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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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세계, 소설의 문제, 소설의 해결에 관하여

―존 쿳시, 『추락』 (Disgrace, 1999)을 읽고

 

 

 



1. 소설 속 세계의 현실성 - “아파르트헤이트, 그 이후

 

1994년 4월 드디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종식되고 남아공은 최초의 흑백연합정부를 수립했다. 흑인을 대표하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백인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국민당(NP)이 연합하여 구성된 남아공 연합정부는 “보복 없는 과거청산”이라는 대명제를 구현하기 위해 1995년 11월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발족시켰다. 이 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백인정부가 저지른 수많은 인권탄압과 잔악행위는 물론 ANC를 비롯한 반(反)정부진영이 투쟁 과정에서 빚어낸 보복적 폭력 행위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에게 경제적ㆍ법률적 보상을 관장했다. 위원회는 청문회를 통해 사면을 신청한 가해자들의 고백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듣고 그 고백의 진실여부에 따라 가해자의 사면을 결정하고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해 국민통합과 화해를 모색했다. 위원회는 1995년 12월부터 1998년 7월까지 2년 7개월 가량 존속했으며, 2000년 11월까지 총 7,112명이 사면을 신청해 그 중 849명이 사면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핵심인물들은 사면을 신청하지도 않았으며, 신청자들의 대부분은 흑인 경찰을 비롯한 하위직 공직자들이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아파르트헤이트의 가해자들이 위원회에서 한 증언들은 자신의 죄과에 대한 깊은 참회와 반성에 바탕을 둔 진실의 고백이라기보다는 사면을 얻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에 가까웠다. 그리고 증언의 과정에서 자신을 체제의 또 다른 희생자로 합리화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죄과의 사실에 대한 인정은 있었지만, 그것을 진실하게 참회하는 것은 부족했으며, 이러한 제도적 절차만으로는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남아공에서 ‘진실과 화해’의 문제는 어떤 면에서 이 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1998년 7월 이후의 시점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법률적 사면을 통해 부여한 국가적 차원의 제도적ㆍ행정적 용서 및 화해가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들 간의 용서와 화해로 곧바로 직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해는 중앙정치의 제도적 장에서 상징적으로 구현되는 것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적어도 남아공에서 진정한 화해란 사회구성원 사이의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조건의 평등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는가 하는 문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아공에서 그 평등 실현의 가시적인 지표는 다름 아닌 ‘토지’ 즉 땅이었다. 지난 시절 남아공 백인정권의 역사는 한 마디로 흑인들을 토지에서 유리시킨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3년에 제정된 ‘원주민 토지법’은 흑인들이 ‘거류지’라고 불리는 지역 외에서 토지 소유는 물론 백인 소유의 토지 소작마저 금지했다. 1936년의 ‘원주민 토지법’과 1950년의 ‘집단 거주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법으로 흑인들의 자유로운 토지 보유와 거주를 점점 더 엄격하게 제한했고, 그런 법을 근거로 흑인들에게서 조직적으로 몰수한 토지를 백인들에게 재분배했다. 그랬기 때문에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과 더불어 흑인들의 토지 귀환 욕구가 증폭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고, 그들의 귀환은 필연적으로 백인농부들과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 더 나아가 흑인들에 의한 백인농부들의 무차별적인 살해라는 ‘전쟁 상황’으로 발전했다. 

 

