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경숙만의 문체가 있다. 신경숙만의 향기가 있다. 신경숙만의 우위位가 있다. 이러한 그녀만의 '문체'와 '향기'와 '우위'는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된다. 역시 신경숙이다, 라는 명료한 한 문장으로 말이다. 1985년 등단한 이후 그녀가 쏟아낸 수많은 텍스트들은 앞서 언급한 공식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그만큼 소설가 신경숙은 자신만의 선연한 브랜드를 갖고 있는 안정적 창조가다.

  궁중 무희의 신분으로 프랑스 외교관을 사랑한 실존 여인 '리진'의 삶을 그린 소설 『리진』으로 그녀의 문학적 역량을 포효했던 신경숙은 불과 1년여만에 전혀 새로운 소재를 담은 장편 한 권을 선보였다. 그녀는 신작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인류가 존재하는 모든 시공간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로 인간에게 각인되어 있는 '엄마'라는 존재를 텍스트 위에 감동적으로 녹여냈다.

  소설은 총 네 개의 장과 하나의 에필로그로 구성된다. 각 장마다 시선의 흐름을 주도하는 화자가 교체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각 장의 화자는 '너', '그', '당신'으로 바귀면서 '엄마'의 존재성을 입체화한다. 작가는 딸을 '너'로, 아들을 '그'로, 남편을 '당신'으로 설정했다. '나'라는 친숙한 일인칭 주어를 거부한 채 내가 아닌 타인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를 차용한 작가의 고집은 '엄마'와 독자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있다. 

  작가에 의해 의도된 '엄마'와 독자 사이의 거리감 좁힘은 종내 소설 속 엄마를 독자 '나'의 엄마로 치환시킨다. 곧 소설 속 '너', '그', 당신'은 곧 현실의 '나'가 된다. '네' 회상이 나의 회상이 되고,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며, '당신'의 부끄러움이 나의 부끄러움이 된다. 어쩌면 작가는 작중인물의 호칭을 가공 실명이 아닌 일반 인칭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독자 일갈을 향한 문장의 절제미와 합리성을 의도화했는지도 모른다.

  네번째 장 엄마의 회상씬이 인상깊다.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일인칭 화자로 시선을 주도하는 넷째 장은 엄마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된 전지적 시각의 이야기다. 시간과 공간의 구속을 벗어난 엄마는 시선을 자유로이 이동하며 자신의 독백을 주도한다. 그 독백에는 엄마로서 살아야만 하는 십자가를 내포한다. 하지만 그것에만 함몰되진 않는다. 여자로서의 비밀과 방황도 함께 있다. 즉 세상 모든 '엄마'가 발현해내는 '신성聖'과 한 여인으로서 감춰야만 했던 내밀한 '인성性'을 공존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교차 합일을 통해 '엄마' 속에 내재한 신의 속성을 이끌어낸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에 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개월째다, 로 시작하는 에필로그 <장미 묵주>는 소설의 완성도를 오롯하게 만든 텍스트 연금술의 극치다. 소설을 시작한 '너' 큰딸의 시선은 엄마를 잃어버린 먼 훗날의 시점으로 회귀하여 소설을 끝맺음한다. 미켈란젤로의 명조각상 피에타상 앞에서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라며 애원하는 큰딸 '너'의 마지막 명장면은 세상의 모든 슬픔을 두 손으로 보듬는 모성에 대한 고개숙임이자 찬탄이리라. 

  대중음악가 이적은 이 소설을 "세상 모든 자식들의 원죄에 대한 이야기"라고 프리뷰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평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소설은 모성을 빚진 자식들의 원론적 죄값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단선적 조망은 신경숙 자신의 모든 문학적 역량을 쏟아부어 창조한 경외스런 텍스트에 대한 지엽적 감상의 오류이자 모독이다. 감히 평하건대,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라는 존재로 대변되는 인류 유일무이한 아가페적 사랑에 대한 오마주이자, 온전하면서도 온전치 못한 인간으로서의 '엄마'를
단층 해부한 'CT촬영'이다. 

