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 여인이 죽기 전에 죽도록 웃겨줄 생각이야
바티스트 보리유 지음, 이승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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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새 여인이 죽기 전에 죽도록 웃겨줄 생각이야]

 

음...현대판 [마지막 잎새]라고나 할까..

[마지막 잎새]와 다른 점은 실화소설이라는 점. (혹, 마지막 잎새도 실화인가요? 확실히 아시는 분, 제보 부탁~)

 

 

 

바티스트 보리유는 응급실 인턴으로 일하는 동안  응급실의 환자들과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들을 시종일관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칫 딱딱하게 흐를 수 있는 일상에 유머 한 줄기를 섞어 놓는다.

제목 그대로 불새 여인이 죽기 전에 죽도록 웃겨줄 생각으로, 자신의 일상 속에서 웃픈(웃기고 슬픈) 이야기들을 적어 놓은 노트를 펼쳐 그녀 앞에서 읽어준다.

 

저자는 2013년 1월, <자, 보세요>라는 블로그를 개설하고서 응급실 인턴으로서 겪고 또한 동료, 의료진, 환자들이 그에게 들려준 종합병원의 생생한 일상을 진솔하고 재치 넘치는 글솜씨로 기록, 이 블로그로 프랑스 최고의 의학박사 논문에 수여되는 알렉상드르 바르네 대상을 수상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단다.

 

나도, 2013년 1월 yes24블로그를 개설했는데, 2014년 이 시점에 그는 책을 냈고, 나는 그의 책을 리뷰한다. 웃픈 현실..

 

표지의 이상한 레게 머리를 한 사자 얼굴에서도 궁금증이 일었건만, 제목조차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한마디로 어서어서 읽어달란 말이야를 온몸으로 외치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소재 중의 하나인 "종합병원" 혹은 "닥터"류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실화소설이다.

의사 개인의 카리스마, 빼고~ 달달한 연애 분위기 혹은 삼각관계, 빼고~과도한 수술장면, 빼고~

완벽하게 흥행할수 있다는 메디컬 드라마의 필수요소 삼박자를 다 빼고도 담백한 가운데 잔잔하면서 가끔 쓰나미 급의 감동을 전해주는 이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호스피스 병동인 만큼 특히나 나이가 70대에서 90대에 이르는 노인들의 이야기도 많고, 그만큼 이야기에서도 젊은이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세월의 더께가 앉은 내공있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하게 포진해 있다 .

의사라는 직업이라서 혹은 병원이라는 장소라서 사람들이 가지는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진리에 가까운 방법이 바로 유머다.

그는 이 유머라는 요소를 잃지 않고 지니고 있으면서 성수처럼 여기저기 뿌려댄다.

그런 그에게 인턴 동료 블랑슈는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는 말은 아마도 동서고금의 진리인 듯. ^^

 

제목의 불새 여인이 궁금해지지 않는가?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불새 여인이라고 불리는 한 환자는 자신의 아들도 의사라며 죽기 전에 빨리 와야 하는데, 화산 때문에 비행기가 못 떠서 못 오는 거라고 그에게 얘기했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불새 여인에게 마지막  희망, 아들이 오고 있다는 희망을 불어 넣어주며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적은 노트를 펼쳐 읽어주는 것으로나마 위안이 되어주고 싶어하는 레게 사자머리 인턴의 마음씀씀이가 여간 비단결 같은 게 아니다.

초반에 등장한 이후로 수시로 나타나며 이야기의 큰 주리가 되어 주던 불새 여인.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날 즈음. 레게 사자머리 인턴이 깨닫게 되는 반전은 꽤 잔인하다.

 

병원이 있고...

들숨.

바람이 있고...

날숨.

내가 있고...

들숨.

누워 있던 환자가 미소 짓는다. 마지막 숨결.

길고 깊은 날숨.

죽음이 있다.

