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1 소설 조선왕조실록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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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사회를 진보시키는가. 왜 역사상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는가. 혁명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혁명은 선한가. 숭고한 것인가. 요컨대 '혁명'이란 단어는 이런저런 질문을 실타래처럼 엉키게 하며 깊은 사유 속으로 밀어넣는 힘을 가졌다.

   우리시대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김탁환이 '혁명'을 말한다. <불멸의 이순신>, <열녀문의 비밀>, <나, 황진이> 등 그간 역사소설로 사랑을 받아왔던 그가 조선왕조 500년 전체를 소설로 재구성하는 거대한 작업을 위해 펜을 들었다. 김탁환의 신작 <혁명>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끝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의 내면세계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는 순간(1392년 3월 17일)부터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당하는 순간(1392년 4월 4일)까지 18일간의 비망록이다.

   소설의 구성은 일관적이다. 매 장마다 이성계, 왕(공양왕), 정몽주, 정도전의 순서로 화자가 교차되며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더욱이 문체의 변화무쌍함과 편재성은 소설의 재미를 입체적으로 폭발시키는 원동력이다. 작가는 편지, 가전체 등 당시 신진사대부들이 애용한 다양한 문체를 통해 각 인물의 내면을 관통한다. 특히 유배지 영주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화자 정도전의 유쾌한 내면을 엿보는 맛은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작가는 특유의 공력으로 '이성계-정도전-정몽주' 사이의 공통된 꿈과 이상, 그러나 분명히 달랐던 혁명의 방법론적 성격에 대해 탐구한다. 동시에 앞선 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꾼 또 하나의 혁명가 이방원의 외면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소설의 시종을 일관되게 지배하고 있는 네 인물들 사이의 공통과 대척의 내외면적 대비는 이야기의 긴장감을 증대시키는 일차적인 구조가 된다.

   주지하다시피 정도전과 정몽주는 혁명 동지다. 같은 스승에게 배웠고, 같은 곳을 바라봤으며, 같은 뜻을 품었다. 두 사람은 맹자의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리학적 이상국가, 누가 왕위에 오르든 건강하게 돌아가는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루려 했다. 왕이 아닌 백성을 위한 국가여야 한다는 점에서 정도전과 정몽주는 하나였다. 정도전이 정몽주였고 정몽주가 정도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상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정몽주는 고려라는 체제 안에서 그것을 이루고자 했고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소설은 동일한 것 같으면서도 확연히 다른 두 혁명가의 대조점을 극히 절제된 내적 번민의 언어로 박진감있게 그려낸다.

   소설의 주인공은 단연 정도전이다. 정도전 자신의 내면을 공개하는 일기체가 정도전 외의 인물들을 이끌어가는 편년체를 압도한다. 소설의 시공간적 시점과 사건의 전개방식은 유배지에서 혁명 과업의 디테일을 사유하는 정도전의 내면세계에 종속되어 있다. 그만큼 소설 속에서 정도전의 아우라는 독보적이다. 이성계, 정몽주, 이방원 등은 한참 뒤로 밀려나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작가는 주인공인 정도전을 유독 부각시키며 그에 대한 애착을 직선적으로 내뿜는다.

   그래서인지 소설 <혁명>은 인물 갈등에 있어 구도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대비를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혁명의 본질적인 대척점이라 할 수 있는 이방원의 존재감을 후퇴시킨 것이다. 본래 혁명의 균열은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비에 있다. 왕이 아닌 백성이 주인되고 재상이 정치하는 나라, 이를 위해 법과 제도를 정립시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나라를 건설하려 했던 '정도전 혁명'에 대한 궁극의 보이콧은 절대왕권주의를 역설한 이방원이었다. 정몽주의 죽음까지만으로는 정도전 혁명의 명암을 입체적으로 천착하기 힘들다. 최소한 '1차 왕자의 난'과 함께 정도전의 죽음까지 다뤘다면 훨씬 더 세밀한 혁명성의 전후를 살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서평의 서두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혁명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혁명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가. 김탁환은 왜 지금 혁명을 말하고 있는가. 21세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작금의 상황에서 과연 혁명은 누구를 위한 주제인가. 소설 속에서 정도전은 혁명은 '절망을 먹고 자라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어 그는 "혁명을 도모한다는 건 절망의 끝에 다다랐다는 뜻일세. 지금 여기의 사람과 제도로는 도저히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확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절망에서 싹튼 혁명이 무조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정도전은 일갈한다. 혁명의 성공에는 힘이 필요하기에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가 혁명가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혁명의 본질에 관한 이러한 여러가지 질문들은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그러나 혁명의 태동에 관한 분명한 진실이 있다. 역사적으로 반복 입증된 결론은 명징하다.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가진 자가 교만할수록, 사회가 부조리할수록, 그래서 그것에 '분노'하고 '실패'하며 '절망'하는 자들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혁명을 원했다. 명확한 사실이다. 소설 <혁명>의 시의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혁명이 무엇을 먹고 자라는 줄 아는가. 절망이라네. 분노에 뒤이은 실패 그리고 절망. 이 셋을 반복하는 동안 혁명은 싹이 트고 뿌리와 줄기가 뻗고 가지가 펼쳐진 뒤 꽃이 피고 열매가 매달리지." (1권,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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