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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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상 수상작은 거의 찾아보는 편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세계문학상은 재미있고 술술 잘 읽히며 스토리가 탄탄한 소설이 주로 선정된다. 초기 수상작인 김별아의 『미실』은 너무 재미있고 흡입력이 있어 드라마 <선덕여왕>의 탄생에 영감을 주었다.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 백영옥의 『스타일』, 정유정의 『내 심장을 쏴라』는 각기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어 대중으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문학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가 '재미'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세계문학상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보편의 문학적 기호를 담아내고 걸러내는 관문의 역할을 잘 수행해왔다. 내가 세계문학상 수상작을 탐독하는 이유다.

제19회 세계문학상은 문미순 작가의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이 수상했다. 소설은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 전 세계에서 유례없이 빠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이 나라 대한민국의 서민 가족의 이야기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부모 간병의 문제를 해학적인 이야기로 풀어냈다. 묵직한 주제가 흥미로운 인물과 사건을 통해 더 진지하게 고찰하게끔 만든다. 독자는 웃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오금이 저리기도 하면서 진지한 주제를 관통한다. 작가의 탁월함이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아파트 옆집에 사는 중년 여성 명주와 젊은 청년 준성이 각자 치매와 뇌졸중으로 쓰러진 부모를 홀로 감당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이와 성별과 상황이 다르지만 둘의 중요한 공통점은 경제력이 여의치 않은 채 홀로 노부모의 간병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남편과 이혼하고 13평 임대 아파트에 홀로 사는 모친을 간병하는 50대 여성 명주의 삶은 비루하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대리운전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26세 청년 준성의 삶도 박복하긴 마찬가지다. 소설은 두 화자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다가 어느 결정적 시점에서 만나 이야기의 절정을 이룬다.

소설의 이야기는 충격적이고 엽기적으로 흘러간다. 명주는 엄마의 연금 때문에 엄마의 죽음을 숨긴다. 엄마의 시신을 아마포로 둘러싸 미라로 만들어 작은방에 모신다. 준성도 마찬가지다. 욕실에서 넘어져 사망한 아버지의 시체를 어떻게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른다. 결국 명주의 도움으로 사체은닉 공범이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범죄가 그저 '죄'로만 보이지 않는다는데 이 소설의 핵심이 있다. 작가의 문제 제기는 간명하다. 치매와 뇌졸중과 같은 노인 중증 환자의 간병을 오직 가족에게 일임하는 게 옳으냐, 하는 것이다. 결코 남일 같지 않고 남일이 되어서도 안 되는 이 거대한 사회적 문제를 작가는 흥미진진한 픽션으로 풀어냈다.