-327

 

응급실 드라마로는 이보다 현실감 있는 것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생과 사의 주름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일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한우리 북카페 서평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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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 그리움

림태주 (지은이) | 예담 | 2014년 5월

 

 

림태주 시인의 에세이. 림태주 시인은 바닷가 우체국에서 처음 그리움을 배웠고 인생학교에서 줄곧 그리움을 전공했다. 그리움은 태곳적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본능적이어서, 퇴화하지도 진화하지도 않는다. 다만 몸 안에 살아 있다 그 몸과 함께 진다.

제목이 아~ 막 나를 끌어당긴다.

이유 없이 슬퍼지려 하지만 한없이 공감되기도 한다.

이런 책은 꼭 읽어줘야 한다!!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10년, 그 시간을 쓰고 말하다

김연수 (지은이), 금정연 | 마음산책 | 2014년 5월

 

 

<청춘의 문장들> 10주년을 맞아 새롭게 선보이는 특별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에서 10년, 청춘, 우연과 재능과 간절함, 직업, 소설 등 10개의 열쇳말을 뽑고, 그 주제로 김연수 작가가 금정연 평론가와 나눈 유쾌하고도 깊이 있는 대담과 함께, 특유의 감수성으로 새로 쓴 산문 10편을 엮었다.

  김연수의 책을 이상하게 잘 안 읽게 되었다.

겨우 그의 소설 하나 읽었을 뿐인데...

시인이라고도 하고, 소설가이기도 하고, 에세이도 가끔 쓰는..

김연수를 알아가는 책으로 이 책을 골랐다.

그의 문장들은 어떠할까? 궁금해진다.  

 

 

 

책등에 베이다 - 당신과 내가 책을 꺼내드는 순간

이로 (지은이), 박진영 (사진) | 이봄 | 2014년 5월

 

 

서교동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이로의 에세이. 이 책은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책의 작가나 줄거리 소개는 물론이고 작품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심지어 각각의 책에서 엄청난 분량의 문장을 인용해놓았지만, 그 인용문들은 저자의 이야기 속에 스며들어버린다.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겠지.

작품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엄청난 분량의 문장 인용이 이야기 속에 스몄다는 데에서는 호기심을 느낀다.

어떤 내용일까.

제목이 나를 날카롭게 베고 지나간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팻 캐바나 (지은이), 최세희 (옮긴이) | 다산책방 | 2014년 5월

 

맨부커상 수상작가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가 자신과 아내에 관해 쓴 유일무이한 회고록이자 개인적인 내면을 열어 보인 에세이이다. 동시에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를 담은 소설이자 19세기 기구 개척자들의 모험담을 담은 짧은 역사서이기도 하다.

 

 

표지의 기구가 왠지 의미심장했는데..

소설과 에세이의 중간쯤인 이야기라고 누군가 얘기해서 참 궁금했다.

아내를 잃고 난 후 남아 있는 남편이 쓰는 이야기...가슴 아픈 러브스토리에 또 눈물 한 가득 흘리게 될까...

 

 

마술 라디오 - 오래 걸을 때 나누고 싶은 이야기

 

 

정혜윤 피디가 사람들 가슴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듣고 풀어낸 마술 라디오 이야기. 사람들이 살면서 들은 이야기들, 그런데 잊히지 않는 이야기들, 잘했건 아쉽건 자랑스럽든 후회되든 잊히지 않고 반복적으로 혹은 기습적으로 생각나는 자신 혹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이뤄져 있다.

 

 

라디오를 안 들은 지 꽤 오래 됐다. 눈을 감고 누워 듣는 라디오의 세상 얘기처럼...조근조근...누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한없이 들어보고 싶다. 마술처럼 빨려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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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동다東茶여, 깨달음의 환희歡喜라네 - 구름과 달과 더불어 만나는 고요한 찻자리, <동다송> 새로 읽다
원학 지음 / 김영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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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 잔 하실래요? [향기로운 동다여, 깨달음의 환희라네]

 

 

 

차나 한 잔 하실래요?

