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픈 글을 쓴다.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의혹이 문학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신경숙 본인과 출판사 창비의 해명이 있었지만 문단 내외의 비판은 점입가경이다. 안부, 쪽지, 카톡 등으로 이번 표절 의혹에 관한 내 견해를 묻는 질문이 적지 않이 쏟아지고 있다. 평소 나는 신경숙을 가장 아끼는 소설가로 자랑해왔다. 신간이 출간될 때마다 호평을 아끼지 않은 팬이었기에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내 주관이 이웃들로서는 궁금했을 것이다. 이에 적당한 선에서 솔직한 입장을 내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 글은 그 판단의 연장선상이다.

   신경숙이 누군가.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문단 최고의 스타다. 나는 이미 여러 채널을 통해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소설가로 신경숙을 꼽아왔다. 많은 서평에서 그의 작품을 한결같이 상찬했다. 『외딴방』에 대해 작품성에 있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능가한다고 말한 백낙청의 평가에 백번 공감했다. 210만 권이나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에 대해 "차후 십 년 동안 이런 소설은 나오지 못할 것"이라며 니체가 주창한 '피의 글쓰기론'을 인용하면서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순문학적 서정성과 발군의 시적 문체, 섬세한 감성 등은 신경숙 문학의 독특한 브랜드이자 그가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로 우뚝 선 힘이었다. 그런 그가 창작자에게 가장 큰 수치라 할 수 있는 표절 의혹에 휘말린 것은 그 자체만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가슴 아픈 일이다.

   이번 표절 의혹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응준의 문제제기로 시작됐다. 이응준은 인터넷매체 '허핑턴포스트'에 소개된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신경숙의 단편 소설 「전설」이 일본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단편 「우국」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게재된 이응준의 글을 면밀히 읽고 그의 논지를 살폈다. 그가 제시한 문제의 문단을 서로 비교했다. 기준은 '상식'이었다. 부분적인 어휘의 쓰임새와 문단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볼 때 원작(유키오의 단편 「우국」)과 무관한 독립적인 창작으로 보기는 어려워 보였다. 더욱이 역자 김후란의 시적 의역을 그대로 옮긴 부분은 원작과 번역을 동시에 베낀 최악의 표절 사례로 의혹을 살 만했다. 우선 이응준이 표절의 증거로 내세운 두 소설의 문단을 비교해보자.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워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우국, 연회는 끝나고' 233쪽. 김후란 옮김. 주우세계문학전집. 1983년 발행)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신경숙)

  

 

   확인하듯이 두 문단은 부분적으로 거의 동일한 문장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의미 배열의 순서까지 완벽히 일치한다. 소설 전체의 서사와 상관없이 상기 두 문단만 봤을 때 단어 선택과 문장 맥락에서 다분히 종속적이고 연계적이다. 더욱이 이응준이 지적한 바와 같이 '기쁨을 아는 몸'이라는 문구는 김후란이 의도적으로 의역화하여 역자 재량에서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시적 문체를 구사한 것이기 때문에 순수문학적 창작력으로는 도저히 일치하기 힘든 부분이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위 정도의 유사성은 의식적인 개입 없이는 상응하기 힘든 문장 배열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겠다.

   물론 표절의 기준은 단순하지 않다. 음악은 별도의 표절 기준이 존재하지만 문학은 아직까지 보편적으로 정립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문학 외의 텍스트들은 나름의 허용되는 지점이 있기는 하다. 예컨대 철학자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보자.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 "노동자들이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다. 그들이 얻을 것은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실제로 마르크스가 고안해낸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를 얘기할 때 격문처럼 회자되는 문장이지만 진실은 칼 샤퍼와 장 폴 마라가 처음 사용한 문구를 마르크스가 짜집기하여 편집한 것이다. 서로 흩어진 독립적인 문장일 때는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 개의 문장이 상기의 순서로 배열되어 『공산당 선언』의 대미를 장식하니 거대한 매력을 발산시킨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표절자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혁명 구호'로서 각 문장의 독립된 개별성이 화학적으로 합쳐져 전혀 다른 차원의 힘과 메시지로 치환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혁명 선언의 용도로 재배치된 구호일 뿐 창조물로서의 시간순서가 방점인 텍스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문학은 다르다. 순수문학은 창작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 어떤 텍스트보다 엄격한 표절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모든 텍스트가 창작의 영역이라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비문학보다 작가(저자)로 하여금 창작의 양심과 그에 따른 긴장감을 훨씬 더 많이 요구한다. 모든 문학적 글쓰기의 태동이 작가의 의식적 순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허구의 것으로 현존의 시공간을 재구성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문학의 일차적 힘은 바로 '진실성'에 있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 '말할 것을 말해야 하는 문학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작가는 문학 위에 진실을 쌓는 게 아니라 반드시 진실 위에 문학을 쌓아야만 한다.

