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인생을 아직 덜 살아서일까. 난 왜 쿤데라 선생의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걸까. 그의 말대로 과연 하찮은 것이 진지하고 무겁고 특별한 것들을 본질적인 선상에서 전복해낼 수 있을까. 텍스트의 분량과 화법의 속도는 전작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인 『농담』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일관되게 포착하고 있는 '가벼움'의 철학은 신간에서도 여지없이 연장된다.

   그는 왜 항시 가벼움과 무의미함을 삶의 정형성 전면에 배치하는 걸까. 사실 '의미 없음', '보잘 것 없음', '하찮음', '초라함', '가벼움' 등은 쿤데라 문학을 관통하는 핵심코드다. 기승전결 없이 막 써내려간 듯 보이는 짧은 소설을 통해 쿤데라는 무의미한 것의 의미, 가치 없는 것의 가치를 설파한다. 쿤테라는 결국 인간의 고독과 삶이 아무런 의미 없음의, 보잘 것 없음의 축제이며, 이 '무의미의 축제'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시대의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고백컨대 쿤데라의 소설은 매번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영원성의 무거움과 일회성의 가벼움을 역설적으로 대비시켜 치환해버리는 쿤데라 문학의 골격은 니체식 시간관념의 문학적 재현이자 관통이다. 더 나아가 헤겔의 분해이자 쇼펜하우어의 소환이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상의 나날이 그 자체로 축제라고 규정하는 그의 일관된 논변에 나는 여전히 고개를 젓는다. 혹시 그는 '지루함'과 '가벼움'을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노벨상을 목전에 둔 노작가의 거대한 진동이 좀처럼 나에겐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의 텍스트에서 쿤데라의 잔영(殘影)을 목도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무언가의 모호성이 추동하는 강한 전율을 느끼곤 한다. 내가 여전히 쿤데라의 소설을 읽는 유일한 이유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 쿤데라는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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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죽지 그래 - 남정욱이 청춘에게 전하는 지독한 현실 그 자체!
남정욱 지음 / 인벤션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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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기계발서를 싫어한다. 개인의 환경과 개별성을 무시한 채 출세와 성공의 방법이 일반화될 수 있는 것처럼 설교하는 계발서의 부조리는 정말 밥맛이다. 오래전부터 계발서를 비판해왔다. 동시에 깊이있는 책읽기를 멀리하고 계발서만 죽도록 파고드는 이 나라 젊은이들의 독서기호를 꾸짖기도 했다.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계발서에 냉담한 이유는 간단하다. 계발서의 내용과 구조를 살펴보면 카뮈식의 부조리(不條理)가 예외없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은 전형적인 힐링 서적이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나라는 OECD국가에서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런류의 책들은 교묘한 선동,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잡는 달콤한 소리 등으로 인간의 행복을 이상세계에 대한 잠시성(暫時性, transiency)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는다. 독자는 읽는 순간만 환상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래서, 정말 싫다.

   그간 여러 매체에서 보수적 담론을 쏟아낸 숭실대 문예창작과 남정욱 교수는 이러한 내 입장을 지지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이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자기계발서를 바라보는 기준과 신념만큼은 그와 내가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아예 책까지 출간해서 자기계발서의 모순을 공격한다. 그의 신간 『차라리 죽지 그래』는 "자기계발서에 파괴당하는 청춘들을 위한, 남정욱 교수의 잔혹 감성 어드바이스"라는 강렬한 부제를 단 명확한 존재성을 가진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제법 쎈 표현과 방식으로 계발서가 가진 내·외재적 모순을 가차없이 재단한다.

   저자 특유의 단단한 문체와 익살스런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거침없이 책장을 넘기게 하는 동력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의 과잉된 힐링과 호도된 멘토링을 강하게 질타한다. 또한 거짓 멘토에 의해 위험한 인생관을 권유받고 있는 불안한 청춘성의 회복을 탐색한다. 저자는 역설한다. 청춘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때로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고,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며, 사는 일은 정말이지 뜻대로 되지 않는 굴절과 실망의 연속이 바로 청춘의 실재임을 일깨운다. 누구도 쉽게 거론하지 못해왔던 청춘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가감없이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평소 젊은이에게 번쩍이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온 몇몇 멘토들에 대해 가차없는 매질을 가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김난도 교수를 '착한 어른'이라 조롱하며 두들긴다. 또한 최근 메스컴에서 활발한 강연활동을 하고 있는 철학자 강신주는 저자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다. 저자는 강신주의 베스트셀러 『강신주의 다상담』을 마치 회를 떠서 도려내듯이 굉장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비판하고 있다. 강신주와 그의 어록에 대한 저자의 칼날은 집요함과 디테일 면에서 과히 압권이라 할 정도로 냉소적이며 날카롭다.

