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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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시민의 신간은 항상 구독하는 편이다. 지금까지 출간된 그의 모든 저작을 탐독했다. 작가 유시민의 애독자라 할 만하다. 그가 좋아서가 아니다. 그의 글 속에 묻어있는 특유의 주관적 향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의 글빨에는 공감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시민이 전직 장관(혹인 국회의원)이 아닌 작가로 불리길 원한다.

그가 현대사 책을 낸다고 했을 때 굉장한 기대를 가졌다. 한국현대사는 아직까지 보편적이고 명확하게 정리된 바이블이 합의되지 않았다. 유시민의 말대로 현대사 논쟁은 고대사나 중세사 논쟁과 달리 격렬한 감정의 표출과 정치적 대립을 동반한다. 대한민국은 그 경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좌·우파의 극심한 이념대립의 현실 속에서 이 땅의 근현대사는 가장 뜨거운 감자로 놓여 있다. 실례로 지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사태는 한국 근현대사를 보편적으로 정립시키기 어려운 이 나라 이념 정서의 함몰성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시민의 신간 <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은 제목 그대로 저자 인생 55년 간의 한국현대사의 기록이다. 전직 장관이었던 저자는 현재의 자신을 '쁘띠부르주아 리버럴(자유주의적 소시민계급)'이라고 당당히 소개한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쁘띠부르주아 리버럴 지식인이 출생 후부터 현재까지 보고 겪고 느낀 주요 사건들을 대중의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들여다본 한국현대사 55년의 기록이다. 일반 역사서와는 달리 저자의 경험과 주관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는 특유의 날카로운 서술과 개성있는 향기로 한국의 현대사를 흥미진진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

저자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좌·우가 극렬히 대립하고 있는 이념전쟁의 한복판으로 진단한다. 대한민국 역대 정권의 성격과 그게 상응하는 국민들을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으로 분류하면서, 역사는 단지 회고의 기록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더 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 같은 세대 간의 단절이 아니라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 한국현대사의 큰 줄기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토대가 마련되지 않으면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응당 옳은 얘기다.

이 책이 저자의 자전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라 하여 역사책으로서의 무게가 가벼울 것이라 단정해서는 곤란하다. 55년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의 다양한 사건들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저자의 국회의원 경력과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 시절의 경험은 여타 역사서에서는 보기 힘든 개성있는 각론들을 추출하는 재료가 된다. 수없이 등장하는 수치와 도표, 당대의 주요 사진들, 꼼꼼하게 표기된 각주와 주석, 적지 않은 인용서적 리스트 등은 저자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이 책을 저술했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과거 어느 책보다 공들인 흔적은 엿보이나 책에 기록된 저자의 견해에 대해 나는 많은 부분 공감하지 못한다. 물론 지금까지 보여준 저자의 진보주의적 색채, 보다 직선적으로 말해 좌파적 기질은 과거에 비해 한층 세련돼졌다. 온건하고 차분해진 흔적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구분하려는 자세는 진일보했다. 동아일보와 조갑제 씨에 대한 긍정적 해설도 눈에 띈다. 그러나 문제는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저자의 기준이 아직까지도 자기 편향적 우월성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끊임없이 보수주의의 기작을 생물학적 편의성으로 설명한다. 보수주의는 인간 여러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지향하는 이념이라는 과거의 견해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건지, 그렇게 규정하고 싶어 의도적으로 단언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보는가는 비단 정치이념뿐만 아니라 역사학, 철학, 경제학 등의 모든 인문학 분야의 뜨거운 감자였다. 저자는 은밀하면서도 일관되게 인간의 이타적 감응을 이기심 위에 올려놓으며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로부터 출발하는 보수주의의 맥락을 인간성의 결핍으로 등치시킨다. 상대적으로 진보의 가치가 우월할 수 있도록 스탠스를 잡고 있는 것이다. 책에 나와 있진 않지만 최근 어느 강연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좌·우파가 갈라지는 이유에 대해 뇌과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인용하기도 했다. 대뇌피질의 거울뉴런이라는 신경생리학적 기관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고통이나 기쁨에 감응하는 강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뇌 구조의 기작 분포로 좌·우파, 혹은 진보·보수를 가름하며 의도적으로 상대적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그의 편향된 이념인식에 동의하지 못하는 건 비단 나만일까.