여기서, 소설 『추락』이 발표된 시기(1999년)가 바로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한 시점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쿳시가 어떠한 현실 가운데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으며, 이 소설이 어떠한 역사적 현실을 관통하는 작품인지를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추락』을 관통해 흐르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활동 및 “토지 귀환을 둘러싼 전쟁 상황”이었다. 전자가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문제라면, 후자는 남아공의 인종 및 계급 간의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뒷받침 하는 정치경제학적 토대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의 현실을 겪고 있던 남아공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추락』은 기본적으로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공이 부딪치고 있는 이런 두 가지 역사적 과제에 대한 소설적 은유로 읽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소설 속 문제의 현실성 - “그러니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진실과 화해’를 통한 이데올로기적 과거사의 청산 그리고 ‘토지의 귀환’을 통한 잔존하는 사회경제적 차원의 불평등 해결, 이 두 가지 차원의 변혁적 과제를 수행하는 중에 극심한 갈등과 혼란을 경험하고 있던 1999년의 남아공, 이 소설 속의 세계가 처한 현실이었다. 그러니 이제 이 혼란의 세계 앞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세계에서 두 주인공 루리와 루시는 따로 또 같이 제 몫의 선택을 요구받는다. 바로 이것이 이 소설의 ‘문제의 현실성’을 구성한다. 예컨대, 루리가 멜라니를 성희롱한 혐의로 대학 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는다는 설정은 정확히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은유라 볼 수 있는데, 루리는 여기서 스스로를 향해서 진실한 내면의 참회를, 멜라니를 향해서는 형식적 차원의(즉 절차적 차원의) 사과를 넘어서는 인격적ㆍ윤리-정치적 차원의 사죄를 요청받은 것이다. 그러나 루리는 조사 과정에서 ‘혐의 사실’은 인정하지만 잘못을 반성하고 참회하기를 거부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진상조사위원회란 오로지 법적 영역만 담당할 수 있고 참회나 사과 같은 개인 내면의 진정성까지 문제 삼을 권리는 없으므로, 여기서 참회를 표현하는 일은 잘못된 타협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즉 자신이 다만 당시 “에로스의 노예”로서 행동한 것이라 진술하고(p.81) 급기야 심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에게 “나는 이번 경험으로 풍부해졌소”라고 말한다(p.87). 총장이 마지막으로 제안한 사과성명 발표마저 거부하고 대학에서 파면당하는 것을 기꺼이 수용했던 그가 끝까지 고수한 입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뒤에 멜라니의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 중에서 드러난다. “나한테는 서정적인 게 부족합니다.”(p.260) 물론 그는 자신의 성희롱사건과 루시가 당한 강간 사건 사이의 모종의 연관성을 감지했기 때문에 멜라니의 집을 방문하여 사과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변화는 자신의 위치를 ‘가해자’로 인정한 것에 그칠 뿐 정작 사건 자체를 바라보는 입장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부인과 또 다른 딸에게 무릎을 꿇는 행위도 멜라니의 아버지가 자신의 “속임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진 상황에서 이제 어떻게든 상대방으로부터 적절한 사면을 빨리 받아내기 위한 의도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걸로 충분할까?” “이거면 될까? 안 된다면, 어떤 게 더 있지?”(p.263)

 

여기까지 그가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오류는 조사위원회의 요구를 개인의 내밀하고 사적인 욕망에 대한 부당한 간섭으로 곡해했다는 점이다. 루리 자신이 멜라니에게 욕망을 실현한 행위가 멜라니에게 딱히 강간은 아니었지만, 명백히 그녀가 욕망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 욕망의 실현 과정에서 명백히 교수-학생, 백인-유색인, 남성-여성이라는 권력관계가 개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루리가 그토록 강변하는 그 욕망 자체가 이미 (서정적인 것의 충분 여부와는 관계없이) 순수한 것이 아닌 정치적 맥락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사위원회의 참회 및 사과 요구는 윤리적인 차원인 동시에 정치적인 차원의 요구였으며, 자신의 욕망 의 기원과 조건 그리고 성질 자체를 근원적으로 성찰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루리에 의해 제기되는 이러한 선택의 요구들을 통해 작가는 ‘진실과 화해’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의 실제적 가능성을 독자들에게 새롭게 문제 제기하는 것이다. 루리가 당면해 있는 문제는 기실 그에게 이 세계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건 모종의 윤리-정치적 의견 표명을 강제하는 요구였다. 그런데 루리는 이 문제 앞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가? 루리는 “죄의 세속적 탄원과 회개의 보다 영적인 영역을 구분”하면서 회개와 용서의 개념을 스스로 문제화한다. 사실의 진술과 회개는 서로 다른 담론의 영역을 점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허한 고백을 거부하고, 제도적 거세를 선택한다.    

 

한편, 남성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헬렌이라는 친구와 동성애를 관계를 맺은 “완전한 시골여자”(p.92)로서, “개를 돌보고 꽃과 채소를 팔아서” 꾸려가는 “단순한 삶”을 선택한, 그래서 “인간이 갖고 있는 특권 일부를 동물들과 공유하”고 살아가는 루시.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단순하고 평화로운 대지에서의 삶은 지극히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꾸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던 지배체제가 타파된 이후 남아공에서는 과도기적 폭력이 만연해 있었으며 미혼의 젊은 백인여성 농장지주인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조건 덕분에 언제든지 폭력의 희생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의 안전은 총과 개들을 통해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불안한 상태의 안전이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은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남긴 부정적 유산이었다. 그녀가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지난 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반성적인 비판에 바탕을 둔 것이긴 했지만, 아직은 다분히 낭만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바램과 달리 그녀가 꿈꾸는 삶, 모든 생명의 조화에 바탕을 둔 상생과 공존의 삶을 일순간에 파괴할 수 있는 위험의 요소가 남아공에는 지속적으로 잔존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결국 ‘토지’의 흑인으로의 귀환 문제와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남아공에서 토지 불평등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잔혹성과 야만성을 상징하는 가장 핵심적인 모순구조였다. 남아공의 인종차별이 극심한 계급불평등으로 직결되도록 매개하는 실질적인 착취의 토대가 바로 이 토지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시대는 흑인들의 토지로의 귀환 욕구가 증폭되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 지난 시절 토지를 부당하게 박탈당했던 흑인들의 관점에서는 백인들의 토지를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되찾아야 했다. 그것은 그들의 정당한 권리행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백인들의 입장에서 그런 행위는 ‘합법적 절차’에 따라 소유한 토지를 약탈하는 야만적 행위였다. 소설 속에서 루시가 이러한 흑인들의 정당한 권리행사 혹은 야만적 행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 이미 소설 밖의 현실에서 그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루시가 강도와 강간을 통해 맞닥뜨린 새로운 폭력의 세계는,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흑인 여성들을 성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별 문제 없이 일상화되어 있던 루리에게 어느날 갑자기 성희롱의 추문으로 들이닥친 그 세계와 결국 같은 세계일 뿐이다.