작업 거는 멘트가 아니다.

나이 탓인지, 날씨 탓인지, 근 한 달 간을 쿨럭 쿨럭 하며 지내왔던 터라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은 요즘이다.

그래서 쉽게 타 마실 수 있는 인스턴트 커피에 길들여져 있던 내가 뜨뜻~ 한 차를 찾기 시작했다.

아침에 아이들 데려다 주고 동네 어귀, 아니 아파트 어귀에서 만나게 되는 친근한 이웃들을 보면 저절로 이런 말이 나온다.

"차나 한 잔 하실래요?"^^

 

예전엔 커피 한 잔? 했을 테지만 내가 주로 음용하는 것이 커피에서 차로 바뀌고 나니 다른 이들에게도 자연스레 차를 권하게 되는 것이다.

 

목이 따갑고 아파서 잠을 잘 때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괴로워하다 다크서클이 눈 밑까지 내려온 내 꼴을 보다 못한 서방님께서 때마침 향긋한 허브차를 사다 주었다.

그 전에 먹던 뽕잎차가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녹차, 뽕잎차, 보이차, 허브차 등등..

종류도 참 많다.

그 때 그 때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마시고 있는데, 커피보다는 일단, 텁텁한 맛이 한결 덜하고 뒷맛도 깔끔하다.

요새 원두커피에 한참 푹 빠진 울 서방님은 갈아온 원두를 드립하여 뚝 뚝 떨어지는 그 소리와 향을 즐기는 것으로 하루의 피로를 푼다는데...

나는 그저 물대신 목을 축여주고 뜨뜻한 기운으로 몸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차가 좋다.

부부도 이러한데 하물며 기호식품의 대명사인 차에 있어서는 꼭 이것이 좋다, 가 통할 리가 없다.

 

그러나...

초의 선사의 <동다송>을 다시 한 번 음미하면서

다시금 차의 세계로 빠져들고 싶어지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차의 생장과 개화부터 차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차에 담긴 선의 정신까지. 1200년 우리 차의 혼을 담아 부른 절창 <동다송>을 초의선사가 지었고, 원학 스님이 엮고 설명을 보태어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초의 선사라 하니, 아주 오래 전, 한승원의 {초의}가 떠오른다.

마침 김영사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이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기획된 의도?^^

 

 

[초의]에서는 [동다송]을 이렇게 표현했다.

[동다송]을 한마디로 말한다면,중국의 좋은 차들의 신묘 영묘함을 말한 다음, 우리나라 차는 그보다 더 놓은 것임을 노래하고 상세한 주석을 단 명저이다. 라고...

 

차를 수행이며 자기성찰의 통로로 여긴 초의 의 차에 대한 모든 것이 [동다송] 안에 담겨 있다.

 

하늘이 점지한 아름다운 차나무여!

차나무의 탄생이 우연이 아니며 우주의 창조주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께서 점지하시어 귤나무의 덕성에 짝지어준 것임을 노래한 [동다송]의 첫 구절부터

심간을 깨우는 서늘한 바람이 차향기라네

대숲에 이는 바람과 솔바람이 파도소리처럼 들리는 자연 속에서 홀로 차 한잔을 음미하며 마무리하는 송의 끝부분까지...

 

구절구절 읽을 때마다 맑은 솔향, 대나무 향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더불어 속세의 것이 아닌 듯,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초의가 우려내 준 황송한 차 한 잔을 받아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차를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든 초의의 <동다송>을 읽고 초의의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하고 있을 거이다.

비릿한 배냇향 베어나게 잘 덖어진 차를 말리고 우리는 법까지.

하나 하나 배우고 싶어진다.

