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로의 길 - 유럽의 교훈 석학인문강좌 69
박지향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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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명예혁명(1688), 미국의 독립혁명(1776). 프랑스의 프랑스혁명(1789). 우리는 이 세 혁명을 '세계 3대 시민혁명'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혁명은 의회를 중심으로 왕권을 제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프랑스는 절대왕정을 타도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봉건적 체제와 중세적 관념을 타파하고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세 혁명은 공통점을 가진다. 

   나는 선술한 3대 시민혁명 중 2개만 긍정한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입헌군주제에 안착해 현재까지 이르게 한 영국의 명예혁명은 말 그대로 '명예로운' 혁명이다. 비록 의회가 주도했지만 영국은 명예혁명 이후 지금까지 큰 정치적 혼란 없이 입헌주의의 전통을 잘 지켜왔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 국왕의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군주, 귀족의 신분과 봉건적 토지 제도의 잔재를 일소하고 3권 분립에 의한 민주적 공화제를 인류 최초로 만들어낸 위대한 혁명이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다르다. 혁명의 정의에 가장 근접한, 소위 '혁명의 어머니'로 불리지만 그 전개과정과 이후 프랑스의 역사를 조망하면 종국적으로 실패한 혁명으로 수렴된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평가는 다원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패한 혁명이라는 평가가 많아지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대의 다수 역사가들은 한 목소리로 프랑스혁명의 부정성을 논하고 있다. 나도 프랑스혁명이 실패한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이다. 영국과 미국은 올곧은 근대혁명을 통해 근대국가의 체제를 확립하고 시민의 자유와 안정을 꽃피웠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요란하고 잔혹하고 참담한 대가를 치뤘지만 끝내 나폴레옹 독재로 귀결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나폴레옹 체제 이후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거치면서 유럽의 2등 국가로 전락했다. 결국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한 뒤 유럽의 패권을 독일(프러시아)에게 넘겨줬다. 전통적으로 유럽이기를 거부해온 영국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여기서 프랑스혁명에 관한 부정적 입장을 구체적으로 공유할 생각은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근대성(近代性, modernity)'의 원류이다. 근대라는 말이 오늘날 더 이상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탈근대를 이야기하는 요즘에 근대는 낡고 식상한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하지만 비판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아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인류를 근대의 문으로 연 건 분명 유럽이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유럽의 근대를 논할 때 영국과 프랑스를 양축으로 언급한다. 이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함께 아우른다는 의미인데 영국과 프랑스가 각 키워드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사실 영국적인 전통과 프랑스적인 특징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영국은 유럽으로 불리길 싫어하(했)고 프랑스는 유럽의 맹주이길 갈망한(했)다. 중세 말기의 100년 전쟁 이후 두 나라 사이의 지독한 긴장관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는 "근대성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신간 <근대로의 길>을 통해 근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최강국인 영국이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눈부신 성취를 이룰 수 있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핀다.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보장해주고 소유와 권력이 비교적 고르게 분산된 사회가 궁극적으로 성공한 사회"이며, 그런 "자유와 소유와 권력의 분산은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영국에서 처음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2014년 12월 한 달 동안 진행했던 한국연구재단의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를 기반으로 씌어졌다. '근대로의 길, 유럽의 교훈'은 평생 저자의 연구의 핵심주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책 전반에서 저자의 거침없는 서술과 풍성한 자료 제시가 눈에 띈다.

   저자는 국내의 저명한 영국통이다. <영국사>, <제국주의>, <슬픈 아일랜드>,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중간은 없다.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 <대처 스타일> 등이 그녀의 영국 관련 주요 저서다.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경계와 탈(脫)근대 담론이 일고 있지만 인류가 지독한 중세적 사고에서 벗어난 데에 영국의 힘이 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자는 일평생 영국사를 천착하면서 중요한 원리를 하나 발견했다. 영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자유, 소유, 권력의 분산을 빨리 확립한 원인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개인(個人)'이었다. 프랑스처럼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지만 영국은 광범위한 사회집단을 대변한 의회가 왕권을 제한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자유를 확대해갔다. 개인에게 노동과 아이디어의 대가를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영국의 제도적 장치는 기술자에게 동기부여를 했고 산업혁명을 촉발했다. 집단을 극복한 '개인의 발견'이 영국이 이끈 근대성의 초석이었다.

