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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평점 :
샘
속으로 스미듯 사라지다 [소소한 풍경]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
뜬금없이
길어올려진 말이, 잘 컷팅되어 햇빛을 골고루 반사하는 고급스럽고 투명한 글라스 속에서 독한 액체를 기다리고 있는 얼음처럼 딸그락, 굴려졌다.
여자
ㄱ 이 한 때 스승이었던 전직 대학교수에게 전화를 걸어와 대뜸 한 말이다.
어라?
제목은 [소소한 풍경]인데, 전혀 소소하지 않은 풍경으로 시작한다. 이 소설.
별안간
14층 높이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툭 떨어져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골수를 쏟아낸 사체라든가 등산로에서 약간 벗어난 길, 쉬어가려다 앉은 자리에
뭔가 이물감을 느껴 손으로 쓸다보니 잡힌 싸늘한 누군가의 팔이라든지 하는 것이 소소하지 않은 풍경의 대표적인 것일진대,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는
그들보다 좀 더 강력한 전율을 예고하는 전조가 아닌가 말이다.
분명,
추리 소설의 기운을 띄고 있는데 [소소한 풍경]이란다.
그럼,
어깨의 힘을 빼고 축 늘어뜨린 가운데 천천히 들숨 날숨을 번갈아가며 호흡해도 되는 것이렷다...
교수직에서
물러난 지 2년, 호숫가 외딴 집에서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던 “나”(최초의 화자)는 그 이야기 속으로 홀린 듯이 걸어 들어간다.
각자의
외로움을 못 견딘 셋이 모여 들었다. 어느 날 여자ㄱ 의 집에 찾아든 남자 ㄴ 은 우물을 파는 노동을 하면서 집 밖의 풍경을 사람 사는 곳처럼
만들었다. 그 사이 또 찾아든 여자ㄷ 은 집 안을 반짝반짝 닦아놓고서 집 안의 풍경을 또한 살 맛 나게 만들었다. 셋이 사니 진짜 좋다고 그렇게
말은 했어도, 한 덩어리로 될 때를 제외하고는 다시 제각각의 외로움에 휩싸이고 마는 그들의 삶은 현실 속의 소소한 풍경이어서는 안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휑하니 떠 있는 것이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환상 속의 그림인 것처럼 외면하고 지나가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이 되어버린
세계에 익숙해져 버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건 묻지도 않고 남자가 삽으로 파내고 있는 우물이 완성되면 헤어지기로 이미 입 밖에 내서 말한 것처럼 셋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ㄴ
이 시멘트 데스마스크인 채로 우물 안에서 발견되었다.
ㄷ
은 사라지고, 혼자 남은 ㄱ 은 경찰조사를 받았다.
그래도
이야기는 추리 소설의 전개를 답습하지 않았다.
교수가
썼다는 [소소한 풍경]의 주인공 여자 ㄱ 과 남자 ㄴ 그리고 또 다른 여자 ㄷ 의 이야기는 물을 닮았다. [소소한 풍경] 속에 나오는 우물도
아니고 샘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어떤 깊은 물보다도, 내가 매일 아침 아들과 산책하는 길에 만나게 되는 저 사진 속의 굽이진 풍경을
닮았다.

멀리서
보면 그저 굽이진 채 흘러가는 물이려니...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한밤중 개구리 떼들의 합창만큼 커다란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길, 매일같이 집 앞을 흐르는 대천천으로 난 산책길을 걷는다. 아이는 어느새 노란 애기똥풀이며 아침이면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난 나팔꽃들이 마구잡이로 자라난 잡초 사이에서 얼굴을 내민 풀섶을 엉덩이로 쓸고 내려가 물가에 닿았다. 물이 돌로 쌓인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곳에 일부러 지그재그로 길을 내어 놓은 곳이 있는데, 물은 그곳을 한 백 년쯤은 묵은 뱀처럼 굼실굼실 타고 내려온다. 바닥의 어둠을 흡수해서
까맣게 번들거리며 내려오는 것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발이 저절로 물 속을 향할 것만 같다. 주위의 잡음들을 다 삼켜버리고 졸졸졸 흐르던
물소리는 온 신경을 집중하자 폭포수의 쏴아 하는 소리만큼 커져버린다. 나는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도 물의 흐름에 동화되어 거기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물 곁에 있는 아이는 ‘지금은 어디를 발로 디딜까’ 신경을 거기에 집중하고 있더니 곧 물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두
팔을 가슴팍에 모으고 자리를 잡고 서서 흐르고 흐르는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아, 저러다 물 속으로 곧 발을 내딛을 것만
같아...’
깊지
않은 물인데도 아이가 곧 물에 빠지고 말 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물소리는 강렬했고, 한순간 쏴악~ 소름이 돋았다.
얼른
아이를 불러 올렸다.
아이는
아쉽다는 듯 발길을 돌리더니 풀섶을 되짚어 산책길로 올라왔다. 도깨비풀이며 얇은 잿빛 풀들이 바지에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이승으로
돌아왔는데 이깟 것 달라붙은 것 떼는 게 뭔 수고라고...’
