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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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처녀작을 만나는 것은 그 작가의 작품 세계와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관찰이 된다. 더욱이 그 작가의 현재적 나침반이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감동과 전율을 일으키고 있음을 가리킨다면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작가의 현재적 우주를 과거의 시간대와 함께 음미함으로써 미래의 우주를 기대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전 세계 120개국에서 2,000만 부 이상 판매된 『연금술사』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첫 작품인 『순례자』를 통해 이미 『연금술사』의 감동을 내용적으로 암시한 바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의 길)’를 코엘료 자신이 직접 걷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집필한 『순례자』는 한 개인의 신비롭고 기적같은 경험을 통해 변화해 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들려주고 있다. 

  책 속에서 코엘료는 자신의 삶과 신앙의 고백을 깊은 사색과 깨달음에서 정제된 주옥같은 언어들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사랑, 열정, 삶, 죽음, 결혼, 광기 등 인간의 가장 중요한 내면적 가치들을 순례의 경험으로 관통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오만과 편견으로 호도하고 있는 것에 대해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웅숭깊은 아포리즘의 물결은 책장을 넘기는 내 자신의 전두엽과 심장이 철저하게 그의 활자에 구속되게끔 만들었다. 

  넓디 넓은 우주가 아름다운 이유는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별들의 존재로 설명된다. 만약 상상할 수 없는 크기로 존재하는 우주가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이 대부분이라면 설계한 자의 공간 낭비요, 오만으로 비춰질 수 있으리라. 하지만 수없이 많은 항성과 행성과 운석과 성운 등의 다양한 물질로 구성된 <우주>라는 거대 공간의 존재감은 인간의 불가해함을 넘어선 신비함의 극치라 할 만 하다. 더욱이 작은 소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의 존재감 또한 수없이 다양한 인간과 피조물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그 신비함과 역동성을 인정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은하수는 콤포스텔라까지 이르는 길을 안내해주죠. 어떤 종교도 모든 별을 한데 모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주는 거대한 빈 공간으로 변해버려 그 존재 이유를 잃고 말 겁니다. 각각의 별, 그리고 각각의 인간은 자신만의 공간과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요. 초록색, 노란색, 파란색, 하얀색, 혜성, 유성, 운석, 성운, 고리 모양의 각기 다른 별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똑같이 작은 점처럼 보이는 것들도 실상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공간에 흩어져 있는 수없이 많은 각기 다른 존재들이죠.   <p. 137> 

  역시나 코엘료는 <사랑>의 가치를 지나치지 않는다. 에로스니 필로스니 하는 사랑의 다양한 기류는 종국에는 아가페라는 으뜸 사랑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있다. 전적인 사랑 아가페는 그 사랑을 경험하는 이를 소멸시킨다. 신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 인류의 구속사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던 위대한 사랑은 신이 인간을 바라보는 사랑의 차원과 수준을 농밀하게 보여준다. 수많은 인간들이 아가페의 포로가 되어 있지만, 정작 아가페를 발산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모든 것을 태워서 소멸시키는 전적인 사랑 아가페는 인간으로 사는 최고 수준에 대한 신의 질문과 답변을 동시에 자각하게 한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는 법과, 자신에게 잔인해지지 않는 법과, 자신의 사자와 대화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모든 것, 당신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취할 수 있는 모든 유익한 것은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사랑을 체험했을 때만 그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p. 156> 