 

루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요구 즉 피상적 차원의 죄과 시인이냐 아니면 윤리-정치적 차원의 사죄냐, 라는 물음을 통해 이 소설이 당시 남아공의 백인들이 ‘진실과 화해’의 역사적 과제 앞에서 처해 있던 문제의 현실성을 구성해냈다는 지적은 이미 앞에서 했다. 한데, 루시의 경우는 루리와 달리 자신이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선택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조건을 떠남 즉 패배냐 아니면 치욕을 감수한 생존의 도모냐, 로 해석하고 그 가운데서 후자를 선택하려 한다. 루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요구를 구조적으로 잘못 파악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강간 및 강도 사건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요구를 생존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오류를 범한다. 즉 루리의 제안대로 생모와 친척들이 도와줄 네덜란드로 돌아가거나 루리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잊을 수 있는 어디 다른 먼 곳에 재정착하는 것까지, 그 다른 삶의 가능성이 그녀에게 완전히 닫혀 있는 것이 분명히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지금 이 농장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 패배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거부한다.

 

대신에 여기에 계속 있음으로써, 자신의 땅을 계속 일구고, 지속될 강간 및 강도의 위협을 모면하고자 페트루스의 사실상 첩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 결국은 땅의 소유권을 페트루스에게 넘겨주고 “그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이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p.308)는 권리 하나만을 챙기는 것이 생존이라고 주장하며 그쪽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녀의 그러한 생존 전략이 그녀가 먼저 거부한 패배로서의 생존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 것인지를 우리는 사실 잘 알 수가 없다. 루시의 논리는 땅의 주인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땅을 제 손으로 일굴 수 만 있다면 그것으로 성공적인 생존을 선택했다는 의미일 터,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존엄성마저 부인한 굴욕적인 밑바닥에서 아무 것도 없이 다시 시작하여, 그녀의 말대로라면 “개처럼 되어”(p.307) 결국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우리는 끝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3. 소설 속 해결의 현실성 -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무엇을 향해”

 

자신의 최소한의 주체적 인격마저 온전히 내버린 상태에서, 그리고 강간 사건의 해결마저 포기하고, 강간범 일당 중 하나인 풀럭스가 수시로 자신을 훔쳐 보는 사태도 참아내고, 강간의 결과로 생긴 임신을 견디고, 끝내는 그 아기를 낳아 기르기로 하고, 자신의 성정체성까지 위반하며 (잠을 함께 자고 싶어 하지도 않는) 페트루스의 세 번째 부인이 되겠다는 루시의 일련의 선택들 앞에서 우리는 실상 이 소설이 남아공의 ‘토지 귀환’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납득할수 있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리라는 우리들의 기대를 철저히 배반하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이 소설이 갖는 상당히 독특한 미덕인지 모른다. 루시의 비논리적이다 못해 독자들에게 불편함마저 느끼게 하는 저 선택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의 순환구조를 백인들이 먼저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것을 깨뜨리고자 한다면 백인들이 지금 마치 “개처럼”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철저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썩 좋은 해결책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독자가 소설을 다 읽은 후 현실에서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그런 해결책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가장 ‘소설적인’ 혹은 ‘소설다운’ 해결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만이 제기할 수 있는 지극히 소설적인 해결책은 소설 밖의 현실 세계에서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서의 그런 해결책이 아닐지 모른다.

 

무릇 진정으로 소설적인 해결책은 한 사회가 완강하게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통념적 좌표를 흔들면서 ‘문제의 현실성’을 보다 심화ㆍ확장시키는 특정한 선택지의 제출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루시의 선택이 좋은 해결책인지 아닌지는 독자들마다 갖고 있는 각각의 윤리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의견이 나뉘겠지만, 객관적으로 확실한 것은 이 소설이 루시의 아버지인 루리에게마저도 그러했듯이, 동시대의 통념적 해결책을 거스르는 매우 이례적인 ‘선택’을 보여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독자들이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및 토지의 귀환 문제에 대해 그 고민과 성찰을 중단할 수 없도록 강하게 자극한다는 점이다.