   개인에 관한 철학은 결코 과거완료적 주제가 아니다. '개인'과 '집단'의 대립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권이 멸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세계는 집단주의(collectivism)에 신음하고 있다. 내 돈은 우리 돈이 되었고 내 책임은 우리 책임이 되었다. 독립적인 개별 인간에 대한 책임의식이 '공동체'라는 말랑말랑한 용어로 뒤덮여지고 있다. 오랜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공동체의식이 유독 강한 한국사회에서는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이기주의(egoism)와 혼동할 정도로 개인에 대한 철학이 빈곤해 있다. 물론 공동체 자체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는 모호한 것이다. 불분명한 것이다. 명징하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건 개인이다. 자유로운 개별 인간(개인)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를 구성한다. 즉 시선과 기준은 항시 개인에서 사회로 향하는 것이지 그 역순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 책은 여러 지적 감흥을 제공한다.

   물론 이 책의 한계가 없지는 않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 때문에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강의내용을 정리한 것이라 읽는 내내 공부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곳곳마다 등장하는 수치와 도표도 이를 대변한다. 저자의 욕심이 컷던 듯하다. 조금 더 쉽고 편안한 방식으로 딱딱한 강의를 유연하게 풀어서 기술했다면 책의 존재감은 달라졌을 것이다. 흥미로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많은 독자를 확보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처 스타일>을 위시하여 과거 그의 저작들이 대부분 대중과 호흡해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소중하다. 근대성의 역사적 원류를 살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근대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무엇보다 개인에 관한 탐구가 빈곤해 있는 한국의 현재성을 감안한다면 이 책은 꼭 필요하다. 이런 책이 많이 팔려야 한다. 독자로서 이런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유독 근현대사와 관련해 지난한 논쟁에 빠져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에서 이 책의 존재가치는 매우 높다. 전문적이고 딱딱하지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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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뭇한 소식을 전한다.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 4부작이 드디어 완간된다는 소식이다. 출판사 문학동네의 최근 공지에 의하면 금월 24일에 마지막 4권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로써 작년 10월에 1권이 출간된 이래 만 1년 만에 새로운 번역본이 완간되었다. 국내 톨스토이 번역의 최고 권위자인 고려대학교 박형규 명예교수의 노고와 열정으로 무려 만이천 매의 원고에 달하는 거대한 분량의 대작이 원전에서 단 한 줄의 누락없이 완전하게 번역된 것이다. 박 교수와 편집자,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오래전 범우사(박형규 역)판으로 이 소설을 읽었다. 아주 오래전이라 소설의 내용과 맥락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작년 허리수술로 한 달간 요양할 기회가 있었을 때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었다. 인간에 대한 환멸과 인생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때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고 삶과 인간에 대한 기존의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린 때이기도 했다. 나에게 남은 건 하나님과 가족, 그리고 책밖에 없었다. 인간과 역사 사이의 함수관계를 힘있고 거대하며 입체적으로 묘사한 <전쟁과 평화>의 장대한 한복판에 나 자신을 침잠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박형규 교수가 새롭게 번역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할 수 없이 완간 때까지를 기다려오게 된 것이다.

   <전쟁과 평화>를 포기하고 읽은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이 또한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소설이어서 손에 땀을 쥐고 읽어내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문학평론가 이현우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세계문학사의 양대산맥으로서 두 작가에 의해 세계문학(소설)은 전부 덮인다"고 말한다. 즉 세르반테스 이후 우리가 '소설(小說, novel)'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모든 개별성들은 두 작가의 작품으로 오롯이 커버된다는 얘기다.

   도스토옙스키과 톨스토이는 소설을 쓰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세계관 자체에 차이가 있다. 전자는 항상 삶을 얘기했고 후자는 끊임없이 죽음을 얘기했다. 전자는 정통 기독교적이며 후자는 변형 기독교적이다. 전자는 시선이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며 후자는 내부에서 외부로 향한다. 전자는 인간 내면의 디테일 속으로 끊임없이 밀고 들어가는 반면 후자는 인간을 넘어 세계와 우주의 거대함 속으로 치고 올라간다. 톨스토이의 기본 세계관은 자아에 대한 무한대의 확장이다. 그 확장 과정에서 보편 인간을 만나고 러시아를 목도하며, 종국적으로 세계(우주) 전체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키우다보니 나도 모르게 '거대한 것'에 대해 탐구하게 된다. 이는 마음의 넓이와 정신의 크기에 관한 것인데 나 자신과 세계, 그리고 신(神) 사이의 삼각관계를 보다 높은 차원의 방정식에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타자와 세계는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신은 얼마나 광대한 존재인가. 그리고 역사에서 그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등. 곧 마흔을 앞둔 나에게 이 장대한 소설이 어떤 울림을 선사할 것인지 자못 흥분된다.