  코엘료는 자신의 멘토 페트루스로부터 아가페의 두 가지 형태를 듣게 된다. 앞서 언급한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아가페는 신이 아닌 인간에게는 쉽게 행사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비록 적용 대상은 다르지만 인간이 행사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아가페는 바로 <열정>이라는 것이다. 열정은 하나의 생각이나 대상을 향한 아가페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심으로 무언가를 사랑하고 믿게 되면, 자신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더 강하다고 느끼게 되며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신념을 깨뜨리지 못할 거라는 확신에 차 평온함을 맛보게 된다. 더욱이 이런 특별한 힘은 적절한 순간에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준다. 아름답고 정제된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찬란한 빛이 발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열정은 대개 우리 삶의 초반부에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 시기에 인간은 아직 신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자신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커다란 애착을 가지고 있어서, 인형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고 작은 장난감 병정들이 움직이기도 하죠. 천국이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한 예수의 말씀은, 열정의 형태로 나타나는 아가페를 두고 한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예수께서 행하는 기적이나 지혜로움, 바리새인, 사도들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에게 곧장 왔죠. 오직 열정에 이끌려, 행복한 모습으로 온 것입니다.   <p. 158> 

  인간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지나치게 압박되어 있다. 사실 어느 누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죽음에 대한 보다 깊은 사유는 두려움으로 점철된 죽음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전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어찌 보면 죽음은 우리의 가장 큰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자각은 더욱 우리를 치열하게 살도록 만든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느끼게 되는 모든 욕망과 공포의 실체를 알 때, 진정한 죽음의 모습을 응시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에 관해서는, 우리 모두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 아가페의 또다른 현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나는 페트루스에게 말했다. 성전에서의 수년 동안의 수련 끝에 사실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었다고. 사실 내가 더 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는 어떻게 죽느냐라고.   <p. 180>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의 검(劍)을 찾기 위한 순례의 길을 통하여 매우 소중한 진리를 하나 인식하게 된다. 사실 순례의 초반부터 종반까지 그의 관심은 오직 검을 찾는 것에 있었다. 검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는 페트루스의 행동은 검을 찾고자 하는 코엘료의 갈증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코엘료가 그토록 알고자 했던 검의 비밀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지만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검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 깨달은 코엘료의 삶의 목적 의식이 추동되어 작가로서의 삶과 『연금술사』의 창조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순례의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내가 알고 싶어했던 것은 오직 검이 숨겨져 있는 장소였다. 왜 그것을 찾고 싶어하는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자문하지 않았다. 나의 모든 에너지는 보상만을 생각하는 데 소진되었다. 무언가를 원할 때는 그 욕망의 대상에 아주 확실한 목정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보상에 대한 유일한 동기였다. 그것이 내 검의 비밀이었다.   <p. 311> 

  코엘료가 선사하는 삶과 우주와 사랑과 열정과 죽음에 대한 아름답고 신비로운 영혼의 언어들은 내 자신의 현재적 영혼에 빙의(憑依)되게 만들었다. 그가 고민하고 사색하고 갈증했던 삶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내 삶과 사랑과 열정과 신앙의 메모장에 오롯이 입력된 것이다. 코엘료의 우주를 목도할 때마다 새삼 느끼는 것은 주옥같이 아름다운 고결한 가치들을 동시적이고 다발적으로 사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의 활자를 좋아하며, 그에 대한 전작(全作)을 선포한 이유가 거기에 있기도 하다. 

  비범한 삶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의 길 위에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명문장인가? 코엘료는 이 문장을 반복적으로 들려주며 자신이 걸었던 산티아고의 험난한 순례의 길은 평범한 사람들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마치 작가로서의 자신의 비범이 평범의 길 위에서 탄생된 것이라는 정제된 겸손을 부연하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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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지음, 이영진 옮김 / 진명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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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지난 얇디 얇은 이 자기계발서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경위가 매우 흥미롭다. 어느 모임에서 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술에 의지(?)하여 자연스럽게 소유하게 된 것이다. 물론 다음 날 숙취의 과정에서 주인장에게 돌려준다는 당연한 약속을 하였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새삼 느끼는 것은 돈을 들이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흥겨운 일이라는 것이다. 선물, 책여행, 이벤트 등의 투자 없는 독서의 맛은 심히 달짝지근한 것임을 부인하긴 어렵다 하겠다. 