 

작가 쿳시의 말을 빌리면, 그의 소설이 지향하는 것은 “벌어진 틈, 거꾸로 된 것, 아래쪽에 있는 것, 베일에 가려진 것, 어두운 것, 묻힌 것, 여성적인 것 등 타자를 읽는 데 있다.” 그의 소설들이 그러한 입장에서의 세상읽기이자 현실에 대한 사유의 한 방식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그 테두리 내에서 그의 문학세계를 좀 더 공감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는 소설가이고, 그가 우리와 만나는 방식은 소설을 통해서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소설 안에서 소설의 세계를 만나고, 소설의 문제를 고민하며, 소설의 해결과 논쟁한다. 역설적이지만, 그러한 소설의 길을 충실히 따를 때 비로소 우리는 소설을 너머, 소설이 반향하는 “진짜 현실의 공포”와 대면할 수 있는 법이다.

 

 













-참고 문헌-




김영수, 「남아공 진실과 화해위원회(TRC)의 활동과 성격」, 『법과사회』제21집, 법과사회이론연구회, 2001년 5월. 




박진아, 「쿳시의 소설에 나타난 타자의 수사학」,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학위논문, 2008년 2월.




신형철, 「만유인력의 소설학」, 『작가와 비평』제6집, 2006년 하반호, 여름언덕, 2007년 1월.




이진준, 「쿳시의 『추락』을 통해서 본 ‘진실과 화해’」, 『영어영문학』제51권 2호, 한국영어영문학회, 2005년 6월.




황정아, 「너무 ‘적은’ 정치와 너무 ‘많은’ 윤리: J. M 쿳시의 『치욕』(Disgrace)」, 『현대영미소설』제14권 2호, 한국현대영미소설학회,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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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길멀어우는새 2012-05-0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통해 소설을 더 '풍부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와이 2022-10-15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다읽고서 알것 같은데 그게 뭔지 말할 수 없는 혼돈을 정리해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펭귄클래식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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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주의적 관점에서 읽는 카프카의 『성(城)』

 

 

 




1. 들어가며

 

1) 카프카의 「법 앞에서」와 『성(城)』

프란츠 카프카의 산문 중에서 그가 ‘전설’(legend)이라고 지칭한 「법 앞에서」라고 하는 짧은 우화가 있다. 이 우화의 주인공 ‘시골에서 온 사람’은 ‘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여기(법 앞)에 찾아온 것이며, ‘법’ 안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으로 시간과 정력을 모두 낭비하게 된다. ‘시골에서 온 사람’은 그러나 결코 지난 시절의 생각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결코 회상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왔으며, 이전에는 무엇을 했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마치 그의 삶은 그가 여기에 도착한 순간에 시작된 것 같다. 과거는 하나의 빈 공간으로 녹아버린 것이다. 거인으로 성장하는 ‘문지기’의 호감을 사기 위한 어리석은 노력으로 자신은 더욱더 작아지며 마침내는 명멸하고 만다. 그러나 죽기 전에 그래도 ‘법’의 꺼지지 않는 광채가 그에게 비쳐 옴을 본다. 하나의 유사한 상황을 우리는 소설 『성(城)』에서 본다.1)

 

카프카의 저작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독문학자 박환덕은 『성(城)』의  측량사 K와 「법 앞에서」의 주인공이 다음의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그들은 하나같이 자의에 의하여 찾아온 점이다. K가 자의에 의하여 성(城) 마을에 찾아와서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음은, ‘시골에서 온 사람’이 자의에 의하여 법 앞에 찾아와서는 끝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둘째, K가 성(城)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점은 ‘시골사람’이 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셋째, 문지기가 ‘시골사람’의 뇌물을 받으면서도 들여보내지 않는 것은 K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넷째, 토지측량사도 역시 ‘시골사람’이다. 토지측량사는 직업상 땅을 만지는(측량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정확한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이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유형적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일체의 것, 보통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제한, 즉 신체상의 특징, 자연환경, 가족관계 등이 일체 제거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일체의 장소, 일체의 역사 밖에 놓여 있음으로써 현실과 허구에 관계없이 다른 어떤 인간보다도 더 고독하다.2) 박환덕은 이런 의미에서 두 작품의 주인공은 공히 현대인의 전형적인 상황(고향 이탈과 방향 감각의 상실), 중심이 결여된 세계에 내던져진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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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이러한 박환덕의 실존주의적 해석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낀다.  예컨대, 실존주의적인 해석은 두 작품의 주인공이 대면하고 있는 법의 문 또는 성(城)이라고 하는 불가해한 미지의 권력을 명확히 규명해내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환덕과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두 작품을 비롯한 카프카의 모든 소설들에서 주제화되는 권력의 문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류가 처한 보편적 상황을 형상화 한 것이라며 그 해석을 독자들의 주관적 관점에 맡기고 말기 때문에, 카프카의 소설에 우리가 다가가는 것을 오히려 더욱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법 앞에서」의 시골에서 올라온 남자는 법의 문에 가로막혀 무시무시한 사물(법)에 접근하지 못하다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듣게 된다. 거기 있는 그 문이 처음부터 자기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법에 포함되어 있었다, 법은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물이었을 뿐 아니라 항상-이미 그와 시선을 교환했다, 라는 이야기이다. 라캉주의적 관점에서 지젝은 이것이 법의 문에 대한 카프카 식의 비틀기로서 실재계를 포착하는 ‘시점의 이행’을 보여주는 예라고 해석한다. 지젝에 따르면, (라캉의) 실재계는 직접적인 접근이 불가능한 사물인 동시에 직접적 접근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요,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사물인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놓치게 만드는 왜곡의 장막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실재계는 첫 번째 관점에서 두 번째 관점으로 이행하는 시각의 변화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법의 문’ 자체가 실재계가 아니며, 이 ‘법의 문’이 사실은 이미 원래부터 오직 나만을 위한 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이행의 순간, 즉 법의 문과 나를 분리하는 간극이 이미 법의 문에 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 시점에서 드러나는 현실의 찢어진 틈새와 같은 것이다.3) 지젝이 재해석하는 라캉의 실재계는 또 다른 현실이 아니라 현실 내부의 오작동이다. 비유컨대 현실이 어떤 그물망 같은 것이라면, 그 그물망의 어딘가가 찢어질 때 그 망의 틈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 혹은 찢어짐이라는 사건 그 자체가 실재다. “실재란 상징적 네트워크로의 포획에 저항하는 외재적 사물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이다.”4)

