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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평점 :
# 프롤로그 : 다시 읽은 소설 『죄와 벌』
오래전 읽은 소설을 다시 집어 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최근 내 주변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결국 사람들 간의 문제인데 이런저런 일들을 지켜보면서 '인간은 어디까지 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인간의 악함의 크기와 종류는 과히 천차만별인 것 같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악랄하고 교만하고 싹수없을 수 있겠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성(理性)이 없고, 예의가 없고, 절제가 없다. 제발 적당히들 했으면 좋겠다.
이런 씁쓸함은 비단 타인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나 자신 또한 역시 추악하다는 진실을 자주 직시한다. 신은 인간의 마음에 양심이란 씨앗을 심어놓았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양심을 '벌레'와 '천명의 증인'으로 비유했다. 총신대학교 문병호 교수는 전자를 '내부에서 끊임없이 갉아먹는 고통'으로, 후자는 '모든 변명을 반박하는 압도적 확증'으로 주석했다. 서글픈 건 세상에는 (나를 포함해)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불편한 진실을 극적이고 적나라하게 마주한 순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다시 내 손에 들어왔다.
⑴ 죄(罪), 그리고 인물
죄는 무엇인가. 국어사전을 펼치니 '잘못이나 허물로 인하여 벌을 받을 만한 일'로 설명되어 있다. 죄를 기독교적으로 접근하면 의미는 조금 달라진다. 기독교에서는 죄의 기준이 타인이나 사회에 있지 않다. 하나님에게 있다. 기독교에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어기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언약적인 관계에서 발생한 불순종은 모두 죄이다. 그렇기에 죄는 상태이고 현상이다. 죄를 존재나 물질로 본 마니주의자들의 오만한 어불성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오래전 폐기처분되었다. 흥미로운 건 세상의 죄의 개념과 기독교의 죄의 개념이 많은 부분 겹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법은 소위 '도덕법'이라는 명명으로 역사 이래 인간의 법에 녹아들었다. 그렇기에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살인을 저지르거나 도둑질을 하는 건 예외 없이 죄로 인식되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규정한 법조항(십계명, 곧 도덕법)의 많은 부분이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각 국가의 실정법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바로 이 죄의 문제를 천착한다. 도스토옙스키가 만들어낸 대부분의 인물이 그렇듯이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불안하고 극단적인 인물이다. 가난한 삶을 살지만 진지하고 독특한 사색을 가진 청년이다. 자신의 자취방에서 "사회에 불필요한 인간을 없애 더 큰 공공의 선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공상에 빠진다. 공상은 곧 현실이 된다. 자신의 사상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동네에 있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계획적으로 직접 살해한 것이다. 범행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막상 살인을 저지르고 나니 극심한 혼란과 망상의 증세가 그를 억누른다. 며칠간 고열과 의식의 혼탁 상태가 이어진다. 그러던 중 지인과 경찰을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슬아슬하게 노출되고 방어된다. 소설은 에필로그 직전까지 그 긴장감을 철저히 유지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아무 이유 없이 노파를 죽이고 우발적으로 그 여동생까지 죽인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는 분명 엽기적 중범죄다. 그는 마지막까지 반성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살인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비범성, 즉 특별함과 초월함을 갖고 있다는 망상으로 자기 자신을 합리화한다. 범행 후 여러 사람과의 만남에서 그의 예민하고 망상적인 행태는 점점 심해진다. 긴 소설 분량 대부분이 라스콜리니코프의 내적 혼란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자신을 제대로 회복시키지 못한다. 자기우월과 자기혐오가 뒤섞인 정신분열적 실존이 인간 라스콜리니코프의 진본이다.
라스콜리니코프를 변화시키는 존재는 소냐이다. 술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의 딸로서 아버지가 마차 사고로 치여 죽은 후 아버지 장례 과정에서 라스콜리니코프를 만난다. 소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을 택한 불운한 여인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자기희생을 잘 드러내며 작가적 장치라는 면에서 신앙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마치 순종과 희생으로 자기를 부정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소냐는 인간의 진정한 구원(부활)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수시로 신약성경의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를 들려준다. 죄를 비껴가지 말고 자수함으로써 정면 승부해야 할 것을 권면하기도 한다. 이런 대목은 기독교적 상징과 은유를 잘 담아낸다. 소냐는 종국 라스콜리니코프를 자수시키고 참회의 가능성으로 이끈다.