명주와 준성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이지만 보다 궁극의 화자는 명주다. 시간 순서상으로 먼저 범행(?)을 일으켰고 자신의 말과 행동에 자의식이 강하게 묻어 있는 인물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남동생의 이른 죽음, 이혼과 화상 사고 장애 등 어느 누구보다 기구한 삶을 살았지만 그 처절한 현실에 짓눌리지는 않는다. 자신과 엇비슷한 처지의 준성을 설득해 '공범'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명주라는 캐릭터를 적극적 나르시시즘에 빠진 단순하고 엽기적인 돌아이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엄마의 시체를 은닉하면서 "이건 세상이 내게 준 모욕과 멸시에 대한 보상이야. 이 세상이 내게 갚아야 할 빚이야. 사죄야"라며 묵직한 한방을 날릴 줄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명주의 일갈은 작가의 말을 대신 전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의 구조, 즉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순서를 충실히 따른다. 엄마를 미라로 만든 명주의 비밀이 들킬랑 말랑하는 이야기로 전개되면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특히 정체불명의 남자가 명주의 집으로 전화해 "당신이 저지른 죄를 알고 있다"며 협박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소설의 성격은 미스터리로 전환되는 듯하다. 그렇기에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하며 읽는 묘미가 제법이다. 부양과 간병이라는 우리 사회의 무거운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되 누구에게나 마음속 깊은 누추한 양심 어딘가에 한 번쯤 상상해 봤을 조악한 인간성을 그려냈다는 것에 이 소설의 생명력이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더욱이 치매와 같은 병은 아무리 효자라 해도 감당하기 힘든 인간성 너머의 시험 거리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젊은이보다 노인이 많은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우리 사회도 간병과 부양의 문제를 세밀하고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명주와 준성처럼 부모의 시신을 유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중요한 건 그 지옥 같은 일상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준성이 술 취한 아버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상상으로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그 죄책감에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많은 걸 시사한다. 부양과 간병의 문제에 신음하는 우리 주변의 여러 사람들의 불편하고 내밀한 '진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첫 장편이다. 작가 자신의 실제 체험이 집필에 토대가 되었다 한다. 코로나 시기 때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75일 동안 간병하면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 작가의 암묵지가 소설 속 명주와 준성의 특질에 투영된 듯하다. 간병 일 자체의 디테일은 모르겠으나 노부모 간병을 어려운 조건에서 홀로 떠안은 사람의 존재론적 고뇌와 감정이 잘 살아있다. 소설을 읽으며 다시 한번 부양과 간병의 문제를 천착했다. 나에게도 아직까지는 건강하시지만 곧 팔순을 앞두고 계신 아버지와 허리가 좋지 않아 주기적으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어머니가 계시다. 그렇기에 외아들로서 많은 사유가 남았다. 개인의 책임인지 국가의 과제인지 논하기 앞서 인간성의 본질과 상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새삼 곱씹었다. 이 무거운 메시지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낸 작가의 연금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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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꿈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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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을 키우고 있다. 큰 딸의 사춘기 진입이 예사롭지 않다. 과거에 비해 말수가 줄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짜증을 많이 낸다는 걸 느낀다. 예전 같았으면 꿀밤을 한대 갈겨주었을 텐데 이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흔히 여자아이의 사춘기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라고 한다. 어떤 의미인지 알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고민과 공부 없이 지나치기에는 아빠로서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책 몇 권을 골랐다. 우리 시대 가장 잘나가는 젊은 작가 손보미의 신작 『사랑의 꿈』은 그렇게 해서 내 손에 들어왔다.

『사랑의 꿈』은 단편 「불장난」으로 작년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손보미 작가의 연작소설이다. 6개의 단편이 미세한 연결로 이어져 있고 동시에 완전히 독립된 이야기로 배치되었다. 표제작 「사랑의 꿈」을 제외하고는 전부 10대 초중반 여자아이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 그래서인지 각각의 화자들은 십 대 소녀의 기분과 감정을 잘 대변한다. 그 나이대의 관찰과 생각으로 타자와 세계를 파악하는 모습이 흥미롭게 읽힌다.

여섯 편의 단편이 공유하는 미세한 연결고리는 '정우맨션'이라는 아파트다. 사실 이 소설이 왜 '연작소설'로 분류될까 의문했다. 사건 연관성이 있는 단편을 모아 하나의 총체적인 이야기를 완성하면서 장편의 분량을 구축한 소설을 통상 연작소설로 부르는데 이 소설은 각 단편마다의 연결고리가 극히 희박하다. 그나마 연결고리가 있다면 정우맨션이다. 어렸을 때 각인된 특정 장소에 대한 기억은 유달리 오래간다. 나도 35년 전 초등학교 친구들과 토요일마다 가재를 잡았던 안양유원지를 생생히 기억한다. 또 평일 방과 후 '더블 드래곤'이라는 게임을 했던 관악역 앞 오락실을 결코 잊지 못한다. 유년 시절의 장소는 당시의 추억을 고스란히 정지 화면으로 이미지화하여 뇌에 아로새긴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소설에서 정우맨션이 갖는 독특한 위치다.

『사랑의 꿈』에 등장하는 10대 소녀 중 일부는 가정의 파괴를 겪는다. 부모가 이혼(「불장난」)했거나 삼촌 집에서 길러지거나(「밤이 지나면」)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으려 하거나(「사랑의 꿈」) 등 상처가 있는 가정들이 배치된다. 가족의 분열이야말로 어린 시절에 겪을 수 있는 가장 참혹한 존재론적 균열이다. 아이는 그 균열을 통해 망가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의 극복을 통해 슈퍼맨이 되기도 한다. 친구를 향한 동경과 첫사랑의 발견 등 그 시절 여성으로서 외부 세계를 날 선 시선으로 바라보고 경험하게 하는 동인도 소설은 다룬다다. 아프기도 하고 눈부시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한 유년 시절의 불가해함을 작가는 노련한 필치로 그려냈다.

