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 인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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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한번쯤은 투명인간이 되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를 맘껏 때리거나 선생님 책상의 시험지도 몰래 훔쳐볼 수 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들어가 갖고 싶은 게임과 옷을 챙길 수도 있고, 음식점에서는 돈 걱정 없이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성 친구의 샤워 장면을 몰래 숨어들 수도 있다. 특히 공부하라는 사람이 없으니,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투명인간>에서는 이런 소소한 재미에 반하는 엄청난 시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차나 물건, 사람들에게 쉽게 부딪쳐 다치거나 생명이 위험했다. 옷을 입자니 유령처럼 보일 테고, 벗고 있자니 추위와 싸워야 했다. 밥을 먹더라도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음식물이 그대로 보여 기괴한 모습이었다. 보이지가 않으니 남들 앞에 말을 걸 수도, 물건이나 음식을 살 수도 없었다. 문제는 이런 어려움을 이야기할 가족이나 친구도 사라졌다. 자유가 아니 외로움만 남은 것이다.


  <투명인간>은 <우주전쟁>, <타임머신>과 같이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고전을 쓴 하버트 조지 웰스의 작품으로, 1897년에 출판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이고 신선했다. 투명인간이 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위기상황부터 소설이 시작되는 것이나, 사건의 흐름에 맞춰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올라가 구성해 놓은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빛을 굴절시켜 사물을 투명하게 만든다는 근거도 나름대로 진지하게 나와 있고, 투명인간이 된 직후의 즐거움과 재미에 반해 수없이 다가오는 난관이 잘 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깨끗이 닦여진 유리창과의 거리를 가름하는 것처럼 투명인간의 행동과 움직임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최고 클라이맥스인 보이지 않는 대상과의 육박전의 생동감이 조금 반감된 느낌이다. 


  투명인간은 약간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봤을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인해 최고의 소재가 되었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로 리메이크되었고, 최근에는 마블과 DC에서 만들어내는 슈퍼히어로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투명인간이 자신의 특수성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켰으면 아이언맨이나 슈퍼맨을 뛰어넘는 ‘원조 슈퍼 히어로’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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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열린책들 세계문학 163
다니엘 디포 지음, 류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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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빈슨 크루소를 모티브로 한 책이나 드라마가 계속 유행 중이다. 사람의 발자취가 없는 원시림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목적지를 찾아가는 외국 프로그램이 국내에 알려지게 되면서, 오지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기술과 팁을 만화로 풀어쓴 만화 시리즈도 유행했고, 김병만이 주축이 되어 무인도와 같은 제한된 환경에서 생활해나가는 예능프로그램의 인기도 식을 줄 모른다. 마치 지구 문명이 멸망하고, 돈으로 해결되는 경제구조가 무너진 영화 속의 상황들이 곧 현실에 닥칠 것처럼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목적 없이 1등만을 위해 달려가는 우리의 삶이 너무 팍팍해서 그런가? 아니면 거품처럼 부풀어진 경제적 환상에 염증을 느껴서인지 모르겠지만, 돈벌이 기계가 되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갑자기 자연에서 자급하며 살아가는 법을 찾는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아무튼 이런 생존기를 볼 때마다 로빈슨 크루소가 대체 누구냐 하는 궁금증은 커져갔다. 그의 이름이야 여기저기서 많이 알고 있지만, 정작 그가 어느 책에서 등장했고, 그 책이 어떤 내용인지는 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지했다. 소인국과 대인국을 여행했던 걸리버와 혼동하기도 했고, 급기야 실존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라는 책이 <로빈슨 크루소>(1998)의 이야기를 리메이크한 소설이라는 소개글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 로빈슨의 모험 이야기를 언급하며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을 풍자한 최고의 소설이라는 평을 보고, 로빈슨의 삶도 정확히 알아보고, 어떤 게 내용이 바뀌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 두 권 모두 구입했었다.