  개인적으로 과학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평가받는 다윈의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라는 종교적 신분증은 차치하더라도 생물과 관련된 학문을 전공한 자로서 진화론이 지닌 방대한 오류와 비과학성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의 진화론이 가르쳐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있다. "결국 살아남는 종은 강인한 종도 아니고, 지적 능력이 뛰어난 종도 아니다. 종국에 살아남는 것은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다.", 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수많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미 과학은 빛의 속도에 비유될 만큼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정치와 문화와 경제와 사회 등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 변화는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형국이다. 작게는 애인의 애정 수준이나 회사 상사의 컨디션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지도자의 교체나 세계화의 속성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변화의 물결에 우리는 노출되어 있다. 이런 거센 변화의 물결에서 얼마나 잘 적응하고 대처하는지에 따라 개인마다의 인과적 열매가 달라질 수 있음은 자명하다.  

  가정이나 직장, 그리고 자기계발에 이르기까지 현재적 나침반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삶에 만족하며 매너리즘에 편승하는 것으로는 이제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과거 조상들이 설파했던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지혜가 정답이 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전의 시대와는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도에 확연한 차이가 나고 있기 때문에 21C의 사회에서 안주하는 것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과 동일한 상대적 의미를 함의한다. 다시말해서 작금의 시대에는 조금 빠른 것은 현재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많이 빠른 것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선을 내게 돌려보면 이에 대해 나 자신 또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집과 교회와 직장에서,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서 변화를 요구하는 환경의 목소리에 얼마나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는가를 사유한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지금까지의 삶의 편린들을 곱씹으며 과거와 현재에 철저하게 안주하려 했던 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부인하기 힘든 것이다. 영어, 독서, 연애, 다이어트, 신앙 등 수많은 내 삶의 목적어들을 상기하면서 동시에 겸허한 마음으로 자아를 탐구하게 된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지극히 작은 분량을 통해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인간상을 농밀하게 그리고 있다. 생쥐 2마리와 꼬마인간 2인의 변화하는 '치즈'에 대한 상이한 탐구방식을 매우 흥미있게 얘기하는 이 작은 우화는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적응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과 그런 삶을 지향하고자 할 때에 변화를 주도하는 '치즈'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안주하는 삶 속에서 삶의 시계추를 과거와 현재에 구속시킬 것이냐, 아니면 변화에 대한 열정적 적응을 통하여 미래를 향하게 할 것이냐의 선택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변화>라는 단어를 깊이 사유하며, 동시에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을 머리속에 그리며 사색의 연못에 잠시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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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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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가 생산하는 아름다운 언어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그의 현재적 시계인 『포르토벨로의 마녀』를 통해 신과 여성과 사랑과 나 자신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감탄의 감탄을 자아내며 가슴을 두근거린 것이 불과 며칠이나 지났던가? 그의 대표적 스테디 셀러의 제목처럼 그가 창조하는 언어 연금술과의 첫 만남은 그의 작품 세계를 현재에서 과거로 급속도로 돌아가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책장 속에서 읽히기를 기다리는 적지 않은 최신 도서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내 머리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언제까지 살지 모르는 내 인생의 현재적 시간대에 오롯이 입력되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종교적 의미는 차치하더라도 죽음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우주에서 분리된다는 정의로 상식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자의든 타의든 현재 살아가고 있는 현재적 우주에 이탈되는 현상,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인간은 <삶>을 지향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 같다. 태아가 모성의 몸 안에서 10개월 동안의 발육을 거쳐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나오고 싶어 안달하며 몸부림 치는 수준으로 탄생되기 때문이다. 엄마의 자궁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갈망이 만들어내는 밖으로를 향한 태아의 방향성은 한 번도 목도하지 못한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 다시 말해서 살고자 하는 것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인간의 원초적이고 태생적인 사는 것에 대한 여망은 정작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적용되며 반영되어 가고 있을까? 인간은 어느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인간이 죽음에 대해 얼마나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는지는 굳이 입증할 필요가 없는 우리 자신 스스로의 초상이리라. 사는 것에 대한 열망,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열망, 타인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열망에 철저히 구속된 인간은 지금도 끊임없이 삶을 향해 몸부림치고 있다. 사는 것에 대한 걱정, 불행한 삶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삶을 지향하는 인간의 속성을 방증하는 또다른 역설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소설 속에서 코엘료가 제기한 '미치다'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보자. 주인공 베로니카는 자살 시도로 인해 정신병원 빌레트에 가게 된다. 그곳은 정신병자들, 소위 미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빌레트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며 치료를 받고 있다. 그들은 한정된 공간에서 자신에게 부여되고 인식되는 '미치다'의 정의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던 중 베로니카라는 한 소녀가 등장하면서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난다. 베로니카가 연주하는 피아노 음악에 심취하는 에뒤아르, 베로니카와의 대화와 교제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마리아와 제드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목도하는 병원장 이고르 박사. 베로니카를 통해 발생되는 빌레트 내의 변화는 기존의 '미치다'의 통념이 잘못되었음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미친 것이 아닌, 미친 척하는 것이었음을. 