이기심과 이타심의 대결구도로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기각됐다. 서울대학교 이영훈 교수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사실과 인간이 타인과 신뢰·협동의 규범과 제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전혀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 정합적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협동할 때 서로에게 득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인지하고 발전해가는 영지의 동물이다. 그래서 개인주의와 사유재산권이 성숙한 서유럽과 미국에서 오히려 사회적 신뢰와 협동이 발달하고 그에 기초한 정신문화가 풍성하게 꽃을 피웠다. 반면 그러한 정치철학의 전통이 없는 동아시아의 문화는 세계에서도 가장 물질주의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근대문명의 출발점이 자립적 개인이라는 것은 현대 역사학계의 통설로 자리매김한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과 정치사상의 견해에 있어 저자 유시민이 가진 불편한 편향성에 대해 지적했다. 물론 이 책이 가진 많은 장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저자의 경험과 일상이 추동하는 평이성과 접근성은 역사에 대한 독자의 탈부담화를 견인한다. 객관적인 수치·도표의 인용과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논지 전개는 역사책이 가져야 할 진지한 무게를 담아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또한 좌·우파 상관없이 반드시 읽어야 할 양서와 우리사회에 큰 이슈가 된 다양한 책들을 소개한 점은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인용된 책들을 살피는 것으로도 이 책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단 저자의 주관과 해석이 강하게 배어 있기 때문에 현대사 교과서로서의 보편과 권위를 갖기에는 한계가 있다. 전직 정치인이 쓴 자전적 역사에세이 정도로 가볍게 읽어 볼만한 책이다.

오랜 기간 동안 유시민을 봐왔다. 그는 기억을 못하겠지만 사석에서 만난 적도 있었다. 유시민은 정치적 색채를 버리고 어깨에 힘을 뺐을 때 멋드러진 지식인의 면모가 드러나는 인물이다. 그의 직업은 작가다. 최근 모정당의 팟캐스트에 고정 출연하여 이런저런 정치적 담론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다. 정치를 떠난 만큼 과한 표현을 자제하고 왕성한 저술과 수준있는 강연으로 참된 지식인의 역할을 다해주기를 바란다. 정치적·철학적·이념적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작가로서 종횡무진하는 그의 열정을 순수한 마음으로 기원하는 건 비단 나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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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의 삶에 가장 기본이 되는 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일이다. 최근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신약성서의 네 성경을 필사하는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필자의 와이프도 밤마다 두 아이를 재운 후 열심히 성경을 쓰고 있다.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가.

   그러나 필자가 이번달에 특별히 탐독하고 있는 성경은 옥중서신이 배치된 신약이 아니라 구약의 한복판에 있는 열왕기서다. 금월에는 열왕기상·하를 낱낱이 파헤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열왕기서는 솔로몬 때부터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최후 주전 586년까지, 약 400년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42명의 왕들, 북방 이스라엘의 19명, 남방 유다의 23명과 12명의 선지자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다룬다. 아합, 시드기야 같은 쓰레기 같은 군주들이 많았지만, 요시야나 히스기야 같은 거룩하고 탁월한 지도자들도 있었다.

   열왕기상·하는 시작과 끝을 극단적으로 대조한다. 시작은 다윗이 세운 광대한 나라에서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여 찬란한 성전을 건축하고,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광활한 영토를 장악하여, 이스라엘 왕국 역사상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장면이다. 반면 열왕기의 끝은 성전이 훼파되고, 나라가 멸망하고, 왕이 두 눈이 뽑혀 백성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장면이다. 400년이 채 안 되는 이스라엘-유다 왕국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 중심의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극단적이고도 진지하게 해부한다.

