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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에 혼자 서다 - 34살 영국 여성, 59일의 남극 일기
펠리시티 애스턴 지음, 하윤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가장
큰 두려움은 혼자가 되는 것.[세상의 끝에 혼자 서다]
목이
뜨끔해오고 두통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까운 의원을 찾아갔더니 목이 부어 있으니 따뜻한 물을 계속 마시라 했고, 어깨가 뭉쳐 있으면 두통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마침 물리치료를 같이 할 수 있는 공간이 보이기에 물리치료를 하고 가마고 했다. 차갑고 미끌미끌한 젤이 발라진 동그란 패드를
양 어깨에 붙이고 편안하게 누웠다. 두드리고 눌러주고 주물러주는 것이 느껴졌다. 손가락으로 근육을 잡아 늘려주는 것 같은 기계의 움직임에 약간
놀라면서 기계가 움직일 때마다 밀물이 밀려드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통증의 근원이 어디일까를 찾기 위해 눈을 감고 집중했다. 곧 왼쪽 어깨
한 부분이 건드려질 때마다 찌릿해져 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거기...’ 30여 분이 지나고 기계의 운동이 멎을 때쯤이 되자 기계는
같은 세기로 운동을 하고 있었음에도 전같은 찌릿함이 느껴지지 않았고 어깨의 통증이 많이 완화되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삐-”
소리가 나면서 기계가 꺼지고 간호사가 와서 등 뒤의 패드를 뗐는데도, 계속 물리치료기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등의 근육들이
기계의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둥근 패드와 거기 연결된 전선을 그대로 달고 일어서서 끌고나온 건 아니겠지?’ 손으로 등 부분을
다시 더듬어 보았지만 둥근 패드는 붙어 있지 않았다.
그
정도로 생생한 물리치료 기계의 감각이 한동안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약을 타고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에도 내내 두드리고 주무르는 패드의 느낌이
지속되고 있었다.
놀라운
몸의 기억.
고작
30여 분의 체험인데도 몸이 이렇게 기억을 할진대...

34살
영국 여성 펠리시티는 59일간의 남극 스키 횡단을 감행했고, 세상의 끝에 혼자 선 우일한 여성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었다.
그녀의
경험이 적힌 이 책에서 나는 물리치료를 받고 나서 그 기억을 몸으로 받아들인 것보다 몇 백, 아니 몇 천 배 더 생생하게 그녀의 몸으로 체험한
일들을 그려볼 수 있었다.
여행을
갔다 온 기억은 보통 한 달 정도 지나면 사진을 보지 않고는 제대로 기억도 안 날 정도로 흐릿해진다. 그러나 펠리시티의 극지 횡단 일기는 언제
어떻게 기록을 남기고 그것을 회상하며 다시 되살려냈는지는 몰라도 계획부터 실행까지의 모든 과정과 그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모든 것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녀의
감각 세포 하나하나에서 느끼고 받아들인 체험이 감정의 결에 너무도 섬세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세계 최초로 여성 혼자의 몸으로 남극 대륙을 횡단했다는 이슈보다도 그녀의 기억 속에서 끌어올려 완성해 낸 이 한 권의 책이 내게는 더 큰
수수께끼로 여겨진다.
오직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
수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이 느낌을 표현한 구절은 끝없이 뽑아 쓸 수 있을 정도지만, 펠리시티의 체험에서 비롯된 글이 전하는 진실함에 비하면 그것들은
너무나도 상투적이라고나 할까.
물리학자와
기상학자로서 영국 남극조사단에 참여한 펠리시티는 처음으로 극지방을 체험했으며 그곳에서 기후와 오존을 측정하면서 3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전까지
한 번도 눈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이끌고 남극점까지 900킬로미터에 달하는 스키 원정을 완수하기도 했다. 펠리시티 애스턴이 다녀온 우명한
원정으로는 영국 여성들의 그린란드 최초 횡단, 시베리아 바이칼 호 700킬로미터 겨울 횡단, 뇌 장애를 지닌 젊은이들과 함께한 아이슬란드 원정
등이 있다. 그러나 이번 남극 횡단은 오직 혼자 이루어냈다는 점이 이전의 원정들과 다른 점이다.