   데카브리스트에 관한 탐구로 계획된,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무대로 한, 나타샤의 성장소설이자 장엄한 역사소설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완벽한 번역으로 곧 다시 읽는다. 올겨울은 '전쟁과 평화'의 한복판에 서 있을 것 같다. 지갑을 크게 열어 양장판 셋트로 지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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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자신이 시무하던 비텐베르크 성당 게시판에 "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제로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이후 종교개혁의 불길이 전 유럽을 뒤덮었다. 신(神)은 더이상 교황과 사제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만인의 하나님이었다. 사람들은 활자로 인쇄된 성경을 읽으며 신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자기자신의 진본을 발견해갔다. 유럽 곳곳에서 개인에 대한 천착이 이루어졌다. 이후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 터졌고 서구사회는 근대로 진입했다.

   사실 종교개혁을 시도했던 사람은 루터 이전에도 존재해왔다. 대표적인 인물로 얀 후스(Jan Hus, 1372~1415)가 있다. 그는 루터보다 100년 앞서 부패한 성당을 맹렬히 비판하고 면죄부 판매를 비난해 로마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종교개혁은 비록 실패했지만 훗날 루터를 위시한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오늘날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 외에도 유럽 여기저기서 비슷한 외침으로 종교개혁을 외친 선구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후스와 루터를 갈랐던 것일까. 다시 말해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주지하다시피 그건 바로 인쇄혁명이었다.

   후스 시대는 활자가 발명되기 전이었다. 필사의 시대였다. 모든 것을 손으로 써야 했다. 후스의 외침이 전 유럽에 퍼지지 못했던 것은 그것을 대중적으로 전달(전파)할 소통의 수단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터의 시대는 달랐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고안한 것은 15세기 중반이다. 반세기 사이 인쇄술은 독일 여러 도시에 꽤 확산된 상태였다. 다만 인쇄할 만한 거리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인쇄업자들은 굶주렸다. 하지만 무명의 사제가 절대권위인 교황에게 맞붙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뉴스였다. 멈춰서 있던 활자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독일 전역은 물론 전 유럽에까지 확산됐다. 그외 종교개혁과 관련한 여러 논쟁들이 인쇄되었고 팔려나갔다. 유럽사회의 지력이 폭발했다. 거대한 지식의 향연이었다. 이제 유럽인들은 더이상 과거의 그들이 아니었다. 세상은 바뀌었다.

   시공간을 동양의 19세기로 돌리자. 일본 메이지 시대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라는 유명한 계몽사상가가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죽일 놈'이지만 일본에서는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일본 화폐 만엔 권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계몽을 촉구하며 "정신의 서구화 없이 물질의 서구화는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쓴 <학문의 권장>이라는 책은 당시 무려 300만 부나 팔려나갔다. 19세기 후반의 일본 전체인구를 3,500만 명 정도로 추산했을 때 열에 하나가 이 책을 읽은 것이다. 일본사회는 변화했다. 메이지유신은 조선의 갑신정변과 청의 양무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비록 방향은 옳지 못했지만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룩했다. 요컨대 메이지유신의 힘은 바로 책의 힘이었다.

   내가 장황하게 루터의 종교개혁과 메이지유신을 거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책과 활자의 힘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비단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사례 외에도 인류 역사상 책의 힘을 증명하는 예는 수없이 많다. 거꾸로 책을 경멸함에서 왔던 지난한 역사도 수없이 많다. 여기서 굳이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을 거론하지는 않겠다.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분노와 짜증이 밀려오는 비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국사회에 모택동을 높게 평가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잔존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어떻게 모택동을 찬양할 수 있는가. 그야말로 미친놈들이다. 각설하자.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문자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책의 힘을 안 민족과 국가는 번영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쇠락했다. 