  신은 절대로 복사기의 메커니즘으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 신 자신이 직접 빚어 만든 인간이란 고결한 존재감은 당신의 생기를 불러 넣은 것에서 다른 피조물과의 완벽한 구별이 완성된다. 한 사람 한 사람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부합할 수 없도록 개별마다 고결하고 소중한 하나의 존재로 창조한 신의 의지는 타인과 구별된 <자아>라는 웅숭깊은 존재감을 확인하게 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법과 관습과 규범과 도덕, 그리고 문화와 습속과 가치관과 불문율 등은 66억의 다양성을 불과 몇 개의 카테고리로 구속하는 요상한 함수 방정식으로 밀어넣고 있다.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다시 말해서 내가 아닌 보편적 타인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행복한 삶은 공격받게 된다. 

  수준 높은 행복한 삶은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며 살아갈 때에 가능하다. 타인과 구별되는 나만의 달란트를 탐구하고 계발하며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러한 있는 그대로의 자아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닌 포장되고 탈색된 거짓 삶, 그런 삶이 간접적으로나마 행복을 비춰줄 수 있다는 비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거짓 삶은 절대로 본질적이고 직접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태초에 신이 창조한 자기 신분증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건강하고 강력한 행복의 근원이지 않을까? 

  또 하나의 행복의 기류를 사유한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절대 명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지구상의 그 어떤 종족보다 사랑에 민감하고, 구속되며, 갈증하는 존재로 설계되었다. 누구를 사랑하거나, 누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소설 속에서 에뒤아르를 통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한 베로니카와 그녀의 연주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게되는 에뒤아르, 그들의 사랑의 쌍방향은 죽기로 결심했지만 결국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회귀될 수 밖에 없는 베로니카의 변화를 추동(推動)케 한다.  

  소설의 마지막, 이고르 박사가 연구했던 결과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자각은 우리를 더 치열하게 살도록 자극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또다른 부가요소가 필요하다. '죽음의 자각'이 주는 삶에 대한 열망은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과 <사랑>이라는 으뜸의 삶의 가치가 접목될 때에 비로소 최고의 행복을 완성할 수 있다. 죽기로 결심했지만 죽지 못한 베로니카의 삶은 소설의 종반부가 연장된다는 상상 하에, 하루하루를 하나의 기적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흐뭇한 장면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과 사랑과 행복, 그리고 나 자신의 정체성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사유하게끔 한 파울로 코엘료는 과히 언어의 연금술사라 불러도 아깝지 않으리라. 코엘료의 아름다운 언어와 주옥같이 정제된 활자들이 만들어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언어 연금술을 재차 상기하며, 별 다섯 개를 아낌없이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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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좋은일이 나에게도 좋은일입니다 - 상생과 공존의 지혜를 밝혀주는 15가지 이야기
안철수, 최재천, 이윤기, 강만길 외 12인 지음 / 고즈윈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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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과 공존의 지혜를 밝혀주는 15가지 이야기'라는 표지 문구를 달고 있는 『당신에게 좋은 일이 나에게도 좋은 일입니다』는 국내의 저명한 15명의 지식인들의 상생과 공존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책이다. 생명과학자, 숲해설가, 기업가, 환경론자, 문명 탐험가, 역사가, 건축가, 소설가 등에 이르기까지 15명의 집필자들은 다양한 방면과 각도에서 상생과 공존의 가치를 설파하고 있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와 활동을 하고 있는 지식인들 각자의 가치관과 문체로 설파하는 다양성 존중의 외침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차 있는 한국인의 습속에 물들어 있는 내 자신을 냉철하게 반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꽤 반가운 만남이었다. 

