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메일
이시자키 히로시 지음, 김수현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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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인메일 : 불특정 다수에게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송신하도록 지시하면 차례대로 연쇄적으로 전송하는 이메일. 허위 바이러스 정보나 ‘불행의 편지’ 형태의 테마 이메일이 대부분이다. (네이버 IT용어사전 인용) 

내가 학생일 때도 잊혀질 만하면 한 번씩 '불행의 편지'가 돌곤 했는데, 이젠 핸드폰을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가 보다. 핸드폰이 중고생 학생들에게도 널리 사용되고 있고, 장난이겠지만 왠지 뒤통수가 간지러운 '불행의 편지'같은 이메일에 쉽게 넘어갈 어린 학생들일 테니까.  

소설 [체인메일]은 불행의 편지와는 조금 성격이 다른 이메일이지만, 어쨌든 그 괜한 이메일의 꾀임에 넘어가 엉뚱한 사건에 휘말리고, 정말 어이없는 결말을 맺고 마는 여중학생 네 명의 이야기다. "허구의 세계에서 함께 놀지 않을래?"라는 유카리의 초대 메시지를 받은 사와코, 마유미, 마이는 '허구'를 자신들의 현재와 완벽하게 단절된 새로운 세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며 릴레이 소설을 써가기 시작한다. 스토커, 스토커에게 쫓기는 여학생, 여학생의 가정교사, 스토커를 쫓는 형사. 이 네 명의 역할을 나누어 가진 네 명의 주인공은 각자 그럴듯한 소설을 써가며, 자신들이 만들어 내는 스토리 전개에 정신없이 빠져든다. 그러던 중 허구와 실제가 묘하게 섞이는 불길한 예감 속에 당황하는 주인공들.

[체인메일] 초반부, 주인공들이 허구의 세계에 모이기까지의 이야기 전개가 흥미롭다. 그들의 현재에,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허구의 세계를 환영했고 빠져들었는지 쉽게 공감할 수 있고, 주인공들처럼 나조차 릴레이 소설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지도 궁금하다. 휙휙 빠른 전개가 휙휙 책장을 넘기듯 잠시도 한 눈 팔 새없게 만든다.  

그러나 초반의 흥미는 정말 잠시일 뿐. 사건이 구체화되고 결말로 치닫는 뒷부분에선 마치 당황한 듯, 허둥지둥 어떻게든 마무리하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이야기가 매끄럽게 흐르지 않고 뒤죽박죽 엉키는 느낌. 초반과는 확연하게 구별될만큼 주인공들의 행보에 개연성이 떨어진다. 물론 이런 식의 미스테리 소설 속 비정상적인 인물의 행동에 반드시 수긍과 이해가 동반되는 것은 아니지만, [체인메일]은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구차한 설명이 엽기를 엽기 그대로 남기지도 못하는 사족이 되었다. 특히 결말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누구로부터 비롯된 사건일지가 감지되기 때문에 미스테리로서의 매력도 급격히 저하. 

[체인메일]의 주인공들과 같은 연령대의 독자라면 자기 이야기처럼, 자기 생각처럼, 자기 친구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다르게 읽힐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로서는 오늘날 안쓰러운 어린 학생들의 모습을 그린 것에서 [체인메일]의 의미를 찾기에는 역부족. 최악으로 표현하자면 일본 소설의 홍수 속에 휩쓸려 세상에 나온 그저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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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Art & Play : 예술가가 되는 법
이상은 지음 / M&K(엠앤케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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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게도 직간접적으로 친구인 연예인이 몇 명 있다. 가장 친한 친구는 우리나라 굴지의 연예인 메니지먼트사의 주요 인사(!)인데, 그녀에게서 아주아주 가끔씩 듣는 유명 연예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고 있으면 그들은 뭐가 달라도 다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끼'나 '열정'은 선천적인 태생의 문제가 아닐까도 싶다. 

[Art & Play-예술가가 되는 법]에서 만난 이상은 역시 달라도 많이 다른 사람인 것 같다. 벌써 20년 역사 속의 '담다디 이상은'이 아닌 '아티스트 이상은'이 느껴진다.  