 

   로빈슨 크루소는 평범하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부모님을 떠나 더 넓은 사회로 여행을 떠난다. 아니 갑갑한 현실에서 도망치듯 영국행 배에 오른다. 하지만 첫 항해에서 배가 난파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고, 두 번째 항해에서는 해적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지만 탈출에 성공해 브라질에 정착한다. 그는 농장을 꾸리며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했지만, 마음 깊은 곳의 방랑벽에 충동적으로 기니로 출발했고, 이 때 만난 폭풍으로 배가 난파되어 홀로 무인도에 버려졌다. 망망대해의 무인도에는 숲과 바다, 하늘뿐이었고, 낮과 밤이 전부였다. 하지만 해안에 밀려온 난파선에서 필요한 물건을 챙기면서 자급하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사실 그의 무인도 생존기를 보고 있으니 이런 무인도에 홀로 생활해보고 싶다는 생각부터 든다. 푸른 바다와 하얀 해변에서 하루 종일 뒹굴 거리면서 자유롭게 수영하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물론 몇 달, 몇 년을 이렇게 '여유롭게' 생활할 수는 없겠지만,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에서 벗어나 며칠만이라도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목적 없이 살아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무인도라는 공간적 낭만보다는 한국, 아니 가족과 직장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부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1719년 출판된 소설답지 않게 로빈슨의 심리상태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놀라웠다.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행동한다지만 늘 충동이 앞서고, 그에 따른 자부심과 후회, 갈등이 혼재한 모습이나, 하나의 결정 뒤에 숨어있는 복잡한 감정 변화가 다채로웠다. 한 사람의 일생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해 전 세계에 방영한다는 <투르먼 쇼>에서 짐 캐리가 보여준 것처럼 만족, 분노, 사랑, 질투, 각성 등의 감정변화를 실시간으로 드러난다. 로빈슨의 여행은 감정변화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면서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죽음 앞에선 자신을 책망하며 신을 찾다가도 그 고비를 넘기면 온갖 방법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오만함을 반복하는 모습은 이성적이라만 다중적고도 모순적인 우리들의 심리상황을 보는 것 같다. 하루에도 열 천 번도 더 변하는 사람의 마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이나 어른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변화가 없어 보인다.

 

   특히 신과 야만인에 대한 로빈슨의 태도 변화가 인상적이다. 평소에는 하느님의 존재나 의미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폭풍우로 인해 배가 좌초되어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는 그간의 행동을 반성하며 주님을 찾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평온함이 익숙해지자 이런 절대자에 대한 믿음도 약해졌다. 이런 롤러코스터 같은 그의 마음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을 신께 의지하는 오랜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주변의 위기상황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모습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의존적인 생명인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로빈슨이 표류하고 있는 섬에 찾아와 식인을 하는 야만인들 보고 처음에는 죽여 없애야 할 인류의 적으로 생각했지만, 자신이 어떤 권리로 그들을 판단하고 처단하는지 의문을 갖게 되면서 자신과 그들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게 된다.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지만 그렇다고 없어져야할 존재들이 아니라 다른 문화 속을 살아가는 독립된 존재들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로빈슨은 목숨만 남은 동물이 되었다가,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이 되기도, 생각하고 갈등하는 인간이 되기도, 넓은 아량으로 야만인을 용서하는 신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로빈슨의 모험은 육체적 생존을 위한 모험기가 아니라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거쳐 정신적 깨달음을 찾아가는 인간의 본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다니엘디포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이야기와 스피디한 전개, 그리고 섬세한 심리묘사까지 1719년에 출판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채롭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오감과 희로애락은 무인도에 갇힌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2001)의 확장판을 본 것 같았다.

   이 여세를 몰아 이 책의 리메이크 작인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를 펼친다. 원작과는 이야기가 어떻게 다르고,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다시금 로빈슨과 함께 긴 항해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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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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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있는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사실 출산과 육아의 주체가 아닌 남자들은 나 같은 특별한 경험이나 계기가 없는 한 모르는 게 당연하다.”(p170)

  ’는 82년생 김지영 씨의 정신과 치료를 맞고 있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ADHD가 의심되는 자녀는 둔 맞벌이 가장이다. 아내는 안과 전문의였지만 결국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했다. 하지만 곧 나아지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변함이 없었다. 육아는 힘들고, 수입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여성과 육아, 성역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변함이 없었다. 사회와 가정, 남성들 속에서 여성은 움츠려들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84년생 김지영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살아온 삶을 되짚으며 기록한 글은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겨운 일인지 담담하고 차분하게 이야기 한다.

