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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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 국회의원이 대통령에게 책선물을 해서 화제가 됐다. 공중파에서 특정소설을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삼는 경우는 드물다. 언론의 유별난 찬사도 익숙지 않은 풍경이다. 딸을 가진 아빠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떠드는 지인의 권유가 제법 매섭기도 했다. 서점가에서는 '김지영이 하루키를 눌렀다'는 말이 들리기도 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동시대 대중의 정서를 공유하는 책이라면 읽어두는 편이 낫겠다 생각했다. 한국식 페미니즘에 거리를 두고 있는 나에게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그렇게 들어왔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기 때문에 줄거리는 다루지 않겠다. 아주 짧게 요악하자면 82년생 김지영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82년에 태어난 한 여성의 성장스토리가 소설 이야기의 본류이다. 각 장은 시대별로 나눠져 있고 주인공이 특정한 연령에 도달할 때마다 당시의 시대성과 포개어진다. 암울한 인생의 현장이 추적되고 들추어진다. 소설 전체를 포괄하는 전제는 이렇다.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이라는 곳은 여성이 살아가기에 힘들고 좌절하고 공포스럽다는 것이다. 김지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과 외부의 시선에 놀라고 불평하며 좌절하는 인물이다. 그녀가 겪고 느낀 한국적 현실은 어둡고 침울하며 착잡하다. 디스토피아가 따로 없다.

   솔직히 얘기하자. 나는 이 소설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간 많은 문학작품을 읽어왔지만 <82년생 김지영>은 냉정히 말해서 평균 미달인 소설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추어야 할 정형적인 측면에서 어설프고 형편없는 작품이다. 소설로서의 이야기적 흥미, 서사의 전개방식, 인물의 매력과 전형성, 인물간의 갈등구조, 보편적 담론을 이끌어내는 설득력 등 어느 것 하나 단단하거나 세련되 면을 발견하기 힘들다. 우리사회의 단면적 마이너리티를 오직 작가 주관의 연역적인 입장에서 조각하여 보편성의 담론으로 무리하게 연결짓는다. 그렇기에 작가적 주관을 제외하고는 소설의 모든 요소가 생명력을 잃고 허공을 멤돈다. 작가적 총론과 소설적 각론은 서로 조합하지 못한 채 어긋나고 균열된다.

   이 소설의 유의미성을 문학적 체계와 구조보다 메시지 자체에서 발견하려는 독자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메시지에도 문제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가 전하려는 주제는 일관적인데 비해 인물간의 갈등과 상황의 전개는 몹시 어색하다. 가장 큰 문제는 작가의 과한 설정 오류에 있다. 작가의 주제의식에 이야기의 파편이 강제적으로 짜맞춰져 있기 때문에 설득력을 잃은 무리한 묘사가 즐비하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성급하게 일반화했다. 작가는 단적인 사건을 일방적으로 보편의 함수관계에 등치시킨다. 또한 개별 인간의 문제를 남녀간의 대치적 상황논리로 대입한다. 작가의 독선적인 이분법은 소설 전체에 흐르고 있는 가장 고약한 전제다.

   작가의 편협한 상황묘사는 소설 곳곳을 빼곡하게 채운다. 가령 작중에서 김지영이 회사에 첫 면접을 보러가는 장면이 있다. 그날의 택시기사에 관한 묘사가 대표적이다. 첫 손님으로 여자를 안 태운다는 원칙은 그 택시기사 개인의 잘못된 성향이지 남자들의 문제는 아니다. 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하고 이를 비밀스럽게 돌려보는 사무실 남직원들의 모습 또한 그렇다. 그것은 단순한 범죄자의 모습이지 일상에서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설정이 아니다. 제일 가관은 소설 말미에 있다. 김지영이 유모차를 끌고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주변의 30대 남직장인들에게 맘충이란 소리를 듣는 장면이다. 김지영은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전율하며 한탄한다. "내가 오빠 돈을 훔친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장면을 배치한 걸까. 그것이 흔한 모습인가. 자연스러운가. 대부분의 여성들이 주변에서 쉽게 맞딱드리는 보편적 일상인가. 현실에서 만나기 힘든 극단의 예―혹은 특별한 사례를 작가는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남용했다. 각 장면마다 무리한 설정에 기대서 핍박받고 공포스럽고 좌절하고 혼란스러운 여성상을 이 시대의 보편성으로 부각시킨다. 작가의 오만한 작위성에 토가 나올 정도다.