   뱌아흐로 영상문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모든 것이 영상으로 대체되는 '도상적 전회(iconic turn)'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 VR, 사물인터넷 등 시각적인 것을 강화(강조)하는 쪽으로 인간의 소통과 문화가 변화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고 영상매체가 가진 장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문자가 가진 본래적 힘은 영상의 폭풍 속에서도 반드시 괴멸하지 않는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의사소통코드는 오직 문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궁극과 본질에서 문자를 대체할 코드는 없다. 문자만이 가진 고유한 '구체성'은 영상의 메커니즘으로는 발현해낼 재간이 없다. 즉 영상은 문자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보완하고 수식하는 수단으로서만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사이의의 일차적 커뮤니케이션 코드는 문자다. 

   다시 종교개혁으로 돌아가자.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여기저기서 요란하다. 반대로 혹자들은 너무 무관심하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더 예민하게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이 비단 기독교(도)만의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종교개혁이 유럽과 전 세계에 끼친 영향을 감안한다면 이는 누구나 공부하고 공유해야 할 인류 보편의 자산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개인을 인식하게 됐고 그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볼 수 있게 했다. 바로 거기에 '문자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역사는 항상 문자가 전해준 역사였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책 한 권 쓰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과 정신은 제자 플라톤에 의해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작금의 우리가 3D게임과 아이폰X가 주는 희열에 열광하는 스마트족이라 할지라도 죽도록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책 좀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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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짧고 소설은 길다. 소설에도 급이 있다. 유독 거대한 소설이 있다. 여기서 '거대함'이란 단순한 분량보다는 '정신의 크기'를 말한다. 예컨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작품은 인류 문학사의 가장 위대한 금자탑으로서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지만 그 독서과정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기적의 소설이다. 등장인물의 수와 생명력, 서사적 흡입력, 시대를 관통하는 구심력, 심원한 주제의식과 독특한 작풍(作風) 등 그야말로 괴물과 같은 소설이다. 거의 모든 출판사의 세계명작전집에 반드시 들어가 있으며 다수의 사람들이 읽어본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읽어본 사람이 드문. 좀 더 솔직히 말해 책 좀 읽었다는 자들이 최고의 책이라고 떠들 뿐 정작 읽는 이는 거의 없는 신비의 소설이기도 하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작년에 처음 완독했다. 허리수술을 한 뒤 집에서 요양하면서 읽은 것인데 아직도 그때 받은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sms다. 소설을 제법 빠르게 읽는 나에게 이 소설은 꽤 긴 호흡을 요구했다. 다 읽고 나서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고 내 안에서 왜 살아야 할지를 새삼 의문하게 했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멍하니 하늘을 응시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아직까지 서평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소설이 공유하는 거대담론에 대한 명확한 주관과 도스토옙스키의 의미심장한 세계관에 대한 차분한 견해가 아직 내 머리속에서 명징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소설은 거대한 여운을 남긴다. 여운이 클수록 갈무리는 어렵다. 이는 세밀함이나 복잡함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세계의 크기'와 '의식의 확장'에 관한 문제이다. 작품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거대할 경우 스케일 자체에 압도되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애매해지게 되는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난이도가 만만치 않은 소설이다. 소설 앞부분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적 논쟁에 몰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가문 이름이 어려워서 메모해가면서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 분량이 상당하다. 민음사를 위시하여 거의 대부분의 출판사에서 세 권으로 출간했다. 읽기도 전에 책 두께에서 먼저 주눅이 든다. 수천 페이지를 넘기는 것 자체도 곤욕이거니와 소설 기저에 흐르는 신학적, 철학적, 사상적 맥락을 붙잡고 따라가는 건 여간 험난한 작업이 아니다. 평소 꾸준한 책읽기로 기본적인 독서체력을 확보하지 않고 장편에 대한 이해(理解)와 애착을 전제하지 못한 독자라면 이 소설은 읽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 인생의 마지막 소설이다. 그는 이 소설을 쓰다가 죽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유일한 미완의 소설이자 최후의 걸작이다. 완결되지 않은 작품임에도 이 소설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오직 문학성에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물간의 묘사와 갈등을 굉장히 섬세한 방식으로 그려냈는데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인간의 복합적 인격을 각각의 카테고리로 분류, 형상화한 것이다. 소설은 다양한 인간군상의 부딪힘 속에서 인간의 절대가치가 무엇이고 무너진 인간성의 회복을 신앙적, 실존적, 도덕적 선상에서 어떻게 완성해야 하는지 심오하고 묵직하게 담아낸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에서 인간을 진정한 해방으로 이끄는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그는 인간 자유와 양면적인 본성을 억압하는 대가로 경제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당대의 어떤 이념에도 반대했다. 그는 인간 영혼의 자유와 사랑, 그리고 부활에 대한 희망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진정한 힘이라고 믿었다. 소설은 미완으로 남아 주인공 알료사가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장면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혹자들은 이 소설의 주제를 '신에 대한 탐색'으로 해석해왔고 또 다른 혹자들은 '악의 문제'로 규정해왔다. 고전 중 가장 토론적인 소설이다. 잔인하되 웅장하고, 추악하되 숭고하며, 기이하되 선명한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적, 철학적 정수를 맛볼수 있는 실로 괴물과 같은 작품이 바로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소설에 대한 소개가 길었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를 하자. 얼마전 '효리네민박'이라는 종편예능에서 가수 아이유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장면이 방영되어 화제가 됐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취미로 삼아온 아이유의 입장에서 "책읽는 게 뭐가 그리 화제일까"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선술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문학적 무게와 심원성을 부인하지 못한다면 이십대 중반의 아이돌 여가수가 한가롭게 여유로운 자세로 이 소설의 책장을 넘기고 있는 모습은 단연 인상적인 것이라 하겠다. 나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책과 관련한 그녀의 여러 에피소드를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왔고 진지하게 책읽기를 탐식해왔는지 더 많이 알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음악성에 관한 관찰로 내 관심은 전도(확장)됐다.

