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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자, 들어가 봅시다. 폴 오스터의 과거 속으로 [내면 보고서]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가 보고 있는 '당신'이 떠오를까.

표지 속 내면을 꿰뚫는 예리한 눈빛은 '나'를 보는 것일까, 책을 읽는 '당신'을 쏘아보는 것일까.

 폴 오스터의 [내면 보고서]는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의 자화상을 담은 회고록치고는 독특한 화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인이 된 지금, 어린 시절부터 기억하는 대로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 어려운 일을 폴 오스터는 (얼핏 보기에) 쉽게 해내고 있다.

 

 

자신을 '당신'이라 일컫는 독특한 설정 때문에 처음에는 회고록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부르는 말 같아서 몇 번을 움찔거렸는지 모른다.

내 기억이 아닌데도 내 기억인 것마냥 '당신'을 불러대는 통에.

 

처음에는 모든 것이 살아 있었다. 가장 작은 물체조차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지녔고 구름들조차 이름이 있었다. 가위는 걸을 수 있었고 전화기와 찻주전자는 사촌 간이었으며 눈과 안경은 형제지간이었다.(...)

사람 얼굴 모양을 한 달 표면의 반점을 보며 진짜 사람이라고 아무런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었다. 밤하늘에서 당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은 당연히 사람의 얼굴이었다.

 

환상 소설의 첫 시작인 것마냥 알 수 없는 풍경으로 시작되는 [내면 보고서].

총 4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앞의 3장에 해당하는 장면들 중 일부는 4장의 '앨범'에 소개된 사진과 함께 하면 그 시절의 기억에 자연스럽게 덧씌워진다.

유년기, 소년기를 거쳐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그의 성장과 맞물려 자신의 내면이 자라나는 과정이 그려진다.

어린 "당신"은 TV만화 흑백 인물 '필릭스'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굳게 믿었으며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을 사랑하여 지금까지도 피터 래빗이 그려진 머그잔을 소중히 여긴다. (잔이 손에서 미끄러져 깨지는 날이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 정도로) 어려서 몸이 약해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 어머니와 병원 진료실에 앉아 있었던 시간이 더 많았던 "당신"은 운동을 할 만큼 튼튼해지자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열정적으로 운동, 특히 야구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당신은 결국 남은 평생 그런 일을 하게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 한 채 계속 책을 읽고 짧은 이야기와 시를 썼다.-102

 

"당신"은 아홉 살에 포를 읽었고, 이듬해 스티븐슨에게 직접적으로 영감을 얻어 첫 번째 시를 썼다고 했다. 버질과 단테의 번역자로 널리 알려진 이모부가 맡긴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세계에 빠졌던 "당신". 자신의 단골 이발사가 에디슨의 머리를 손질했었던 이발사라는 사실에 흥분했지만 에디슨은 정작 자신의 아버지가 유대인인 것을 알고 해고해버렸던 과거의 기억까지도  떠올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소설은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 폴 오스터는 "글은 왜 쓰는가?"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

'묻혀 있는 비밀들', 즉 '우리 스스로는 가닿을 수 없는 부분들'에서 받는 '압력의 일부'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글을 쓴다고 말이다.

 

당신은 소년 시절, 사춘기 때, 청년기의 흔적 등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전처였던 리디아에게 보냈던 1백여 통의 편지가 타임캡슐이 되어주었다. 과거를 향해 직접 열린 유일한 문을 연 당신은 치열하게 글을 썼던 청춘 시절의 추억까지를 되살려내서 섬세하게 정련된 언어로 기록하고 있다.

[내면 보고서] 속 회고록은 스스로를 "당신"이라 부르며 어떨 때는 한없이 가까이 다가가고 어떨 때는 냉정하게 떨어져서 바라보며 자신의 내면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이다. 다작 작가인 만큼 자전적 에세이 여러 편, 다수의 소설, 영화 대본들을 냈고, 그 안에서 폴 오스터의 모습을 어쩔 수 없이 엿볼 수밖에 없었다. [내면 보고서]는 오롯이 자신의 모습만을 써내려간 책이기에 집중해서 읽으면서 그가 지금의 작가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확실히 그려볼 수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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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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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엉뚱하게 거침없이 사는 지혜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

무엇이든 열심해 해야 한다는 것이 기존의 통념이고 뿌리깊은 가치관일진대

그것을 과감하게 깨부수는 제목이어서다.

어디 감히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을 떳떳이 입밖에 낼까...