 


 

「법 앞에서」에 대한 이러한 라캉주의적 해석을 참조하면서, 이 글에서는 기존의『성(城)』연구들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고 있는 법과 성(城)의 복합적 위상을 라캉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중심으로 탐구하고, 나아가 이 작품에서 발견되는 실재로서의 초자아와 대상 a, 자아, 주체의 소외, 응시와 시선의 주제 등을 중심으로 작품을 해석해보고자 한다.

 




2) 데리다와 들뢰즈의 카프카, 그리고 라캉의 카프카

히벨은 욕망과 권력관계의 작용에 주목하여, 카프카에 의해 묘사되는 인간의 전존재가 “에로스에 부합되는 동경과 이것을 부수고자하는 욕구로서 타나토스에 부합되는 충동” 사이에 위치하는 “삶과 죽음의 유예”를 통해 규정된다고 해석했다.5) 히벨에 의하면, 삶을 파괴시키는 타나토스로 규정되어 왔던 억압이 유예를 통해 규정되어 왔던 문화와 동일한 근원을 갖는다고 할 때, 인간의 자기 지배는 동시에 주체의 절멸을 수반하였던 바, 그 이유는 자기유지를 위해 해소되어진 억압된 실체가 바로 “생동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법을 억압 내지는 유예의 장소로서 해석하는 이 같은 입장은 이미 데리다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카프카 해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데리다는  법이 명하는 진입금지가 법이 자신에게 부과하는 금지로서 작용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이 같은 자기모순적인 법의 ‘자기금지’는 금지에도 불구하고 진입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결정을 가능케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법 앞에서 현상함으로써 법 앞에서 법의 주체가 되지만, 법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법 이전에 있기도 한 그는 마찬가지로 법 바깥에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의 주체가 법의 바깥에 있음으로써, 법은 끝없이 진입될 수 없는 대상이 되며, 법의 주체는 진입될 수 없는 법을 욕망함으로써 자유로운 자기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6)

 


 

데리다가 주목하는 카프카 사유의 독특한 이미지는 ‘소송’이다. 소송은 경계 안에서 벌어진 경계의 위반이며, 최종판결의 무제한 연기 속에서 전개되는 능동적인 어떤 과정이다. 데리다는 이 ‘소송’을 문학과 법 사이에 설정된 ‘법-앞에-있음’의 이중 구속적 상황으로 읽는다. 이는 보편적인 것과 독특한 것 사이의 비-관계적인 관계 맺음이다. 문학의 경계를 보장하는 법은 그 기원에서 이미 허구적 서사성에 물들어 있으며, 문학이 생산할 더 나중에 도래할 법에 의해 대체가능하다. 법은 문학에 의존한다. 문학은 법을 넘어서는 법을 생산하는 독특성의 법이다. 반면, 법 그 자체, 보편적인 본질로서의 법은 ‘법이란 현전불가능하고 접근불가능한 것으로서 남아있어야만 한다’, 라는 법이다. 문학은 이러한 법 앞에서 결코 법과 접촉하지 못한 채 법 그 자체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법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문학은 법을 존중하며 법에 예속되어 있다. 따라서 법과 문학은 서로의 유사-초월론적 조건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해서 데리다의 카프카 읽기는 문학과 법 사이의 탈경계적 관계를 보여주었다.7)

 


 