   아이유는 상당히 노래를 잘 부른다. 가창의 기술뿐 아니라 표정과 감성에 있어 도저히 이십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특색있는 운치와 기풍이 그녀에게는 존재한다. 아이유의 음악은 시대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모든 노래는 시대를 안고 태어난다. 즉 노래를 듣고 부를 때마다 그 노래가 탄생한 시대의 감정과 겹쳐지는 것이다. 아이유의 목소리에는 그 시대를 '지금 여기의 시간'으로 끌고 오는 힘이 있다. '그 시대'와 '이 시대'가 아이유의 목소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포개지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감수성을 가진 이십대 가수는 많지 않다. 나에게는 아이유와 로이킴 정도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어떻게 그런 놀라운 감성을 가진 가수가 됐을까. 그녀보다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많지만 그녀와 같이 노래하는 가수는 드물다. 어린 나이에 시간과 목소리를 공명시키며 노래하는 가수는 극히 드물다. 그 나이에 얼마나 사람을 만났고 얼마나 세상을 경험했기에 그녀의 목소리에서 김광석이나 유재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무(無)'와 '여백'에 관한 공허한 감동이 느껴지는 걸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음악적 현상이 어떤 내적 본질에 기초하고 있는지에 대해 나는 깊이 사유했다.

   혹 독서 때문은 아닐까. 그녀가 읽어온 수많은 소설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과 부질없는 세계에 관한 탐구가 그녀를 높은 차원의 시간세계로 인도한 동력은 아니었을까. 책을 통해 여러 인간의 모습을 진지하게 탐색함으로써,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특질의 긴장을 자신의 가슴속에 녹여놓은 게 아닐까. 어려서부터 아이유가 쌓아올린 책더미들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부여잡은 음악적 감수성의 연원을 찾아보는 건 지나친 오버일까. 내가 너무 나간 것인가. 아이유와 도스토옙스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조금 더 생각하면 제법 어울릴 수 있겠다 생각했다. 독서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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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의 심리학 - 아버지의 부재와 무신론 신앙
폴 비츠 지음, 김요한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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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는 좋은 책들이 많다. 시간의 힘은 강하다. 개인을 기준으로 한다면 독서는 항상 세월보다 앞선다. 인생은 짧지만 양서는 수없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다독가라 할지라도 거대한 책더미 앞에서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책 중에서 보석과 같은 책을 만날 때는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것이다. 어딘가 구석에 숨어 있어 널리 읽히지 않은 책들 중에서 보물을 발견할 때만큼 큰 희열은 없다.