  단일민족국가 대한민국은 오랜 기간동안 동일한 민족과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와는 다른 것에 익숙지 않은 습속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어려서부터 철저한 입시 위주의 공교육은 획일적이고 주입적인 교육을 양산했다. 그렇기 때문에 '왜(Why)'라고 질문하고 의심하는 학습력은 길러지지 않고, 그에 따른 창의력이나 토론력은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을 뽐내고 있는 형편이다. 더나아가 이러한 배경은 '다름(diffrene)'과 '틀림(wrong)'의 정의에 대한 혼선을 빚게 만들었다. 내 주장과 다른 남의 주장은 수용하기 힘든 사회 구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국회 의사 결정의 현주소는 물론, 사회적 담론에 대한 일반인의 토론 수준은 21세기 대한민국의 비관용 문화를 그대로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든 한국인의 속도 문화는 그 어떤 나라보다 경쟁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960년부터 40년간 경제의 구매력 관점으로 14배 성장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 속도는 영국의 5배, 미국의 4배에 달할 정도로 급속도였다. 서구 선진국들이 백 여 년이 넘게 걸린 일을 40년 만에 해치우느라 선전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적지 않았는데, 극심한 이기주의와 경쟁주의의 만연이 그것이다. 불과 40년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상승하기까지의 놀라운 속도를 보여주었던 가속 엔진은 어느덧 힘을 다했는지 GDP 2만 불의 벽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KTX의 속도로 달렸던 속도계는 왜 2만 불 앞에서 걷기 수준으로 전락한 것일까? 

  길을 지나가는 이에게 "지금 세계를 움직이는 국가는 어디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열에 아홉의 답변은 동일할 것이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라는 존재가 우리들 머리 속에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국한지 230년에 불과한 초짜 나라 미국이 그 짧은 기간동안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전반에 걸쳐서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집약적인 의견은 바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에 기인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서로 다른 사상, 체제, 이념, 신앙, 출생지, 성징, 피부색 등에 대해 배타하지 않고 그것을 존중하며 공존하고 상생하는 문화, 그것이 유일무이한 초강대국 미국이 존재하는 추동력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2,000여 년 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초강대국이었던 로마도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유니버셜 세계였다. 속주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또 그 주민들을 로마 제국의 시민으로 인정해 주는 체제는 로마 제국이 주도하는 평화 체제,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건설하는 동기가 되었다. 사실 이러한 관찰은 한국사에서도 여실히 목도된다. 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강력한 힘을 가졌던 고구려는 다민족 국가였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였고, 그 다양성의 존중과 상생이 초강대국 고구려를 지탱한 힘이 되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시선의 렌즈를 대한민국으로 돌려보자. 여와 야가 끊임없이 반목하며, 국회는 대통령을 존중치 않고, 정부와 언론이 전쟁을 일쌈으며, 노와 사가 계속해서 대립하는 대한민국의 관용 문화의 수준을 재설계하지 않고서는 GDP 4만불은커녕 3만불조차도 머나먼 당신이 되리라 단언한다. 이제 국가적 에너지가 한 개인의 역량이나 개인과 개인의 경쟁주의를 통해 효율이 발휘되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 리더십보다는 멤버십이, 독점보다는 나눔이, 집중보다는 네트워킹이 중시되는 '관계'의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21C 대한민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제임을 갈파하고자 한다. 

