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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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은 마을, 두 남녀의 결혼식이 치뤄진다. 서로 사랑하지 않은 채 결혼한 바야르도 산 로만과 앙헬라 비까리오의 신혼 첫날밤 사건으로부터 비극의 서사는 시작된다. 잠자리에서 앙헬라가 처녀가 아님을 확인한 바야르도는 곧바로 아내를 친정으로 내쫓는다. 앙헬라는 자신의 처녀성을 빼앗은 장본인이 마을의 멋쟁이 부자 청년 산띠아고 나사르라고 밝힌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평소 산띠아고 나사르는 앙헬라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산띠아고는 고등학교 중퇴 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농장을 경영하는 스무살의 청년이다. 앙헬라와 함께 있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띈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녀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그였다. 그랬기에 그가 앙헬라를 범했다는 것은 언뜻 이해되기 힘든 고백이다. 

  하지만 앙헬라의 쌍둥이 오빠 빠블로 비까리오와 뻬드로 비까리오는 여동생과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산띠아고 나사르를 살해하기로 계획한다. 그들의 살해 계획은 마을 내에 충분히 예고된다. 하지만 정작 살인의 타겟인 산띠아고는 죽임을 당하기 직전까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결국 산띠아고 나사로는 자신의 집 앞에서 잔혹한 죽임을 당한다.

  두 형제는 살인을 저지른 후 곧바로 성당으로 달려가 신부에게 범행을 고백한다. "저희는 양심에 따라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두 형제는 일체의 양심의 가책을 외면한 채 범행의 논리적 완전성을 주장한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며 주요인물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난다. 그리고 23년의 세월이 흐른다.

  150페이지 전후의 분량으로 하드커버를 두르고 있는 이 얇은 소설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자신의 작품 중 최고로 꼽는 소설이다. 자신의 모든 텍스트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서 비롯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고 밝히는 마르케스의 의지는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렬히 드러난다. 요컨대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는 그의 소설 중에서 가장 실재적이고 사실적인 작품이다.

  서평의 도입부터 장황하게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한 이유는 이 소설이 철저히 사실주의적 배경에서 쓰여졌기 때문이다. 작가 마르케스가 직접 작중화자로 등장하여 당시 관련있었던 인물들로부터 23년 전의 과거를 회상시킨다. 마르케스 자신의 기자 생활 이력을 증명하듯 이야기를 추동하는 인터뷰 기법은 발군이다. 작가는 충분히 예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온전히 실행된 살인 사건을 매우 집중력 있게 담아냈다.

  나는 이 소설이 제기하는 두 가지 질문에 주목한다. 먼저 '폭력'과 '명예'의 상치 구도다. 다시 말해 명예를 위한 폭력은 납득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소설에서 사회와 집안의 엄격한 도덕적 분위기 가운데 처녀성을 잃은 채 거짓으로 결혼한 앙헬라의 행태는 불명예로 치부된다. 명예를 짓밟힌 자들의 수치심과 이를 회복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개인적 폭력의 발동으로 치환된다. 마을사람들의 방관자적 태도 또한 이러한 폭력성에 대한 묵인이자 그늘진 집단 무의식의 전형이다. 과연 이는 논리인가, 비논리인가.

  또 하나는 '운명주의'다. 이야기 속에서 산띠아고 나사르의 운명은 미리 결정된 듯 보인다. 살인을 위해 달려가는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우연'이다. 하지만 '필연된 우연'으로 가장한다. 마치 기차가 정확한 시간에 각 역을 정차하며 통과하는 것처럼 산띠아고의 죽음을 위해 달려가는 불운한 우연의 기차는 항시 제 궤도를 달린다. 작가는 한 남자의 죽음으로 치닺는 우연의 상황을 운명이 미리 결정된 숙명적 분위기의 그림으로 잘 그려냈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소재로 작가 자신이 직접 화자를 자처하여 이야기를 추동하는 이 얇은 소설은 참 재미있다. 1인칭 화자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의 과거 회상을 이끌어내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하지 않은, 더욱이 단선적 서사가 아니기에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야만 하는 수고가 독자에게 요구된다. 그렇기에 읽는 묘미는 배가된다. 

  정리하자면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는 얇은 텍스트 내에서 '무의식의 공동체적 현상'과 '운명주의', 그리고 '폭력과 명예의 아이러니한 배리'를 질문하는 작가 마르케스의 섬세한 감각을 맛볼 수 있는 소설이다. 한마디로 묘한 감흥과 깔끔한 텍스트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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