   소설에 묘사된 여러 사례들은 개별적으로는 사실을 지적하는 기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개별이 하나의 총체적 사실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 김지영이 대한민국 모든 여자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지영의 일면은 공유할 수 있으나 김지영의 전체는 상당히 독특하기 때문에 보편성이 조각난다는 얘기다. 소설을 읽는 내내 김지영이라는 인물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종일관 불공평하다고 징징대는데 그렇다고 현실을 타파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현실에 순응하고 안주하면서 오직 불평과 포기로 일관한다. 80년대 이전생들 여성이 대부분 그렇게 산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김지영이 이 나라 모든 여자를 대변하는 듯한 그런 억지스러운 태도가 역겹고 짜증난다. 오히려 작가의 지나친 작위적 설정으로 인해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김지영의 표상성은 힘을 잃고 소멸되어 간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 소설에 공감을 갖는다고 한다. 그 공감을 무시하거나 기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 공감의 디테일(내밀성)에 나는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그들 중에서 '진짜 김지영의 삶'을 산 이는 얼마나 될까. 김지영의 일면이 아닌 김지영의 전체, 즉 오롯한 김지영 말이다. 남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다. 여자의 적도 남자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이 세계를 함께 경영하는 평등한 존재로서의 주체자이지 서로간에 경멸하고 기각하는 대상이 아니다. 이 소설의 굴곡된 논리 때문에, 즉 작가와 같은 이분법적 선입견에 함몰된 세계관으로 인해 우리사회에 여혐과 남혐이 번지고 꼴페미와 한남충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서로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참으로 안타깝고 혐오스럽다. 

   삶은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다. 꼭 여자라서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고 힘들고 고단하다. 남자는 남자대로의 고민과 무게가 있고 여자는 여자대로의 고충과 번민이 있다. 양성평등은 만고의 정의다. 하지만 지나친 약자의식에 젖은 '피해자 코스프레 페미니즘'은 그 어떤 생산적인 것도 추출할 수 없다. 우리시대의 페미니즘은 오직 급진주의 여성해방론으로 일관해왔다. 세계의 여러 문제들을 '핍박받는 여성'이라는 용암으로 녹여버렸다. 남녀 사이의 이분법적 구도로 사회문제를 편재해왔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이 힘든가. 이해한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이유로 한국사회에서 남자로 살아가는 것도 힘들다. 그것도 함께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작가의 논리대로라면 '82년생 김정훈'도 우리사회 곳곳에 존재하게 된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본래적으로 고단한 것이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징징대지 말라.

   이런 편협한 소설에 나약하게 감상되어 세상을 삐뚤고 굴곡지게 바라봐서는 곤란하다. 그럴 시간에 가족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이웃과 성실하게 교제하며, 자신의 일과 여가에 열심히 땀흘리는 것이 보다 값지고 보람찬 일일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세상은 원래 추악하고 고단하고 가난하다. 생생한 삶의 한복판에서 천국이 없다고 투덜대서야 되겠는가. 루돌프와 싼타클로스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어른됨의 본질이다. 진정한 행복은 바로 이 사실을 용기있게 관통하는데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작가의 삐뚤어진 사고방식에 중심추를 잃어버린 <82년생 김지영>은 외연만 요란할 뿐 실상 고약하고 부족하고 불쾌하기 그지없는, 과히 형편없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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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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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치고 러셀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드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의 하나다. 철학, 수학, 과학, 윤리학, 사회학 등 다채로운 영역을 탐구했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살아생전에 40여권의 책을 남길 만큼 열정적인 집필가였다. 하지만 러셀에 대한 내 평가는 애증의 선상에서 출발한다. 솔직히 그의 사상과 저작들 대부분에 냉소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호도된 조롱, 뼛속까지 가득한 좌익적(무정부주의적) 세계관, 철학에 대한 성급환 주관화(일반화), 기존질서를 대하는 경박한 태도 등 내가 그를 멀리해야 할 이유는 많다. 그러나 무조건 까고만 볼 수 없는 학자로서의 '박력'이 그에게 있다. 특유의 파워풀한 문장력과 어마어마한 글쓰기력에 압도당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가끔 그것이 나를 헷갈리게 한다.

