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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김처선
이수광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허리를 90도로 꺾고 소맷자락 안으로 양 손을 모아 잡은 채로 서있는, 얇고 높은 목소리로 '주상 전하 납시오'라고 외치는, 내가 알고 있는 '내시'의 정체는 그것뿐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TV 사극에서 그들은 붙박이로 서있기만 하는 엑스트라였고, 코미디극에선 남자구실을 못하여 놀림감이 되는 단역이었으니, '내시'는 나의 관심권 안에 들어오지 않았고, 더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존재를 단 한 번도 의식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왕과 나, 김처선]를 받아들곤 이렇게 두툼한 책으로 나올만큼 이야기거리가 많은 건가,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그 유명했던 영화 '왕의 남자'도 보지 않았으니 도무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내시를 주인공으로 하여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을!
김처선은 조선 전기의 내시다. 예종 후기부터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하는 때까지 궁궐에, 임금 옆에 있었던 '왕의 남자'. 임금과 내시는 최고의 君과 최하의 臣이라는 극과 극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빛과 그림자처럼 늘 한 몸으로 붙어있었으니 비록 그 존재의 크기가 다르더라도 사사로운 마음을 나누는 오랜 친구와도 같았으리라. 때문에 임금 성종은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은 후에 윤씨를 살려달라며 읍소한 김처선의 엉뚱한 말을 새겨들었고, 연산군은 중국고사를 빗대어 그의 방탕함을 꾸짖는 김처선의 직언에 연회를 폐하였지 않았겠는가. 이처럼 내시 김처선의 告함이 곧장 임금의 귓속을 파고드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최고 권력자 발밑에 따라붙는 그림자의 소임이자 의미였을 것.
[왕과 나, 김처선]은 왕비 자리를 놓고 왕실 전체가 아귀다툼을 벌이는 장면들과, 권력의 그늘에 빌붙는 조정 대신과 내시들의 미천한 행보들과, 그 와중에도 신뢰하고 또는 불신하는 내시들간의 머리싸움이 밀도높게 그려졌다. 동시에 그 어느 것 하나도 밀리지 않을만큼 이것과 저것이 팽팽한 긴장 속에 잘 어우러져 있기에,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에 막힘이 없다. 계속되는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실마리, 새로운 반전, 그리고 그 중심에 흐트러짐없이 선 내시 김처선. 이것은 내시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역사의 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스케일이 큰 역사극과도 같다.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때 쯤에야 곧 드라마로 방송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
최근 역사소설이 부쩍 많아지는 것은 역사는 누구의 관점에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앞으로도 상당수 출간될 것이라고 분석한 한 작가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매우 공감하는 내용이었는데, 내가 이렇듯 김처선을 통해 조선 전기의 역사를 만날 줄이야?! [왕과 나, 김처선]은 실재인물인 내시 김처선의 발굴, 왕의 남자 내시에 대한 조명, 왕권을 둘러싼 암투, 역사소설로서 흥미로운 소재를 재미있게 잘 엮었다. 기존의 역사소설과는 맥락을 달리 하는 색다른 역사소설이다. 만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