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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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 대한항공의 '땅콩회항'사건에서 놀라웠던 것은, 동료들의 그 어떤 집단행동도 없었다. 그들은 깊이 침묵하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이도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등장한 '먹고사니즘'이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을'이라도 되는 상황을 감지덕지한다. '갑'의 행패에 원칙대로 대응한 사무장은 복종을 다짐하는 세상에서의 자유인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갑'질은 경제적뿐만 아니라 애써 관계를 유지하려는 데서부터 나온다. 이는 오래전부터 자연과 배치되는 부당한 권력으로 우리 의식의 내면에 뿌리 내려왔다. 따라서 자유에 대한 사랑이 인간 본성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16세기였다. 18세 청년의 손에서 나온 이 짧은 글이 오늘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아, 현대사회의 모순을 해석하는 데 핵심적인 영감을 주는 언설로 남아 있다. 저자는 절대군주가 행사하는 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 글이 세상에 나온 때는 프랑스혁명을 즈음으로 '몽테뉴'가 상속자다.

 

 '라 보에시'가 말하는 복종의 가장 큰 이유는 '습관'이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망각'이다. 대부분의 복종은 자발적으로 이뤄진다. 왜 우리는 복종하는가? 사람들은 권력의 존재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예를들면 명품에 대한 현대 사회의 숭배, 자본에 대한 눈물겨운 숭배 역시 물질의 노예들이 행하는 자발적 복종이다. 이런 삶은 자유 대해 절실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은 그저 살아내야 하는 고통의 과정일 뿐이다. 즉 기계를 굴리기 위해 박혀 있는 나사에 불과하다.

 

 사로 잡힌 동물들은 자유를 상실한 불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잃어버린 자유를 애석해하는 분노에 시달린다. 감정을 가진 모든 세상 만물이 구속을 경험하는 순간, 자유를 향해 질주한다. 인간의 본성을 변질시키고, 존재 양식에 대한 기억을 지우며, 자유를 갈망하는 본질적 존재로 돌아가려는 욕구마저 무기력하게 만드는 '자발적 복종'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앞서 읽었던 'John Stuart Mill'의 '자유론' 탄생의 배경은 18세기의 산업혁명을 계기로 농업국이었던 영국은 공업국 전환기였기 때문이다. 민중의 수중에 정권이 옮겨진 후에 민중의 이익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정부의 권한은 팽창하고 각종 간섭과 강제가 새로이 출현했다. 이는 밀의 공리주의적 개인 자유에 대한 역설이다.  201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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