   신경숙은 이번 표절 논란에 대해 신속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우국」을 읽어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게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라는 말이 꺼림직하지만 이번 의혹을 단칼에 부인하려는 의지는 엿보인다. 하지만 당사자의 해명과는 상관없이 온라인상에서 폭포수처럼 번지는 비난의 목소리는 줄어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거의 모든 언론이 의혹을 제기하고 있고 대부분의 네티즌들이 성토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문단의 방향을 제시해온 책임있는 작가라면 한 걸음 더 나서서 자신의 구체적인 목소리를 내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번 논란의 본질을 '신경숙의 표절'이라는 단선성에 두지 않는다. 대형 작가의 표절 의혹을 음지에서 비호한 문단과 출판사의 잘못된 관행이 본질이다. 이번 표절 의혹에 대해 대부분의 평론가와 작가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표절의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해온 한국 출판계의 더러운 민낯은 정말 충격적이다. 소위 '메르스급'이다. 한국 문단의 발전을 좀 먹는 거대한 병원성을 침묵과 비호로 잠복해온 바이러스의 존재를 밝힌 것만으로도 이응준의 용기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신경숙 개인의 입장표명과 별반으로 출판사 창비의 해명은 그야말로 수준미달이다. 국내 최대규모의 문학 전문 출판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아적 수준의 해명을 내놓았다. 창비의 해명은 '표절되었다고 주장하는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가 극우민족주의다'라고 폄하하면서 신경숙의 글이 더 뛰어난 작품이라는 식의 논지를 펴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표절 글을 공정하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대등하게 분석하기보다는 외연의 부차적 요소를 프레임화하여 본질을 희석시키려는 아마추어리즘을 보여주고 있다. 쪽팔리지도 않는가. 그나마 트위터상에 일부 직원들이 잇따라 양심선언을 한 걸 보면 출판사 자체적으로 무언가 다른 목소리를 내줘야 할 상황임은 분명하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라 글이 횡설수설했다. 입장을 정리하자. 이응준의 논지를 볼 때 표절 의혹을 피해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작가나 출판사나 침묵으로 시간을 끌며 결국 유야무야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결국엔 양심의 문제다. 모든 표절 논란이 그렇지만 '칸트의 도덕률'만이 작금의 사태를 밝혀줄 빛이 될 듯하다.

   고백한다. 『외딴방』을 벌벌 떨면서 읽었다. 『깊은 슬픔』의 여운에 장시간 경도됐었다. 『엄마를 부탁해』는 처음으로 울면서 읽은 소설이었다. 그의 글은 아직도 내 생명력 속에서 살아숨쉬고 있다. 내가 사랑한 소설가 신경숙이 거짓을 말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잠재적 표절도 표절이다. "우주가 도와줬냐"는 문학평론가 조영일의 조롱은 표절 논란의 중심을 관통한다. 진실은 신경숙 안에 있다. 지금은 엄마를 부탁할 때가 아니다. 부디, 진실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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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사랑 2015-11-18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하게 본질을 짚어 주신 것 같습니다.

다윗 2015-12-01 15:47   좋아요 0 | URL
공감 고맙습니다.
 
해나가 있던 자리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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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질은 고통일까 행복일까. 서양철학사의 중요한 시기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은 인간을 "고통과 쾌락의 두 군주의 지배 하에 놓여있는 존재"로 규정했다. 그러나 다수의 현대사상가들은 인간의 삶을 '고통과 쾌락'이라는 전근대적인 기준으로 탐구하는 것에 거부권을 행사한다. 인생을 사변적인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나도 동의할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른 고유한 삶은 그 자체로 절대선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여행에세이로 친숙한 작가 오소희가 소설을 냈다. 그의 첫 소설 <해나가 있던 자리>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단선적으로 상실과 박탈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하면 인간 내면의 깊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고민하는 삶의 보편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오소희는 이 짧은 소설을 통해 삶의 '보편적 천국'이 '개별적 지옥'을 어떻게 극복해가는지 따뜻하고 진지한 언어로 보듬고 위로한다.