   실명을 거론하면서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는 저자의 논지에 나는 오롯이 동의한다. 강신주처럼 포스트모더니즘 흉내를 내는 소위 '강단 좌익'의 현상은 비단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삶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무언가 비틀고 뒤집어서 보려고 하는 그들의 지적 변태행위는 구토가 날 정도로 짜증나는 일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마치 사탄의 사술(詐術)인양 비아냥거리며 요란을 떠는 그들의 무지와 착각이 불편하다. 그들의 주장(논리)에서 새로울 건 전혀 없다. 러셀의 반복이고 라캉의 연장이며 레비스트로스의 소환일 뿐이다. 오래전 사르트르가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흉내내며 덤방댔던 것과 흡사한 방식이다. 더 짜증나는 건 이런 방식이 유독 한국사회에서 잘 먹히고 있다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사람이든 사건이든 실재를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만의 연역적 결정론(決定論)대로 뒤집고 비틀어 사회적 구성물로 치환하려는 사조가 횡행하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상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데 그 본질은 동일하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합리주의 전통을 거의 노골적으로 부정하며 경험적 검증과 동떨어진 이론적 담론에 머문다. 과학적 지식과 귀납적 사실을 인간이 만든 사회적 구조체로 대체시킨다. 종국적으로 객관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병(病)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런 풍토를 가르치고 선동하는 지식인들이 가장 큰 문제다. 강신주는 그중 최전선에 있다. 그가 쓴 『다상담』이나 『감정수업』을 읽으며 나는 충격을 넘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일하지 말고 노는데 힘써야 하고, 올해 안에 회사에 사표를 내야 하며, 부모님을 반드시 우려먹어야 하고, 진실보다 거짓을 말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고 가르치는 강신주의 인생관은 도대체 무슨 개똥철학이란 말인가. 그것도 철학인가. 이러한 거짓 멘토와 쓰레기 철학을 시원하게 씹어준 것만으로도 저자의 노고는 결코 녹록지 않다.

   물론 이 책에 한계가 없는 건 아니다. 자기계발서가 가진 모순을 비판하면서 결국 저자마저도 뒷부분으로 가면서 전형적인 자기계발서의 방식으로 젊은이들을 훈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강신주와 김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뒤 '이것이야말로 진짜 자기계발서'라는 자신만의 계발서 속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저자가 제시한 내용은 '진짜'라고 하기에는 진부하고 별 것 없다. 새로운 게 없다. 잘못된 내용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기존의 경험적 통념과 겹치기 때문에 굳이 필요치 않은 부분이다. 더욱이 후반부 '농담수업'이라는 코너는 책의 앞뒤 맥락의 연결에 방해가 될 정도로 불필요하다. 지면을 채우기 위한 장치로 오해를 받을 만하다. 더 많은 거짓 선지자(先知者)들의 텍스트를 해부하면서 청춘의 고된 일상성을 진지하게 천착하는 것으로 갈무리했다면 좀 더 힘있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삶은 고단하다. 천국은 없다. 플라톤이 상정한 이데아의 세계는 인간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본래 추악하고 고단하며 가난한 것이다. 비루한 현실을 견디고 책임지는 여정 위에 인간 삶의 원형이 놓여 있다. 자기 삶은 철저히 자기 방식대로 본인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멘토와 힐링은 필요한 것이되, 비본질인 것이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소망이 샘솟을 수 있다. 난 그렇게 믿는다.