  매우 깊은 문학적 감동을 선사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문장 곳곳에 작정하고 쓴 흔적이 역력하다. 고결한 주제를 뛰어난 연금술로 완벽하게 창조해낸 텍스트에 별 다섯개는 한없이 적게만 느껴진다. 한국 문단에 신경숙이 있어 행복하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어떨 때는 잔잔한 동화 한 편이 더욱 심원한 인생의 이치를 말해주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떨 때는 얇은 그림소설 한 권이 긴 서사가 말해주지 못하는 영역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 동화는 아이만을 위한 텍스트가 아니다. 잘 다듬어진 동화는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순수성 결락의 질병을 앓는 성인들에게 일그러진 자화상을 자각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한국적이며 토속적인 정서와 감수성을 발군의 내공으로 만들어내는 작가 김주영이 동화 같은 그림소설을 새롭게 선보였다. 나는 그의 대표작 『객주』를 통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꾼인지를 경험했다. 조선 상인의 생생한 삶과 역동성을 극히 섬세하고 토속적인 문체로 담아낸 『객주』는 한국 문학사에서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요 몇 년 사이 개정판으로 새롭게 선보여 현대인들이 읽기에 어려움이 없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총 아홉 권에 달하는 김주영의 역작 『객주』는 반드시 읽어야 할 사회소설로 지인들에게 아낌없이 추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김주영 작가가 그림소설을 새롭게 선보였다는 소식은 솔깃했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똥친 막대기'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선연한 유추가 자못 어려운 제목이다. 과연 김주영은 그림을 배치하면서까지 무슨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던 걸까. 거장의 변화는 언제나 독자의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양장본의 첫 장을 넘기면서 거장 김주영의 동화 속으로 침투한다.

  여기 한 그루의 백양나무가 있다. 오랜 세월 갖은 고난을 감내하며 강인한 나무로 성장했다. 소설 속 화자 '나'는 바로 그 백양나무의 곁가지다. 어미나무로부터 물과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으며 무탈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한 농부의 손에 의해 꺾이면서 '나'의 삶은 송두리째 뒤바뀐다.

  '나'는 수많은 정체성의 변신을 거듭한다. 본래 백양나무 곁가지였다. 그러다가 암소 엉덩이와 재희(농부의 딸)의 종아리를 때리는 회초리로 변신한다. 그런가 하면 하룻밤 사이에 똥친 막대기가 되어 측간에 갇힌다. 또다시 어미나무 곁인 봇도랑으로 돌아와 꽂혀 있는 막대기가 된다. 낚싯대가 되기도 한다. 홍수에 의해 오랜 시간 떠내려가다 어느 한 곳에 몸을 박고 뿌리를 내리면서 '나'의 지난한 여정은 끝난다.

  『똥친 막대기』는 꿈과 사랑의 이야기다. 막대기의 꿈과 사랑은 짧은 서사를 지탱하는 두 가지의 본류다. 한 농부의 손에 의해 절단되어 작은 막대기로서 다양한 변신을 꾀하며 모험을 거듭한 '나'의 꿈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것이다. 어미나무가 간단없이 몰아치는 여름의 비바람과 천둥 번개를 견뎌냈던 것처럼, 겨울의 칼바람에 잎이 찢어지고 가지가 휘어지는 담금질에도 꿋꿋하게 견뎌왔던 것처럼, 강인하고 생명력있는 나무가 되는 것이다. 종국에 스스로 뿌리내릴 곳을 찾아 우뚝 서기까지 작은 막대기의 찬란한 여정은 참으로 아름답다.