 

녹아차와 자순차여

구름 속 돌부리 뚫고 나와

오랑캐 신발 들소 목주름에

물결무늬 주름이어라

간밤 맑은 이슬

흠뻑 머금은 잎

삼매의 솜씨로 차를 달이니

기이한 차향이 피어오르네-187

 

자비로운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서 성장과정을 지켜보듯 차나무를 세심히 관찰해야만, 차나무의 잎이 발아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색으로 돌돌 말린 모양가 다시 이것이 변해 주름이 생기고, 다시 녹색으로 펼쳐지는 전 과정을 알 수 있다. 찻잎의 맛과 향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삼매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차의 맛과 향은 최상이 되고 차를 내주는 주인과 손님은 하나로 합일된다고 한다.

아~

열에 달뜬 아이가 헛소리로 "물! 물~" 하고 찾는 것처럼, 나도 삼매의 경지에 이른 이가 다려주는 차 한 잔을 황송하게 머금어 그 오묘한 맛을 보고 싶다.

 

추사, 다산, 소치 등과의 인연은 이미 소설 [초의]를 통해 알고 있었으나, 이 책에서 다시금 만나게 되니 그 이름이 또한 새롭다.

차와 맺은 소중한 인연.

나도 "차나 한 잔 하실래요?"를 통해 이어나가고 싶다.

아득히 먼~ 훗날의 일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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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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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속으로 스미듯 사라지다 [소소한 풍경]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

 

뜬금없이 길어올려진 말이, 잘 컷팅되어 햇빛을 골고루 반사하는 고급스럽고 투명한 글라스 속에서 독한 액체를 기다리고 있는 얼음처럼 딸그락, 굴려졌다.

여자 ㄱ 이 한 때 스승이었던 전직 대학교수에게 전화를 걸어와 대뜸 한 말이다.

어라? 제목은 [소소한 풍경]인데, 전혀 소소하지 않은 풍경으로 시작한다. 이 소설.

별안간 14층 높이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툭 떨어져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골수를 쏟아낸 사체라든가 등산로에서 약간 벗어난 길, 쉬어가려다 앉은 자리에 뭔가 이물감을 느껴 손으로 쓸다보니 잡힌 싸늘한 누군가의 팔이라든지 하는 것이 소소하지 않은 풍경의 대표적인 것일진대,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는 그들보다 좀 더 강력한 전율을 예고하는 전조가 아닌가 말이다.

분명, 추리 소설의 기운을 띄고 있는데 [소소한 풍경]이란다.

그럼, 어깨의 힘을 빼고 축 늘어뜨린 가운데 천천히 들숨 날숨을 번갈아가며 호흡해도 되는 것이렷다...

 

교수직에서 물러난 지 2년, 호숫가 외딴 집에서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던 “나”(최초의 화자)는 그 이야기 속으로 홀린 듯이 걸어 들어간다.

 

각자의 외로움을 못 견딘 셋이 모여 들었다. 어느 날 여자ㄱ 의 집에 찾아든 남자 ㄴ 은 우물을 파는 노동을 하면서 집 밖의 풍경을 사람 사는 곳처럼 만들었다. 그 사이 또 찾아든 여자ㄷ 은 집 안을 반짝반짝 닦아놓고서 집 안의 풍경을 또한 살 맛 나게 만들었다. 셋이 사니 진짜 좋다고 그렇게 말은 했어도, 한 덩어리로 될 때를 제외하고는 다시 제각각의 외로움에 휩싸이고 마는 그들의 삶은 현실 속의 소소한 풍경이어서는 안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휑하니 떠 있는 것이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환상 속의 그림인 것처럼 외면하고 지나가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이 되어버린 세계에 익숙해져 버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건 묻지도 않고 남자가 삽으로 파내고 있는 우물이 완성되면 헤어지기로 이미 입 밖에 내서 말한 것처럼 셋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ㄴ 이 시멘트 데스마스크인 채로 우물 안에서 발견되었다.