   열왕기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를 서로 지그재그로 비교하면서 기록하는 형식을 취한다. 즉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 기사를 동시대 유다 왕들의 통치 기사의 배경 아래서 볼 수 있게 했다. 전반적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은 대부분 악했다. 특히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누가 하나님을 더 열받게 할까 내기하는 수준으로 우상숭배와 악행만을 일삼은 역사였다. 한결같이 전부 쓰레기들이다. 그러나 남유다의 경우에는 의외로 선한 왕들이 많이 나왔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두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한 민족의 역사로 기술한 것이다.

   필자가 이 시점에서 열왕기서를 탐구하려고 한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작금의 한국정치가 가진 심각한 병적증세를 목도하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된 리더십의 본질을 강구하기 위함이다. 둘째 가정에서는 가장으로, 교회에서는 집사와 회장으로, 회사에서는 과장이라는 직급으로 위치한 내 책임의식을 점검하면서 올바른 리더자가 되기 위한 하나님중심주의적 방법론을 천착하기 위함이다. 요컨대 현재의 나와 우리를 진단하고 부재와 굴곡에 직면한 내·외재적 리더십의 위기를 극복하기를 소원하는 탐구상의 여정인 것이다.

   열왕기서는 솔로몬의 치세로 시작된다. 고백컨대 필자는 솔로몬을 정말 싫어한다. 솔로몬에 대한 필자의 비호감은 다소 각별한 데가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 솔로몬만큼 필자를 짜증나게 한 인물도 없다. 솔로몬의 죄가 집대성된 열왕기상 11장에 이르러서는 화를 참지 못해 펜으로 성경책의 일부분을 후벼 판 적도 있다. 일부 사람들이 솔로몬의 위대성을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인정하지 못하겠다. 위대한 지혜도, 거대한 성전 건축도,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솔로몬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지 솔로몬이 잘나서 누린 게 아니라는 얘기다. 솔로몬이 뭐가 그리 위대하단 말인가.

   솔로몬은 열왕기상·하에서 가장 핵심적 모형이 되는 인물이다. 집권 초반기에 그토록 지혜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었다가 후반기로 가면서 심하게 타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솔로몬이 타락하게 된 가장 실제적인 배경은 결국 여자 문제였다. 인류 역사는 권력, 돈, 섹스 ― 이 세가지가 항시 한 셋트로 작동한다는 것을 명징히 보여준다. 하나에 걸리면 다른 두 개가 붙어 오는데, 처음엔 그것이 특권 같지만 나중엔 무서운 독이 되어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 솔로몬은 이방 왕비들을 많이 들였고, 그들을 위해 이방 신당을 짓고, 노예제도와 무거운 세금 부과로 백성을 힘들게 했다. 솔로몬의 집권 후반기는 하나님의 분노를 얼마나 끌어올릴까 궁리하는 악의 퍼포먼스와 같다. 솔로몬의 리더십은 후세 왕들이 답습하는 악행 패턴으로 굳어 버려서 두고두고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

   필자가 솔로몬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권력, 부, 여자 ― 로 연결되는, 소위 문명사적 유구성을 띤 남자의 약점을 과히 입체적으로 포괄하여 죄악의 불길을 타올린 데 있다. 솔로몬의 모습에서 나는 현대사회가 직면한 가장 실제적이고 악질적인 죄의 형태를 직시한다. 솔로몬의 죄는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에 모든 남자들에게 열려있는 어두운 고민과 유혹의 본성적 패착이다. 하나님중심주의의 삶에 대한 현란한 일탈이요 치졸한 반역이며 기괴한 공격이다. 남자의 가장 약한 아킬레스건 가운데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그러나 치명적으로 내면화된 추악한 죄의 형상이 솔로몬의 우상숭배의 인과관계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필자가 솔로몬을 싫어하는 이유다.