도스토옙스키는 왜 그토록 병적인 인간을 전면에 내세웠을까. 솔직히 라스콜리니코프는 위대한 고전의 주인공으로는 전형성과 일상성이 거의 없는 또라이다. "비범한 인간은 도덕법칙을 초월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사상에 도취되어 사람을 둘이나 도끼로 찍어 죽인 인물이다. 미친놈이다. 이 막장극을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그건 아마 '역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성의 추악한 실체를 극한까지 몰고 감으로써 결국 하나님 없이는 인간은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음을 깨우치고야 마는 그런 역설 말이다. 즉 도스토옙스키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극단적인 망가짐을 보여줌으로써 은혜로 살 수밖에 없는 인간론을 강하게 설파한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는 인류의 사상과 종교의 역사에서 항시 뜨거운 주제였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본 몇 안 되는 철학자다. 죄의 문제를 부조리(absurdism)란 신조어로 비껴간 카뮈 같은 자도 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을 악하거나 타락했다고 본 전통이 훨씬 두텁고 오래된 흐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위시하여 그를 계승한 루터와 칼빈은 인간을 전적 타락(Total Depravity)한 존재로 규정했다.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주장하며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이기적 욕망에 지배된다고 말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에로스, 타나토스 등을 통해 인간의 악성을 탐구했고, 니체는 선과 악을 권력 투쟁의 산물로 해석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을 '믿을 만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철저히 인간은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입장에 서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칼빈의 계보인 것이다.
많은 책을 읽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명확하게 깨달은 게 있다. 인간은 절대로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에게 인간은 "가만히 놔두면 자신의 자유의지로 악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규정된다. 법과 도덕은 인간의 악을 감소시키기 위한 마지노선일 뿐이다. 인간 구원은 인간 밖에 존재한 강력한 외부의 힘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성실한 친구 라주미힌은 소설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밝고 친절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서 나중에 두냐와 결혼해 건강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멀쩡한 사람은 그 하나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라주미힌은 끝내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일말의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도덕적으론 성공했지만 구원의 성취에는 다가서지 못한 인물이다.
또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죄가 일상화된 형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극단적이되 이론적이라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일상화된 죄의 얼굴이다. 그는 하인을 학대하고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의심을 받는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의혹도 받는데 이에 대해 인물 간의 심증만 있을 뿐 소설에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현대인의 내밀한 일상에 실재한 죄의 형상을 은유한 것 같다. 그는 죄를 설명하거나 변명하지도 않는다. 죄와 함께 살아가는 인물로서 죄가 일상을 넘어 권태에 도달한 완성형 악인이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양심의 고통이 없고 회개 또한 불필요하다. 자기 욕망의 목적이었던 두냐(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결국 그는 자기 부정과 자기 소멸의 길을 택한다. 신도 없고 절대적 의미와 가치가 없는 세계는 공허하며 그 어떤 삶의 본질도 찾을 수 없기에 결국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예심판사(수사관) 포르피리는 『죄와 벌』을 신학소설이나 인간론 사상서로 읽히게 하는 주요한 인물이다. 포르피리는 가장 이른 시점에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이라는 내적 확신을 갖는다. 명확한 확신을 갖고 있음에도 라스콜리니코프를 체포하려 하지 않는다. 고발하지 않고 도망칠 길을 막지도 않는다. 대신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다. 대화 속에서 논리적 우위를 점하는 방식이다. 확신은 가득하지만 정죄하지는 않는다. 합리적이고 냉정하고 통찰력이 있지만 그 또한 라주미힌과 같이 라스콜리니코프의 영혼을 구하지는 못한다. 왜 틀렸는지는 알지만 어떻게 부활할 것인지는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냐에게 바통을 넘긴다.