소설의 서사는 간명하다. 주인공 해나는 아들을 잃은 비운의 여인이다. 아들 재인은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목숨을 잃는다. 어린 자식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엄마는 제정신일 수 없다. 해나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붙박이장의 차가운 금속 봉에 목매달아 죽을까를 고민한다. 그러나 "엄마, 행복해"라는 재인의 말을 상기하며 생각을 거둔다. 그리고 떠난다. 목적지 없이 멀리 떠나버린다. 작가는 해나가 계획되지 않은 여행을 통해 상처를 견디고 치유하는 과정을 동화처럼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려냈다.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이 되는 해나의 여행지 '그린레프트'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작가는 현실의 상처를 비현실의 치유 속으로 밀어넣는다. 이 작가적 장치는 현실에서는 해나가 위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전제한다. '깊은 슬픔'의 본질을 결론적으로 굴종시키는 비본질의 외연이 실재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우리네 현실이 피곤한 건 필요한 게 없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게 많기 때문"이라는 평소 오소희식의 세상보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렇다. 불필요한 비본질의 과잉은 항시 본질의 영역을 침해하고 배반한다. 비극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의 집필의도를 직선적으로 드러낸다. 한꺼번에 삼백 명의 아이들을 잃은 작년 봄의 광포한 상처는 우리 모두를 해나가 되게 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해나가 아니었다. 작가는 바로 그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 상실과 박탈의 지속성을 중단할 아무런 동력장치가 우리의 현실체계 속에서 존재하지 않았음을 꼬집는다. 이 책의 시작이 바로 거기서 태동했음을 작가는 밝힌다. 즉 이 소설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현실에 실재한 '진짜 해나'가 벌떡 일어서서, 자신을 되찾고, 사랑받고, 사랑하는 모습을 미치도록 갈망하는 목적으로 씌어진 것이다.

소설을 읽다가 나는 어느 한 지점에서 잠시 멈칫했다. "살아서 벌어지는 건 다 축복이다"라는 소설 속 어느 여인의 대사가 나온 장면이다. 내가 정지한 건 나이를 먹을수록 이 말이 가진 거대한 본질에 깊이 동의해가기 때문이다. 그렇다. 삶은 고단하다. 하지만 그것을 채우는 수많은 순간들의 조합은 온갖 축복으로 가득 차 있다. 삶은 곧 축복인 것이다.

아직 생을 다 살지 않은 '지금 이 순간'의 시간대는 '삶이 곧 축복'이라는 명제를 오롯이 수용할 수 없게 만드는 한계적 속성을 내재한다. 인간은 현재라는 시간대만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의 인식론은 신(神)의 것과는 다르다. 시간은 인간을 조롱한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있다. 현재는 총알같이 날아간다. 미래는 머뭇거리면서 다가온다. 이 굴곡된 시간의 물리력은 인간이 종국의 순간에 직면하여 자신의 내면을 쓸어내리며 신의 차원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시간대에 대한 통섭(通涉)의 내공을 누적하는 과정이리라.

인간은 상처의 종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여러 상처와 아픔으로 충만하다. 안타까운 건 개별 인간의 비극과 무관하게 시간은 항시 보편적으로 묵묵히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일관성과 건조함 앞에 인간은 더욱 번민하며 좌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답다. 종국의 희극이 순간의 비극을 압도할 미래의 시간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은 그 자체로서 선이고 사랑이고 축복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삶은 아름다운 것이고 소망의 기한은 무한적이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오소희의 소설 <해나가 있던 자리>를 우리 주변의 '진짜 해나들'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그들이 옷장 속에서 용기있게 나올 수 있기를 기다리며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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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문학은 오에 겐자부로 전과 후로 나뉜다.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역설한 조정래의 외침은 오에 겐자부로의 작가적 현존에 그대로 닿아 있다. 고백컨대 오에 겐자부로는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입체적으로 천착하는데 객관적 원형이 된 작가이기도 하다.