개인적으로 수록작 중 「불장난」에 유독 많은 감정이 이입되었다. 이상문학상 수상이라는 외연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니다. 나도 어렸을 때 아파트 옥상에서 불장난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기억을 절대 잊지 못한다. 다만 소설과 다른 점은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의 차이다. 소설에서 아이는 아버지의 라이터로 옥상에 올라가 종이를 태운다. 훗날 중학생이 되어 과거의 그 경험을 바탕으로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는다. 작가의 경험이 투영된 장면이라 한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하지도 않은 남의 이불을 태웠다는 오해와 모략을 받아 소위 개 패듯이 맞았던 기억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상처로 남아 있다. 소설 속 아이는 불장난을 통해 자신을 괴롭힌 수치심과 굴욕감, 외로움을 연소시켰을지 몰라도 과거의 나는 단순한 불장난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른들로부터 확증편향을 당해 이웃의 이불을 태워버린 방화범이 되었다. 「불장난」을 읽는 내내 그때의 억울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첫사랑」과 「이사」는 과외 선생과의 관계를 통해 겪게 되는 주인공의 성장통을 담았다. 「첫사랑」은 군 입대를 앞둔 대학생 오빠가, 「이사」는 주인공과 한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중학생 언니가 과외 선생으로 등장한다. 부모 외에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처음 겪은 타인을 향한 신비로운 감정은 결국 비루한 진실 앞에서 폭파되고 해체되어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양태된다. 세상 모든 아이가 겪는 고통,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것을 극복해 내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참 나'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다양한 성장통의 모습이 1인칭 시점의 발군의 묘사로 그려졌다.

소설의 막장을 덮고 많은 생각을 했다. "연약하지만 다채롭고 위태롭지만 맹렬한 세계 속에 포함되어"(192쪽)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작가의 표현대로 사춘기는 위태롭지만 맹렬한 세계다. 기성세대로서 십 대 시기의 특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오직 위태로움에 대한 방어기제로 그 시절을 재단하려 하지 않았는지 자문했다. 서두에 언급한 대로 이 소설은 딸아이의 사춘기 입성에 맞춰 아빠로서 그 시절 여자아이들의 심리와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집어 든 책이다. 최근 부쩍 말수가 줄고 가끔 내뱉는 말조차도 엄마와의 신경전에 대부분 소비하는 아이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연약하면서도 다채롭고 위태로우면서도 맹렬한 세계에 진입되고 있는 내 딸의 여정이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기를 기대한다. 엄청난 성장과 함께.

서평을 정리하자. 반추해 보니 너무 감상적인 서평이 되었다. 앞서 고백한 내 진지한 현실이 반영된 탓일 게다. 픽션이 논픽션보다 진실되다는 평소의 내 독서 철학을 거뜬히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손보미의 소설 『사랑의 꿈』은 압도적이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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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오랜만에 아이들과 책장 정리를 했습니다. 추가되는 책은 많아지는데 순서에 맞게 꼽아놓지 않아 체계 없는 중구난방의 책장이었지요. 차일피일하다가 아이들이 도와준다고 하여 잽싸게 작업했습니다. 제 책장은 양면으로 되어 있는데 침대가 있는 전면은 문학으로 채웠고 장롱이 있는 후면은 비문학으로 채웠습니다. 이마저도 공간이 부족하여 첫째 딸 방에 별도 책장을 설치해 제가 가장 아끼고 영향을 준 명저들, 즉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카뮈, 위고, 폴 존슨의 저작들을 따로 구분해두었지요.

문제가 되는 건 안방 책장의 한국문학이었습니다. 가나다순의 작가명 배열이 완전히 파손되어 공선옥부터 현기영까지 순서대로 맞췄고 제가 좋아하는 공지영, 신경숙, 오소희, 김훈 작가는 별도 구획으로 모아놨습니다. 그리고 문학 내에서도 소설과 비소설을 나누어 일반적인 에세이, 즉 여행후기와 산문집 같은 책은 작가명과 무관하게 별도로 묶었습니다. 아이들이 도와주어 금방 끝날 수 있었지요. 이제 남은 건 후면의 비문학 도서―주로 인문학 서적―를 손보는 일입니다. 워낙 책이 많고 먼지도 많아 하루 반나절을 소요해야 할 듯합니다. 물론 아이들이 즐겁게 도와주겠지요.