   아! 솔로몬! 최소한 솔로몬과 같은 리더는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사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이다. 우리 정치의 모습에서, 가끔은 필자 자신의 모습에서 솔로몬의 모습을 본다. 그럴 때마다 소름이 돋고 전율을 느낀다. 땅을 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와 필자 자신의 리더십 속에서 솔로몬의 방식이 사라지고 다윗의 방법이 세워져야 한다. 솔로몬은 아버지를 잘 만났다. 그는 아버지 다윗 왕의 발꿈치 때만도 따라오지 못했다. 다윗과 솔로몬 ― 두 사람의 리더십의 궁극적인 대조는 차후 별도의 지면을 통해 논설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실 솔로몬을 까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텍스트가 필요하다.

   작금의 국가적 혼란과 필자 자신의 위치를 바라보며 진정한 리더십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사유한다. 솔로몬의 리더십은 곤란하다. 다윗의 왕권이 세워져야 한다. 국가, 사회, 가족 등 모든 인간 공동체의 리더십은 하나님 왕권의 파생품이다. 바로 이 지점에 열왕기서가 주는 교훈이 있다. 필자가 열왕기서를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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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사기 -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음 | 이희재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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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휴가철 필독서 코너를 통해 소개한 책이다. 너무 괜찮은 책이라 다시 한 번 밀도있게 추천하고자 한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과학적 지식과 객관적 사실이 혼미한 형태로 굴곡되어가는 극심한 형태의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주의에 뿌리를 둔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을 공격한 이 책의 존재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겠다.

   작금의 시기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부른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나 또한 관련서적을 적지 않이 읽었지만 이에 대해 명확하고 체계적인 정리는 아직까지 요원한 상태다. 주변의 책 좀 읽었다고 하는 독서꾼 가운데서도 이에 대해 자신있게 풀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심지어 철학과 현대사상을 전공한 자들 가운데서도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그만큼 포스트모더니즘은 광범위하고 복잡다단한 사상적 맥락을 가진다. 몇 마디 말과 몇 장의 텍스트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어렵다는 얘기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말 그대로 모더니즘 이후를 의미한다. 모더니즘이 리얼리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항으로 발생했다. 엄밀히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연속이며 부정이다. 그 본격적 태동은 모든 권위에 저항하고자 했던 프랑스 68혁명 이후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마치 세계를 입체적으로 천착하는 신세계적 사조로 보이지만 실상 객관적 사실에 대한 도전으로 귀결되는 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된 특징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적 지식을 사회적 구성물(구축물, 작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합리주의 전통(인류의 진보, 보편적 가치, 과학적 발견, 이성에 대한 믿음 등)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경험적 검증과 동떨어진 이론적 담론에 불과하며 과학(적 지식)을 수많은 이야기, 신화, 사회적 구성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인식론적·문화적 상대주의에 다름 아니다. 절대적 진리를 추구한 소크라테스가 보면 기겁할 사조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시공간 압축성, 즉흥성, 순간성, 파편성의 이데올로기다. 철학적으로 포스트구조주의에 뿌리를 둔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장 보드리야르, 질 들뢰즈 등이 이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거대 서사를 해체하고 미시성의 담론을 제시한다. 또한 그들은 루이 알튀세르, 자크 라캉,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등의 구조주의 철학이 지닌 근본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를 연속하면서 동시에 해체하는 사상사적 맥락에 놓여 있다.

   나는 평소 구조주의 철학서들을 읽을 때마다 심각한 짜증을 발산하곤 했다. 지독하게 난해하고 난잡한 그들의 텍스트를 읽어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라캉의 저작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데리다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읽어도 읽어도 미궁 속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철학이나 심리학, 정신분석학을 전공하지 않은 내 지력의 수준을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늦게 깨달았다. 구조주의는 심오한 학문적 무게를 지닌 경이로운 철학이 아니었다는 것을. <순수이성비판>의 칸트적 난해성과는 성격이 달랐다. 무언가 있기 때문에 난해한 게 아니라 하나도 없기 때문에 난해한 것이었다.