   러셀에 대한 내 호감을 단적으로 드러낸 예를 소개하자.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네이버에서 주최하는 큰 규모의 어워드가 있었다. 각 분야별로 우수한 콘덴츠를 생산해낸 블로거를 선정하는 행사였다. 당시 나는 책리뷰 부문에서 우승을 했다. 시상식에서 나는 러셀의 말을 인용해 수감소감을 말했다. 러셀의 자서전을 인용한 것인데 그 내용은 상당히 유명하고 매혹적이다. 러셀은 그의 자서전의 서문에서 자신의 전 일생을 지배했던 세 가지 열정에 대해 고백한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다. 러셀은 이것들이 자기 삶에서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책읽기'였음을 역설한다. 러셀의 이 말을 인용해 나는 수상소감의 절반을 채웠다. 요컨대 나에게 러셀은 보편적 부정과 일면적 긍정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복잡한 인물인 것이다.   

   러셀의 수많은 저작 중에서 나는 『행복의 정복』을 최고로 꼽는다. 가장 유명한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호불호가 갈린다. 철학책치고 재미있고 박력있는 문체로 유명하지만 러셀의 지나친 주관과 삐딱한 편견 때문에 철학전공자에게는 증오의 책이다. 하지만 『행복의 정복』은 그런 불편한 호오가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긴 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행복의 정복』은 보편적으로 두루 널리 읽히는 고전이 됐다.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수학, 철학, 과학 등 전문분야를 다루지 않았고 러셀 스스로 작정하고 쉽게 썼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무엇보다 인간의 영원한 화두인 '행복'에 대해 20세기의 대학자가 논증한다는 점에서 많은 독자의 이목을 끌었다.

  
이 책이 활력있는 고전이 된 이유는 행복에 대한 저자의 태도에 있다. 러셀은 행복을 정복의 대상으로 본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약속된 미래가 아니고 노력해서 정복해야 할 것으로 규정한다. 행복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행의 원인을 아는 것이 필수다. 러셀은 책을 크게 '불행의 원인(Causes Of Unhappiness'과 '행복으로 가는 길(Causes Of Happiness)'로 나누어 설명한다. 현대사회에 만연한 일반적인 불행의 원인은 어두운 인생관이나 세계관, 경쟁, 피로, 권태, 질투, 부질없는 죄의식, 피해망상, 여론의 횡포 등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타파하여 행복으로 이르는 길에 올라타야 한다고 힘있게 논증한다.

   행복을 가로막는 여러 원인들을 뭉뚱그리자면 그것은 바로 자기집착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몰입은 자아를 바깥 세계와 단절시키는 주요한 원인이다. 자기도취나 과대망상, 모두가 나만 미워한다는 합리적이지 못한 자기비하 등의 감정은 우리를 자기 안에 가두어 행복이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러셀은 '나'에 대한 관심을 멈추고 되도록 외부 세계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한다. 마흔인 내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한 방의 충격이 있는 통찰이다. 

   행복은 자기 자신의 문제이다. 동일한 환경인데도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불행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행복에 관한 성찰은 일상의 편린이 아닌 삶의 총체성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인생의 비루한 속성은 외면한 채 삶의 디테일 하나하나마다 행복의 공식을 적용하는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내면과 외연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부분을 전체로 확대시키는 것이다. 자아에 구속될수록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육신이 건강한 사람은 시선을 외부로 향한다. 결국 행복은 학습과 환경이 아니라 자아와 관점의 문제인 것이다.