    오에 겐자부로의 마지막 소설 『익사』를 설레는 마음으로 주문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아버지의 존재성을 통해 일본 전후戰後 역사를 탐구한다. 자신이 아홉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할 만큼 그와 아버지 사이에는 무거운 여백이 존재해왔다. 그의 80년 문학인생이 이 한 권의 소설로 어떻게 갈무리되는지 느끼기 위해 나는 오늘 그의 텍스트 속으로 침잠한다. 행복한 '잠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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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7 리커버 한정판 나무 에디션)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허지웅을 싫어한다. 그는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편견에 빠진 무지, 자본주의에 대한 몰이해, 짓까부는식의 소통방식, 나이에 맞지 않은 훈계조의 언변 등은 상당히 불쾌한 것들이다. 특히 정치적인 것뿐 아니라 절반의 찬반을 가진 진영논리적 주제에 대해 강한 자기확신으로 질타하는 그의 표현방식은 언제나 비호감이다. 작년 그는 모 종편 방송에서 "드라마 <정도전>을 보지 않는다는 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목에 힘을 주며 역설했다. 드라마 한 편의 시청여부를 놓고 인생의 보편성을 훈계할 만큼 그는 대단한 사람인가.

   우리사회의 여러가지 민감한 이슈들에 대한 자신의 주관을 마치 전투하듯이 대중에게 훈계하는 그의 어법은 정말 밥맛이다. 그렇다고 그의 말이 옳은 것도 아니다. 본인이 지껄일 수 있는 자유의 자아상은 외면한 채 남도 나와 같이 지껄일 수 있는 자유의 현존에 대해서는 극도로 무지한 반응을 보이는 추태가 꼴사납다. 옥소리의 부정(不貞)을 비판하는 대중의 자유와 그 양상을 비판하는 그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자유권에 속한 것이다. 누가 감히 자유의 과잉과 한계를 말한단 말인가.

   허지웅은 '옥소리 간통 논쟁'에서 '공인(公人)'의 개념을 전근대적인 수준에서 이해했다. '공인'의 의미를 '공적에 적을 둔 사람'이라는 좁고 사전적인 의미로 걸러낸 것이다. 그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현대적 공인의 개념에 무지해 있다. 미국의 '공인이론'과 한국의 법원 판례를 한 번이라도 훑어봤는가. 근래의 공인 범위 논쟁은 명예훼손과 직선적으로 닿아 있다. 연예인은 자발적이면서도 비정치적인 공인으로 분류된다. 모든 명예훼손법이 이 기준에서 적용되고 있다. 연예인은 공인이다. 더이상 무식한 얘기를 하지 말라.

   허지웅은 싫지만 그의 글은 읽어보고 싶었다. 한 사람의 공인은 입체적으로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방송인이면서도 '글쓰는 허지웅'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그의 텍스트만큼은 살필 필요가 있었다. 세간의 말처럼 그의 뇌가 얼마나 섹시한지 알아보고 싶었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 하는 노파심도 작용했다. 그랬다. 허지웅의 신간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책 제목이 맘에 든다. 저자는 인생을 '버티는 것'으로 규정한다. 제목뿐 아니라 책 곳곳에서 인간 삶의 고단함을 인정한다. 저자는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내재된 잘못된 전제를 나와 비슷한 논지로 규탄한다. 인생은 피곤하고 가난한 것이다. 자기 인생을 사회적 합의와 제도로써 천국처럼 만들 수 있다는 망상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인물은 아니다. 제목 '버티는 삶'은 박수 쳐 줄만하다.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반갑다. 시대가 변해도 책읽기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책 읽는 개인과 청춘, 국민 들이 역사를 추동했다. 저자는 일갈한다. 책을 읽지 않으면 내가 아는 것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이 말만큼은 진실이다. 오만과 편견에 빠진 지성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도 폭넓은 독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마르크스식으로 말해 책은 세계를 '해석'하고 '변혁'하기 위한 인류 지성의 거대한 용광로다. 책읽기의 소중함을 설파한 부분 또한 박수 쳐 줄만하다.