   서평을 정리하자. 남정욱의 『차라리 죽지 그래』는 누구에게나 권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계발서가 지닌 부조리의 민낯을 살펴보고 질적으로 우수한 독서를 여망하는, 무엇보다 모호한 인생관 가운데 삶을 둥개는 고된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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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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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시민의 신간은 항상 구독하는 편이다. 지금까지 출간된 그의 모든 저작을 탐독했다. 작가 유시민의 애독자라 할 만하다. 그가 좋아서가 아니다. 그의 글 속에 묻어있는 특유의 주관적 향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의 글빨에는 공감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시민이 전직 장관(혹인 국회의원)이 아닌 작가로 불리길 원한다.

그가 현대사 책을 낸다고 했을 때 굉장한 기대를 가졌다. 한국현대사는 아직까지 보편적이고 명확하게 정리된 바이블이 합의되지 않았다. 유시민의 말대로 현대사 논쟁은 고대사나 중세사 논쟁과 달리 격렬한 감정의 표출과 정치적 대립을 동반한다. 대한민국은 그 경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좌·우파의 극심한 이념대립의 현실 속에서 이 땅의 근현대사는 가장 뜨거운 감자로 놓여 있다. 실례로 지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사태는 한국 근현대사를 보편적으로 정립시키기 어려운 이 나라 이념 정서의 함몰성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시민의 신간 <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은 제목 그대로 저자 인생 55년 간의 한국현대사의 기록이다. 전직 장관이었던 저자는 현재의 자신을 '쁘띠부르주아 리버럴(자유주의적 소시민계급)'이라고 당당히 소개한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쁘띠부르주아 리버럴 지식인이 출생 후부터 현재까지 보고 겪고 느낀 주요 사건들을 대중의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들여다본 한국현대사 55년의 기록이다. 일반 역사서와는 달리 저자의 경험과 주관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는 특유의 날카로운 서술과 개성있는 향기로 한국의 현대사를 흥미진진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

저자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좌·우가 극렬히 대립하고 있는 이념전쟁의 한복판으로 진단한다. 대한민국 역대 정권의 성격과 그게 상응하는 국민들을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으로 분류하면서, 역사는 단지 회고의 기록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더 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 같은 세대 간의 단절이 아니라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 한국현대사의 큰 줄기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토대가 마련되지 않으면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응당 옳은 얘기다.

이 책이 저자의 자전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라 하여 역사책으로서의 무게가 가벼울 것이라 단정해서는 곤란하다. 55년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의 다양한 사건들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저자의 국회의원 경력과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 시절의 경험은 여타 역사서에서는 보기 힘든 개성있는 각론들을 추출하는 재료가 된다. 수없이 등장하는 수치와 도표, 당대의 주요 사진들, 꼼꼼하게 표기된 각주와 주석, 적지 않은 인용서적 리스트 등은 저자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이 책을 저술했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과거 어느 책보다 공들인 흔적은 엿보이나 책에 기록된 저자의 견해에 대해 나는 많은 부분 공감하지 못한다. 물론 지금까지 보여준 저자의 진보주의적 색채, 보다 직선적으로 말해 좌파적 기질은 과거에 비해 한층 세련돼졌다. 온건하고 차분해진 흔적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구분하려는 자세는 진일보했다. 동아일보와 조갑제 씨에 대한 긍정적 해설도 눈에 띈다. 그러나 문제는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저자의 기준이 아직까지도 자기 편향적 우월성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끊임없이 보수주의의 기작을 생물학적 편의성으로 설명한다. 보수주의는 인간 여러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지향하는 이념이라는 과거의 견해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건지, 그렇게 규정하고 싶어 의도적으로 단언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보는가는 비단 정치이념뿐만 아니라 역사학, 철학, 경제학 등의 모든 인문학 분야의 뜨거운 감자였다. 저자는 은밀하면서도 일관되게 인간의 이타적 감응을 이기심 위에 올려놓으며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로부터 출발하는 보수주의의 맥락을 인간성의 결핍으로 등치시킨다. 상대적으로 진보의 가치가 우월할 수 있도록 스탠스를 잡고 있는 것이다. 책에 나와 있진 않지만 최근 어느 강연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좌·우파가 갈라지는 이유에 대해 뇌과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인용하기도 했다. 대뇌피질의 거울뉴런이라는 신경생리학적 기관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고통이나 기쁨에 감응하는 강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뇌 구조의 기작 분포로 좌·우파, 혹은 진보·보수를 가름하며 의도적으로 상대적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그의 편향된 이념인식에 동의하지 못하는 건 비단 나만일까.