   내 주변에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들이 꽤 있다. 오래 사귄 사람들 중에도 여럿 있다. 자존감 자체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자신의 현존을 엉뚱한 방식으로 공격하는 경우라면 곤란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눈쌀이 찌푸려진다. 이는 관계라는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자기도취에 함몰된 사람은 타인과의 대화와 소통을 자아의 실존에 묶어두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대화의 기결(起結)을 자기자랑으로 채운다. 하지만 내용은 빈곤하고 맥락은 부재하다. 뜬금없기도 하다. 정작 자기 자신은 모른다. 더욱이 나이가 한참 어린 후배들이 이런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걸 보면 안쓰럽다. 정말 안타까운 건 대개 그들이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나르시시적 자존감은 열등감의 역설적 분출이라는 건 심리학계의 오래된 정설이다. 지나친 자기애를 불행의 본질적 요인으로 본 건 시대를 초월한 러셀의 통찰력이다. 

   행복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한 점에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은 건강한 에세이다. 어떻게 보면 뻔한 내용으로 보일 수 있지만 대철학자다운 탄탄한 논리로 자신의 논증을 이끌어간다. 러셀이 책에서 제시한 여러 논거들은 백년 전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이다. 시공을 초월하고 역사를 꿰뚫는 통찰이 있다. 시중의 천편일률적인 자기계발서를 읽을 바에는 러셀의 행복론을 일독하는 게 훨씬 더 유익하다. 읽을 때마다 그 울림이 매번 다른 고전이다. 사상, 종교, 정치와 무관하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보편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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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리커버 에디션)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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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유시민의 고전리뷰집 『청춘의 독서』가 리커버에디션으로 출간됐다. 내용은 그대로 두고 커버 디자인만 바꾼 신장판이다. 정계를 떠나 작가가 본업이 된 후부터 유시민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끼치는 그의 영향력은 결코 녹록지 않다. 정치적 외연을 벗고 저술과 강연으로 자신의 본실력을 굴곡없이 전달한 게 소위 '유시민 현상'의 원동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여러 방송을 통해 그의 지력은 더욱 재조명받고 있다. 그간 정치성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 그의 지적 내공이 대중적으로 널리 공유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지식인도 연예인 못지않은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풍토를 만든다는 점에서 유시민의 존재는 소중하다. 이에 2009년 출간 이후 지금까지 17만 권 이상 팔린 그의 스테디셀러 『청춘의 독서』를 재리뷰하고자 한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좋은 책은 항상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변화하게 한다. 책이 세계를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변혁의 동기를 부여하고 고취한다. 인류사에 기록된 수많은 고전들을 보라. 그것들은 인간을 탐구하고 시대를 조명하며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왔다. 한 시대 공동체 구성원의 지적 화두를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고전에는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것이 없는 텍스트는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고전은 뜨겁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인간의 당위적 가치와 그 시대의 고민에 직면할 수 있게 된다. 대작가(대저자)의 혼과 숨결은 텍스트 곳곳에서 독자의 머리와 가슴을 진동시킨다. 고전은 입증된 텍스트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욱 지난한 시간의 검증과정을 누적하며 그 입증을 단단히 쌓는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고전을 통해 참된 길이 무엇인지를 교훈받고 도전받는다.

   '지식소매상'임을 자처하는 우리시대 대표 진보 지식인 유시민은 『청춘의 독서』를 통해 바로 고전을 얘기한다. 저자 자신이 청춘시절에 읽고 감동한 고전 중 14편을 선정하여 독자에게 소개한다. 저자가 전하는 14편의 고전은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찬란한 명저들이다. 저자는 저작마다 담긴 웅숭깊은 가치와 다양한 시대성에 대해 수준높은 식견과 진지한 자세로 리뷰한다.