우리의 지영 씨는 남존여비의 고착화된 성역할과 내조의 여왕식의 가족 역할을 통해 언제나 수동적이고 보조적인 존재였다. 개인의 소질이나 개성과는 상관없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희생을 강요당하고 보상조차 재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자는 응당 그래야 돼라는 사회적 편견 속에 오빠의 뒷바라지와 동생의 학비를 벌기위해 동부서주했지만 정작 자신이 원했던 것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여성은 가정에서부터 서브 자녀로 시작되었다.

어렵게 학업을 마쳤지만 취업의 벽은 높기만 했다. 벽 꼭대기에 앉은 남성은 실력보다는 성별을 먼저 고려했고, 설상가상으로 결혼과 출산의 족쇄마저 달려있었다. 어렵게 취업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차별과 성희롱을 이겨낸다고 하더라도 가정과 육아, 직장생활의 3중고를 이겨내는 슈퍼우먼이 되어야했다.

이렇게 그녀는 세상에 함몰되어 갔고, 지친 육체는 공허함과 허탈감을 더 이상 지탱하기 힘들었다. 84년생 김지영 씨는 꿈도, 희망도, 내일도 사라졌다...

  안타깝다. 그저 미안하고 부끄럽다. 뭐라 해줄 말도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위로의 말이라고 어설프게 꺼냈다가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붙는 격으로 서러움만 키울 것 같다. 서글서글하고, 당찬 모습이 아름다웠던 나의 지영 씨는 오늘도 자유롭지 못했다.

미안해, 지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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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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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거의 백만 년 만에 읽은 책이다. 이런 저런 핑계와 게으름으로 한번 멀어져버린 책은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마음 속 한구석에는 책을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있다가도 막상 시간이 나면 손은 언제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책이라는 아날로그 매체를 다시 접하기에는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디지털 매체들이 넘쳐났기에 책을 읽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최근 서울로 출장갈 일이 생겨 들고 간 책이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이다. 올 초에 읽다가 덮어둔 단편집이었는데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서 그 첫 페이지를 넘겼다. 다시 김영하를 만났다.

 

   <오직 두 사람>은 생로병사의 인생사처럼 오르내렸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그의 죽음을 계기로 되돌아보는 편지형식의 소설이다. 가족 중에서도 유난히 아버지를 많이 따르고 친했던 현주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고, 아버지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우연찮은 계기를 통해 아버지의 애정 속에 가려진 집착을 느끼게 되고 부담스러워한다.

   그리고 <아이를 찾습니다>11년 전 유괴 되어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갑자기 되돌아오면서 겪는 이야기다. 아들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려야 했던 윤석에게서는 아이를 찾았다는 사실이 믿기지도 않을 뿐더러 어디서부터 바로잡아 나가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11년 동안 아이를 찾기 위해 기다려온 날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리면서 더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두 단편은 모두 혈육이라는 관계 속에 안주하지 못하고 겉도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버지의 절대적인 존재감은 딸의 성장과 독립 앞에서 무력해지고 불안해졌다. 그리고 아들만 찾는다면 모든 행복했던 지난날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는 가족 내의 존중과 배려 속에 이를 지키고 리드하는 중심이 되었지만, 가족이 소형화되고 외부활동이 많아지고 사회조직이 복잡해짐에 따라 소외되고 주변으로 밀려나버린 존재가 되었다. 절대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신의 모습에서 금전출납기처럼 생활비를 토해내야 하는 외부 용역업체 직원처럼 말이다. 미약하게 남아있는 존재감이라도 붙잡아보려는 오늘날의 아버지들이 이런 모습이지 싶다. 변화가 필요하지만, 정작 그 변화에는 제일 늦게 반응하고 대처하는, 느려터진 무감성의 존재가 된... 아버지.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죽겠습니다.”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 이제 그거 아시잖아요?”