  막대기의 사랑 또한 구슬프다. 농부의 딸 재희에게 한 눈에 반한 막대기의 사랑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까지 생명을 지탱케 한 원인이자 작동 장치이다. 막대기는 재희에게 선택되길 바랐다. 하지만 재희의 회초리로 선택될 때는 가슴이 아팠다. 측간에서 똥친 막대기로  갇혀 있을 때도 재희의 손길을 기다렸다. 재희가 자신을 무기로 동네 악다구니들을 쫓을 때는 한없이 기쁘기도 했다. 다시 어미나무 곁인 봇도랑으로 돌아와 꽂혀 있는 막대기가 될 때에는 재희에게 감사했다. 소설의 말미, 막대기는 자신이 살아갈 땅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재희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똥친 막대기가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꿈의 실현은 한 존재에 대한 사랑의 방향성과 합치되면서 아름다운 꿈과 사랑의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꿈과 사랑의 가치가 훼손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젊고 어려운 시절의 꿈은 물질 만능에 영합한 현실주의로부터 가치를 외면당한다. 사랑의 의미 또한 퇴색됐다. 절대적 사랑 아가페(agapē)는 신의 전유물로만 각인된다. 아무리 시대와 가치관이 바뀐다 하더라도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할 가치와 의미가 있다. 그것이 바로 '꿈'이고, '사랑'이다. 꿈이 현실이 될 때 인류는 진보했고, 사랑의 가치가 녹록지 않은 시대에서 인간은 가장 행복했다. 어쩌면 작가 김주영은 『똥친 막대기』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결핍되고 폄하되고 있는 꿈과 사랑의 가치와 의미를 전하고 싶었으리라. 

  『똥친 막대기』는 맑다. 아름답다. 여자의 변신도 무죄지만, 거장의 변신도 무죄다. 대하소설에서 얇은 동화 그림소설로 돌아온 작가 김주영을 환영하며, 그가 새롭게 만들어낸 맑고 아름다운 텍스트에 별 다섯 개를 아낌없이 선사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린 핑거
김윤영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흥분이다. 이 흥분은 두 부류의 작가로 가름되며 내게 각기 다른 농밀함을 갖게 한다.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유명작가의 그것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그것에 나는 조금 더 경도된다. 유명작가는 이미 많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적잖은 형용사로 수식된다. 반면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는 부담스러운 형용문구에 비교적 덜 노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 외적에서 오는 호도와 선입견에서 자유롭다. 요컨대 편견없는 명징한 시각으로 작가와 텍스트를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신선한 작가와의 첫 만남을 예찬한다.

  더욱이 텍스트 자체가 수준급이라면 첫만남이라는 작은 수고는 곧바로 책읽기의 보람과 희열로 치환된다. 응당 그 작가가 이전에 쏟아냈던 작품들의 제목을 훑어보게 된다. 그리고 읽어야만 하는 또 다른 수고로움이 의무화된다. 1998년 제 1회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한 김윤영과의 만남이 내겐 그랬다.

  김윤영의 최신 소설집 『그린핑거』는 생각지도 못한 만족을 내게 안겨주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창비에서 보내준 이 얇은 단편소설집은 '김윤영'이라는 브랜드가 어떤 것인지를 내게 처음으로 소개한다. 본래 단편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 짧은 서사도 이렇게 쓸 수 있구나, 하는 선입견의 파괴를 선사했다. 정말 잘 쓴 깔끔한 소설집이다.

  총 일곱 개의 단편이 실려있다. 표제작 「그린핑거」와 「전망 좋은 집」은 별도의 독립된 단편이다. 나머지 다섯 편은 '내게 아주 특별한 연인'이라는 테마로 엮어진 연작 연애담들이다. 작가는 잘 다듬어진 일곱 편의 단편을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독특한 사랑과 내적 감수성을 섬세하고 감각적인 필치로 그려냈다.