   유시민은 역시 진보다. 훌륭한 명저였지만 서슬퍼런 정권의 감시때문에 공개적으로 읽기가 힘들었던 희대의 금서들을 리스트 위에 올려놓았다.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불과 이십오 년 전만 해도 금서로 분류되어 제도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작품들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이 과거에 비해 확실히 '좋은 시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만개한 세상이 됐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전환시대의 논리』를 숨어서 읽고, 『공산당 선언』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남산에 끌려가는 시대는 종말했다. "젊은 시절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서 빛나는 금서들을 탐독했다"는 저자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진실이 역사를 어떻게 압도해왔는지를 새삼 반추한다.

   이 책의 가치는 다양성에 있다. 인간, 역사, 철학, 정치, 사회, 과학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다채로운 관점과 방법으로 관류해온 여러 고전을 선택했다. 도스토옙스키에서 카(E. H. Carr)에 이르기까지 세기의 천재들이 뿜어낸 텍스트는 한결같이 역동적이고 찬란하다. 고전을 집필한 거인들은 항상 새로운 것으로써 기존 사상과 관습을 들추어보려고 했다. 용기가 있었고 끊임없이 고민했으며 깊이 통찰했다. 그리고 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생산했고 재창조했다. 이러한 고전작품의 혁신적 정신은 항시 시대성의 전복과 맞물려 발생해왔다.

   고전이 지닌 태동적인 진보성은 저자의 성향을 고려하면 자연스럽게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선술한 바와 같이 유시민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명징한 진보주의자다.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정치적 선탠과 신념은 기존의 것을 바꾸고자 하는 데에 많은 부분 닿아 있다. 이러한 그의 진보적 색채는 시대 안에서 시대를 혁신해온 고전의 특질과 일맥상통한다. 난 믿는다. 모든 고전은 태생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수주의자인 나에게 '고전의 진보'가 뿜어내는 생기(生氣)는 언제나 도전이다. 이념의 대립을 넘어선 '검증된 지적 대화'라는 점에서 고전을 관통하면서 보수와 진보는 화해한다.

   저자는 각 고전 속에 살아 숨쉬는 여러 맥락을 소개한다. 기존 해설서와는 다른 저자만의 시각과 사유로 추출해낸 해석이 인상적이다. 젊은 시절 날카로운 첫키스와 같은 책 《죄와 벌》을 통해 평범한 다수가 갖는 강력한 힘과 선한 수단과 목적 사이의 인과관계를 사유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배웠고, 《공산당 선언》을 읽으며 혁명의 가치와 매력에 경도되었다. 《맹자》에서 진정한 보수守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사기》를 통해 권력의 단면과 정치의 속성을 배웠다. 《진보와 빈곤》을 읽고 문명과 빈곤의 함수관계를 학습했고,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개안(眼)을 일으켰다. 물론 그의 주관과 해석에 내가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다.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부분은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편이다. 이 소설은 개인과 언론 사이의 무서운 구조적 관계에 대해 묘파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카타리나와 신문사 '차이퉁'의 대립은 당시 독일에서 작가 자신과 일간지 <빌트>와의 대결구도를 그대로 상징한다. 판매부수 400만 부로 독일 내 1위 신문 <빌트>는 논조가 매우 보수적이며 때로는 극우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많이 팔린다고 해서 '일등 신문'이 되는 건 아니다. 비록 <빌트>보다 판매량이 많진 않지만 품격 있고 사회적 영향력을 갖춘 다른 신문들이 균형감 있고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한국적 현실을 대조한다. 1위부터 3위까지 모두 '빌트'로 점령당한, 다수가 '일등 신문'이라고 부르고 읽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환경에 빠져 있는 한국 언론시장의 세태에 한숨을 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급받는 정보와 진실은 일차적으로 미디어의 프레임을 통해 가공된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영향으로 종이신문의 권위가 예전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언론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신문의 헤드라인이 가진 거대한 폭력을 고발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유시민이 어떤 생각과 마음에서 읽었을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주지하다시피 그와 나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스탠스를 달리 한다. 엄밀히 말해 개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근본인식에 큰 차이가 있다. 자기자신을 스스로 '자유주의자(liberalist)'로 규정하는 것만 동일할 뿐 그는 상당히 왼쪽에, 나는 굉장히 오른쪽에 서 있다. 그럼에도 내가 그와 그의 텍스트를 즐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식인으로서의 실력을 그가 갖추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시민의 거의 모든 저작들을 탐독해왔다. 저자와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소위 나는 '유빠'인 것이다. 그의 책(언어)은 한결같이 쉽고 시의적이며 재미있다. 어렵고 민감한 사안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다는 건 지식인으로서 최고의 내공이다. 그의 책과 강연과 방송이 대중으로부터 환영받는 이유다.

