p263>

"····· 정말 놀라운 건, 아름다운 것으로만 채워놓으니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거야." <p264>

동화란, 다만 우리가 '보고 싶은 세상'에 대한 기록인지도 모른다. 한 조각의 희망들이 손잡고 풀처럼 대지를 뒤덮는 세상,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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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김정일의 246분 -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진실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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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이 또 책을 냈다. 평소 그를 좋아하고 그의 책을 탐독해왔기에 이번 신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구독했다. 금번 출간의 목적과 책의 성격은 기존과는 다른 특수성을 가진다. 정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은 NLL 대화록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 위한 목적이 이 책의 집필 이유다. 특정 사건에 대한 정치적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이미 공개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전후 문맥에 맞춰 풀이했다. 결론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은 전혀 없었다는 게 이 책의 핵심이다.

   NLL 사건에 대한 내 견해부터 말하자. 나 또한 대화록 원본 전문을 읽은 사람으로서 이에 대한 입장은 단호하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은 없었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이와 반대된 생각을 갖는다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정치적 반대편에 위치한 자들의 공격은 다분히 악의적인 면이 있다. 이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과 양심의 문제이다. 원본을 읽지 않아서 몰랐다면 게으른 것이고 읽었음에도 정리되지 않았다면 무지한 것이다. 이를 처음으로 제기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정문헌 의원과 서상기 의원은 사실과 다른 거짓 발언을 했다. 의도와 상관없이 지금이라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도리다. 두 사람의 발언이 만들어낸 파장을 감안하면 국민에게 사과하고 의원직을 사퇴하는게 적절한 처사로 보인다. 그게 참된 보수의 모습이 아닌가.

   세간의 많은 사람들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자신의 견해를 내뿜는다. 특정 정파나 일부 언론의 목소리에 편승해 자신의 주관을 피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개인마다 정치적 자유가 있고 입장차가 있으며 각기 다른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그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실관계의 객관성을 가늠하는 역량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영역이 추동하는 법이다. 팩트를 발견하고 추출하는 기능은 따뜻한 가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차가운 머리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보수·우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나조차도 NLL 발언의 진실과 관련된 입장은 분명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NLL 포기 발언이 없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굳이 유시민의 책과 강연이 없어도 이미 공개된 정상회담 대화록을 진지하게 일독만 해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분명한 사실관계가 정파성이라는 이기적 용광로 속에서 모호하고 부적절한 과정을 통해 침해받고 왜곡됐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저자 유시민은 이러한 나와 엇비슷한 감정에서 책을 썼을 것이다. 더욱이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라 불릴 정도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극진한 그로서는 현실 정국에서 벌어지는 코메디와 같은 사태를 묵과할 수 없었을 게다.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 책은 분명한 한계 또한 지니고 있다. 'NLL 대화록 설명서'라는 본래의 목적을 넘어서 당시의 정상회담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다. 잘한 부분도 없진 않겠지만 못한 부분이 훨씬 더 많았던 게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여론조사를 보라. 이는 국민 다수의 견해다. 평소 참여정부의 공과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구분해왔던 저자였기에 중용을 잃어버린 서술로 자화자찬한 그의 서술은 한없이 아쉽다 하겠다.

   사실 증명을 위한 증거 제시와 그것을 논증하기 위한 논거 대입의 적절성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증명하려는 사실이 분명한 '사실'일지라도 논증방식이 설득력을 잃게 되면 증명의 고결성은 침해받는다. 유시민의 논조는 간단하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반전과 전율이 뒤섞인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정면돌파와 김정일의 호탕함이 빚어낸 낭만적인 무대였다는 게 유시민의 일관된 입장이다. 책 내용의 절반 이상을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찬양으로 도배하고 있다. 유시민의 말대로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찬양할 게 많은 축복의 잔치였을까. 저자의 견해에 동의할 수 있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만난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형편없는 점수를 주고 있는 사람이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정국을 차갑게 만든 NLL 논란의 빌미도 노 전 대통령의 부적절한 발언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부분을 꺼내서 반대편으로부터 오해를 사게 만들었다. 대북관계의 유연성을 강조하는 일부 세력들은 NLL 추후 협상 명분을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남북불가침부속합의서'에서 찾는다.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로 명시돼 있는 부속합의서 10조 항목을 NLL 협상 명분의 근거로 들이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남북기본합의서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그에 따라 존재하는 본래적 전제를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대변되는 공산권의 몰락으로 인해 체제유지에 위협을 느낀 북한이 벼랑 끝에 몰려서 시작한 협상이었다. 당시 북한의 GDP는 마이너스였다.
노태우 정부는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7.7 선언'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북방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이에 체제 위협을 느낀 북한 측은 한반도 비핵화를 요구했고, 노태우 정권과 미국은 이에 동의하여 "한반도 내에 핵무기는 없다"고 선언하며,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의 전제가 성립된 것이다. 결국 남북은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각기 서명 및 발효하게 된다. 즉 남북기본합의서는 애당초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시작된 협상이었던 것이다.