  책의 제목을 생각한다. 당신에게 좋은 일이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정말 멋진 문장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와 같은 속담이 없어질 때, 대한민국의 미래는 한층 높은 수준으로 도약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 미래와 희망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제목의 의미를 곱씹는다. 당신에게 좋은 일이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콩 세알의 삶 

생명농사 지으시는 농부 김영원 님은
콩을 심을 때
한 알은 하늘의 새를 위해
또 한 알은 땅속의 벌레들을 위해
나머지 한 알을 사람이 먹기 위해
심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만주 들판에는 삼전(三田)이 전해오는데
일제 때 쫓겨 들어간 우리 조상님들이
눈보다 속에서 맨손으로 일궈낸 논을 3등분해
하나는 독립운동 하는 데 바치는 군전(軍田)으로
또 하나는 아이들 학교 세우는 데 학전(學田)으로
나머지 하나는 굶주림을 이겨내는 생전(生田)으로
단호히 살아내신 터전이 바로 삼전인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오늘
내가 번 돈
나의 시간
나의 관심
나의 능력
어디에 나눠 쓰며 살고 있는가요

지금 나는 콩 세알의 삶인가요
삼전의 뜨거움, 삼전의 푸르림,
셋 나눔의 희망을 살고 있는가요. 

<p. 100, 박노해 《나눔의 희망》>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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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들의 중국사
사식 지음, 김영수 옮김 / 돌베개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황제(Imperor)'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두가지 면이 공존한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데, 전자가 강하다는 것,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 신성한 것 등으로 정리된다면, 후자는 폭정, 잔인한 것, 백성들의 고통 등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재위하는 황제가 성군일 경우 백성들은 행복하고 국가는 태평성대를 누리지만, 폭군일 경우에는 온갖 피바람이 일어나면서 백성들의 찢어지는 고통이 발생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B.C. 200년 즈음에 진시황이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이후 약 2,000년 동안 중국사는 황제의 역사였다. 하나의 왕조가 탄생될 때마다 상상할 수 없는 백성들의 고통과 희생이 뒤따르게 마련이며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암투속에서 대략 200여명의 황제들이 2,000년 동안 중국을 지배했다. 중화민족사 연구회 회장인 사식(史式)은 『황제들의 중국사』를 통해 진시황제 이래 2,000년의 중국역사를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의 존재를 통해 관통하고 있다.  

  저자 사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통념과는 배치된 의견을 제시한다. 역사는 오로지 사실 안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성공과 실패로만 역사 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결과보다는 동기 차원에서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응당 맞는 얘기다. 우리가 학습하는 과거의 역사 자체가 승자의 역사일 수 밖에 없음은 자명하기에 과정론적으로 역사와 인물을 천착해야 한다는 저자의 의견은 심히 공감할 만하다. 하지만 지나친 과정 중심의 역사 해석은 역사의 긴 줄기라는 측면에서 역사의 인과성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어떤 과정으로 인하여 어떤 결과가 발생한다는 역사의 인과성은 역사 자체를 넓고 깊게 보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관찰이 아닐 수 없다. 기존의 역사적 통념을 전복하고 있는 저자의 주장은 그 논거가 지엽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이 강해서 읽는 내내 적잖은 부담이 발산된다.  