한국문학을 정리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내가 참 많은 한국 작가들을 만났구나. 결혼 전 가장 많이 읽은 게 한국소설이었습니다. 비 오는 금요일 밤 퇴근하자마자 소파에 누워 김훈의 『남한산성』을 벌벌 떨며 한달음에 읽은 기억은 아직도 선연합니다. 박민규는 한국소설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려준 작가이고, 공지영은 내가 관심 갖지 않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민낯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김별아의 에세이는 내가 가장 아끼는 '힐링'이었고 『달의 제단』을 위시한 몇 권 안 되는 심윤경의 소설은 나에게 하나의 독특한 '브랜드'로 심어졌지요. 신경숙의 문체와 이문열의 무게는 여전히 저를 압도하지요. 한국소설은 여전히 찬란합니다.

고전과 인문학으로 이탈했던 제 독서를 응시하면서 이제 한 달에 한두 권씩은 꼭 한국문학을 만나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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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 - 흔들리고 지친 이들에게 산티아고가 보내는 응원
손미나 지음 / 코알라컴퍼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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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파울류 코엘류를 참 많이 좋아했다. 오래전 정치와 인문도서를 즐겨 읽다가 문학으로 기호를 옮길 시점이 있었다. 그때 나를 강렬히 끌어들인 게 바로 코엘류의 연금술적 문장이었다. 당시 몇 달 만에 코엘류의 모든 소설을 읽었을 정도로 그의 글과 이야기를 좋아했다. 15년 전 신(神)의 여성성을 탐구한 『포르토벨로의 마녀』에 처음 매료된 후 코엘류의 소설들을 거꾸로ㅡ현재에서 과거 순으로ㅡ읽기 시작했다. 『연금술사』 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등 그의 유명작들을 두루 훑었다. 그중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 내 마음속을 가장 강렬하게 붙들고 있는 작품은 그의 처녀작 『순례자』다. 이 소설을 읽은 후 스페인 산티아고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혼이 났던 기억이 선연하다.

소설 『순례자』 탓인지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에게 로망이 되었다. 이후 내 나이 서른이 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산티아고의 존재를 잊었다. 그러다 아이돌 그룹 GOD가 재결성되어 산티아고 길을 함께 걸은 TV 예능을 본 후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열망이 다시 샘솟았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고 산티아고는 완전히 잊힌 듯 보였다. 내면의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산티아고에 대한 내 무의식을 다시 일깨운 건 여행작가 손미나의 신간이다. 그녀의 신간 에세이는 오랜 시간 잠재적으로 봉인되어 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내 갈망의 불꽃을 다시 태우기 시작했다.

신간 『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는 작가 손미나가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후 약 40일 동안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완주한 여정을 담았다. 이 책은 기존 여행기와는 달리 오직 '산티아고'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의 스페인 사랑을 생각하면 더 먼저 떠났어야 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떠났어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산티아고 길을 언제 걸을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고 때가 되면 그 길이 부른다"는 말처럼 지난해 봄, 작가는 가슴속에서 드디어 산티아고 길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지독한 전염병이 3년간 전 세계를 뒤집어 놓고 사라지려 시작하려던 시점이다. 작가는 산티아고 길로부터 '계시'를 받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스페인행 비행기 표를 끊는다.

책 속에는 인생 2막으로 넘어가는 한 중년 작가의 도전과 용기, 열정과 사랑, 위로와 사유가 포근하게 담겨 있다.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 피레네산맥 24.2km 구간을 거쳐 총 800km에 이르는 대장정 가운데 작가는 여러 유의미한 주제를 포착하고 가치 있는 사유를 추출한다. 아름다운 경치와 거쳐가는 마을마다의 고유성을 관찰하는 재미는 현상적인 것일 뿐 본질적이지는 않다. 긴 여로에서의 본질은 결국 '나 자신'이란 걸 깨닫는다. 죽도록 힘든 피레네산맥 코스가 끝나면 앞으로 쭈욱 펼쳐진, 마치 자기 인생길을 은유하는 듯한 길고 긴 도보길이 펼쳐진다. 걸으면 걸을수록 작가는 산티아고의 울림을 더 깊이 발견하고 음미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코스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도착한 작가는 종국적인 깨달음 앞에 고개를 숙인다. 결국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내면의 질문과 그것에 대한 해답, 그리고 자신이 받아야 할 위로와 사랑, 더 나아가 인생 2막에도 더 무겁게 짊어져야 할 타자와 세계의 무게 등. 작가 자신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여러 의미는 결국 자기 마음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걸 알기 위해 걸어야 했고, 그 길을 걸었기에 그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고백은 깊은 울림을 준다.