한편,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에서 카프카의 작품에 등장하는 법과 법에 이르려는 욕망은 동일한 구조기능을 수행한다고 본다. 즉 욕망이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욕망, 파시즘적 욕망’ 등과 같이 일정하게 결정체를 이루고자 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그것을 해체하며 다시금 고개를 들듯이, 법 역시 한편으로는 “초월적이고 편집증적인 법”으로서 일정한 법적 결정체를 다시금 해체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결국 욕망이나 법 자체는 텅 빈 내재성(혹은 내재적 형식)일 뿐 “언표 되면서만 결정되고 처벌행위를 통해서만 언표된다”는 것이다.8)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의 ‘소송’을 내재성의 장 안에서 초월적인 법과 선분적 권력에 포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탈영토화하는 욕망의 연속적 운동으로 읽는다. 욕망은 근원적인 결핍도 아니고 죄의식에 고개 숙인 억압된 충동도 아니다. 욕망은 막 다른 골목에서도 출구를 찾는 능동적인 생산이고, 모든 배치를 가로지르는 창조적인 탈주선이다. 욕망은 정의이고, 권력이며, 욕망이외의 어떠한 초월적 심급도 없는 내재성의 장 그 자체이다. 욕망은 끊임없이 경계들을 움직이고, 한계들을 대체하며, 인접한 다른 삶의 계열로 이어지는 탈경계적 연속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카프카는 리좀이자 탈주선으로서 탈경계적 문학기계로 작동한다.9)

 



 

데리다가 경계를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유사-초월론적 조건을 드러냄으로써 탈경계를 사유하고 있다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경계의 유동성과 변환을 생산하며 끊임없이 탈주하는 욕망의 실재적 운동을 통해서 탈경계를 사유하고 있다. 데리다에게 텍스트의 바깥이 없듯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내재성의 장에는 초월적 심급이 없다. 데리다와 들뢰즈(그리고 가타리)에게는 경계 바깥으로의 완전한 초월이 아니라, 매번 독특하게 이루어지는 해체와 탈주의 무한한 내재적 초월이 있을 뿐이다.10) 이처럼 데리다나 들뢰즈(그리고 가타리)에게서 카프카의 법 개념은 실증적인 법 이전에 혹은 이것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근원적인 규정기능과 내재적 형식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이 보완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라캉의 이론이야말로 이러한 법의 기능과 법이 작용하는 공간, 그리고 이 법의 작동과 관계를 맺는 주체의 위상을 가장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해석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라캉과 더불어 카프카의 『성(城)』을 읽어 나가면서 그것을 확인해보기로 하자.

 


 







2. 라캉주의적 관점에서 읽는 『성(城)』

 

1) 법과 초자아 그리고 성(城)과 대상 a

소설에서 주인공 K가 갖고 있는 성(城)에 대한 지식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은 성(城)은 이미 하나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城)은 보는 이에 따라서 달리 보인다. 성별에 따라 지적ㆍ사회적 수준에 따라 성(城)은 항상 다른 모습으로 표상된다. 따라서 성(城)은 성별, 사회적 계층 등의 수만큼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비록 하나의 대상인 성(城)에 대해서이긴 하나, 각자는 서로 다른 성(城)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이다. 사실상 이들이 전하는 그 내용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城)에 대하여 파고들면 들수록 도리어 성(城)은 K에게서 더 멀어진다. K는 사실상 기대하고 있던 하나의 통일을 거기에서 찾을 수 없다. 그가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다양한 것, 변하기 쉬운 것이었고, 이처럼 질이 서로 다른 여러 진실은 그것의 의미를 완전하게 총계를 내는 경우에도 그 참뜻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성(城)은 돌연의 계시를 받아 파악할 수 있는 ‘전체’가 아니고, 가산(加算)을 끝까지 하지 않는 한, 일부만을 알 수 있을 뿐인 ‘어느 한 전체’인 것이다. 측량사는 실제로는 성(城)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은 하나의 성(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자기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성(城)에 들어가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뿐이다. 「법 앞에서」의 마지막 부분을 연상케 하는 상황이다.

 

대체 이 성(城)은 무엇인가? 성(城)은 K라는 주체가 그리고 이 마을에 살아가는 다양한 주체들이 각자 자신의 내면에서 만들어낸 이상적 자아로 해석할 수 있다. 주체의 무의식적 충동이 성(城)을 욕망의 대상으로 키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도덕적 의식은 이 성(城)을 다시 진압한다. 성(城)은 욕망의 대상이자 원인으로서 실재를 대리하는 대상 a인 것이다. 사실상 그들이 욕망하지만 그에 도달할 수 없는 실재의 대상은 성(城) 너머에 존재하는 법체제이다. 법이 곧 실재이며, 성(城)은 그 법의 대상 a로 기능하는 것이다. 예컨대, 올가는 성(城)의 관리 조르티니의 구애와 “추잡한 편지”를 무시한 까닭에 벌을 받아 가족들까지 모두 마을에서 배척 당하게 된다. 성(城)은 본질적으로 조르디니의 고매한 도덕적 초자아뿐만 아니라 그 밑의 추잡한 하인인 조르티니의 성적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성(城)의 본질인 법체제는 그런 의미에서 초자아이자 실재로서, 내게 불가능한 요구를 퍼붓고 그것을 해내지 못하는 나를 조롱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작인이자, 내 ‘죄스러운’ 분투를 억누르고 그 요구들에 응하려 하면 할수록 그 시선 속에서 나를 점점 더 죄인으로 만드는 그런 작인이다. 이것은 정확히 법의 기능이다. 이 법이 K와 마을 사람들의 상상계의 차원에서 이상화된 분신 이미지로 작동하고 있는 것, 즉 대상 a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성(城)인 것이다.




