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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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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하나에도 숙연해지며...[라면을 끓이며]

 

 

라면은 구공탄에 끓여야 제 맛!

후루룩 쩝쩝, 후루룩 쩝쩝, 맛좋은 라면~

 

둘리에서 라면 면발처럼 머리를 꼬불꼬불 지진 마이콜이 기타를 잡고 우스꽝스럽게 불렀던 노래지만 어느샌가 라면하면 떠오르는 ' 라면 주제가' 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쌀보다 싼 밀가루로 '주식'을 만들어 먹던 시절, 일본에서 바다 건너 전달된 라면은 온국민의 환호를 받게 되었다.

오죽하면 누군가는 영혼의 음식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기름 둥둥 뜬 그 모양새마저도 찬양하게 되었을까.

라면을 먹을 때, 나는 파 송송, 계란 탁, 정도의 짧고도 간단한 레시피를 활용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물을  적게 잡고  스프를 아주 탈탈 털어넣어서 짜고 맵게 먹는 걸 즐기기도 한다.

라면 한 봉지는 대체로 가라앉아 있는 내 기분을 업시켜주는 존재가 되었으며 라면은 어느새 일주일에 한 끼 이상은 꼭 챙겨먹게 되는 나의 '절친'이 되었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면 집에 라면이 남아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없으면 꼭 채워넣어야 할 목록 일순위에 올려 놓는 걸 보면, 알게모르게 라면은 내 삶의 일부분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라면에 대한 단상은 말 그대로 여기서 그치게 마련인데, 이 '라면' 하나를 두고도 괜히 숙연해지게시리, 김훈은 꼿꼿하게 정좌하고 앉아서야 책장을 넘기기를 허락하는 날카로움을 곳곳에 숨겨놓았다.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인다. 그 안쓰러운 것들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 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 세상은 짜장면처럼 어둡고 퀴퀴하거나, 라면처럼 부박하리라는 체념의 편안함이 마음의 깊은 곳을 쓰다듬는다. -17

 

라면에 대한 이야기  뿐이랴, 오랜 세월에 걸쳐 적은 산문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김훈 산문의 삼엄함을 짜르르 떨치고 있다.

하나의 사물을 보더라도 사물들이 숨기고 있었던 역사와 비밀들을 끈질기게 뽑아내고서야 그 자리를 뜨는 것인가.

 

 

죽변항의 낡은 어선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수천 년 전 이 항구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신석기 사내들과 그들의 고기잡이 도구를 생각했다. 그들의 돌도끼와 돌칼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박물관에서 본 신석기의 돌도끼는 그 손잡이 부분이 인간의 손바닥에 닳아서 반질반질했다. 그 돌도끼를 쥐고 사냥을 해서 처자식을 빌어먹이던 사내들의 고난과 희망, 사냥에 실패해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저녁의 슬픔, 비 오는 날 그 신석기 사내들의 몸의 비린내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

몸을 먹여살리기 위해 몸을 고단하게 하는 것이다. 삶을 지속하려는 자만이 연장을 만든다. -54

 

숨막히는 경외감에 가슴 한 쪽을 꼭 누르며 글 하나하나를 씹고 또 씹어넘긴다.

그래도 쉬이 소화되지 않고 씹는 행위 또한 느리기만 하다.

김훈의 글을 하루만에 다 읽기란 요원한 일이다.

그가 느리게 글을 써내려 간 만큼이나 읽는 이도 길고 긴 시간을 들여 꼼꼼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왜 이렇게 힘겹게 읽어야 하나, 하고 나를 몰아세워보지만

그래도, 먼 길을 돌아서라도 김훈의 글은 다시 또 읽게 되는...

중독성이 있다.

 

글을 쓰는 그의 자세에서 진지함을 배우고

자신을 강하게 채찍질하는 태도에서 나태한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어찌해도 그의 글 한쪽 끝에 물이 들어버리면 나도 모르게 흐트러진 매무새를 고치게 된다.

라면 하나에 괜시리 숙연해진다고 투정 부려보고 싶지만

이런 시간도 필요하다고, 또 다른 내가 이미 답을 내려 놓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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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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휑한 바람의 맛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인 밥장은 축제는 늘 길 위에서 펼쳐지므로 떠난다고 했다.

어딘가로 떠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길 위에서 펼쳐지는 축제를 만나기 위해 떠난다는 그 이유가 참 멋있어 보였다.

여행을 다녀온 뒤 그 경험을 기록한 작가들의 에세이를 가끔 보면 신기하게도 그들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떠나는 이유에서부터, 길 위에서 느끼는 독특한 느낌이 그들만의 체화된 언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누구는 활력을 얻기 위해서, 누구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누구는 지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에서 배수아는 이것이 여행기가 아니라고 못박듯 말하고 있다.

여행기라고 불리기에는 어떤 요소가 너무 부족하거나 혹은 너무 넘치게 될 것이라고.

무엇보다도 이것은 여행과 함께 시작하거나 끝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행을 떠났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였으며, 특별히 흥미진진하거나 남다른 사건이나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아주 낮은 어조로 목소리를 낮춰서 말하는 문장들은 길게도 이어진다.