   '다윗의 서재'를 자주 찾는 분이라면 유시민에 대한 내 견해가 상당히 안온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감지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정치적 견해와 사상적 맥락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까고 보자는 스탠스는 곤란하다. 예컨대 나는 꼴통보수이면서도 완전한 공산주의자 에릭 홉스봄을 좋아했다. 그의 내공(내용이 아닌 내공 그 자체)과 태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유시민 또한 마찬가지다. 지식인에 대한 평가는 입체적이어야 한다. 유시민을 향한 내 따뜻한 시선은 바로 그 기준에 닿아 있다. 한국 보수에 유시민만한 지식인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의 고전리뷰집 『청춘의 독서』를 아낌없이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저작 중 최고로 꼽는다. 돈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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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이기주의 에세이 <언어의 온도>가 또다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수십 주 째 베스트셀러에 우뚝 서 있다. 도무지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간 눈에 띄는 신작이 없던 이유도 있지만 작가 특유의 따뜻한 문장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외연을 확대해간 것으로 보인다. 언어의 홍수 속에서 말과 글의 범람에 허덕이는 현대인들에게 이 한 권의 책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건넨다.

   평소 자기계발서를 위시하여 소위 '힐링서적'에 거리를 두는 편이다. IMF 이후 국내 서점가는 위로와 멘토를 중심으로 한 힐링문학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서점 중앙에 군을 형성하여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정도다. 읽어 보면 대부분 내용과 얼개가 도긴개긴이다. 개별성을 고려하지 않은 저자만의 기준과 실질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는 합리주의로 쓰여진 말랑말랑한 얘기들뿐이다. <언어의 온도>는 그런 책들과 궤와 결을 달리 한다. 작가 이기주는 뜬구름 잡는 달콤한 소리에서 벗어나 언어의 일상성과 인문성을 대중적인 수준에서 잘 녹여냈다. 

   언어에도 온도가 있을까. 이에 대한 작가는 답은 단호하다. 분명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온도>는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라는 명확한 선언으로 책 표지의 전면을 장식한다.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설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언어적 존재'라는 명제에도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사회적 맥락은 대부분 언어를 통해 채워지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 상처와 번민, 기대와 실망 등 인간이 향유하는 거의 모든 정서적 소용돌이는 서로 간의 말과 글을 통해 발생한다. 따뜻한 언어가 사람 사이를 안온하게 하고 차가운 언어가 사람 사이를 냉랭하게 한다. 사회는 곧 언어인 것이다.

   언어에는 힘이 있다. 기독교는 신神이 세상을 언어(말씀)로 창조했다고 선언한다. 빛이 있으라, 했더니 빛이 생겼다. 나사로야 일어나라, 했더니 죽은 사람이 깨어났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신성에 기인한 것이다. 인간은 언어의 힘을 신으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렇기에 인간의 언어에도 신성적 힘과 능력이 내재해 있다. 언어가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킨다. 반면 언어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주변을 어둡게도 한다. 즉 언어는 그 내밀성 속에 빛과 어둠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으며 인간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수렴하고 있다. 그야말로 인간은 호모로퀜스(Homo loquens)다.