소심하고 마음 약한 나로서는 질러보지 못한 이 한 마디가 책 제목에 떡하니 적혀 있으니

왠지 눈길이 저절로 가고

'이거 괜찮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어느샌가 손으로 책장을 넘겨보게 된다.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고양이를 두 마리나 곁에 두고 있는 푸근한 인상의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허를 찌르는 표현들이 수두룩하다.

과연, [백만 번 산 고양이]의 작가답다고 생각한다.

아이들 동화는 대개 감수성을 건드리는 아름답고 유한 분위기의 그림이 많이 실려 있는데

[백만 번 산 고양이]는 그런 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눈이 쭉 째진 고양이가 멋진 줄무늬를 입고 있었다. 그 고양이는 사람과 함께 살았지만 여러 번 죽음을 거듭했다. 어린이 동화책에서 '죽음'을 그렇게 대책없이, 툭 던지듯이 다루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생각외로 아이들은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듯 했다. 을씨년스러운 죽음이 이어지고 삭막하달 정도로 정 없이 세상을 대하던 고양이는 드디어! 인연을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정한 사랑을 느끼면서 백만번째의 죽음을 맞이한다. 마지막은 앞의 내용에 비추어 완전한 반전이라 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고, 그래서 그 여운이 오래 남았다. 교훈조의 따스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아이들의 동화에 혜성같이 나타난 비극 속의 카타르시스라고나 할까.

그래, 사노 요코는 반전의 여왕이라 할 만하다.

그녀의 일상을 적은 에세이는 처음이지만 백만 번 산 고양이의 주인공처럼 어딘가 거침없고 무덤덤하면서 솔직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쩌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것저것 잴 것이 없어졌기 때문일까.

자식을 둔 늘그막의 부모가 자식의 효도를 뻔뻔하게 바라는 것조차 너무나 솔직해서 그만 웃음이 나고 만다.

 

오로지 일상이란 것으로부터 울고 싶을 정도로 마구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적절하게 바로 병에 걸린다. 병을 좋아하는 거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때 나는 단 하나뿐인 저금통장을 가지고 입원한다. 세상으로부터 차가운 눈총을 받지 않아서 좋고, 비실비실 병원으로 외출하니 '돈'얘기밖에 입에 담지 않는 아들조차도 얌전해지는 것이, 어디 깊은 산 속 고원의 뭐라는 호텔의 트윈룸에 가는 것보다도 좋다. 정말로 병에 걸린 거니까 노란 링거주사를 맞는다.-168

 

'그래 , 분명 다들 그런 마음일 테지만 겉으로 표현 안 한 것일 뿐이야. 유별난 할머니는 아닌 것 같아.'하고 말았다.

계산하고 재서 일상 속의 소재를 끌어와 일부러 교훈을 끌어내려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그마한 일상도 재치있게 다루어 나갈 줄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공녀 속 주인공같은 소녀들이 나오는 소녀소설에 지나치게 빠져들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며, 그녀의 눈에 '인테리'였던 아버지와 인테리 아닌 마누라였던 어머니의 이야기는 독특한 개성을 풍긴다. 함께 키우는 고양이며 개에 관한 지극히 객관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도 사실은 알고 보면 가족과 같이 느끼고 있기에 다른 개와 고양이로 바꿀 수 없다는 반전 멘트로 마무리 짓고 있으며,

연애소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세상에 연애 소설 아닌 소설은 없다며 소세키에게 새삼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

 

'조금 더, 조금 더 곁에 있게 해 주시지 않겠어요? 당신님은 이리저리 주무르거나, 여기저기 핥거나 하지 않지만 그래도 좋아요, 곁에 있게 해 주세요,'라고 나는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 그것은 대충 80년 전, 우리 증조할아버지 시절만큼이나 옛날 옛적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메이지 시대의 남자와 여자 쪽이 단연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 더 진지하고 성실하며, 연애의 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소세키의 남자는 여자를 이리저리 주무르고 여기저기 핥으며 마치 플라스틱 완구 조립 솜씨를 자랑하는 것처럼 여자를 다루지 않는다. 소세키의 여자는 온전한 사람이다.

나는 <산시로>, <그 후>, <문>이야말로 일본인에게 연애가 뭔지를 제대로 보여 줬다고 생각한다.

-299

 

각각의 글들은 짧고, 거의 모든 것을 다루었다고 할 만큼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이것저것 글 속에 들어가 있지만 그 속에는 분명 자신이 겪어왔던 삶의 지혜가 다량 녹아들어 있다.

MSG를 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맛이라고나 할까.