2) 주체의 소외

문제는 주인공 K가 마을 사람들과 달리 이러한 성(城)에 대한 자신의 상상이 철저하게 오인에 근거하고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데서 발생한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달리 성(城)으로의 진입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법이라고 하는 사회적 초자아가 작동하면서, 불러일으키는 죄책감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억압된 ‘쾌락’을 무의식 속으로 추방했다가 그것을 성(城)이라는 낯선 형상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있으며, 이 성(城)을 중심으로 한 환상적 현실 속에서 나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방인인 K는 이 환상적 현실의 중핵으로 진입하여 실재와 직접적인 대면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과 그는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며, 자신의 오인을 자신도 모르게 종식시키려고 하는 무의식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城)으로의 입장은 거듭 실패하고, K는 측량사에서 학교급사로 마지막에는 말 관리사의 신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실패의 사건을 거치면서 비로소 K는 마을에 안착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고용되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이 마을을 찾아온 측량사로, 다음에는 아무런 일이 주어지지 않은 채 마을을 전전하다가 프리다와 약혼하게 되고, 결국 면장과의 타협 끝에 학교 급사가 되어 마을이라고 하는 사회에 정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을 우리는 라캉의 소외 이론에 맞추어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이 마을에 온 것은 사회로의 출생을 의미한다. 출생과 동시에 인간은 모체로부터 분리되고 이때 최초의 소외를 경험한다. 주인공 K역시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의 사람들에게 낯선 이방인으로 인식되어 소외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역시 성(城) 아래 마을이라고 하는 환상적 현실에 동참하여 성(城)을 이상적 자아로 인식하고, 그것을 함께 욕망한다. 바로 이 단계가 상상계로 진입하여 자아를 형성하는 ‘거울단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어를 배워 상징계로 진입하여 기표적 주체가 될 때 그 직전 단계의 주체들로부터 소외되며, 이 순간들에 무의식이 생겨나며 진정한 주체는 그러한 무의식의 연쇄 가운데서 출현한다. 그는 상상계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상징계로 넘어오지 못하고 끊임없이 성(城)의 실재를 찾아 방황한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성(城)으로의 진입 시도는 번번히 실패하고, 그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함으로써 마을의 질서에 순응한다. 그것이 바로 상징계로의 진입인 것이며, 그가 기표적 주체 즉 마을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한 언어적 주체가 되는 단계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있어 진정한 무의식적 주체의 출현은 바로 성(城)으로의 진입을 시도하던 그 직전의 단계에 있었던 것이다.




3) 시선과 응시

카프카는 주인공 K가 추구하는 성(城), 다시 말해 라캉적 대상 a가 주체의 환상의 산물일 뿐임을 잘 보여준다. 라캉적 관점에서 볼 때, 성(城)의 초청장은 주인공의 욕망의 시선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것의 그의 욕망의 시선을 통해 생겨나며 세력을 확장한다. 라캉은 시선과 응시를 구분했는데, 나의 시선을 단지 한 지점으로부터만 보게 되는 반면 나는 모든 면들에서 보여진다. 내 주관적인 시선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응시가 있는 것이다. 대상을 보는 시선의 주체의 편에 있는 반면 응시는 대상의 편에 있는 것이다. 내가 대상을 볼 때 대상은 내가 그것을 볼 수 없는 지점으로부터 항상 이미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K는 성(城)을 계속 관찰한다. 그는 클람이 투숙하는 헤른호프의 방 문 앞에서 문구멍으로 클람을 유심히 들여다 본다. 그는 여관의 각 방으로 배달되는 엄청난 서류들도 밤새도록 관찰하며, 여주인의 옷도 관찰하고, 조수들의 동태를 감시하며, 프리다의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관찰한다. 그는 성(城)을 향한 자신의 시선을 고수하며, 성(城)에서 자신에 관한 객관적 기록을 발견하길 희망한다.