⑵ 소냐 - 구원이 작동하는 자리
반면 소냐는 라주미힌과 포르피리가 도달하지 못한 '특별한 은혜'를 아름답게 웅변해낸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서는 가능성의 통로의 길 위에 서 있다. 소설 『죄와 벌』에서 소냐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건 이 소설의 단 하나의 명료한 주제, 즉 '인간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 작업이다. 소냐의 삶은 고단하고 가난하고 비루해 보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았다. 라주미힌처럼 도덕적 고지(高地)에 올라선 인물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소녀가 위대한 건 '자기 위치'를 안 다는 것에 있다. 그녀는 스스로 죄인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를 판단하지 않는다(못한다). 어떤 이론이나 지적도 없다. 남의 눈의 티끌이 아닌 자기 눈의 들보에 주목한 소냐의 겸손함은 율법적 정죄가 아닌 은혜의 통로만이 인간의 살 길임을 명징히 보여준다.
성경에 대한 소냐의 태도 또한 주목할 만하다. 소냐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반복적으로 읽어주는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는 신약성경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기적의 메시지다. 죽은 지 나흘 동안 무덤에 있던 나사로를 예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살려낸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 중 마지막이자 최대의 표적이다. 중요한 건 소냐는 이 본문을 설명하지 않고 그저 읽어주기만 한다는 점이다. 적용도, 논증도, 교훈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소리 내어 읽을 뿐이다. 이는 정통 기독교의 말씀론(성경론)과 깊게 맞닿아 있다. 말씀은 인간의 해석으로 효력을 얻지 않는다. 말씀은 스스로 살아 역사한다(sola Scriptura + viva vox evangelii). 라스콜리니코프는 말씀을 듣고 즉시 회개하지 않지만 "죽은 자라 불려 나오는 사건"이 그의 내면에 깊이 심어진다. 이는 성령의 사역이지 설득의 결과가 아니다.
많은 독자들이 소냐를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감상하는 것 같다. 여러 온라인 리뷰를 읽어본 결과 소냐를 구원의 주체이자 동력으로 이해하는 후기가 제법 많이 눈에 띈다.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 대속은 오직 그리스도의 몫(Solus Christus)이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백을 요구하지 않고 회개를 재촉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고난의 길로 갈 때 "함께 가겠다"고 말할 뿐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닌 교회의 역할과 정확히 일치한다. 교회는 죄를 사하지 못한다. 회개하는 죄인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곳이다.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이 작동하는 자리이다. 대속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동행은 교회의 역할이다. 소냐는 인간을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대체나 은혜의 생산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이다. 결국 소냐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자리'가 어떤 모습인가"를 농밀하게 상징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일갈한다. 인간은 인간 밖에 실재한 '강력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도스토옙스키에게 인간은 구원에 있어 절대 무능력한 존재다. 그래서 그는 그의 모든 작품에서 일관되게 은혜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을 탐구했다. 노파와 그의 여동생을 잔인하게 죽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행동에 끊임없이 괴로워하지만 끝까지 죄책감을 느끼거나 회개하지 않는다. 범행 후 공포와 혼란, 신경증과 피해 망상을 겪지만 그것들은 윤리적 죄책감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자기 힘이나 이성, 내면의 양심이 아닌 오직 소냐의 절대적 사랑에서 무너진다. 벌을 받을 때보다 사랑받을 때 더 붕괴하는 도스토옙스키 인간관의 절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냐는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옆에 함께 있을 뿐이다. 죄책감이나 회개로 인해 구원으로 간 게 아니라 구원의 가능성을 먼저 만났기 때문에 죄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은혜인 것이다. 신(하나님)은 그 은혜를 인간이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도록 작정하셨다. 그래서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다. 『죄와 벌』이 윤리나 도덕 소설이 아닌 '은혜 소설'로 불리는 이유다.
⑶ 영향받은 작가와 기독교
도스토옙스키는 독실한 기독교(러시아정교회)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진 건 아니다. 젊었을 때 벨린스키, 생시몽, 푸리에와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던 중 급진적 사회주의 모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총살 직전 차르의 특사로 구제받은 경험을 통해 인간의 불완전성과 유한성을 경험한다. 이후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보내며 신약성경을 깊이 탐독한다. 이런 과정이 도스토옙스키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원인으로 분석된다. 산상수훈 정도의 도덕적 기독교에 머문 톨스토이와 달리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십자가와 부활을 온전히 붙잡았다는 점에서 그의 신앙은 정통 기독교에 머물러 있다.