짜고 시고 달고 맵고 한 다양한 맛들이 각각의 맛을 죽이지 않고 되살아난다.

너무 솔직해서 엉뚱하게 느껴지고 또 때로는 너무 거침 없다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녀의 연륜 속에서 지혜를 찾아낼 수 있다.

[백만 번 산 고양이] 라는 동화책처럼 삶의 생생한 모습을 가감없이 담고도 마지막에는 격한 감동을 안겨 준다.

아, 멋진 분.

그 입담을 좀 더 오래 들려주시지 그랬어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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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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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담하게 뱉어내는 피의 역사 [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는 <롤링 스톤>의 편집장이었으며 작가이자 뛰어난 음악평론가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형수, 게리 길모어의 막냇동생이다.

게리 길모어는  폭력과 광기로 점철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그의 성겻탓이든, 집안 분위기 탓이든 결국, 혹은 마침내 무고한 시민 두 명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이고 스스로 총살형에 처해달라고 주장했다.

1977년 미국에서 10년 만에 부활한 사형제도에 의해 처형된 첫 번째 사형수였고, '피의 속죄'라는 모르몬 식의 엄격한 대가를 치른 사람이었다. (1996년 유타 주에서 총살형이 다시 집행되었으므로 최후의 총살형 사형수는 아니다.)

 

"게리 형, 보고 싶을 거야.""우리 모두 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

"날 자랑스러워 할 필요는 없어. 자랑할 게 뭐가 있다고. 난 그저 총에 맞아 죽는 것뿐이야. 못할 짓을 저지른 대가로 말이지."

그것이 우리가 나눈 마지막 인사였다.-604

 

게리 길모어의 죽음을 TV로 접하게 된 마이클의 감상은 간결하다.

-그 마지막 감정의 굴곡은 대비할 길이 없다.-605

 

가족의 어두운 역사, 더 나아가서는 피의 역사가 될 수도 있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이클은 가족에게 세습된 내력, 그것은 무엇이며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를 담담하게 파헤쳐 간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조차 진실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는, 먼저 들은 이야기를 적고, 다시 한 번 그 이야기의 끝을 되짚어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따졌다.

미국의 개척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의 뿌리를 찾아가고, 미국 전역을 떠돌아 다녔던 자신의 기족사의 흔적을 찾아낸다. 자신의 가족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운명의 힘을 강조하는 대신, 자신의 가족사에서 비극의 정점을 이루는 순간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

무엇보다도 가족의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 가장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감정'의 농도를 최대한 낮춘 다음 사실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그리하여 이 논픽션은 드라마틱하고 비통한 삶의 순간을 함께 거슬러감에 있어 독자가 작가의 내력에 대해 한 점 의심 품을 여지를 없게 한다.

 

"게리가 어렸을 때, 그가 살인자가 되는 데 영향을 줬을 만한 어떤 사건이 혹시 있었습니까?"-20

 

자신의 집안 역사 어딘가에 모든 것을 풀어줄 열쇠가 있을지, 무엇이 이토록 많은 희생과 폭력을 만들어냈는지를 설명해줄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를 어쩌면 알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과거로 돌아가 진실을 찾아내고자 한다.

 

너무 길고 너무나 개인의 가정사에 관련된 이야기여서 처음엔 읽기에 적잖이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살인자가 되어가는 과정과 음침한 가족의 내력에 점점 호기심이 생겼다.

읽는 내내 고통이 뒤따르기도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생생하게 전달받기 어려운 교도소 내에서의 끔찍한 악행들을 볼 수 있고, 엇나가기로 작정한 한 사람의 행동을 통해 그 내력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책장을 어서 넘기라고 채근하고 있었다.

저자는  자신의 형을 이해해달라고 호소하지도 않았고 누구 하나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집안의 내력, 나아가서는 미국의 자본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타락과 폭력의 시대에 휩쓸린 인간의 나약함이라고 치고, 조금은 동정을 보여줘도 되지 않을까...생각하게 되었다.

하나의 온전한 인간을 이루는 것이 혈통인지, 환경인지, 혹은 운명인지.

딱 부러지는 답은 있을 수 없지만 이렇듯 고통 속에서 삶을 살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개인에게 엄청난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용감하게 가족의 역사를 훑어내리려는 결단을 내린 작가가 대단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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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 푸시킨에서 카잔차키스, 레핀에서 샤갈까지
서정 지음 / 모요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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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인문의 결합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일반적인 여행책들은 이제 넘쳐난다.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은 여행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일상에서의 도피, 색다른 경험.

여행지에서의 독특한 사유.