   “글세,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옥수수와 나>는 자신을 옥수수라 여겼던 한 남자의 콩트부터 시작한다. 이 옥수수와 대비되는 박작가는 한때 베스트셀러도 썼지만 지금은 별 볼일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작가 중에 한 명이다. 그는 출판사로부터 받은 계약금을 이미 다 써버렸지만 소설은 한 줄도 써내려가질 못했다. 그러던 그가 뉴욕에서 만난 자신이 계약된 출판사 사장의 처와 동거를 시작하면 엄청난 문학적 집중도를 보인다. 한창 자존감이 업 되어 자신을 대견해하고 있을 무렵, 권총을 들고 찾아온 출판사 사장의 게임 같은 협박에 허둥지둥 최근 상황을 설명한다. 문학가로서 최고의 희열을 맞본 그에게 갑자기 죽음이 직면해왔다.

   존재감의 무게에 방황하다 엉뚱하고 이상한 방향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는 <깊이에의 강요>(파트라크 쥐스킨트)<변신>(카프카)이 생각난다. 옥수수 같은 하찮은 존재였지만 막상 이를 벗어던지려는 찰나에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현실, 혹은 존재의 가벼움...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는 그대로인 것 같지만, 내 속의 생각과 주변의 조건에 따라 옥수수가 되기도 했다가 닭이 되기도 하는 모순되고 혼란스런 현실을 에로틱하고 유머러스하게 풀어 놓았다. 결국 옥수수로 살 것인가, 닭으로 살 것인가는 자신이 결정할 문제!

 

   이밖에도 <인생의 원점>, <슈터>, <최은지와 박인수>, <신의 장난>이 실려 있다. 재밌게 읽히는 글도 있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의 문학적 무지와 미흡한 독서에서 오는 이해력 부족이리라. 단편 자체가 열려있는 스토리인데다 특정 부분만 집중해서 부각하다보니 읽기가 불편할 수도 있지만, 달리 말하면 이런 모호함 때문에 더 빛을 발하는 것이 단편소설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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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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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부산 송도해수욕장을 자주 갔었다. 같은 부산이라지만 우리 집과는 정 반대 방향인 남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 대중교통을 타고가려면 2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하지만 당시 건설 붐을 타고 잘나가셨던 이모부님의 그라나다 자가용을 타고 자주 들렀던 기억이 난다.

  시내에서 한참을 들어가 언덕 하나를 넘으면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해안도로가 작은 해수욕장을 감싸고 있는 곳이었다. 그 길 곁으로 많은 횟집들이 성업 중이었고 그 앞 도로가에 아무렇게나 마련된 테이블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명개며 해삼을 먹었다.

  어떤 날에는 송도 앞바다에 위치한 거북섬으로 가기위해 나무로 엮어진 구름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발아래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바다가 투명했지만 흔들거리는 다리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그런 경치를 볼 여유는 없었다. 몸을 움직이며 다리를 더욱 출렁거리게 만드는 사촌 형들의 장난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그런 다리를 지나서 도착한 거북섬은 안락한 낙원처럼 포근했었다. 그곳에서 바다를 보며 회를 먹고 산책을 하고...   

  아 그리고 한가지 더! 송도에서는 조그만 횟배도 탔었다. 네다섯 명이 간신히 탈 수 있는 작은 배에 천막을 올리고 방석을 깔아 횟배로 개조한 놈인데 관광객들로 분비는 해변에서 벗어나 바다 한가운데에서 회를 먹는 느낌이 일품이었다. 출렁이는 송도 앞다에 배를 띄워놓고 혈청소를 바라보며 먹는 아나고(붕장어)의 고소함이 아직도 선하다.

 

  바로 그 곳, 송도해수욕장(부산)이 주무대가 되었기에 더없이 반가웠다. 80년대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물론 내 어린 시절이 <뜨거운 피>처럼 힘겹거나 폭력적인 삶은 아니었지만, 이것 또한 어떠하리! 시간에 윤색된 기억은 언제나 푸르고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을. 

  이렇듯 정겹게 남아있는 송도해수욕장이었지만 <뜨거운 피>에서는 그리 평온하게 그려놓지 않았다. 구암이라는고 소개된 이곳은 돈과 여자, 각종 이권을 찾아 모여든 건달로 넘쳐났다. 말이 좋아 건달이지 실은 조직폭력배, 전과자, 마약중독자, 사채업자, 도박꾼, 밀수꾼, 포주 등 사회의 어두운 면에 기생하는 깡패들이라 보면 되겠다. 그래서인지 폭력이나 욕설은 애교 수준으로 등장하고 살인은 물론 시체처리를 위한 분쇄기도 심심찮게 등장할 정도로 살벌했다. 