ㄷ 은 사라지고, 혼자 남은 ㄱ 은 경찰조사를 받았다.

그래도 이야기는 추리 소설의 전개를 답습하지 않았다.

 

교수가 썼다는 [소소한 풍경]의 주인공 여자 ㄱ 과 남자 ㄴ 그리고 또 다른 여자 ㄷ 의 이야기는 물을 닮았다. [소소한 풍경] 속에 나오는 우물도 아니고 샘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어떤 깊은 물보다도, 내가 매일 아침 아들과 산책하는 길에 만나게 되는 저 사진 속의 굽이진 풍경을 닮았다.

 

 

멀리서 보면 그저 굽이진 채 흘러가는 물이려니...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한밤중 개구리 떼들의 합창만큼 커다란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길, 매일같이 집 앞을 흐르는 대천천으로 난 산책길을 걷는다. 아이는 어느새 노란 애기똥풀이며 아침이면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난 나팔꽃들이 마구잡이로 자라난 잡초 사이에서 얼굴을 내민 풀섶을 엉덩이로 쓸고 내려가 물가에 닿았다. 물이 돌로 쌓인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곳에 일부러 지그재그로 길을 내어 놓은 곳이 있는데, 물은 그곳을 한 백 년쯤은 묵은 뱀처럼 굼실굼실 타고 내려온다. 바닥의 어둠을 흡수해서 까맣게 번들거리며 내려오는 것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발이 저절로 물 속을 향할 것만 같다. 주위의 잡음들을 다 삼켜버리고 졸졸졸 흐르던 물소리는 온 신경을 집중하자 폭포수의 쏴아 하는 소리만큼 커져버린다. 나는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도 물의 흐름에 동화되어 거기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물 곁에 있는 아이는 ‘지금은 어디를 발로 디딜까’ 신경을 거기에 집중하고 있더니 곧 물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두 팔을 가슴팍에 모으고 자리를 잡고 서서 흐르고 흐르는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아, 저러다 물 속으로 곧 발을 내딛을 것만 같아...’

깊지 않은 물인데도 아이가 곧 물에 빠지고 말 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물소리는 강렬했고, 한순간 쏴악~ 소름이 돋았다.

얼른 아이를 불러 올렸다.

아이는 아쉽다는 듯 발길을 돌리더니 풀섶을 되짚어 산책길로 올라왔다. 도깨비풀이며 얇은 잿빛 풀들이 바지에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이승으로 돌아왔는데 이깟 것 달라붙은 것 떼는 게 뭔 수고라고...’

그러다 흠칫한다.

이승으로 돌아왔다라...

물이 전하는 메시지는 매일 아침 달랐지만, 특히나 물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돌아온 아이를 보면서 느꼈던 그 순간의 감정은 분명 안도감이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라 자주 일컬어지는 물.

 [소소한 풍경]에서는 샘과 우물을 자주 얘기했지만, 내가 받아들이는 물의 움직임은 바로 저 사진 속, 저 물의 느낌이었다.

 

 

샘 속에 발을 내디디면 발이 스르르 스미듯 사라진다고 했었던가. 어느새 몸이 물에 잠기고, 입, 귀, 눈...드디어 머리의 정수리를 꼭 누르면 샘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가 되는 물의 표식임을 남겨두려는 듯 우물 가에서의 각자 다른 마지막 기억만을 남겨두고 그렇게 ㄱ 과 ㄴ 과 ㄷ 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디에서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날의 기억을 기점으로 해서 살아 남은 사람들은 퐁퐁 솟는 처럼 새로운 삶을 꿈꾸며 걸어나갔다.

 

나는 우물이라고 하고, 그는 한사코 샘이라고 한다.