   <지적 사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목소리가 왜 난해할 수밖에 없는지 명쾌하게 설명한다. 공저자 엘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은 이 책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라캉과 보드리야르를 위시한 프랑스 현대 철학의 지적 남용과 학문적 허영을 다양한 논증으로 고발한다. 화려하고 난해한 수식어로 도배가 되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대부분 철학자 자신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며 과학적으로 반증되지 않는 허구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일침한다. 사유의 부재를 은폐할 목적으로 난해하게 꾸며진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통쾌한 고발이 아닐 수 없다.

   진리는 단순하다. 거짓말은 화려하고 매혹적이다. 반면 참말은 엉성하다. 독일 사상의 투박성을 유려한 언어로 각색하여 대중적인 호소력을 확보한 게 프랑스 철학의 특징이다. 예컨대 실존주의도 그랬다.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아니었던가. 진지함과 난해함은 동의어가 아니다. 사상의 깊이와 무게는 무조건적 난해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허약한 콘덴츠를 난해하고 위압적인 수사로 포장하여 독자를 압박하려는 그들의 내밀한 속셈에 속지 말아야 한다. 빈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쉬운 책은 결코 아니다. 현대사상사에 약간의 조예만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통렬하고 통쾌하며 흥미롭다.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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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무덥다. 이제 본격적인 휴가철에 접어들었다. 이에 휴가지에서 읽을 만한 책을 아래와 같이 추렸다. 고전과 신간 중에서 시기적으로 적확성을 띤 열 권(여덟 편)의 책을 선정했다. 소설이 한 편 포함되어 있지만 대부분 고전과 인문학을 택했다. 무겁긴 하지만 현실 한국을 조망하는데 이 책들만큼 긴요한 것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부디 휴가철에 책을 벗삼아 무더위를 식히기를 기원한다.



 


『이방인』 - 알베르 카뮈, 민음사

말이 필요없다.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다. 서양 소설사는 <이방인> 전과 후로 나뉜다.
<이방인>을 읽지 않고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문학을 제대로 관통할 수 없다. 또한 '의식'이나 '주체'를 탐구하는 시대가 끝나고 '규칙'이나 '구조'를 천착하는 시대가 도래한 사상사의 과도기적 현상을 이해할 재간이 없다. 카뮈는 이 얇은 소설에서 인간 부조리의 본성을 진지하게 질문한다. 지난 4월 '세월호 사건'은 우리사회에 내재한 부조리를 극명하게 보여준 비극이다. 개인과 사회는 어떤 긴장과 갈등으로 얽혀있는가. 과연 부조리란 무엇인가. 최근 번역논쟁에 휘말릴 만큼 작품의 질적 밀도도 최고도에 오른 작품이기에 반드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노예의 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나남

케인즈의 대척점에 있었던 경제학자인 하이에크의 명저다. 좌파든 우파든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힌다. 사회주의적 기제는 반드시 집단주의(collectivism)로 귀결되며 이것이 개인을 어떻게 노예의 삶으로 귀속시키는지 경제·도덕·법·철학 등의 다양한 부문에서 논증했다. 하이에크는 이 책을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집필했다. 대중이 읽기에 어렵지 않게 썼다. 최근 우리사회의 모습에서 방향성 잃은 집단주의의 단면을 발견하는 건 비단 나만일까.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념과 당파를 불문하고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한길사

교회 청년부 특강 시 인용한 책이다. 구조적 무지가 만들어내는 '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고발하고 있다. 수백만 명의 유태인 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이 전범재판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을 인용하여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충격적인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철학자 아렌트의 보고서다. 구조적 무지는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에 의해 무지를 내재적으로 생산하고 고착시키는 악의 귀속적 형태다. 저자 아렌트는 구조적 무지의 기제들이 어떤 형태로 악을 평범화하고 귀속시키는지 이 책을 통해 날카롭게 고발한다. 절대적 진리와 정의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작금의 시대에 강력한 울림을 선사하는 책이다. 젊은이들에게 특히 권한다.