  예컨데 성공과 실패로 영웅을 논하지 말라는 강렬한 문장을 시작으로 유방과 항우를 비교한 저자의 주장과 논거는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항우는 진실된 사람이요, 훌륭한 장군이요, 양심이 있는 영웅이다. 하지만 유방은 출생이 미비한 천민이요, 전쟁을 모르는 자요, 은혜를 모르는 소인배다. 그런데 어떻게 유방이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저자 자신도 인정하고 있는 '용인술'에 기인한다. 저자는 항우의 단점은 사람을 잘 쓰지 못한 것이었고, 유방의 장점은 사람을 잘 쓴 것이라고 얘기하면서 유방의 용인술은 항우와 비교하여 유방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비꼬고 있다. 하지만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을 얻고 다루는 것이야말로 인간만사에 있어 성공과 실패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인식할 때, 유방의 승리는 당연한 인과성의 순리라 할 수 있다. 항우라는 개인이 가진 장점과 그것에 대한 개인적 흠모를 표현하는 것은 뭐라 할 수 없으나, 그 주관적 잣대를 논거로 승자와 패자의 역사적 인과성을 무시하며 일반적 통념을 전복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저자는 진시황제가 평생 남에게 통제당하며 살았던 황제라고 주장하며 이런저런 논거를 즐비하게 늘어 놓는다. 또한 뛰어난 전략가였던 조조에 대한 주관적 비방도 강렬하게 내뿜는다. 더욱이 '정관의 치'와 '개원의 치'로 대변되는 중국사 최고의 태평성대를 일군 당태종 이세민과 당현종 이융기의 존재감마저 건드리고 있다. 새로운 접근방식과 해석은 좋은 것이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객관성을 잃을 때에는 접하는 이에게 설득력을 얻기 힘든 법이다.  

  황제의 자질을 평가하는 저자의 일관된 잣대는 <덕성>과 <도덕성>으로 함축된다. 황제는 정직하고, 양심이 있어야 하며, 인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진시황부터 옹정제까지의 15명의 중국황제들을 다루면서 오직 덕과 도덕의 기준으로만 접근하고 있다. 물론 덕성과 도덕성을 갖춘 군주가 좋은 군주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의 어느 나라의 역사보다 개국과 망국이 많았고, 그에 따른 왕조 교체가 빈번할 수 밖에 없었던 중국 황제사 2,000년의 특질을 깊이 사유할 필요가 있다. 죽고 죽일 수 밖에 없는 왕조 교체의 반복된 혼란상, 그리고 진시황 이래 계속되어진 절대적인 권력만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봉건주의 사회라는 점을 곱씹는다면 덕과 도덕의 잣대로만 한 영웅을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저자가 언급한 <도덕성>의 잣대를 작금의 시대로 들이댄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위정자들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민주주의 시스템에서는 도덕성은 매우 중요한 정치인의 자격요건이 된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직하지 못한 자가 어찌 국민과의 신뢰를 쌓아나갈 수 있겠는가? 실수한 대통령은 용서할 수 있어도 거짓말 하는 대통령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미국 유권자들의 정치 철학은 지구상에서 가장 민주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력한 대통령을 갖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의 존재감을 정갈하게 대변하고 있다. 

  저자는 과거 중국의 군주제도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갖고 있는 듯하다. 서양과는 달리 별다른 견제장치가 없었던 중국식 황제 제도는 결과적으로 전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고 강력하게 피력한다. 사실 그렇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속성이 있기에 세계사에서 가장 절대적인 힘과 권위를 가졌던 중국 황제의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고통과 불행의 2,000년 역사를 만든 동기가 되었다. 극소수의 성군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혼군이나 폭군이었던 중국 역사 2,000년은 인간이 힘과 권력에 대해 얼마나 민감한 존재인지,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교훈이 된다. 

  저자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지나치게 주관적인 영웅 해석이 되어버린 책이지만,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를 통해 2,000년의 중국 역사를 관통한 점, 그리고 몇몇 중국 황제들에 대해 인지하고 있던 일반적 통념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 점에 대한 신선한 시도와 용기는 반갑기만 하다. 불완전한 인간의 특질, 일인 절대 권력 체제의 허구, 중국식 황제 제도에 대한 모순 등은 21세기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에게 여러가지 각도에서 다양한 사유를 하게 한 주제가 되기도 했다. 2,000년의 중국식 절대 봉건사회를 이름만 들어도 번쩍하는 몇몇 황제들의 존재감을 통해 관통하고 싶다면 사식의 『황제들의 중국사』 는 적잖은 흥미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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