이것들은 여행을 떠나갔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에게 다만, 현실에서의 일탈을 경험하고 왔다는 만족감만을 선사할 뿐이다.

여행은 언제나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사람의 경험담은

여행기가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는 또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게 될 터이지만 여기저기 나풀거리며 살아온 탓에

디아스포라적 삶에 젖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의 "지금, 여기"는 또다른 '여행'의 묘미를 선보여주지 않을까.

 

서정은 독특한 화자이다.

서울 출생이지만 모스크바에서 정치문화를 공부했고 러시아에 한참 정착한 뒤에 여행의 맛을 알게 되어 조금씩 서쪽으로 이동하며 유럽을 살폈다고 한다.

그녀가 밟은 땅의 이동경로도 흥미롭지만 그 기록의 깊이와 넓이 또한 "평범한" 것은 아니다.

 

여행은 내게 낯선 것 가운데 낯익은 아름다움을 확인하며 불안을 넘어설 힘을 얻는 계기로 지각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불안을 온전히 규명하게 되지는 못할지라도, 무력한 시도에 머물지라도.--7

 

서양을 이해하는 첫걸음으로 러시아를 택했다는 작가는 다시 그 러시아라는 창문으로 유럽을 바라보았다. 유럽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난 변두리를 기회가 될 때마다 밟고 다녔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인물들이 도스토옙스키, 고흐, 쇼팽이었고, 자연스럽게 반복적으로 만나게 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샤갈, 카잔차키스였다.

작가는 여행을 인문과 결합시키면서 여행을 불안의 실체를 찾아가는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작가의 여행기에서 일단은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되어 기쁘다.

매주 혹은 한 달에 한두 번, 시간 날 때마다 푸시킨 미술관, 톨스토이 뮤지엄, 바스네초프 아틀리에 등을 산책 가듯 다니는 러시아인들.

소비에트식 교육의 영향으로 러시아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지식인과 예술가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을 평생에 걸쳐 반복한다고 한다.

그 곳에서의 생활에 길들여진 탓에 가는 곳마다 작가와 사상가, 화가와 음악가의 삶을 시간여행하듯 되짚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작가.

그래서 그의 글은 도시에서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체취를 느낀 이야기로 시작해서 점점 확대되어 나가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이 이 책이 다른 여행기와 구별되는 신선한 점이다.

 

 

러시아어의 섬세하고 풍부한 운율을 느껴보려는 모든 노력은 끝내 푸시킨으로 통한다. (...)

러시아인들은 술자리의 시작과 끝을 적절한 시 한 수 던지는 것으로 열고 맺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13

 

풍부한 문학적 토양을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함으로 여기고 그것을 한껏 누리는 모습이 부럽다.

 

어느 날 교실 발표회 때 아이가 외운 여덟 줄짜리 짤막한 시는 어휘의 선택과 배치의 절묘함, 일상어가 지니는 리듬감의 극대화를 통해 완벽한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언어 감각을 깨치기 시작할 무렵부터 잘 조합된 단어들을 지속적으로 외우면서 세상을 발견할 채비를 갖추는 것이다.-14

 

시인 푸시킨의 서재를 둘러보며 한 편의 시 같은 한 천재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집을 방문하고 작가의 불안한 인간상을 떠올린다.

 

러시아에서 작가의 위치는 프랑스나 독일의 경우와 좀 다르다. 러시아의 작가들은 계몽주의적 사명을 띤 교사이자 비판적 저널리스트이며 거의 유일한 지식인 그룹이었다. 특히 20세기 이전에는 -작가는 사상가와 다름없었다.-44

 

시대와 불화한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 기념관을 나서며 모딜리아니가 직접 그린 그녀의 스케치를 보고 시대의 뮤즈였던 그녀를 회상한다.

 

사랑스러운 아내 벨라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샤갈이 러시아와 연관이 있었나?

 

고골이 러시아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했던 것처럼, 샤갈 또한 그랬다. 노예적 심리 상태로 자의식이 졸고 있었던 러시아, 비극적 가락을 덮어버릴 유머 감각을 지닌 존재가 그들의 러시아였다. 이야기를 이미지로 새롭게 해석하는 일을 즐겼던 샤갈은 고골 외에도 셰익스피어와 라퐁텐의 작품에 삽화를 그려 넣었다. -170

 

러시아를 벗어나 베를린의 어제와 오늘을 짚어보고, 괴테를 통해 문예 도시의 면모를 바이마르에서 찾는다. 남프랑스에서 고흐의 절정의 순간을 떠올리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토마스 만을 회고한다.