  
『사랑의 역사』 - 남미영, 김영사

신간이다.
문학사를 아름답게 수놓은 여러 고전소설 속에서 다양한 사랑의 속성을 탐구하는 책이다. 저자 남미영 교수는 1597년 출간된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2012년 출간된 《사랑의 기초》까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34편의 작품을 선별하여 사랑의 가치와 의미, 성장과 인생에 대해 심층적으로 해부한다. 사랑이 가진 인생의 선과 악, 그리고 건설과 파괴라는 양면적 속성을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폭포수처럼 뽑아낸다. 어렵지 않고 지루하지 않는, 상당한 재미를 선사하는 사랑학 에세이다. 머리 식히기에는 딱이다.


  
『지적 사기』 - 앨런 소칼 & 장 브리크몽, 한국경제신문사

절판됐다가 금년초에 한국경제신문사를 통해 재출간됐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이를 대변하는 학자들의 이론과 사상을 강도높게 비판한 책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논리는 마치 다양하고 입체적인 듯이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객관적 사실에 대한 도전으로 귀결된다. 과학적 지식을 사회적 구성물(구축물, 작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합리주의 전통(인류의 진보, 보편적 가치, 과학적 발견, 이성에 대한 믿음 등)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그러나 경험적 검증과 동떨어진 이론적 담론에 불과하며 과학(적 지식)을 수많은 이야기, 신화, 사회적 구성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인식론적·문화적 상대주의에 다름 아니다. 공저자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목소리에 수류탄을 투척한 것이다. 약간의 지적知的 백그라운드가 있어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⑥ 『나의 한국 현대사』 - 유시민, 돌베개

출간된 지 얼마 안 됐지만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책에 대한 평가는 유보적이다. 내용을 공감한다기보다 한 번쯤 읽어보기를 추천하는 책이다. 달필가 유시민의 신간이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 55년을 통해 한국의 현대사를 조망했다. 저자는 1959년에 출생했다. 그의 출생년도부터 2014년까지의 시기를 다뤘다. 유시민의 정파적 색채는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가 여태까지 분출해왔던 국내 보편의 좌파적 역사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저자의 쿨한 서술은 눈에 띈다. 박정희 시기의 명암을 차분하게 구분하려는 자세는 진일보했다. 책 곳곳에 주석을 단 인용서적의 리스트를 확인하는 것으로도 이 책을 읽는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주관적인 해석은 아쉽다. 자전적 현대사 에세이 정도로 읽는다면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다. 역시 글빨 하나만큼은 죽인다.


  
⑦ 『혁명 I, II』 - 김탁환, 민음사

최근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혁명가 정도전의 이야기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끝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의 내면세계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엄밀히 말해 이 소설은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는 순간(1392년 3월 17일)부터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당하는 순간(1392년 4월 4일)까지 18일간의 비망록이다. 소설의 구성은 일관적이다. 매 장마다 이성계, 왕(공양왕), 정몽주, 정도전의 순서로 화자가 교차되며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더욱이 문체의 변화무쌍함과 편재성은 소설의 재미를 입체적으로 폭발시키는 원동력이다. 작가는 편지, 가전체 등 당시 신진사대부들이 애용한 다양한 문체를 통해 각 인물의 내면을 관통한다. 특히 유배지 영주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화자 정도전의 유쾌한 내면을 엿보는 맛은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민심이 들끓고 정부에 대한 회의가 높아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혁명의 본질을 흥미롭게 탐구해볼 수 있는 소설이다.