   그러나 책 속으로 깊게 들어가면 문제가 많이 보인다. 저자는 여러 사안에 대해 정통좌파식 어법을 가감없이 구사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라는 논리를 줄기차게 쏟아낸다. 저자의 주장에 새로울 건 없다. 무엇보다 20대를 천착하는 저자의 시각은 가장 불편하다. 저자는 현재의 20대를 부정적으로 본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지금의 20대만큼 '세대의식'이 전무한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작금의 20대는 주위의 문제의식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돈에 미쳐있다는 게 저자의 논지다. 원인은 IMF 체제 이후 과거와 전혀 다른 환경을 세계 전부로 경험했고 급격한 신자유주의 바람 속에서 무한경쟁의 순환고리 안으로 떠밀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과연 그럴까.

   건강한 청년이 대학을 졸업한 후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타인과 경쟁하는 게 잘못된 걸까. 돈을 모으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 노력하는 게 나쁜 걸까. 시대는 변한다. 80년대와 90년대는 다른 시대적 소명을 요구한다. 21세기는 더하다. 지금의 20대가 80년대의 20대처럼 광장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민주화를 외칠 세대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가 87체제의 아비투스에 함몰되어야 하는가. 내 주변의 20대들은 어느 시대의 20대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20대는 꼭 마르크스주의자여야만 하는가. 치열한 세계에서 자신을 분석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대비해 공부하며 땀흘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은 고결하고 자생적인 인간의 행위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면서 남을 돌본다는 건 위선이요 거짓이다. 저자는 뒷골목에서 짓까불며 덤방거리는 유럽의 얼빠진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 비호감이다.

   이밖에도 책 내용 곳곳에서 비판할 대목은 많다. 다만 뒷부분의 영화리뷰는 인상적이다. 저자의 이력에서 영화잡지사 경력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영화리뷰만큼은 수준급이다. 리뷰어로서 주관이 뚜렷하고 개성이 있다. 어느 정도 전문성을 확보해 논설에 여유가 느껴진다. 정치색과 정파성을 버리고 순수하게 영화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다면 저자의 뇌는 정말 섹시하게 보였을 것이다. 사람마다 잘 하는 분야가 있고 어울리는 옷이 있다. 타자의 존재성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지만 내가 보는 관점에서 지금 입고 있는 허지웅의 옷은 어울리지 않는다.

   서평을 정리하자.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외연적으로 에세이의 평균은 유지한다. 허지웅은 말보다 글이 낫다. 앞서 그의 지력과 태도를 모두 꼬집었지만 글에서는 태도적 문제가 어느 정도 순화되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건질 것은 별로 없다. 영화 해설을 소개한 몇 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자본주의에 대한 일천한 냉소로 가득 차 있다. 아무런 대안없이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조소를 던지며 마치 그것이 정의의 편에 선 위트인양 지껄이는 모습은 신물이 날 정도로 지겨운 풍경이다. 자본주의는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수정해가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없이 함부로 나불대지 말라. 동갑이라서 조언하겠다. 방송에 나와 떠들려면 공부 좀 더하고 기본적인 태도를 갖추라. 그게 공인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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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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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학상은 1회 수상작부터 꾸준히 읽어오고 있다. 세계문학상은 다른 문학상과는 다른 뚜렷한 개별성을 갖고 있다. 텍스트의 가독성과 재미를 중시하는 게 주된 특징이다. 한국판 나오키상(直木賞)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읽기에 쉽고 몰입도가 높은 대중적인 소설이 꾸준히 선정이 되어 왔다. 도발적인 소재와 개성있는 문체, 빠른 속도감과 흡입력 있는 서사를 갖춘 작품이 세계문학상의 표적이 된다.

   1회 수상작 김별아의 『미실』은 여태까지 생각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어냈다.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는 보수적인 한국사회에 '비독점적 다자연애'를 질문함으로써 꽤 충격적인 도발을 시도했다. 신경진의 『슬롯』은 도박을 소재로 자본주의의 바다를 헤엄치는 인간의 정체성을 흥미있게 그려냈다. 백영옥의 『스타일』은 신세대 한국여성의 진화된 원형을 익살스럽게 담아냈다. 잘 읽히고 흥미있고 도발적이고 신선한 점이 세계문학상 수상작들의 공통적 분모다.

