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고 소설은 길다. 소설에도 급이 있다. 유독 거대한 소설이 있다. 여기서 '거대함'이란 단순한 분량보다는 '정신의 크기'를 말한다. 예컨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작품은 인류 문학사의 가장 위대한 금자탑으로서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지만 그 독서과정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기적의 소설이다. 등장인물의 수와 생명력, 서사적 흡입력, 시대를 관통하는 구심력, 심원한 주제의식과 독특한 작풍(作風) 등 그야말로 괴물과 같은 소설이다. 거의 모든 출판사의 세계명작전집에 반드시 들어가 있으며 다수의 사람들이 읽어본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읽어본 사람이 드문. 좀 더 솔직히 말해 책 좀 읽었다는 자들이 최고의 책이라고 떠들 뿐 정작 읽는 이는 거의 없는 신비의 소설이기도 하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작년에 처음 완독했다. 허리수술을 한 뒤 집에서 요양하면서 읽은 것인데 아직도 그때 받은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sms다. 소설을 제법 빠르게 읽는 나에게 이 소설은 꽤 긴 호흡을 요구했다. 다 읽고 나서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고 내 안에서 왜 살아야 할지를 새삼 의문하게 했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멍하니 하늘을 응시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아직까지 서평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소설이 공유하는 거대담론에 대한 명확한 주관과 도스토옙스키의 의미심장한 세계관에 대한 차분한 견해가 아직 내 머리속에서 명징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소설은 거대한 여운을 남긴다. 여운이 클수록 갈무리는 어렵다. 이는 세밀함이나 복잡함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세계의 크기'와 '의식의 확장'에 관한 문제이다. 작품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거대할 경우 스케일 자체에 압도되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애매해지게 되는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난이도가 만만치 않은 소설이다. 소설 앞부분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적 논쟁에 몰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가문 이름이 어려워서 메모해가면서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 분량이 상당하다. 민음사를 위시하여 거의 대부분의 출판사에서 세 권으로 출간했다. 읽기도 전에 책 두께에서 먼저 주눅이 든다. 수천 페이지를 넘기는 것 자체도 곤욕이거니와 소설 기저에 흐르는 신학적, 철학적, 사상적 맥락을 붙잡고 따라가는 건 여간 험난한 작업이 아니다. 평소 꾸준한 책읽기로 기본적인 독서체력을 확보하지 않고 장편에 대한 이해(理解)와 애착을 전제하지 못한 독자라면 이 소설은 읽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 인생의 마지막 소설이다. 그는 이 소설을 쓰다가 죽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유일한 미완의 소설이자 최후의 걸작이다. 완결되지 않은 작품임에도 이 소설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오직 문학성에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물간의 묘사와 갈등을 굉장히 섬세한 방식으로 그려냈는데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인간의 복합적 인격을 각각의 카테고리로 분류, 형상화한 것이다. 소설은 다양한 인간군상의 부딪힘 속에서 인간의 절대가치가 무엇이고 무너진 인간성의 회복을 신앙적, 실존적, 도덕적 선상에서 어떻게 완성해야 하는지 심오하고 묵직하게 담아낸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에서 인간을 진정한 해방으로 이끄는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그는 인간 자유와 양면적인 본성을 억압하는 대가로 경제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당대의 어떤 이념에도 반대했다. 그는 인간 영혼의 자유와 사랑, 그리고 부활에 대한 희망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진정한 힘이라고 믿었다. 소설은 미완으로 남아 주인공 알료사가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장면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혹자들은 이 소설의 주제를 '신에 대한 탐색'으로 해석해왔고 또 다른 혹자들은 '악의 문제'로 규정해왔다. 고전 중 가장 토론적인 소설이다. 잔인하되 웅장하고, 추악하되 숭고하며, 기이하되 선명한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적, 철학적 정수를 맛볼수 있는 실로 괴물과 같은 작품이 바로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소설에 대한 소개가 길었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를 하자. 얼마전 '효리네민박'이라는 종편예능에서 가수 아이유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장면이 방영되어 화제가 됐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취미로 삼아온 아이유의 입장에서 "책읽는 게 뭐가 그리 화제일까"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선술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문학적 무게와 심원성을 부인하지 못한다면 이십대 중반의 아이돌 여가수가 한가롭게 여유로운 자세로 이 소설의 책장을 넘기고 있는 모습은 단연 인상적인 것이라 하겠다. 나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책과 관련한 그녀의 여러 에피소드를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왔고 진지하게 책읽기를 탐식해왔는지 더 많이 알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음악성에 관한 관찰로 내 관심은 전도(확장)됐다.

   아이유는 상당히 노래를 잘 부른다. 가창의 기술뿐 아니라 표정과 감성에 있어 도저히 이십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특색있는 운치와 기풍이 그녀에게는 존재한다. 아이유의 음악은 시대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모든 노래는 시대를 안고 태어난다. 즉 노래를 듣고 부를 때마다 그 노래가 탄생한 시대의 감정과 겹쳐지는 것이다. 아이유의 목소리에는 그 시대를 '지금 여기의 시간'으로 끌고 오는 힘이 있다. '그 시대'와 '이 시대'가 아이유의 목소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포개지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감수성을 가진 이십대 가수는 많지 않다. 나에게는 아이유와 로이킴 정도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어떻게 그런 놀라운 감성을 가진 가수가 됐을까. 그녀보다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많지만 그녀와 같이 노래하는 가수는 드물다. 어린 나이에 시간과 목소리를 공명시키며 노래하는 가수는 극히 드물다. 그 나이에 얼마나 사람을 만났고 얼마나 세상을 경험했기에 그녀의 목소리에서 김광석이나 유재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무(無)'와 '여백'에 관한 공허한 감동이 느껴지는 걸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음악적 현상이 어떤 내적 본질에 기초하고 있는지에 대해 나는 깊이 사유했다.

   혹 독서 때문은 아닐까. 그녀가 읽어온 수많은 소설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과 부질없는 세계에 관한 탐구가 그녀를 높은 차원의 시간세계로 인도한 동력은 아니었을까. 책을 통해 여러 인간의 모습을 진지하게 탐색함으로써,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특질의 긴장을 자신의 가슴속에 녹여놓은 게 아닐까. 어려서부터 아이유가 쌓아올린 책더미들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부여잡은 음악적 감수성의 연원을 찾아보는 건 지나친 오버일까. 내가 너무 나간 것인가. 아이유와 도스토옙스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조금 더 생각하면 제법 어울릴 수 있겠다 생각했다. 독서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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