  무식함과 잔인함에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면이 오히려 나의 관심을 끌었다. 살인청부업을 그린 김언수 님의 전작, <설계자들>을 통해 그의 글 빨에 푹 빠져버린 것도 원인이었지만 폭력이 갖는 묘한 긴장감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멜로영화보다는 액션영화가 흥행에 더 유리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내 안에 숨겨진 강한남자 콤플렉스-남자는 울어도 안 되고 힘도 쌔야 한다는- 때문인가?  

 

  구암의 터줏대감이자 실세로 만리장 호텔을 운영하는 손영감과 그의 밑에서 조직을 관리하고 각종 사업을 총괄하는 호텔 지배인 희수의 이야기로 80년대 우리 시대를 관통했던 조직폭력배의 생성과 번영, 암투와 잇권 다툼, 그리고 몰락과 부활이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전개된다.

  손영감은 다른 조폭들처럼 세를 확장한다거나 밀수 등 큰 돈벌이에는 신경이 없고 구암을 관리하면서 받는 세금이나 중국산 고춧가루를 국내산과 섞어 파는 등 몸을 사리며 안전하게 조직을 운영한다. 그래서인지 외부세력과의 큰 마찰 없이 오랜 시간 구암을 지배했다.

  희수는 손영감의 오른팔로 구암의 질서를 잡거나 자잘한 싸움의 중재하는 등 바쁘게 살아가지만,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소모품 같은 자신의 삶에 불안을 느끼고 손영감 밑에서 나와 양동의 오락기 사업에 동참한다. 희수와 양동의 오락기 사업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급성장하지만 주류사업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양아들(아미)을 통해 자신과 구암을 둘러싼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평온하던 구암을 세력다툼의 중앙으로 내몰았고 푸른 바다는 핏빛으로 변해갔다.

 

  김언수 작가의 화려한 글 솜씨와 치밀한 전개로 지루할 틈 없이 읽었다. 기존의 조폭 소설이나 영화에서 흔히 봐온 의리와 배신이 뻔~하게 등장하지만 독특하고 미스터리한 손영감의 행보를 통해 이야기는 더욱 치밀해지고 인물은 더 따뜻해졌다. 손영감의 평범한 노파 모습 뒤에는 조직을 이끄는 보스의 잔인함이 숨겨져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과 자신과 구암을 위해 노력한 희수에 대한 애틋함이 녹아있었다. 

  그리고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낸 희수를 통해 우리의 삶과 급변했던 근현대사를 되돌아보게 했다. 우리는 7~80년대의 급격한 산업화를 통해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뤄냈지만 그 여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화려한 외적성장을 감당할 의식수준도 부족했다. 경제가 살아나면서 돈의 가치는 올라갔지만 가족의 응집력은 약해졌고 이탈도 심해졌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소외감은 커졌고 하나 둘 길거리로 내몰렸다. 사회는 국가발전이라는 명제 아래 전제주의적인 군사문화를 확대해 나갔고 개인의 희생은 당연시 되었다.  법과 양심 보다는 편법과 돈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으며 가진 자는 더 많은 배팅으로 이득을 챙겼을 뿐 이윤은 고르게 분배되지 못하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져갔다. 

  희수는 자신의 시대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돈과 조직, 의리와 배신 사이를 오가며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는 모습은 인간적이다 못해 안쓰럽게까지 보였다. 어쩌면 희수는 몸뚱아리 빼놓고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던 우리들의 옛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책 이면에 깔려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암울하게 살아왔던 세월이 더 갑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현실을 타파해줄 무언가를 찾게 되고, 그 돌파구로 액션을 가장한 '폭력'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시대 역시 폭력적이다. 정치는 어지럽고 교육은 근시안적이다. 산하는 더욱 오염되어 가고 예술마저 돈벌이의 수단이 된 지 오래다. 어딜 가든 한 밑천 잡아보려는 깡패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끝나지 않은 폭력의 시대를 종식시킬 진정한 히어로는 없는 것일까. 희수가 간직했던 소박한 꿈을 이뤄줄 지도자는 없는 것인가. 크고 작은 폭력 속에 살아가는 '희수'는 여전히 고달프다.

 

 

(www.freei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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