순도
100%의 고독감.
정말로
혼자일 때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게 되며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스키를
타고 1700킬로미터를 가는 것과, 두 달 이상 혼자 지내야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염려 되는가?
첫 2주일 동안 나는 원정의 성공과 실패가 눈보라나 크레바스, 극한의 추위나 기술적 역량에 달려 있지 않을 거라고
깨달았다. 순전히, 그리고 오로지 매일 아침 텐트 밖으로 나설 힘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번 원정의 진정한 도전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육체적으로 그다지 힘들지도 않은 이 행위야말로 이제껏 직면했던 가장 힘든 과제의 하나였다. 이 점에서
볼 때 어쩌면 어느 날 아침 내가 실패할 거라는 건 필연적이었다. -121
그녀의
최대 과제는 혼자 살아남는 것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완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 그녀는 “텐트부터 찾아야지, 바보.”
혹은
“지금 뭐하는 거냐고!” 등등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지만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겁을 먹은 것이다. 그야말로 혼자라는 것 때문에 공포를 느끼고 신체가 이에 반응을 보인 것이다.
(...)
거품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면서 내 허파로 들어오는 공기를 금방이라도 막아버릴 것처럼 공황이 내 가슴을 덮쳐 눌렀다.
위장은 부식되는 것처럼 타들어가는 느낌이었고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았다. (...) 절대적인 고독의 느낌이 순간적으로 덮쳐와 나를 압도하고
완전히 짓눌렀다. -13
누구보다
강인해 보였고, 여러 번의 원정을 성공으로 이끈 경험을 했던 그녀도 혼자가 되는 일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남극에 홀로 남겨진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고립이었다. 다른 인간 존재는 물론 그 어떤 형태의 생명과도 만날 일이 없다는 것.
그녀가
혼자 가겠다고 했을 때 친구는 그녀에게 충고했다.
“그건 안 돼. 펠리시티. 혼자 가지 마. 혼자서 떠난 멋진 사람들을 여럿 보았는데 다시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했어.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매번 다름 사람이 되어 돌아왔지. 결코 좋은 쪽으로 달라진 건 아니었어.”-41
그러나
매일 눈물을 흘리고 지독한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용기가 꺾이는 일이 닥쳐도 그녀는 꿋꿋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원정을 떠나기 전 정신과의 팩 박사를
찾아가 조언을 얻은 대로 마음이 약해졌을 때 자신을 바로잡는 법을 떠올리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머릿속 싸움을 해나갔다. 그리고 그 중 최고로
그녀에게 도움이 된 자극제는 과거 회상을 통해 되살아난 화, 분노, 좌절감이었다고 한다. ^^
극지방의 화이트아웃(천지가 온통 백색이 되어 방향 감각이 없어진
상태)은 가장 완벽한 자연적 겐지스필드(전체야라고도 하며, 역치 이상의 자극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한결같아 형태의 지각이 성립되지 않는 시야)의 하나다. -110
환경에서
오는 고통, 딱딱한 것을 씹어야 하는 식생활에서의 괴로움, 한계에 맞부딪혔을 때 그것을 자각함으로써 얻게 되는 충격. 그럴 때마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려야 했고 아마 미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긴 했지만 친구의 충고에서처럼
좋은 쪽으로 달라지지 않은 사람 편에 서지는 않았다.
모험에
관해 일가견이 있는 펠리시티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섣불리 하고자 나서지 않는 일을 하려 했고 성공적으로 해냈다.
극한의
날씨를 이겨냈고, 무엇보다도 “고독”, 완벽한 “고독”을 체험했으며 그 고독을 잘 딛고 일어서서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극한의
추위와 고통, 절대고독을 상징하는 남극에서 홀로 살아남은 그녀의 책을 읽으며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
문학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언어가 말하는 진실한 체험에서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용감한
펠리시티의 여정을 읽고 나면 남극에서 인간 하나 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느끼게 되듯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 아무 것도 아님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