그녀가 노래 몇 곡을 히트시키면서 꽤나 인지도를 넓혔을 때 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소리를 들었고, 일본 유학시절 발표했던 '공무도하가'를 들으며 그녀가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을 가졌었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상은을 이 책에서 만난 지금 그녀를 진정한 아티스트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장르를 무엇으로 규정해야 할까. 에세이? 칼럼? 예술? 아니면 화보? 딱 이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장르를 넘나드는 이상은의 아방가르드적 UCC라고나 할까. 그렇기에 기존의 어느 책과도 다른 형식과 이야기로 꾸민 그녀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모두 9개의 장에 담긴 이야기를 축약하면 '예술을 놀이처럼 즐겨라. 이상은처럼 이렇게만 해도 예술이다.'이다. 옷과 가구, 액세서리, 조명 등 누구나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아이템들에 자신의 아이디어만 더하여 장식하면 훌륭한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  

실제로 이상은은 자기가 직접 만든 작품을 공개하면서 어디에서 어떻게 아이디어를 냈는지,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사면 되는지 등 자기만의 노하우와 관련정보를 아낌없이 오픈했다. 또 감수성을 키우는 그녀의 비법, 인생과 예술에 대한 그녀의 단상, 아끼는 소장품, 편지, 직접 쓴 동화(?)까지, 어찌보면 '나 이상은은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듯 상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의 생각의 깊이와 사색의 심도에 놀랄 수 밖에 없는, 예를 들면, 

"그래서 여러 가지 게임을 만들고 가치도 여러 가지를 실험해서 대안적인 문화를 만들고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말하자면 이런 대안적 사고를 만들어내는 것이 사회학이나 철학, 미술이 하는 일이 아닐런지요." (29쪽) 

와 같은 문장을 만날 때면 기대 이상의 만족감에 젖고 만다.   

그녀가 직접 집필한 글 또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 완전한 구어체의 문장이나 ^^ ㅋㅋ ㅠㅠ와 같은 기호도 자주 등장하지만 오히려 그녀와 나와의 자연스러운 대화처럼 느껴지고, 책의 구성 역시 기존의 틀을 깬-거장 아티스트와의 인터뷰를 실었다거나, 화보집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만큼 수많은 사진들로 페이지를 할애했다거나- 시도여서 그녀가 이 책을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또 얼마나 기꺼이 즐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독특하고 신기한(!) 책을 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상은을 아티스트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아트(ART)이고, 그녀는 진정 아티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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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07-06-30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은, 첫느낌부터 달랐잖아요... 일본으로 간 후에 나온 노래들이 참 가슴에 아리는 노래들이었던 것 같아요..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석유시장 쟁탈기 그랜드 펜윅 시리즈 4
레너드 위벌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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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유소에 갈 때마다 '또 올랐어?'라고만 했지, 기름값이 왜 올랐는지, 왜 올라야 하는지는 고민하지 않았던 소시민이다. 그저 중동 산유국의 가격담합과, 중간유통기업의 주머니 채우기 욕심에, 우리나라 정유업체의 알 수 없는 가격정책과 정부의 애매한 입장표명을 잠시 탓했을 뿐, 나로서는 석유를 둘러싼 세계정세나 정책까지 두루 섭렵하여 비판할 어떤 정보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인데. 때마침 만난 소설,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석유시장 쟁탈기]는 나와 같은 소시민의 몽매한 의식을 화들짝 깨울 만하다. 

그렇다고 난해하고 생소하여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세계정세를 논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재미있고 가볍다. 억지로 꾸며내지 않아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등장인물, 순순히 잘 나가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엉뚱하게 튀어버리는 상황전개, 말 한마디와 표현 한문장에도 반짝이는 유머와 풍자가 숨어있다. 물론 그 유머와 풍자는 세계정세와 주요 사건들을 이미 이해하고 있는 독자라면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올 테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책 중간중간에 주석을 달아놓은 것만 보아도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다.