  표제작 「그린핑거」는 단연 돋보이는 단편이다. 주인공 써니는 '그린 핑거'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정원을 잘 다루는 여인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식물을 다루는 것과 근본적인 자의식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은 별개의 역량인 듯보인다. 선천적 얼굴 기형으로 태어난 그녀의 콤플렉스는 성공적인 수술 이후에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남편이 기형에 대한 압박감으로 아이 갖는 것을 꺼림을 알게 된 그녀는 남편과 소원해진다. 한 여성의 자기부정이 날카롭게 잘 드러났다.

  연작의 구성으로 이어진 다섯 편의 연애 단편들 또한 모두 읽어볼 만 하다. 각 단편은 하나의 독립된 단편이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앞선 단편의 한 인물이 다음 단편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피카레스크식 구성은 각 단편을 동일한 주제로 엮으면서 동시에 독립성을 잃지 않게 한다. 물론 각 단편들의 완성도 또한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하다.

  「블루오션 경제학」은 연애학에 주식과 투자의 개념을 차용했다. 「모네의 정원으로」는 다른 단편보다는 조금 긴 호흡으로 연애에 '그림'과 '경제'의 키워드를 대입했다. 다섯 편의 단편 모두 주인공 화자는 여성이다. 최근에 읽은 비슷한 소재의 일본소설인, 작가의 이름을 거론하기도 민망한 싸구려 연애 이야기와는 수준을 달리한다. 동시대 여성들의 각기 다른 다양한 연애담을 통하여 여성의 내밀한 심리묘사와 자의식 탐구가 돋보이는 소설집이다.

  여성이기에 쓰지 못하는 소설이 있는 반면 여성이기에 가능한 소설이 있다. 『그린핑거』에서 김윤영의 문학적 브랜드는 잘 드러난다. '단편'이라는 서사 장르가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작가 김윤영은 깔끔하게 입증했다. 본래 나는 단편을 즐겨 읽지 않는다. 단편소설은 대체적으로 서사가 가볍다. 단편이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 또한 내게는 거북하다. 하지만 김윤영의 단편은 매력적이다. 동시대적 감수성을 전면에 배치하지만 칙릿이라는 한국 여류문학의 클리셰에 함몰되지는 않는다. 메시지가 간명하며 글이 매끄럽다. 기술력 또한 탄탄하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반성할 줄 아는 작가란 말을 듣고 싶다고 고백한다. 텍스트에 대한 겸손이 잘 묻어있는 고백이다. 이에 한 권의 소설집으로 그녀의 매력에 경도된 미천한 독자는 그녀에게 한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단편의 벽을 넘어 장편의 바다에 진입해줄 것을 말이다. 장편은 단편과는 다른 세계다. 지금보다 훨씬 긴 호흡으로 그녀의 텍스트를 궁구하고 싶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김윤영을 100%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econd Edition]



『로드』를 다시 읽었다.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찬연한 호평을 받는 노장의 텍스트를 향해 나는 결코 박수를 보낼 수 없었다.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로 평가해야 하며, 바로 이런 공식에서 『로드』는―적어도 내 주관에서는―별볼일 없는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거장의 문학을 탐독하는데 있어 혹 내게 결락된 부분이 없는지를 반추코자 하는 의지가 강렬히 발동했다. 읽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한 권의 소설을 재차 손에 집어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카시는 극도의 건조한 묵시록적 분위기로 독자를 안내한다. 소설의 시작부터 종말을 맞이한 인류의 황량한 배경이 제시된다. 하지만 종말의 근원과 성격은 함구된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야기된 인류 최후의 암울한 미래상으로부터 서사는 시작된다.

  작가는 두 명의 인물을 배치한다. '남자'와 '아이'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자 부자 관계다.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종말의 세계에서 두 부자의 고된 여정은 시작된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사랑과 책임으로 무장한 부성애의 표상이다. 반면 아들은 아버지가 없이는 삶을 추동할 수 없는 연약한 자식의 전형이다. 두 부자는 실체가 가려진 비실존적 구원을 찾아 지난한 여행을 떠난다. 남쪽을 향해 끊임없이 걷고 또 걷는 부자의 행로에는 일말의 희망을 향한 인간의 용솟음치는 갈증이 오롯이 배어 있다.