이기심과 이타심의 대결구도로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기각됐다. 서울대학교 이영훈 교수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사실과 인간이 타인과 신뢰·협동의 규범과 제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전혀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 정합적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협동할 때 서로에게 득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인지하고 발전해가는 영지의 동물이다. 그래서 개인주의와 사유재산권이 성숙한 서유럽과 미국에서 오히려 사회적 신뢰와 협동이 발달하고 그에 기초한 정신문화가 풍성하게 꽃을 피웠다. 반면 그러한 정치철학의 전통이 없는 동아시아의 문화는 세계에서도 가장 물질주의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근대문명의 출발점이 자립적 개인이라는 것은 현대 역사학계의 통설로 자리매김한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과 정치사상의 견해에 있어 저자 유시민이 가진 불편한 편향성에 대해 지적했다. 물론 이 책이 가진 많은 장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저자의 경험과 일상이 추동하는 평이성과 접근성은 역사에 대한 독자의 탈부담화를 견인한다. 객관적인 수치·도표의 인용과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논지 전개는 역사책이 가져야 할 진지한 무게를 담아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또한 좌·우파 상관없이 반드시 읽어야 할 양서와 우리사회에 큰 이슈가 된 다양한 책들을 소개한 점은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인용된 책들을 살피는 것으로도 이 책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단 저자의 주관과 해석이 강하게 배어 있기 때문에 현대사 교과서로서의 보편과 권위를 갖기에는 한계가 있다. 전직 정치인이 쓴 자전적 역사에세이 정도로 가볍게 읽어 볼만한 책이다.

오랜 기간 동안 유시민을 봐왔다. 그는 기억을 못하겠지만 사석에서 만난 적도 있었다. 유시민은 정치적 색채를 버리고 어깨에 힘을 뺐을 때 멋드러진 지식인의 면모가 드러나는 인물이다. 그의 직업은 작가다. 최근 모정당의 팟캐스트에 고정 출연하여 이런저런 정치적 담론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다. 정치를 떠난 만큼 과한 표현을 자제하고 왕성한 저술과 수준있는 강연으로 참된 지식인의 역할을 다해주기를 바란다. 정치적·철학적·이념적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작가로서 종횡무진하는 그의 열정을 순수한 마음으로 기원하는 건 비단 나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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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의 삶에 가장 기본이 되는 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일이다. 최근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신약성서의 네 성경을 필사하는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필자의 와이프도 밤마다 두 아이를 재운 후 열심히 성경을 쓰고 있다.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가.

   그러나 필자가 이번달에 특별히 탐독하고 있는 성경은 옥중서신이 배치된 신약이 아니라 구약의 한복판에 있는 열왕기서다. 금월에는 열왕기상·하를 낱낱이 파헤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열왕기서는 솔로몬 때부터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최후 주전 586년까지, 약 400년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42명의 왕들, 북방 이스라엘의 19명, 남방 유다의 23명과 12명의 선지자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다룬다. 아합, 시드기야 같은 쓰레기 같은 군주들이 많았지만, 요시야나 히스기야 같은 거룩하고 탁월한 지도자들도 있었다.

   열왕기상·하는 시작과 끝을 극단적으로 대조한다. 시작은 다윗이 세운 광대한 나라에서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여 찬란한 성전을 건축하고,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광활한 영토를 장악하여, 이스라엘 왕국 역사상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장면이다. 반면 열왕기의 끝은 성전이 훼파되고, 나라가 멸망하고, 왕이 두 눈이 뽑혀 백성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장면이다. 400년이 채 안 되는 이스라엘-유다 왕국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 중심의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극단적이고도 진지하게 해부한다.

   열왕기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를 서로 지그재그로 비교하면서 기록하는 형식을 취한다. 즉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 기사를 동시대 유다 왕들의 통치 기사의 배경 아래서 볼 수 있게 했다. 전반적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은 대부분 악했다. 특히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누가 하나님을 더 열받게 할까 내기하는 수준으로 우상숭배와 악행만을 일삼은 역사였다. 한결같이 전부 쓰레기들이다. 그러나 남유다의 경우에는 의외로 선한 왕들이 많이 나왔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두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한 민족의 역사로 기술한 것이다.