유럽 한복판에 위치한 나라 '그랜드 펜윅'은 작은 땅덩이에, 농업을 주력산업으로 하고, 전화교환수를 통해야만 국제전화가 가능하며, 자동차는 국가를 통틀어 단 2대밖에 없는, 그 존재조차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약소국이다. 아마도 석유사용량에 있어서는 거의 세계 최저 수준일 이 나라에 매우 중대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편지 한 통이 잘못(!) 배달되고, 이 잘못된 우편배달사건으로 이 나라의 대표인 마운트조이 백작은 전세계가 석유공급 중단의 위기에 처했음을 알게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백작은 자신의 목욕물을 데우기 위해서도 반드시 석유를 확보하고 싶었지만, 전세계의 경제적 퇴보를 막기 위해, 전세계에 야기될 혼란과 빈곤과 기아를 막기 위해 이 절대절명의 위기탈출 작전을 수행하는데. 이름하여 전세계를 상대로하는 20억 배럴의 석유 사기극. 여차저차하여 사기극은 무사히(?)-사실 '무사히' 라는 표현은 어패가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말하는 것이 좋겠다.- 마무리되고, 백작의 뜻대로 세계의 석유시장은, 이 세상은 평온했다는 이야기.

자신의 안위는 물론 전세계의 안위를 꾀한다는 정의감과 사명감에 제 몸을 불사르는 백작조차 한 거대기업의 총수와 손을 잡아야 했던 것, 자국의 파워를 우위로 지키기 위해 중동 산유국과 은밀한 거래를 해야 했던 것, 그리고 문서상으로나 대외적인 발언에 있어서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갖은 우회적 표현을 사용하고, 그 표현을 해석하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것 등, 소설적인 재미를 추구하기 위한 장치라고만 보기에는 뒷맛이 씁쓸하다. 우리가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입장인 것 같아서라기 보다는, 세계의 정치와 경제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이 소설처럼 정의감과 사명감에 제 몸 하나를 불사르는 이가 있기나 할까.

소설은 소설이다. 약소국이 세계의 석유시장을 쟁탈한다는, 기분좋은 상상 속으로 쏙 빨려들어갈만큼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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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쉬 스토리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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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카 코타로님. 

님의 베스트소설집 [피쉬스토리]를 읽었습니다. 참 잘 쓰셨고,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네 편 합쳐서 300페이지쯤 되니 아주 얇은 책은 아닌데, 너무 금방 읽어버려서 아까웠을 정도랍니다.

저는 사실 이 책으로 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이미 유명한 작가이신 것도 이 책의 소개글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좀 신기하기도 합니다. 일본소설이 이렇게 와르르 쏟아져나온 것이 별로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일본 책 한 권이 나올 때마다 그 작가의 오랜 팬이라면서 그 작가의 다른 작품 뭐, 뭐, 뭐를 읽어보았다며 열광하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제가 소설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진 것도 아니니 제가 모르는 작가와 작품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만, 그동안 이렇게나 인기있는 작가와 작품이 왜 한결같이 '지금', '동시에' 붐을 이루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님도 알고 계신가요? 요즘 우리나라 서점가에는 일본 소설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가히 일류라 할 만합니다. 뭐, 일본 작가와 작품이라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지만, 아무래도 요즘과 같은 일류 속에서는 저와 잘 맞는 작가와 작품을 선택하기가 어려운 점은 있습니다.

이런, [피쉬스토리]를 얘기하려고 했는데, 엉뚱한 얘기가 길었습니다. 

저는 처음 두 작품 [동물원의 엔진]과 [새크리파이스]가 특히 좋았습니다. 