그러다
흠칫한다.
이승으로
돌아왔다라...
물이
전하는 메시지는 매일 아침 달랐지만, 특히나 물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돌아온 아이를 보면서 느꼈던 그 순간의 감정은 분명 안도감이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라 자주 일컬어지는 물.
[소소한 풍경]에서는 샘과 우물을 자주 얘기했지만, 내가 받아들이는 물의 움직임은 바로 저 사진 속, 저 물의
느낌이었다.
샘
속에 발을 내디디면 발이 스르르 스미듯 사라진다고 했었던가. 어느새 몸이 물에 잠기고, 입, 귀, 눈...드디어 머리의 정수리를 꼭 누르면 샘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가 되는 물의 표식임을 남겨두려는 듯 우물 가에서의 각자 다른 마지막 기억만을 남겨두고
그렇게 ㄱ 과 ㄴ 과 ㄷ 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디에서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날의 기억을 기점으로 해서 살아 남은 사람들은 퐁퐁
솟는 샘처럼 새로운 삶을 꿈꾸며 걸어나갔다.
나는 우물이라고 하고, 그는 한사코 샘이라고 한다.
'우물'에선 노년의 어둠이 먼저 떠오르고 '샘'에선 청춘의 빛이 먼저 떠오른다.-86
그렇게
샘 속으로 정수리를 꼭 눌러주면 금세 사라지고 이 세상에 있었다는 흔적마저 남기지 않았을 것만 같은 소소한 풍경 속의 세 사람은, 바로 나일
수도 있는 세 사람이었다. 1980년의 광주로부터 걸어나왔으나 그 끝은 희로애락이 완전히 거세된 데스마스크로 귀결된 ㄴ도 나일 수 있다. 세상과
맞서기 위해 무기가 이를테면, 문장의 창(槍 ) 같은 것이 필요해서 문장에 기대고 싶었던 ㄱ 도 나일 수 있다. 조선족으로 위장, 가짜 사씨
조선족 처녀로 살아가는 북녘 땅의 사연 많은 ㄷ 도 나일 수 있다. 그리하여 남과 여, 둘의 관계가 아닌 셋이 얽힌 관계여서 이상하다,
외설적이다, 차마 눈 뜨고 못 보겠는 비이성적인 관계다...에서 벗어나 관대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예컨대, 나와 그가 그녀를 사이에 두고 반씩 껴안고 잠들 때도 있는데, 그녀의 젊은 육체는 어느 곳을 만지든
울근불근한다. 퍼져나가는 힘찬 파동을 나-그는 나누어 만진다. (...)
법칙에 복속되지 않으려면 그 모든 양식의 제복을 벗는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모든 제복을 벗고 그 긴 겨울의 나날을
덩어리져 보낸다. 우리가 덩어리진 그 별에는 고유성을 억압하는 어떤 법칙과 형태도 없으며 그러므로 어떤 악이나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다.
-116
플롯은
중시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었던 작가의 분신 “나”(최초의 화자)는 자유롭게 이야기를 써나갔다. 그리고 신경 쓰지 않은 가운데 저절로 질서를
찾아가는 완벽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쓰는
동안 내내 곰팡이 때문에 귓속이 가려웠다고 했나...
나는
읽는 동안 내내 물소리 때문에 편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책을
덮고 눈을 감았을 때에는 촤아아아 라든지 쏴아아악 이라든지 똥, 또동,, 또,,,옹 이라는 물의 움직임을 실은 소리들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너를 만나고서야 깨달았구나. 얘들이, 내 몸속의 가시라는 것. 소설이라는 게 , 사람들 몸뚱어리 속에 박인 가시들에
대한 세밀한 보고서와 진배없다는 것. -317
결국,
ㄱ 이나 “나(최초의 화자)”는 문장 속에서 답을 발견하려 한다. 싹둑 썰어버린 과거의 단면을 들여다 보면서 문장을 지어 가려 한다. 부디
불가능한 사랑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려 애썼던 지난 시간으로 되돌아 가지 말고, 내가 매혹될 수 있게 머물려고도 달아나려고도 하지 않는 우아한
문장을 지었으면 좋겠다.
사랑의
불꽃이라는 말로 모든 사랑을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니, 치르르르 허공을 차고 날아올라가서 [소소한 풍경]안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에
눈물 한 방울, 또르르 흘릴 수 있는 아름다운 문장을 남겼으면 좋겠다.
나였을
수도 있는 살아남은 자들의 앞날이 어떠할지 알 수는 없으나, 이제는 무엇에 기대든, 쓸쓸하지 않은 날개를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우물처럼 한 곳에 붙박이지 않은 저 자유분방한 물의 흐름처럼 좀 더 신 나게 흘러갈 수 있을 것 같다.
멀리서는
유유히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가까이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문득 깨달을 만큼 훅 하고 빨려들어갈 수 있는 물이라 무섭긴 하지만, 퐁퐁 솟는
샘의 이미지처럼 살아 있는 물을 타고 넘실넘실 잘도 넘어갈 수 있으리라...상상해 본다.
소소한
풍경을 간직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