   필자가 이 시점에서 열왕기서를 탐구하려고 한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작금의 한국정치가 가진 심각한 병적증세를 목도하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된 리더십의 본질을 강구하기 위함이다. 둘째 가정에서는 가장으로, 교회에서는 집사와 회장으로, 회사에서는 과장이라는 직급으로 위치한 내 책임의식을 점검하면서 올바른 리더자가 되기 위한 하나님중심주의적 방법론을 천착하기 위함이다. 요컨대 현재의 나와 우리를 진단하고 부재와 굴곡에 직면한 내·외재적 리더십의 위기를 극복하기를 소원하는 탐구상의 여정인 것이다.

   열왕기서는 솔로몬의 치세로 시작된다. 고백컨대 필자는 솔로몬을 정말 싫어한다. 솔로몬에 대한 필자의 비호감은 다소 각별한 데가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 솔로몬만큼 필자를 짜증나게 한 인물도 없다. 솔로몬의 죄가 집대성된 열왕기상 11장에 이르러서는 화를 참지 못해 펜으로 성경책의 일부분을 후벼 판 적도 있다. 일부 사람들이 솔로몬의 위대성을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인정하지 못하겠다. 위대한 지혜도, 거대한 성전 건축도,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솔로몬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지 솔로몬이 잘나서 누린 게 아니라는 얘기다. 솔로몬이 뭐가 그리 위대하단 말인가.

   솔로몬은 열왕기상·하에서 가장 핵심적 모형이 되는 인물이다. 집권 초반기에 그토록 지혜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었다가 후반기로 가면서 심하게 타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솔로몬이 타락하게 된 가장 실제적인 배경은 결국 여자 문제였다. 인류 역사는 권력, 돈, 섹스 ― 이 세가지가 항시 한 셋트로 작동한다는 것을 명징히 보여준다. 하나에 걸리면 다른 두 개가 붙어 오는데, 처음엔 그것이 특권 같지만 나중엔 무서운 독이 되어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 솔로몬은 이방 왕비들을 많이 들였고, 그들을 위해 이방 신당을 짓고, 노예제도와 무거운 세금 부과로 백성을 힘들게 했다. 솔로몬의 집권 후반기는 하나님의 분노를 얼마나 끌어올릴까 궁리하는 악의 퍼포먼스와 같다. 솔로몬의 리더십은 후세 왕들이 답습하는 악행 패턴으로 굳어 버려서 두고두고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

   필자가 솔로몬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권력, 부, 여자 ― 로 연결되는, 소위 문명사적 유구성을 띤 남자의 약점을 과히 입체적으로 포괄하여 죄악의 불길을 타올린 데 있다. 솔로몬의 모습에서 나는 현대사회가 직면한 가장 실제적이고 악질적인 죄의 형태를 직시한다. 솔로몬의 죄는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에 모든 남자들에게 열려있는 어두운 고민과 유혹의 본성적 패착이다. 하나님중심주의의 삶에 대한 현란한 일탈이요 치졸한 반역이며 기괴한 공격이다. 남자의 가장 약한 아킬레스건 가운데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그러나 치명적으로 내면화된 추악한 죄의 형상이 솔로몬의 우상숭배의 인과관계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필자가 솔로몬을 싫어하는 이유다.

   아! 솔로몬! 최소한 솔로몬과 같은 리더는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사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이다. 우리 정치의 모습에서, 가끔은 필자 자신의 모습에서 솔로몬의 모습을 본다. 그럴 때마다 소름이 돋고 전율을 느낀다. 땅을 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와 필자 자신의 리더십 속에서 솔로몬의 방식이 사라지고 다윗의 방법이 세워져야 한다. 솔로몬은 아버지를 잘 만났다. 그는 아버지 다윗 왕의 발꿈치 때만도 따라오지 못했다. 다윗과 솔로몬 ― 두 사람의 리더십의 궁극적인 대조는 차후 별도의 지면을 통해 논설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실 솔로몬을 까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텍스트가 필요하다.