   폴 비츠의 <무신론의 심리학>은 보석과 같은 책이다. 인파가 없는 해변가 끝자락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진주 같은 책이다. 저자 폴 비츠는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로 무신론자들의 삶을 추적해보니 공통적으로 아버지에게 결함이 있다는 놀라운 논증을 시도한다. 부정적인 아버지상이 무신론을 향하는 정신적 토대가 된다는 것인데 저자의 여러 논거들을 훑는 과정은 상당히 재미있다. 출판사 새물결플러스에서 2012년에 번역·출간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일차적으로 '아버지'와 '무신론' 사이의 연관성을 역사적 천착과정을 통해 논증한 데 있다. 니체, 흄, 쇼펜하우어, 러셀, 사르트르, 홉스, 포이어바흐, 프로이트 등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철학자들을 논증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책 속에는 대(大) 사상가들의 가정환경과 유년기의 기록과 증언이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신과 종교에 대한 비존재와 불필요성을 역설한 열세 명의 무신론자들의 삶을 추적한다. 그들이 아버지와 어떤 부정적 관계를 맺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사상과 철학에서 어떤 방식으로 신을 기각하게 됐는지 힘차게 논증한다.

   저자는 반대사례인 '유신론의 심리학'도 함께 다룬다. 이는 무신론 철학자의 삶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저자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한다. 저자는 파스칼, 페일리, 윌버포스, 슐라이어마하, 토크빌, 슈바이처, 바르트, 본회퍼 등 위대한 유신론자들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꼼꼼하게 추적한다. 또한 '정치적 무신론자'를 별도로 추가했다. 희대의 독재자 스탈린, 히틀러, 모택동의 어긋난 권력의지의 기저를 파헤치고 그 태동에 파괴된 아버지와의 관계가 놓여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그 외에도 남성과 여성이 자신의 논리적 맥락 위에서 각기 다르게 반응한다는 점을 논증하기도 한다. 또한 예외사례(드니로)와 개인적 사례를 더해 논증의 넓이를 크게 확보했다.

   이 책의 주제는 간명하다. 신에 대한 이해가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심리학적 표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무의식적으로 신에 대한 부정을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파괴된 관계(부재, 결핍, 학대)가 유년기의 가정환경은 물론 훗날의 인격형성을 좌우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해소되지 않아 삶을 둥개고 인격이 고장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존재한다. 가정의 상처는 가정 외에서 치유받기가 대단히 힘들다. 현대 교육학과 사회학의 공통된 목소리다. 저자는 이를 무신론과 아버지의 상관관계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신(神)'이다. 커가면서 부모보다 더 큰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어린 시절에 교제했던 부모에 대한 잔상은 그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는 절대적 전거이다. 아이의 내적 성품은 오롯이 가정에서 결정된다. 여기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보편적으로 어머니는 자식과 모생애적 친밀성으로 긴밀하게 맺어져 있다. 반면 아버지는 보다 독특하고 난해한 위치를 점한다. 어머니는 존재만으로 친밀하지만 아버지는 꼭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대개 아들에게 더 그렇다. 유년 시절에 아버지의 부재 혹은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로 자아가 굴곡된 이들을 나는 주변에서 수없이 봐왔다. 그들의 분노는 타자를 겨누고 사회를 향한다. 자신의 현존을 갉아먹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치유되지 않는다. 비극이다. 

   '다윗의 서재'에 자주 방문해온 이웃이라면 내가 '가정'이라는 공동체에 녹록지 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가정학을 공부했고 그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해왔다. 관련된 많은 책을 읽었고 주변 지인들과 여러 담론을 쌓아왔다. 나에게 있어 가정은 내 '양심'과 '신앙'과 '책임'을 하나로 집약시킨 단 하나의 천국이다. '가정 행복'이야말로 내 인생 성공의 절대 원칙이자 숭고한 증거이다. 이러한 나의 보수적 가정관은 대부분 기독교 신앙과 가정교육에 기인한 부분이 크다. 그러나 모호하거나 원론적인 선언에 함몰되어 있지는 않다. 이런 배경에서 이 한 권의책은 나에게 무척 소중하다.

   인간은 가정에서 만들어진다. 사회는 개별인간의 본성과 궁극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회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바꿔 말해서 인간은 사회가 구원할 만한 싸구려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부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류사를 빛낸 여러 철학자들의 삶을 추적하여 여기에 대입해보는 연구는 굉장히 매력적인 주제이다. 그 수고의 연장선상에 이 책의 존재성이 놓여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을 다루다보니 개괄적으로 짧게 훑고가는 방식으로 씌어진 점은 아쉽다. 제시한 거대담론에 비해 적은 분량도 아쉽다. 깊이와 디테일보다는 넓이와 개괄성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다. 이를 감안하면 꽤 흥미롭게 읽을 만하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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