 

⑧ 『병자호란 I, II』 - 한명기, 푸른역사

병자호란은 치욕의 역사다. 왕이 무릎을 꿇었고 백성은 죽거나 다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조선시대를 객관적이고 생산적으로 연구해왔다는 평가를 받는 우리시대 최고의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의 역작이다. <광해군>과 더불어 당대를 다룬 책 중 최고의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한 교수의 저작은 객관적인 시각과 담담한 문체로 정평이 나 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가해자인 청나라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잘못한 게 없는가. 국제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당쟁에만 휘말려 국력을 낭비한, 그리하여 연약하고 허접한 나라가 된 당시 조선 지도부의 무능과 허약함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민족적 수치이자 쪽팔린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병자호란의 역사는 작금의 한국사회에 녹록지 않은 화두를 던진다. G2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초강대국 사이에서 외교전쟁을 펼쳐야만 하는 대한민국의 현재상과 자연스럽게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의 교훈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G2 시대에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나름 어렵게 선정한 열 권의 책이다. 책이 곧 답이 되진 않지만 책 속에서 답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다. 좋은 책은 항시 답으로 가는 여정 위에 존재한다. 힘들고 난해한 세대일수록 책을 벗삼아야 한다. 이번 여름에 위의 책들이 좋은 벗이 되기를 다시 한 번 소박하게나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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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교회에서 청년부를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평소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었기에 청년부 담당 전도사님의 제의를 흔쾌히 수용했다. 강의 주제는 '청년의 본질'이었다. 그리스 철학과 20세기 현대사를 넘나드는 지난한 여정이었다. 강의는 계획된 시간보다 꽤 많이 초과됐다. 그러나 청년들은 마지막까지 잘 따라와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나는 청년들에게 역설했다. 청년시기에 올바른 지식과 건강한 사랑, 올곧은 비전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지식'과 '사랑'과 '비전'은 청춘을 빛내는 보석과 같은 것이며 그 시기 젊은이의 화두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훗날 성인의 아우라를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시간 관계상 사랑과 비전에 대한 내용은 다루지 못했다. 그날은 청춘이 가져야 할 지식의 성질에 대해서만 주로 얘기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이 보여준 구조적 무지와 같은 악의 평범성에 귀속되지 말 것을, 또한 중용을 파괴하는 편향된 지성에 함몰되지 말 것을 역설했다. 한나 아렌트가 설파했듯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은 악의 평범성을 생산시키는 귀속적 기제다. 젊은 시절에 편견과 선입견에 빠진 무지는 훗날 건강한 어른이 되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청년들에게 강력하게 전달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기대는 것은 일시적이고 징징대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개소리다. 청춘의 본질은 아픔에 있지 않다. 청춘은 어른이 되어가는 숭고한 통로다. 청춘과 어른 사이의 시간차는 청춘시절이 아름다울 수 있는 증거다. 어른이라는 실존은 청춘의 본질을 규정한다. 젊었을 때는 누구나 실수하고 넘어진다. 청춘이기 때문에 용인되는 것이다. 이는 청춘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더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며 진정한 어른의 생으로 존재론적 전환을 이루게 될 때, 그때는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젊었을 때 당연하게 용서됐던 상처와 실수가 무조건 옳거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강의 내내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사르트르, 솔로몬 등 수없이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두들겨 깠다. 쓰레기 같은 삶과 사상을 남긴 과거의 인물을 천착하며 청년들이 고민해야 할 점은 분명하다. 인간의 삶은 짧고 고단하고 가난하다는 것이다. 세상은 편하지 않다. 삶은 피곤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라는 달콤한 말로 선동한 이데아idea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가 천국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망상이다. 천국은 다른 곳에 있다. 그 '다른 곳'의 숭고한 비밀을 아는 자만이 천국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곳의 비밀을 경탄하며 그것을 자신의 심장 속에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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