   작금의 국가적 혼란과 필자 자신의 위치를 바라보며 진정한 리더십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사유한다. 솔로몬의 리더십은 곤란하다. 다윗의 왕권이 세워져야 한다. 국가, 사회, 가족 등 모든 인간 공동체의 리더십은 하나님 왕권의 파생품이다. 바로 이 지점에 열왕기서가 주는 교훈이 있다. 필자가 열왕기서를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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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사기 -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음 | 이희재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지난 휴가철 필독서 코너를 통해 소개한 책이다. 너무 괜찮은 책이라 다시 한 번 밀도있게 추천하고자 한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과학적 지식과 객관적 사실이 혼미한 형태로 굴곡되어가는 극심한 형태의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주의에 뿌리를 둔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을 공격한 이 책의 존재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겠다.

   작금의 시기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부른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나 또한 관련서적을 적지 않이 읽었지만 이에 대해 명확하고 체계적인 정리는 아직까지 요원한 상태다. 주변의 책 좀 읽었다고 하는 독서꾼 가운데서도 이에 대해 자신있게 풀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심지어 철학과 현대사상을 전공한 자들 가운데서도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그만큼 포스트모더니즘은 광범위하고 복잡다단한 사상적 맥락을 가진다. 몇 마디 말과 몇 장의 텍스트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어렵다는 얘기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말 그대로 모더니즘 이후를 의미한다. 모더니즘이 리얼리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항으로 발생했다. 엄밀히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연속이며 부정이다. 그 본격적 태동은 모든 권위에 저항하고자 했던 프랑스 68혁명 이후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마치 세계를 입체적으로 천착하는 신세계적 사조로 보이지만 실상 객관적 사실에 대한 도전으로 귀결되는 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된 특징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적 지식을 사회적 구성물(구축물, 작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합리주의 전통(인류의 진보, 보편적 가치, 과학적 발견, 이성에 대한 믿음 등)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경험적 검증과 동떨어진 이론적 담론에 불과하며 과학(적 지식)을 수많은 이야기, 신화, 사회적 구성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인식론적·문화적 상대주의에 다름 아니다. 절대적 진리를 추구한 소크라테스가 보면 기겁할 사조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시공간 압축성, 즉흥성, 순간성, 파편성의 이데올로기다. 철학적으로 포스트구조주의에 뿌리를 둔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장 보드리야르, 질 들뢰즈 등이 이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거대 서사를 해체하고 미시성의 담론을 제시한다. 또한 그들은 루이 알튀세르, 자크 라캉,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등의 구조주의 철학이 지닌 근본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를 연속하면서 동시에 해체하는 사상사적 맥락에 놓여 있다.

   나는 평소 구조주의 철학서들을 읽을 때마다 심각한 짜증을 발산하곤 했다. 지독하게 난해하고 난잡한 그들의 텍스트를 읽어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라캉의 저작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데리다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읽어도 읽어도 미궁 속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철학이나 심리학, 정신분석학을 전공하지 않은 내 지력의 수준을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늦게 깨달았다. 구조주의는 심오한 학문적 무게를 지닌 경이로운 철학이 아니었다는 것을. <순수이성비판>의 칸트적 난해성과는 성격이 달랐다. 무언가 있기 때문에 난해한 게 아니라 하나도 없기 때문에 난해한 것이었다.

   <지적 사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목소리가 왜 난해할 수밖에 없는지 명쾌하게 설명한다. 공저자 엘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은 이 책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라캉과 보드리야르를 위시한 프랑스 현대 철학의 지적 남용과 학문적 허영을 다양한 논증으로 고발한다. 화려하고 난해한 수식어로 도배가 되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대부분 철학자 자신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며 과학적으로 반증되지 않는 허구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일침한다. 사유의 부재를 은폐할 목적으로 난해하게 꾸며진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통쾌한 고발이 아닐 수 없다.

   진리는 단순하다. 거짓말은 화려하고 매혹적이다. 반면 참말은 엉성하다. 독일 사상의 투박성을 유려한 언어로 각색하여 대중적인 호소력을 확보한 게 프랑스 철학의 특징이다. 예컨대 실존주의도 그랬다.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아니었던가. 진지함과 난해함은 동의어가 아니다. 사상의 깊이와 무게는 무조건적 난해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허약한 콘덴츠를 난해하고 위압적인 수사로 포장하여 독자를 압박하려는 그들의 내밀한 속셈에 속지 말아야 한다. 빈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쉬운 책은 결코 아니다. 현대사상사에 약간의 조예만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통렬하고 통쾌하며 흥미롭다.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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