   북한은 1999년 제1차 연평해전을 일으키고 서해 5도 한참 밑에 내려온 '조선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2000년엔 후속조치 성격으로 '서해 5도 통항질서'를 발표하며 남북기본합의서를 위반했다. 또한 부속조항에 있는 군사훈련 협의사항도 전혀 지키지 않았다.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의 불가침 조항 등을 위반했기에 그 부속합의서의 협의사항을 남측이 이행할 의무는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햇볕정책을 주창했던 김대중 정부에서조차 NLL을 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에서는 2007년 정상회담 이후 벌어진 국방장관회담 등을 통해 NLL 협의의 발판을 마련해줬다. 북이 버젓이 핵 개발과 핵 실험을 실시하고 합의 내용의 군사관련 지침사항을 일관되게 무시해오고 있는데 왜 우리가 먼저 몸을 낮춰 협상 테이블에 올려줘야 하는가. 더욱이 서해 앞바다를 실질적으로 북에 내주게 되는 '등면적 공동어로수역'을 역대정부 최초로 논의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짜증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2차 남북정상회담의 내용과 가치를 확대 포장하고 예찬한 저자의 서술은 다수 국민의 정서와는 배리된 초라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냉철하면서도 입체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북한'이라는 의미는 자유와 인권의 부재 가운데 굵주림에 허덕이는 우리 동족이 아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명명되는 북한 권력의 지도층을 두고 얘기하는 것이다. 북한 정권은 정통 공산주의 체제가 아니다. 김일성이 창시하고 김정일이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는 북한의 혁명사상인 '주체사상主體思想'은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궤를 달리 한다. 사유재산을 부정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마르크시즘의 카테고리로 편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북한 군부지도부는 마르크스의 'M'자도 모르는 세력이다. 단언적으로 북한이라는 집단은 김씨 3대 세습독재체제로 근거되는 왕조체제인 것이다.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엽기적인 독재체제를 오직 선군정치와 공포정치의 방식으로 공고히 유지해가면서 인권을 말살시키고 인민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북한 정권을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지하고 대변할 수 있는가. 이는 공산주의의 기본 이념에 대한, 아니 북한 체제가 갖고 있는 본질적 오류에 대한, 더 나아가 숭고한 인간성의 숙지에 대한 깊은 이해에 달려있는 부분이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이 부분에 대한 중량감과 숙연성肅然性을 너무 낮게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게 문제다.

   책에 피력된 유시민의 대북관은 앞서 언급한 한국 진보좌파세력의 중론과 그대로 부합한다. 그는 북한 체제가 가진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최대한 좋게좋게 구슬리면서 인내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세 살배기 어린아이를 다루듯 참고 또 참으면서 달래고 퍼주며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개인이 아니다. 북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국가 간 외교는 인간 사이의 교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집단(집단주의集團主義, Collectivism)이 무서운 것은 개인보다 훨씬 많은 다양성과 의도성, 개별성과 모호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문서로 협의된 약속도 지키지 않고 지속적인 도발로 전쟁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북에게 '햇볕'이라는 어쭙잖은 용어를 전면에 배치하며 퍼주기식 정책으로 일관했던 진보정권 10년의 대북정책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유시민은 적어도 국민의 대북정서가 어떤 분포로 형성되어 있는 지에 대해서는 공부가 덜 된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기조 위에서 쓰여졌다.

   서평을 정리하자. 유시민의 신간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 포기 발언이 없었다는 논증을 위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해설하는 기능을 지닌 책이다. 그 기능에는 충실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나간 게 문제였다. 지나친 미화와 불필요한 논거, 그에 따른 편협한 시각의 의견개진은 대부분의 국민의 대북정서와는 멀리 떠나 있다. 읽는 동안 눈살이 찌푸러졌다. 굳이 긴 분량이 필요한 책은 아니었다. 쓸데없이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 유시민에게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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