   제 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는 제 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대중에게 낯설지 않게 자리매김한 소설가 정유정의 장편소설이다. 이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보다 '문학적'이라는 점에서 강한 매력을 가졌다. 요컨대 소설 『내 심장을 쏴라』는 재미와 무게를 함께 지닌 힘있고 감동적인 소설이다. 최근에는 영화로 제작되어 기존에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다시 한 번 재조명되고 있다.

   이 소설은 폐쇄된 정신병원에서 만난 두 남자가 서로를 알아가면서 각자의 삶으로부터 교차되어 얻는 깨달음과 열정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가위만 보면 공황장애를 일으키는 1인칭 화자 이수명과 그와 같은 날 정신병원에 입원한 시력장애인 유승민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 만남의 데면데면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친밀한 우정으로 변화하기까지의 과정을 흥미있고 생동감 있게 담았다.

   수명과 승민은 각자 삶을 대하는 태도가 상이하다. 수명이 내면 속으로 자신을 축소화한다면 승민은 외연을 향한 방향성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수명과 승민은 공히 과거의 비밀을 가슴에 품고 지낸다. 작가는 두 인물의 과거 트라우마와 그것에 함몰되어 일상을 둥개는 현실의 긴장감을 잘 그려냈다. 소설의 뒷부분으로 가면서 과거에 봉착되어 있던 수명과 승민의 내밀한 비밀은 밝혀진다. 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에 의해 고백되고 깨달아졌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소설의 앞부분은 서사의 진척이 느리고 미지근한 몰입도를 보인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 후반에 이르게 되면 여태까지 소급되어 응축된 이야기가 한꺼번에 터지면서 독자의 가독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소설의 말미, 주인공 수명이 오랫동안 가슴 깊숙한 곳에 봉인해두었던 삶의 참된 진실을 인식하고 용기를 표출하는 장면, 그 순간은, 이 소설이 선사하는 가장 강렬한 울림이자 카타르시스다.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그것은 바로 '자아'와 '자유'다. 폐쇄된 정신병동이라는 외면의 벽을 탈출하려는 몸부림은 자아를 제대로 인식하기를 원하는 내면의 열정에 닿아있다. 두 인물의 과거의 아픔과 이에 구속된 일그러진 현재상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아의 지정학적 위치를 잘못 두었을 때를 그대로 은유한다. 자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은 결락된 채 비본질에 대한 집념과 고집만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자유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방식은 자아의 역동과는 거리가 먼 외적 환경의 파괴, 또는 내적 울림과의 단절에 불과하다.

   이러한 두 인물의 자유 성취와 자아 성찰에 대한 공전(轉) 행태은 승민이 병원을 탈출하여 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활공하는 바로 그 순간, 앎과 행복의 실현으로 급반전된다. 승민은 종내 죽는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소설의 마지막 수명이 정신병원을 퇴원하는 장면과 연결된다. 죽은 승민은 수명에게 질문한다. 너는 누구냐고. '새' 아니면 '비행기'냐고. 이에 대한 수명의 답은 단호하고 명확하다.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라는 것을.

   한 사람의 자유는 타자의 간섭이나 외부의 구속으로 조정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생 또한 타자가 아닌 자아의 추동, 즉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생(生)의 강렬한 욕망은 항시 자유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내 인생을 '나'로서 사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이 타협할 수 없는 절대명제 앞에서 우리 삶은 때때로 외부를 의식하고 타자에 주눅들며 방황한다. 진정한 자유의 가치는 내가 내 삶의 주어로서 존재하며 약동할 때 빛을 드러낸다. 내 실존은 누구도 욕망하지 못한다. 이 말이 진리라면, 외부를 향해 가슴을 열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내 심장을 쏴봐.

   굉장히 잘 쓴 소설이다. 서사를 풀어가는 능숙함과 재치있는 입담이 돋보인다. 순간순간의 감동이 녹아있고 시종 재미를 잃지 않는다. 정교하고 정제된 묘사와 독자의 호흡을 쥐었다 놨다 하는 작가의 내공이 훌륭하다. 우리는 이런 소설에 박수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내적 자유와 자아의 고찰에 번민하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이 한 권의 소설이 위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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