   작가는 여러 지식과 경험을 통해 추출한 사유로 자신의 언어학을 풀이한다. 일상의 편린이나 한 편의 영화, 혹은 다양한 간접경험을 소재로 해서 '언어'라는 매개로써 독자의 가슴을 관통한다. 아주 작은 일상의 순간, 좀 더 큰 시간의 흐름, 더 크게는 한 사람이 가진 삶의 폭과 같은 것들을 통해 보편적 이해와 공감대를 추출한다. 각론에서 뽑아내는 총론의 메시지가 가볍지 않고 각 장이 총체적으로 '언어의 격格'이라는 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통합된다는 점에서 작가의 단단한 내공이 느껴진다. 

   작가는 '언어의 온도'를 말하기 위해 적확한 '언어의 무게'를 찾았다.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다. 특유의 냄새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개성이 강한 문장들도 아니다. 불필요하게 화려한 덧칠을 하지 않았다. 허세와 겉멋이 없는 진솔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무색무취의 공명적 힘이 있다. 과하지 않고 군더더기없는 문장을 이쁜 디자인으로 두른 작은 책에 담았다. 그렇기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많은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책이 됐다. 힐링서적에도 '격格'이란 게 존재한다. 두서없이 마구 갈겨쓴 여느 에세이들과는 격을 달리 한다. 주제를 잡고 일관되게 쓴 작가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잘 쓴 책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이례적인 호평 속에는 앞으로 비평의 시각을 변화하고자 하는 내 의지가 담겨 있다. 내 비평의 현존을 진지하게 탐색한다. 베스트셀러에 대해 보다 아량있는 스탠스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기존에는 베스트셀러에 옥석을 구분하는 예리한 칼날을 먼저 들이댔다. 위대한 고전의 존재성을 기준으로 하여 현재의 책들을 재단하려고 했다. 돌아보건대 불필요한 짓이었다. 요즈음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유시민의 말대로 "베스트셀러는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에 베스트셀러인 것"이다. 많이 팔리는 책은 이유가 있다. 동시대 대중으로부터 공감과 사랑을 받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힘과 능력이다. 그래서 말하겠다.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를 아낌없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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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일상에 관한 이런저런 상념을 두서없이 남긴다.

1.  19대 대통령 취임
   새 대통령이 취임했다. 시의성 때문인지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나라의 진보주의 담론을 대중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신임 대통령에게 국민들은 녹록지 않은 기대를 보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나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진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꽉 막힌 보수꼴통인 내가 그의 정책과 이념을 지지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취임 초기의 여러 신선한 모습에 박수를 아끼고 싶지는 않다. 철학과 진영이 다르다고 해서 잘한 것에 대해 무조건 비판하려는 태도는 부당하다. 지지 여부를 떠나 지금은 힘을 실어주고 격려해줄 때다. 부디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2. 이기주 <언어의 온도>
   이기주 작가의 에세이 <언어의 온도>를 읽고 있다. 베스트셀러 1위에서 쉽사리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간 눈에 띄는 신작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작가 특유의 따뜻한 위로의 문장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외연을 계속해서 확대해가고 있는 듯하다. 가벼운 맥락의 힐링서적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이기주의 에세이는 신선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최근 말과 글로 인해 상처와 권태를 가진 내 자신의 현재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나의 한계를 유독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나 자신을 비워야 할 때다. 이기주의 말대로, 비우는 행위는 뭔가를 덜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움은 자신을 내려놓은 것이며 자기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3. 책 추천
   아끼는 교회 후배가 연애와 결혼을 준비하며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간만에 서재를 훑었다. 책장 빼곡하게 들어선 책들을 살피며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사랑을 책임진다는 것.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것. 이것들은 그야말로 어렵고 험난한 길이다. 추할 때도 있고 고독할 때도 있다. 그러나 기적의 길이기도 하다. 이 고차함수의 길을 묵묵하게 관통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삶과 사랑과 사람은 동의어'라는 진리에 자신의 현존을 맡길 수 있게 된다. 부디 후배녀석이 뜨겁게 사랑하며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4. 육아
   최근 둘째를 많이 혼냈다. 둘째 특유의 심통기질이 최극단의 지점에 도달한 듯하다. 엄마와도 매일 전쟁을 치른다. 훈육은 엄마의 영역이지만 가끔 아이가 도를 넘어설 때에는 참지 못하고 개입하곤 한다. 인내가 부족했다. 부끄럽다. 물론 두 딸이 너무 예쁘다. 하지만 어떨 때는 한없이 밉기도 하다. 아이는 정말 내 맘대로 크지 않는다. 육아와 훈육은 부모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이미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현실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난 아직 멀었다. 부족한 아빠다.