'우물'에선 노년의 어둠이 먼저 떠오르고 '샘'에선 청춘의 빛이 먼저 떠오른다.-86

 

그렇게 샘 속으로 정수리를 꼭 눌러주면 금세 사라지고 이 세상에 있었다는 흔적마저 남기지 않았을 것만 같은 소소한 풍경 속의 세 사람은, 바로 나일 수도 있는 세 사람이었다. 1980년의 광주로부터 걸어나왔으나 그 끝은 희로애락이 완전히 거세된 데스마스크로 귀결된 ㄴ도 나일 수 있다. 세상과 맞서기 위해 무기가 이를테면, 문장의 창(槍 ) 같은 것이 필요해서 문장에 기대고 싶었던 ㄱ 도 나일 수 있다. 조선족으로 위장, 가짜 사씨 조선족 처녀로 살아가는 북녘 땅의 사연 많은 ㄷ 도 나일 수 있다. 그리하여 남과 여, 둘의 관계가 아닌 셋이 얽힌 관계여서 이상하다, 외설적이다, 차마 눈 뜨고 못 보겠는 비이성적인 관계다...에서 벗어나 관대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예컨대, 나와 그가 그녀를 사이에 두고 반씩 껴안고 잠들 때도 있는데, 그녀의 젊은 육체는 어느 곳을 만지든 울근불근한다. 퍼져나가는 힘찬 파동을 나-그는 나누어 만진다. (...)

법칙에 복속되지 않으려면 그 모든 양식의 제복을 벗는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모든 제복을 벗고 그 긴 겨울의 나날을 덩어리져 보낸다. 우리가 덩어리진 그 별에는 고유성을 억압하는 어떤 법칙과 형태도 없으며 그러므로 어떤 악이나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다. -116

 

 

플롯은 중시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었던 작가의 분신 “나”(최초의 화자)는 자유롭게 이야기를 써나갔다. 그리고 신경 쓰지 않은 가운데 저절로 질서를 찾아가는 완벽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쓰는 동안 내내 곰팡이 때문에 귓속이 가려웠다고 했나...

나는 읽는 동안 내내 물소리 때문에 편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책을 덮고 눈을 감았을 때에는 촤아아아 라든지 쏴아아악 이라든지 똥, 또동,, 또,,,옹 이라는 물의 움직임을 실은 소리들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너를 만나고서야 깨달았구나. 얘들이, 내 몸속의 가시라는 것. 소설이라는 게 , 사람들 몸뚱어리 속에 박인 가시들에 대한 세밀한 보고서와 진배없다는 것. -317

 

결국, ㄱ 이나 “나(최초의 화자)”는 문장 속에서 답을 발견하려 한다. 싹둑 썰어버린 과거의 단면을 들여다 보면서 문장을 지어 가려 한다. 부디 불가능한 사랑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려 애썼던 지난 시간으로 되돌아 가지 말고, 내가 매혹될 수 있게 머물려고도 달아나려고도 하지 않는 우아한 문장을 지었으면 좋겠다.

사랑의 불꽃이라는 말로 모든 사랑을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니, 치르르르 허공을 차고 날아올라가서 [소소한 풍경]안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에 눈물 한 방울, 또르르 흘릴 수 있는 아름다운 문장을 남겼으면 좋겠다.

나였을 수도 있는 살아남은 자들의 앞날이 어떠할지 알 수는 없으나, 이제는 무엇에 기대든, 쓸쓸하지 않은 날개를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우물처럼 한 곳에 붙박이지 않은 저 자유분방한 물의 흐름처럼 좀 더 신 나게 흘러갈 수 있을 것 같다.

멀리서는 유유히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가까이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문득 깨달을 만큼 훅 하고 빨려들어갈 수 있는 물이라 무섭긴 하지만, 퐁퐁 솟는 샘의 이미지처럼 살아 있는 물을 타고 넘실넘실 잘도 넘어갈 수 있으리라...상상해 본다.

소소한 풍경을 간직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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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두근거리는 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예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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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자 마음"은 두근. [여전히 두근거리는 중]

 

 

 

몸이 조금만 안 좋아지면 갱년기 증상인가를 의심해봐야 할 나이가 다가오는데도...