  이 소설이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대한 코맥 매카시의 의도된 침묵에 있다. 매카시는 종말의 원인과 희망의 실체에 대한 구체화를 거부한다. 그렇기에 읽는 이마다 다양한 해석과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야기는 통조림을 뜯어 먹고, 잠을 취하며, 남쪽을 향해 걷는 두 부자의 행동이 거듭해서 반복될 뿐이다. 독자의 아웃풋을 하나의 굵은 공감대로 묵는 것을 차단코자 하는 작가의 기술에 의해 『로드』는 텍스트 자체의 수준에 비해 과대 회자되었다.

  나는 『로드』를 향한 가장 강렬한 비판 논거로 "<성서>에 비견되었던 소설"이라는 거북한 홍보문구를 제시하고자 한다. 온갖 찬사로 도배가 되어 있는 다양한 서평들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리뷰어들이 이 문구를 통속적으로 때려 맞추는지를 확인했다. 물론 <성서>에 비견할 만큼 뛰어난 텍스트라면 비판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도대체 매카시의 문장 어디가 <성서>에 비견된다는 말인가. 

  『로드』와 <성서>의 공통점은 묵시록적 그림밖에 없다. 하지만 이마저도 두 텍스트는 배리된다. 『로드』에서 묵시록은 전부이지만 <성서>에서는 극히 작은 일부분이다. 『로드』가 제시하는 '희망'은 그저 역할 인물의 교체에 불과하다. 그것도 마지막 석장을 남겨둔채 이야기의 작은 전복으로써 대체된다. 종내 답은 침묵된다. 구원에 대한 해답은 없고, 오히려 고통의 또 다른 연속으로 이어질 뿐이다. "320페이지의 절망, 그리고 단 한 줄의 가장 아름다운 희망"이라고 외치는 소설의 표지 문구는 초라하기만 하다. 소설 말미의 역할 대체극에서 구원에 대한 선연하고 명려한 희망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희망은 없다. 고통만 연장될 뿐이다.

  하지만 <성서>는 다르다. 구원에 대한 명징한 해답을 제시한다. 인류 구원의 해답을 내재적이 아닌 외재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세계의 창조, 인류의 태동, 신의 선택, 아가페(agapē), 구원의 원리, 종말, 종말 이후로까지 이어지는 <성서>의 인과적 구조는 비교가 거부되는 절대 고차원이다. 요컨대 '구원'이라는 명제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신의 아이러니 속에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에 반해 『로드』는 철저하게 인간 안에 구속된 희망을 얘기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화두만 던질 뿐 답의 해석을 독자의 의무로 토스한다. 제시한 명제에 대한 책임감, 이야기의 풍성함, 서사의 인과성, 그리고 문학적 진수에 있어서도 『로드』는 <성서>와 비교될 수 없는 함량 미달 텍스트다.

  한가지를 더 거론하자. 혹자는 소설에서 시계들이 '1:17'에 멈춰진 장면을 발췌하여 무리한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성서>의 '마태복음 1장 17절'의 구속사적 의미를 대입하는 것이다. 사실 17절까지는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의 직계 족보이며, 18절부터 본격적인 예수 자신의 이야기다. 이를 차용하여 『로드』의 텍스트 위에 그대로 올려놓는 혹자들의 과한 접근은 '마태복음 1장 17절'의 의미를 피상적으로 해석한 오류에서 기인한다. 『로드』의 '1:17'과 <성서>의 그것은 의미와 가치, 그리고 차원에서도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로드』의 그것은 전과 후를 나누는 일차원적 분리에 불과하지만, 성서의 그것은 전과 후가 동일하면서 후가 전을 완성하는 동시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로드』의 등장인물 두 사람의 몰개성도 문제다. 인물이 상황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저 상황만 흘러갈 뿐이다. 인물은 상황에 의해 통제되고 억압된다. 개성이 없이 기호로서만 존재한다. 소설에서 '통조림', '잠', '걷기'는 인물을 상황의 기계화로 고착시키는 상징 장치이다. 그렇기에 매카시가 제시하는 '희망'이라는 명제에는 아이러니가 존재할 틈이 없다. 오직 실체가 없는 텅빈 기표로서 구원에 대한 방향성만이 『로드』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꼴이다. 