그리고 마침내 카잔차키스의 조르바, 그리고 그리스에서 어떤 자유와 조우한다.

 

 

인간 의지에 대한 결의에 찬 확신 같은 것을 가질 수 없는 나같은 사람조차 카잔차키스의 저 흔적을 더듬는 묘사에는 금세 무장 해제 상태가 된다. 피할 곳이라고는 아예 없는 한낮의 폐허에서 맞이하는 정적, 그 속에서 망자를 불러일으키고 정신의 높이에 가닿는 것이야말로 진정 그리스적이지 않은가. -355

 

여행을 떠난다면...

머리를 비우러 가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곳에서 낯선 이를 만나는 것의 시간과 공간을 넓혀

인문학과의 조우도 고려해보면 좋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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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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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비에트 '문명'의 흔적을 기록하다 [세컨드핸드 타임]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말이 예전에는 친숙했는데, 지금은 그 말을 쓰기가 어색하다.

러시아로 대체된 그 지역은 한때 온통 붉은 색으로 뒤덮여 있는 곳이었지만 자유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뀐 듯 하다.

러시아에 특별한 관심도 없고 연관 관계도 없는 제3자의 눈으로 보면 러시아는 붉은 궁전과 발랄라이카, 사모바르의 나라. 관광지로 조금은 매력적이지 않을까? 하는 나라로 각인되어 있다.

뉴스를 통해 지도자가 바뀌었다, 자유가 침투했다, 같은 단편적인 내용으로는 그 나라의 속사정을 알 길이 없다. [비정상회담] 같은 예능프로그램에 러시아 출신 인물이 나와 자신의 나라를 알리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러시아를 속속들이 알기란 불가능하다.

어떻게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나라의 정서와 역사와 문화를 아우를 수가 있겠는가.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소련이 붕괴되고 20년 후 '붉은 인간'이라 명명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특히 정권교체와 변화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실망과 상실감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대단히 어둡고 침체되어 있다.

한 장 넘기고 한숨 쉬고, 또 한 장 넘기고 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는 자세로 책을 읽어나가야 했다.

소비에트 시절 사회주의에 길들여졌던 인물들을 찾아가 소중한 이야기를 끌어내서 기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인터뷰 형식으로 이어진 이 책은 비극적인 인간상인 '호모 소비에티쿠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저자의 지인, 친구,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기에  저자는 스스로를 '가담자'라고 일컫는다.

사회주의 출신자만의 언어, 선과 악에 대한 가치관, 그들만의 영웅과 순교자가 있으며 심지어는 죽음과도 특별한 관계로 얽혀 있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드러내기 꺼려지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소비에트의 일상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렸지만 세상이 변한 지금에는 모두가 그 때 그 시절 그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저자는 가정 속에 나타난 사회주의 또는 내부적으로 나타난 사회주의의 역사적 파편과 부스러기를 모아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역사 속에 감정을 들이지 않기 위해, 재앙과도 같은 그 시절을 드러내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저자는 사람들에게 사회주의가 아닌 사랑, 질투, 유년기, 노년기에 대해 그리고 음악, 춤, 헤어스타일에 대해, 사라ㅏ진 삶의 소소한 일상에 대해 물어보았다.

소비에트 문명의 흔적을, 소비에트의 익숙한 얼굴을 기록하는 장대한 여정을 떠난 저자는 그리하여 자유에 대한 서로 다른 대답도 얻어냈다.

 

"지금의 학생들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불평등, 가난, 뻔뻔한 부라는 것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고 뼈저리게 느낀 아이들이에요. 학생들의 눈에 약탈당한 국가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한 부모들의 삶이 적나라하게 비친 거에요. 그래서 학생들은 극단적인 사상을 추구하게 되었어요. 자신들만의 혁명을 꿈꾸는 거죠. 레닌이나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붉은 티를 입고 다니면서요."-18

 

저자는 구시대적 발상이 부활하고 공산당을 재현한 것 같은 집권당이 활동하고 있는 지금, 세컨드핸드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며 바리케이드 쳐진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인문학자도 역사학자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건너온 세월의 강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떠다니고 있다. 뜰채로 하나씩 하나씩 건져서 쭉 늘어놓으니 그럴듯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다. 수백 만의 생명이 스러지는 것을 목도한 뒤에 찾아온 자유라는 것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역사의 한 장면, 장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나서야 깨닫게 되리라. 일상이었던 사회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 속에 살고 있었는지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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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1 0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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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1 05: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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