여행 에세이로서 이 책의 강점은 적확한 사진의 배치에 있다. 글과 사진의 불일치성과 외연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잃게 된 글의 무게는 조악한 여행수기가 갖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불편함이 없다. 책 속 빼곡히 들어선 다양한 산티아고 사진들은 나란히 기술된 작가의 글을 잘 수식하고 보완한다. 사진 한 장 한 장마다 책 속에서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이 소중하게 펼쳐져 있다. 특히 앞으로 길게 늘어선 산티아고 길을 향해 홀로 걷는 작가의 뒷모습을 풍경과 함께 찍은 책 표지 사진은 탁월하다. 표지만 보고도 책을 사고 싶게 만드는 기술이다.

책장을 덮은 후 생각했다. 서두에 언급한 대로 나는 왜 산티아고 길을 가고 싶어 했는지. 모호했다. 구체적 이유 없이 그저 일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애매한 일탈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결국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는 걸 발견하기 위해 걷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는 내 현실의 비루함을 부인할 수 없겠다. 언젠가 꼭 떠날 것이다. 혼자도 좋고 아내와도 좋다. 때에 따라서는 큰 딸과 함께도 좋다. 산티아고 길의 로망을 다시 한번 내 가슴속에 밀어 넣으며 기분 좋은 감상을 갈무리한다. 손미나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일독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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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끝장이자 극한'으로 평가받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작년에 완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희영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10년간의 혼신의 번역이 출판사 민음사를 통해 결실을 맺었다는 뉴스를 통해서다. 프루스트 서거 100주년에 딱 맞춰 완간했으니 무덤에 있을 작가가 손뼉을 칠만한 절묘한 타이밍이다. 잘 알다시피 이 소설은 끊임없이 확장되는 긴 문장으로 유명하다. 한 문장이 페이지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흔하고, 한 페이지를 꽉 채우기도 한다. 가장 긴 문장은 931단어나 된다. 김 교수는 한글과 어순이 다른 프랑스어를 원문의 흐름 그대로 옮겼다고 한다. 10년 동안 매일 같이 6시간씩 번역 작업에 매진했다고 하니 과히 노학자(老學者)의 열정에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일반 독자보다 작가와 평단에게 더 박수를 받는 작품이다. 모두 수천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7편의 연작 소설로 이루어진 이 긴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서 한 소년이 사랑을 알게 되고 예술을 향유하면서 한 시대를 살아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T.S. 엘리엇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20세기 2대 걸작으로 꼽으며 "이들을 잃지 않고 문학을 논할 수 없다"라고 했다. '타임스'와 '르몽드'는 이 소설을 20세기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다. 모루아, 발레리, 베케트, 보부아르 같은 거장들뿐만 아니라 들뢰즈, 리비에르, 베냐민 등의 비평가, 철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 이 소설은 읽기가 정말 쉽지 않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이 소설을 완독한 자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나는 완독주의자(完讀主義者)다. 웬만해선 완독하는 편이다. 도중에 그만둔 책은 많지 않다. 지루하고 난잡하기 그지없는 장 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도 완독한 나였다. 읽었던 소설 중 가장 긴 분량이었던 32권의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짧은 시간에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껌이었다. 그러나 정말 끝까지 읽기 힘든 책이 있다. 읽다가 중도 포기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루함'이고 다른 하나는 '난해함'이다. 물론 둘을 동시에 갖춘 텍스트는 정말이지 한 장조차 넘기기 힘들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기 위해 수차례 도전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긴 호흡을 좋아하는 장편소설 마니아인 나에게 프루스트의 대작은 과히 넘사벽이었다. 나와 잘 맞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 소설을 스킵 없이 완독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물음은 매번 실패할 때마다 드는 나만의 정신승리였다. 앙드레 모르아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라고 말했다. 모르아의 말대로라면 나는 프루스트를 읽지 않은, 아니 못한 사람이다. 

이 소설에 대해 할 얘기는 많지만 지금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이걸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왜냐면 매번 실패하면서도 재차 도전하고 싶은 욕망이 들 정도로 이 기묘하고 거대한 텍스트는 매력적인 완역본으로 내 앞에 우뚝 서 있다. 최근 내 독서는 방향을 잃었다. 기준과 박력, 도전과 일관이 필요하다. 23년에 반드시 읽어내고야 말 것이다. 이 다부진 도전의 가슴 뛰는 부담감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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