5. 구분선
   최근 객관과 주관의 철학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사실과 주관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설정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어떤 사안에 대해 자기만의 주관과 견해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 자체를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명확한 사실을 자신의 주관적 구성물로 대체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몹시 불편하다. 그들은 사실에 관한 명확한 텍스트를 제시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 식의 '악의 평범성'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다. 우리 주변 곳곳에 내밀한 방식으로 숨어 있다.

   베이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기각한 논거는 바로 대전제의 오류였다. 대전제가 잘못되면 과정과 결론은 공히 거짓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다양한 건 좋은 것이다. 다양성에 대한 관용은 우리사회가 밝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분선'을 인정하지 않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에릭 홉스봄의 말대로 사실과 허구를 가르는 명백한 구분선은 존재한다. 개인이 분출하는 모든 형태의 다양성도 바로 이 구분선 위에서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의견은 자유롭되 사실은 신성한 것이다. 고민은, 그 구분선을 지적하는 순간 관계의 균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부분이다.

6. 진정한 남자
   "진정한 남자는 열등감을 갖지 않습니다" 라디오에서 전여옥 작가의 말이 흘러나온다. 정치인은 정치를 그만둘 때 비로소 철이 드는 것 같다. 전여옥도 그렇고 유시민도 그렇고 현실정치를 그만두고 작가라는 지식인의 본업으로 복귀하면서 내공과 매력을 더욱 찬연하게 뿜어내는 듯하다. 한때 거침없는 독설로 주변에 생채기를 많이 남긴 전여옥의 말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혹적인 명언이다. 그렇다. 열등감은 남자의 본성과 양립하지 않는다. 결코 함께 설 수 없다. 형편없는 남자만이 열등감을 가진다. 남자는, 아니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열등하지 않다.

7. 고전 원서
   외국고전을 읽다 보면 작품과 문장이 너무 좋아서 그 나라 언어를 배우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원서로 읽고 싶은 욕망이 샘솟음치는 것이다. 대표적 언어가 독일어와 러시아어다. 나에게 독일은 괴테의 나라고 러시아는 톨스토이의 나라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독일어 원서로 <안나 카레리나>를 러시아 원서로 읽을 수 있다면, 딱 한 번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 인간의 타락이여. 바벨탑의 비극이여. 나의 무지함이여. 천성의 게으름이여.

8. 인간의 품격
   "품질은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다" 문화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말이다. 이 말을 인간에게 적용해서 다음과 같이 패러디해볼 수 있겠다. "인격은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다" 그렇다. 사람의 품격이란, 과거와 오늘이 없고 보수와 진보가 없다. 인격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훌륭한 인격은 신(神)을 닮아가는 거룩한 여정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거추장스러운 형용수사로 정의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생이란, 선하고 겸손하게,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다.

9. 독서 권태
   요새 들어서 책읽기에 흥미를 잃고 있다. 책읽기에 권태가 생기니 자연스럽게 글쓰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간 많은 책을 읽어왔다고 자부하지만 독서를 통해 얻는 앎과 지혜는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지식이 있다. 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깎이고 떨어져 나가는 지식도 많다. 나이가 들수록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는 깨달음에 봉착하곤 한다. 그럴수록 책더미에서 해방되는 것이 참 지혜를 알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과 나 자신 사이의 적절한 긴장관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책과 지식을 떠나 사람과 신앙을 돌아보자.

  
   삶은 고되지만 참으로 역동적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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