  이 소설의 키워드라 할 수 있는 '희망'에 대한 매카시의 모호한 처리도 답답하다. 작가는 두 명의 인물을 통해 종말이라는 현상을 쫓기에 바쁠 뿐, 정작 그것을 만든 근원적 모순이나 이를 해체할 희망의 실체에 대해선 묵묵무답이다. 본질은 애써 외면하고 비본질로 채워진 고매한 문장만을 열거할 뿐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극히 단선적인 이야기 구도에 작품을 송두리째 맡겼다고 할 수 있다. 어두운 현재상보다는 근원과 결과를 파고 들었어야 했다. 책을 덮은 후 머릿속에 남는 것은 앞과 뒤가 잘린 암울한 묵시록의 스케치밖에 없다. 인물의 인격성 결여, 명제의 아이러니 부재, 허공을 맴도는 그저 도저하기만 한 문장들로 인해 재미없고 지루한 텍스트에 머물고 만다.

  모든 독서에는 읽는이의 주관이 반드시 필요하다. 내 주관이 아닌 남의 기호에 따라 책을 읽는 것은 작가와 종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기본이 아니다. 그렇기에 혹평은 소중하다. 인터넷을 통해 읽은 『로드』의 다수 독자평들은 대부분 작품 요약이나 작가의 메시지를 직간접적으로 조합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더욱이 이미 미디어에 소개된 평론가들의 찬사평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옮겨놓은 수준이다. 사실 전달의 측면에서 그럭저럭 무리가 없다고 하겠으나 서평으로서 쓰여진 글에 글쓴이의 비판적 판단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면 간접광고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 권의 책에 대한 평은 반드시 텍스트 안에서만 논해져야 한다.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텍스트 내면만을 살핀다는 것은 바깥에 대한 몰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깥에 대한 태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로드』는 분명 텍스트 안보다 바깥이 더 요란한 소설이다. 외연을 두르고 있는 과장된 포장에 의해 너무 심각한 작품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로드』는 독자 개개인의 주체로서 읽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텍스트일지도 모른다. '해럴드 블룸'이나 '퓰리처상' 등의 거대한 긍정 코드가 이 소설을 압도적으로 형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미없는 소설을 두 번 읽는 것도 곤욕이지만 서평을 두 번 쓰는 일도 십자가다. 『로드』를 한 번 더 읽으며 얻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루한 문장을 감내하는 인내심을 고양시킨 것이며, 또 하나는 기존 평점에 별 반개를 더 얹은 것이다. 그뿐이다.

 

★ 다윗이 추천하는 『로드』 찬사 서평 : 고냥씨님 - '변방에서 울리는 경종'
블로그 http://lifelog.blog.naver.com/waytogohr/r01_waytogohr_132
카페(책좋사) http://cafe.naver.com/bookishman/149492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작은 마을, 두 남녀의 결혼식이 치뤄진다. 서로 사랑하지 않은 채 결혼한 바야르도 산 로만과 앙헬라 비까리오의 신혼 첫날밤 사건으로부터 비극의 서사는 시작된다. 잠자리에서 앙헬라가 처녀가 아님을 확인한 바야르도는 곧바로 아내를 친정으로 내쫓는다. 앙헬라는 자신의 처녀성을 빼앗은 장본인이 마을의 멋쟁이 부자 청년 산띠아고 나사르라고 밝힌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평소 산띠아고 나사르는 앙헬라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산띠아고는 고등학교 중퇴 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농장을 경영하는 스무살의 청년이다. 앙헬라와 함께 있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띈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녀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그였다. 그랬기에 그가 앙헬라를 범했다는 것은 언뜻 이해되기 힘든 고백이다. 