아이러니한 건 도스토옙스키에게 영향을 받은 사상가 중 반기독교인이 수두룩하다는 점이다. 니체, 사르트르, 프로이트와 같은 이들은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거나 신을 부정한 사람들이다. "그는 내가 무언가를 배운 유일한 심리학자다."라고 도스토옙스키를 치켜세운 프리드리히 니체는 동시에 "신은 죽었다."를 외쳤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역설적 문장을 차용한 장 폴 사르트르는 본질에 앞서야만 하는 실존적 인간론을 설파했다. 도스토옙스키를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꼽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죄의 기준을 신이 아닌 인간 내면의 심리적 억압의 기제로 천착했다. 헤르만 헤세는 기독교 탈주 후의 영성을 그렸고, 앙드레 지드는 반기독교적 개인주의를 탐색했다. 흥미로운 건 이들을 통해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성이 더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믿는 자리에서' 인간을 쓰지 않고 '믿음이 무너지는 자리까지' 인간을 데려간 뒤 거기서도 예수를 놓지 않았던 작가였다. 니체, 카뮈, 사르트르는 인간의 죄·고통·자유를 끝까지 밀어붙였지만 '은혜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이라는 도스토옙스키의 통찰 앞에서는 멈춰 섰다. "인간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을 만큼 강한가."라는 질문 앞에 도스토옙스키의 대답은 일관된다. "아니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철학적으로 불편하고 윤리적으로 모욕적인 답변이겠지만 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 답변했기 때문에 그 일관됨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 문학의 힘이 있다.
소설의 힘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이야기로 그저 보여줄 뿐이다. 철학자와 심리학자는 '전제->논리->결론'이나 '개념->체계->설명'의 방식으로 논증한다. 논박이 가능하고 회피가 가능하다. 그러나 소설은 전제와 결론보다 과정과 경험으로 말한다. 라스콜리니코프, 소냐, 라주미힌, 스비드리가일로프 등은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라 삶의 실험체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모두 '신 없이는 못 버티는 인간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단 한 번도 신 존재 증명을 하지 않았다. 신이 없는 인간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인간의 선의를 끝까지 시험한다. 자유를 무한히 부여하고 책임을 전부 떠넘긴다. 그리고 질문한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독자는 이 질문에서 도망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 인간으로 살아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는 '설득'이 아니라 '피할 수 없음'이 된다. 정리하자면 도스토옙스키는 신이 없으면 '끝까지 살 수 없다'는 것을 서사로 증언해낸 것이다.
⑷ 도체스토옙스키의 시간, 그리고 톨스토이
『죄와 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굉장히 압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오랫동안 읽었는데ㅡ길고 무거운데ㅡ실제 소설 속에서 이야기가 흐르는 시간은 아주 짧다. 소설 시작부터 결말까지 1년 남짓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기 전까지는 몇 달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핵심 사건들은 2-3개월 안에 몰려 있다. 살인 전후의 핵심 드라마는 2주 정도다. 즉 노파 살인, 정신 혼미, 경찰 조사, 소냐와의 만남, 인물들 간의 심리전, 스비드리가일로프 사건, 자백 등등. 소설 전체를 덮고 있는 이 모든 게 약 10일~2주 안팎에 벌어진다. 더욱이 재판 과정은 생략되었고 시베리아 유형은 에필로그 몇 장으로 요약되었다. 정리하면 『죄와 벌』은 분명 긴 소설이지만 이야기 속 시간은 짧고 인간의 내면만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난 소설이다.