어디서 쉬어 읽어야 할지 몰라 허둥대다가, 에라 모르겠다,  뱀의 머리부터 꼬리까지지 한 번 훑어본다 생각하고 바라보니 문장이 보였다.

흔히들 말하는 만연체의 문장이어서 읽는 내내 호흡이 가빴지만 요가수련자처럼 일단 그 호흡에 몸을 맡기자 정신이 한 곳으로 모아졌다.

그리고 알타이 유목민의 흔적을 따라 가며 세세하게 그 곳 풍경을 묘사하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을 소개하는 문장을 읽으면서 황량한 그 곳의 바람이 느껴졌다.

 

꽤 긴 한 문장을 함께 읽어보겠는가.

 

그것은 스스로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여행이었으며 불확실성을 가득찬 출발이었고 나는 보이지 않는 칼과 쇳덩이,  맹수와 질병에 의해 쫓기는 사람처럼 떠났는데, 그곳에서 칼과 쇳덩이, 맹수와 질병을 보았고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바람, 그곳에 있음으로써만 가능했던 어떤 간절한 바람을 갖게 되었고 우연히 유르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는데, 놀랍게도 검은 몸체의 테두리가 코로나처럼 희게 반짝이는 이른 아침의 야크떼를 보면서 그 바람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마음이 순간 알타이의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졌고 나는 두 손을 가슴으로 모았으며 그러다 시간이 흐르자 그 충족의 사로잡힘은 알타이 환각의 연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것을 깨달은 이후에도 내 일부는 여전히 허공에 남아 있는 듯했으며 그리하여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13

 

무슨 선문답도 아니면서 혼자 중얼중얼하는 스님의 독경소리와도 비슷한 울림으로 읽어야만 어울릴 듯한 문장이 아닌가.

작가는 문장으로 알타이의 풍경을, 그 바람 속이 가르침을 전해주려는 듯하다.

 

예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작품 하나를 보았는데, 몽골인이 거친 황야에서 부르곤 하는 구슬픈 구음, '흐미'에 관한 내용이었다.

주인공은 몽골식 전통복장을 하고 투박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모자를 쓴 채 손에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그저 목소리로만 소리를 내었다.

그가 있는 곳은 현대식 건물의 내부였고 그나마 안은 어두침침했는데, 그가 '흐미'를 목에서부터 뽑아내는 순간부터 주위의 배경은, 내가 그토록 거대한 영화관의 스크린으로 그 한 사람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는데도, 드넓은 몽골의 초원으로 바뀌었다.

너무도 넓고 거칠 것이 없어서 하늘을 바라보면 멀리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비구름이 보일 정도인 대평원에 나직하고도 힘있게, 때로는 낭랑하게 울려퍼지는 '흐미'는 대자연과 노래하는 자, 오직 둘만의 교감인 듯 느껴져서 잠시 아득해졌던 것이 기억난다.

예전에 읽었던 김동인의 <배따라기>였던가. 형수와 쥐잡이 때문에 온 방안을 돌아다니다 옷이 흘러내린 줄도 몰랐는데, 그 때 문을 벌컥 열었던 형이 그 상황을 오해하자 동생은 집을 나간다. 그길로 뱃사공이 되어 청승맞게 '배따라기'를 불렀다던가. 동생은 대동강을 오가며 고향에 가지 못하는 '한을 실어 배따라기를 불렀겠지. 오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옛이야기를 배따라기에 실어 들려줬겠지.

배따라기 한 곡조 속에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한 정서를 담아 부르는 그이의 심정과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정한을 담아 '흐미'를 꽉 다문 입새로 흘려보내는 사람의 마음은 서로 통하는 것이 있을까.

 

혹독한 바람이 부는 유르테에 머무는 동안 야크똥을 주워 태우며 온기를 더하면서 작가는 유목민의 심정이 되어 본다.

유목민 소년이었던 갈잔 치낙이 쓴 자전적 소설 [귀향]을 읽고 무작정 그를 만나러 독일의 낭독회 일정을 찾았고 그것은 알타이-투바 여행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의 연속인 재미있고 흥미로운 여행기를 생각한다면, 이 책은 아니올시다, 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봐도봐도 똑같이 솟아오른 산맥들과 드넓은 스탭평원을 보고도 색다른 표현을 해내는 작가의 문장구사능력은 가히 엄지를 척 치켜들 만 하다.

그보다는 내면으로, 좀 더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들면서 생의 비밀을 한 켜 한 켜 벗겨내려는 듯한, 작가 배수아의 치열한 하루하루 견뎌냄의 과정이 더욱 볼 만하다.

 

선명하고 투명한 대기와 푸른 하늘, 여전히 비현실적인 눈덮인 산, 공중을 빙글빙글 선회하는 한 마리 독수리를 응시하면서, 내가 누구이며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멀리 허공으로 달아나고 있는 나의 낡고 허물어진 에고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것은 세계의 전환이다, 하는 말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이상 독수리를 지켜보는 내가 아니었고, 독수리가 지켜보는 나일 뿐이었다. -221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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