  하지만 앙헬라의 쌍둥이 오빠 빠블로 비까리오와 뻬드로 비까리오는 여동생과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산띠아고 나사르를 살해하기로 계획한다. 그들의 살해 계획은 마을 내에 충분히 예고된다. 하지만 정작 살인의 타겟인 산띠아고는 죽임을 당하기 직전까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결국 산띠아고 나사로는 자신의 집 앞에서 잔혹한 죽임을 당한다.

  두 형제는 살인을 저지른 후 곧바로 성당으로 달려가 신부에게 범행을 고백한다. "저희는 양심에 따라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두 형제는 일체의 양심의 가책을 외면한 채 범행의 논리적 완전성을 주장한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며 주요인물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난다. 그리고 23년의 세월이 흐른다.

  150페이지 전후의 분량으로 하드커버를 두르고 있는 이 얇은 소설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자신의 작품 중 최고로 꼽는 소설이다. 자신의 모든 텍스트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서 비롯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고 밝히는 마르케스의 의지는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렬히 드러난다. 요컨대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는 그의 소설 중에서 가장 실재적이고 사실적인 작품이다.

  서평의 도입부터 장황하게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한 이유는 이 소설이 철저히 사실주의적 배경에서 쓰여졌기 때문이다. 작가 마르케스가 직접 작중화자로 등장하여 당시 관련있었던 인물들로부터 23년 전의 과거를 회상시킨다. 마르케스 자신의 기자 생활 이력을 증명하듯 이야기를 추동하는 인터뷰 기법은 발군이다. 작가는 충분히 예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온전히 실행된 살인 사건을 매우 집중력 있게 담아냈다.

  나는 이 소설이 제기하는 두 가지 질문에 주목한다. 먼저 '폭력'과 '명예'의 상치 구도다. 다시 말해 명예를 위한 폭력은 납득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소설에서 사회와 집안의 엄격한 도덕적 분위기 가운데 처녀성을 잃은 채 거짓으로 결혼한 앙헬라의 행태는 불명예로 치부된다. 명예를 짓밟힌 자들의 수치심과 이를 회복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개인적 폭력의 발동으로 치환된다. 마을사람들의 방관자적 태도 또한 이러한 폭력성에 대한 묵인이자 그늘진 집단 무의식의 전형이다. 과연 이는 논리인가, 비논리인가.

  또 하나는 '운명주의'다. 이야기 속에서 산띠아고 나사르의 운명은 미리 결정된 듯 보인다. 살인을 위해 달려가는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우연'이다. 하지만 '필연된 우연'으로 가장한다. 마치 기차가 정확한 시간에 각 역을 정차하며 통과하는 것처럼 산띠아고의 죽음을 위해 달려가는 불운한 우연의 기차는 항시 제 궤도를 달린다. 작가는 한 남자의 죽음으로 치닺는 우연의 상황을 운명이 미리 결정된 숙명적 분위기의 그림으로 잘 그려냈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소재로 작가 자신이 직접 화자를 자처하여 이야기를 추동하는 이 얇은 소설은 참 재미있다. 1인칭 화자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의 과거 회상을 이끌어내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하지 않은, 더욱이 단선적 서사가 아니기에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야만 하는 수고가 독자에게 요구된다. 그렇기에 읽는 묘미는 배가된다. 

  정리하자면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는 얇은 텍스트 내에서 '무의식의 공동체적 현상'과 '운명주의', 그리고 '폭력과 명예의 아이러니한 배리'를 질문하는 작가 마르케스의 섬세한 감각을 맛볼 수 있는 소설이다. 한마디로 묘한 감흥과 깔끔한 텍스트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