여전히 마음은 20대, 아니 10대처럼 팔딱거리는 게 여자 마음인가 보다.

아직은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없지만, 한 두개라도 보일라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나도 이제 늙어가는 건가...하고 잠깐 우울해 한다.

 

그럴 때, 마스다 미리의 책들은 참 힘이 되어준다.

책을 읽는 동안이라도 엄마와 아내의 역할에서 벗어나 "여자"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만화와 에세이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하던 마스다 미리의 만화와 에세이를 한 권씩 접해 보았었는데, [여전히 두근거리는 중]은 만화와 에세이가 혼합되어 있어 심심치 않게 읽을 수 있다.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으며 심심하다고 한다면...그건 아니, 아니, 아니되오~~

 

그저 가볍게 터치할 뿐이지만, 마스다 미리가 건드리고 지나간 곳은 그 밑에서 파동이 일어 마침내는 지진이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공감이 많이 되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 강한 안타를 날리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청춘, 이 아닌 중년.

중년들의 오갈데 없는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매어주는 위트와 공감을 자아내는 그녀의 그림과 글에는 솔직히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씌어진 것 같아 흉내내어 보고 싶지만, 그 내공이 사실은 보통이 아니라서, 따라하기도 힘들다.

 

[여전히 두근거리는 중]

이 책을 읽으면  때를 놓친 청춘의 여러 가지 반짝반짝한 추억들이 방울방울 샘솟는다.

마스다 미리의 푸념처럼 풋풋한 청춘의 그 때에 했어야만 했던 일들을 못하고 지나간 것이 후회로 남지만, 그 후회는 쓰디쓴 것이 아니라 달콤 쌉쌀하다.

그녀가 놓친 것들이 무엇이 있나...

 

 

패스트푸드점에서 데이트하기, 그의 교복을 빌려 입기, 하트 은목걸이 선물 받기, 방화 후의 고백, 커프룩 입기, 그의 타진 옷을 꿰매주기, 자전거 둘이서 함께 타기, 수제 초콜릿 선물하기, 졸업식 날 고백하기, 하굣길에 선 채로 계속 대화하기...

 

나도 마찬가지로 놓친 것들이지만 나는, 너무나 무뎌서 이젠 기억조차도 하지 못하는 것들을 마쓰다 미리는 세세하게 되살려 냈다.

여러 개의 목록 중에서 공주님처럼 안기기, 가사 실습 음식 챙겨주기,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기 등등 대부분의 것은 못해보았지만, 딱 하나...관람차에서의 첫 키스는 해보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물론, 꼭 첫 키스여야 한다면 이것도 양보해야겠지만...

 

확실히 공중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방이 트인 곳에서 키스하기는 짜릿했다.

그것이...어린 청춘의 시절을 지난 어른이 되었을 때의 키스여서 좀 재미가 반감되긴 했지만 말이다.

 

은근슬쩍. 이런 추억 하나 끼워넣고는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어...하고 되새겨보는 것이 지금의 재미이긴 하다.

꺼내어 곱씹어보고 살큼 웃음 베어물고픈 추억이 있긴 했던 것이...참, 다행이다.

 

 

 

 

나이가 들면 이렇게 된다...휴...

 

 

사십 대 오십 대 여성이 읽는 패션지를 보면 말도 안 되게 멋있는 것들이 실려 있다. 보석, 시계, 요정, 급이 다른 교토 등등. 멋진 어른의 세계다. -163

 

멋진 어른이 되려면 지금의 나이에 걸맞는 애티튜드를 갖추고 살아야 하겠지만, 가끔은 마스다 미리와 함께 두근거리는 여자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가끔은 "소녀"가 되고 싶다는 어린 마음이 불쑥 튀어나온다.

 

 

*한우리 북카페 서평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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