이는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백치』도 실제 서사 기간은 1년에 불과하며 주요 사건은 특정 시기에 집중되었다. 가장 충격적인 작품 『악령』도 이야기가 흐른 시간은 수개월이다. 이 소설 또한 결정적 며칠에 모든 사건이 폭발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인물들 간의 설교와 토론이 많지만 사건 자체는 매우 빠르고 흐른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야기 전체가 1년 안에 이뤄지지만 핵심 서사는 부친 살해 전후 며칠에 불과하다. 이는 톨스토이의 작품들과 명백히 대조되는 지점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결혼-불륜-파국'으로 이어지는 긴 세월을 다룬다.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 초기부터 몰락까지 약 15년의 역사를 관통한다. 『부활』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장기적 회고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차이는 두 작가의 소설의 결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시간의 단위는 대화다. 그의 소설은 상황이나 배경 묘사가 축소되어 있다. 정확히 말해 의식과 대화가 배경을 압도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을 항상 떠든다. 이에 대해 미하일 바흐친은 '폴리포니(polyphony) 서사'로 정의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작가의 목소리가 중심이 되지 않고 여러 인물의 말이 서로 충돌하면서 의미가 만들어지는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 세계관에서 시간의 흐름은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 순간이 중요하고 이를 따라가는 인간의 의식이 시간의 압축성을 주도해낸다. 반면 톨스토이에게 시간은 일상과 반복이다. 순간이 아닌 변화와 축적의 시간이다. 톨스토이의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간은 단 한순간에 드러나고 톨스토이의 인간은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
내가 청소년기나 이십 대 때에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면 지금보다 더 매료되었을 것이다. 아직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겪어보지 못한 청춘의 시기는 많은 걸 모르지만 동시에 모든 질문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시간대다. 이 시기는 지혜의 응축과 깨달음의 밀도보다는 직감이 우선한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나 이반과 같은 인물에 더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삶은 변하기 마련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부모의 늙음을 보면 '왜 살아야 하는가'보다 '어떻게 오늘을 견디는가'가 더 중요한 주제가 된다. 더욱이 아이를 키우는 순간 톨스토이는 더 넓게 열린다. 아이는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서서히 자라고 배우고 멀어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는 거의 없는 경험이다. 반면 톨스토이에게는 핵심 주제다. 내가 톨스토이의 소설에 더 깊이 감동받는 이유이다.
# 에필로그 : 4대 장편으로 향하는 관문
나는 이미 여러 지면에서 도스토옙스키보다 톨스토이가 더 탁월한 소설가임을 수차례 주장해왔다. 지금도 그 견해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은 단 한순간에 드러난다고 보는 도스토옙스키적 극단보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는 톨스토이적 일상이 보편 인간의 경험과 성찰에 더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내 입장은 내가 소설의 배경, 상황 전개, 심리의 축적, 인간이 환경 속에서 변해가는 과정 등을 주목하는 내 소설관의 기준에 깊이 종속되어 있다. 소설을 삶의 형식으로 읽어내는 나 같은 독자에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여전히 불편한 텍스트로 남는다. 하지만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 불편하긴 하지만 꼭 읽어야 하는 대상으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시각이 변모했다는 점이다. 이는 과거 그의 소설에서 내가 붙잡지 못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측면에서의 독서를 리셋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제 <프롤로그>로 돌아가자. 나는 이 글을 열면서 "최근 내 주변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배경이 되어 『죄와 벌』을 다시 집어 들었음을 고백했다. 대략 50년의 삶의 경험을 통해 얻은 내 통찰은 인간은 오류가 많고 추악하며 불완전한 존재라는 깨달음을 여실히 축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독교 신앙은 '인간은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당위를 지시한다. 서로 부딪히는 진실과 당위의 혼합 속에서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는 건강한 인간론을 다듬어보길 원했다. 이에 마냥 "인간을 사랑하라."라는 교훈을 주기보다 "그런 인간을 보고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가혹하고 정직한 질문을 던지는 도스토옙스키를 손에 들게 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중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다. 이번에 『죄와 벌』을 재독했으니 이제 순서대로 『백치』 - 『악령』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재독) 순으로 4대 장편을 독파할 예정이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역동적으로 관통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대작들을 통해 더 깊고 풍성한 인간론의 백미를 탐구해 보려 한다. 그래서 나의 지향은 "인간은 혐오스러울 만큼 타락했지만, 결국 바로 그 자리에서만 은혜가 의미를 갖는다."라는 궁극의 깨달음에 더 감동적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백치』와 『악령』은 기존 소장본인 열린책들본으로 읽을 것이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만 김연경 번역의 민음사본으로 읽을 것이다. 번역에 대한 사유는 나중에 각 책들의 리뷰에서 밝히겠다.
서평을 마무리하자. 나는 옳다는 확신에 가득 차 타인을 무시하고 배제하고 끝내 '죽여버리는'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 정작 『죄와 벌』을 읽는 동안 "네가 혐오하는 그 인간의 씨앗이 사실은 네 안에도 있다"라는 불편한 속삭임이 끊임없이 귓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이 긴 여정(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독파)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에게 간절히 울부짖는다. 하나님!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란 말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