[동물원의 엔진]은.. 어쩜 그렇게 저를 완벽하게 속아넘기셨는지요. 추리소설 읽는 것처럼 은근히 긴장하고 있다가 끝엔 크게 웃었습니다. 우리식 표현으로 유쾌하게 등짝을 탁 치면서 '내가 졌다'하는, 딱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새크리파이스]는 독특했고, 제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 주인공이 자기도 모르게 그 마을의 비밀의 올가미에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도 제가 졌지요. 하지만 동물원같은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뭐랄까.. 주인공은 독자 대신 상황을 파악, 전달하고 마무리를 져주는 역할이어서 충분히 그 몇 배는 더 자극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스토리인 것을 일부러 밋밋하게 가져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그것이 님의 스타일입니까? 두 단편을 읽고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피쉬스토리]는 표지그림이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작품입니다. 짧은 세 편의 단편이 하나로 묶인 단편. 이 형태도 특이하지만, 그것들이 시간을 오가며 작은 관계성을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님의 아이디어가 참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포테이토칩]은 저와는 잘 맞지 않나봅니다. 등장인물이 몇 명 되지도 않는데, 누가 누구인지 자꾸 앞을 들춰보며 확인해야 했습니다. 낯선 일본 이름이 눈에 익지 않아서 그랬기도 했지만, 특히 초반부에선 잘 정리가 안 됩니다. 돌려 말하자면 흡입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내용은 차라리 주인공의 정체를 몰랐을 때가 더 재미있습니다. 누구인지가 밝혀지고 나니 김이 쭉 빠지면서 많이 본 듯한 흔한 이야기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네 편 중에 제일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책의 맨 뒤에 실린 님의 인터뷰를 보니, [포테이토칩]이 지금 님의 감각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마음에 든다고 하셨네요. 이런.. 저와는 비껴가는 인연일까요? 이 책에 실린 단편이 발표순서로 배열되어 있다고 하니, 저는 님의 초기 감각과 통하는가 봅니다. 그래도, 저와 통하느니 안통하느니와 상관없이 [피쉬스토리]로 님을 처음 만난 것 자체가 의미있는 만남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전혀 몰랐던 작가에게 매력을 느끼게 한 작품이라면 그럴 만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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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기 1 - 부여왕 대소를 제거하라
김상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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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서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말하는 '역사에 방점이 찍힌 역.사.소설'이 아니라 '소설'에 방점이 찍힌 역사 소.설.이 바로 '나만의 재미'의 다른 말이다." 내 무릎을 쳤다. 내가 서평에서 쓰고 싶은 핵심이다. 어쩜, 서문도 이렇게 근사하게 쓰는지! 

[대무왕신기]를 단숨에 읽었다. 그렇게 읽힌다. 정사는 꿰뚫지 못해도 역사소설을 좋아하고, 무협지는 읽지 않아도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덕일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역사소설이라는 이름이 주는 괜한 중압감에 읽기를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재미를 노리고 썼다는 작가의 호언장담이 있지 않은가! 

작가 김상현은 삼국사기에 실린 짧은 고구려 이야기를 단초로 스펙타클하고 파노라믹한 한 편의 역사를 [대무신왕기]로 재탄생시켰다. 주몽 신화, 머리가 두 개인 붉은 까마귀, 을두지의 잉어 계책 이야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와 자명고, 이런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작가의 손에서 꼼꼼히 짜맞춰져 거침없이 흐르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생동감 넘치는 장면들로 승화되었고,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당연히 그 곳에 그렇게 있었던 듯 분명하게 그려졌다. 

[대무신왕기]는 고구려의 3대왕, 광개토대왕조차 갖지 못했던 '대무신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무휼왕의 일대기를 중심축으로 한다. 하지만 무휼왕이 전장을 누비며 불멸의 화신으로 활약하는, 그래서 심심할 지도 모를 영웅일대기가 아니다.  

초반부터 "자결해도 되겠습니까?"라는 위트 넘치는 말대답을 또박또박 해대는 대환관이 등장하고, 개구장이 철없는 사내아이같은 어린 호동왕자가 전장에서 이름을 널친 악명높은 인물로 예상을 비껴간다. 뛰어난 지략가이자 충신인 을두지, 을두지와 숙명의 라이벌일 수 밖에 없는 좌보 송옥구의 대결구도가 즐길 만하고, 무휼왕의 첫째부인과, 왕의 동생인 재사와, 괴유와, 선량 등이 자기만의 스토리를 가지며 묘하게 뒤얽혀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책의 끝을 얼마 남기지 않고 급박한 반전으로 돌아서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가 세상에 익히 알려진 결말이 아니고, 왕권을 노리는 역모가 있을 듯 있을 듯 하더니 최종적으로 꾸며진 역모의 주인공이 뜻 밖의 인물들이다. 마지막까지 소설적인 재미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다만 이 역모의 주인공들은 앞선 전개에서 살짝 복선을 깔아주었던 인물이긴 하나, 그들이 그렇게 뭉치게 된 개연성에 대해서는 살짝 개운치 않은 면이 있는데, [대무신왕기] 전체의 완성도와 재미를 해칠 정도는 아니다. 

소설에 방점이 찍힌 역사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 김상현을 향해 승리의 브이자를 그려보이고 싶다. 재미있다. 작가는 [대무신왕기]를 그렇게 썼고, 나도 [대무신왕기]를 그렇게 읽었으니, 우리는 한 팀이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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