 

그러나 면장과 만났을 때 면장이 그의 서류를 계속 찾지만 아무 것도 찾지 못한다. 물론 성(城)안에도 그에 관한 서류가 존재하지 않는다. 서류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클람으로부터 그가 받은 작업허가 공문서도 면장이 해석한 바에 의하면, 결국 빈 종이 위에 서명만 대충 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결국 성(城)은 K 자신의 주관적 시선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성(城)의 공허한 모습 속에서 사물의 응시를 발견하게 된다. 클람과 면장의 육화된 공허는 죽음이라는 실재를 예감케 한다. 주인공 K도 그러한 응시를 종종 경험하지만, 그는 나르시시즘에 너무 강하게 빠져 있는지라 좀처럼 그것을 중요하게 인식하진 못한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K는 그런 초자아의 심판의 응시를 어렴풋이 감지한다. 간밤에 서류가 배달되고 다음날 아침에 그는 여주인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당하고, 자신이 “무감각하고, 단단하며, 그 어떤 존경심에 의해서도 물러지지 않는 심성”이었던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작품 자체가 미완성인 까닭인지는 몰라도 K는 프로이트적인 쾌락충동과 도덕적 죄책감 사이에서 진동할 뿐, 이 운동 자체에 대한 주체적 반성은 수행하지 못한다. 

 

 




3. 나가며

라캉은 거울단계를 통해 상상계의 기만적 본성에 대해 말할 때부터 이미 자아와 주체의 구분을 강조했다. 라캉의 시니피앙 논리에 따르면, 주체는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되면서 상징적 질서 속에서 존재성을 획득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주체의 사라짐을 가져온다. 여기서 라캉은 주체의 분열을 말한다. 주체가 한 곳에서 의미로서 나타날 때 다른 곳에서 주체는 사라짐처럼 소실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주체는 현존과 부재의 동시성 속에서만 진정한 본성이 파악된다. 주체의 현존이 없다면 부재도 없는 것이다. 부재의 효과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상징계로, 상징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상징계는 그 속성상 주체 상호간 구조에서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된 언표주체를 진정한 주체처럼 설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과 무의식의 논리에서는 사라지는 주체가 더 본질적인 주체이다.11)

 

『성(城)』에서 성(城)의 환상적 현실 가운데 존재하면서, 마을로의 정착 즉 상징계로의 주체와 마을 위에 존재하는 성(城)으로의 진입 즉 실재와의 대면 사이에서 갈등하던 K의 주체 중 후자의 주체가 바로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 윤리적인 욕망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 주체는 단순히 프로이트가 무의식적 실체처럼 언급하는 이드나 욕망의 동력인 리비도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존재는 상징계가 작동할 때마다 그곳에서 무(無)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주체의 빈 자리이다. 이 빈 자리가 마을 안에서의 K에게서 마을 사람들이 겪게 되는 당혹감과 낯설음이 생겨나는 자리인 것이다. 욕망은 언제나 그 자리를 향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불가능한 욕망을 향한 정신분석학적 윤리의 주체가 출현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그려낸 너무나도 ‘실재’적인 소설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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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정신분석학적인 카프카 해석의 개척자로 인정되는 조켈(W. H. Sokel)은 그의 주저 『F. 카프카 - 비극과 아이러니』에서 소설 『성(城)』의 기본적인 구조가 우화 「법 앞에서」와 매우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덧붙여 그는 「법 앞에서」가 『소송』이나 『성(城)』뿐 아니라 카프카 전체 작품 이해의 주요한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조켈은 이 텍스트를 통해 카프카 전체 작품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법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푸는 실마리를 찾고 있다. 즉 법에 대한 시골사람의 행동방식과 법을 대행하는 문지기의 대응방식에서 법에 대응하는 카프카의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조켈에 따르면 『성(城)』의 핵심적인 의미는 성(城)과의 투쟁에서 주체의 주관적인 요구, 즉 주체의 오만함과 고집이라는 것이다. 특권을 기반으로 세우고자 하는 주인공의 언제나 위협받는 존재론적인 계획인 실현되는 곳으로서, 성(城)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가족 구조에서 아버지의 권력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투쟁의 장(場)이라는 것이다. 


 

2) 박환덕, 「카프카의 <성(城)> 연구 - 작품의 구조(構造)를 중심으로」, 프란츠 카프카, 『성』, 박환덕 옮김, 부록․4, 서울: 범우사, 2001, pp.471-473


 

3) 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김정아 옮김, 서울: 도서출판 길, 2007, pp.126-127


 

4)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박정수 옮김,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07, p.112


 

5) 김윤상, 「법은 악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계몽의 기획에 대한 재평가 I」, 『뷔히너와 현대문학』제24집, 서울: 한국뷔히너학회, 2005년 5월, pp.21-45, 여기서는 p.35에서 재인용


 

6) 문광훈, 「법 앞의 물음: 데리다의 카프카 읽기로부터」, 『카프카연구』제8권, 서울: 한국카프카학회, 2000, pp.93-94 참조


 

7) 박은주, 「카프카의 ‘법 앞에’ 서 있는 데리다의 “법 앞에서”」, 『카프카연구』제5권, 서울: 한국카프카학회, 1996, pp.170-173 참조


 

8)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이진경 옮김, 서울: 동문선, 2001, p.107


 

9) 박은주,「카프카의 탈영토화하는 글쓰기 - 들뢰즈와 가타리의 카프카론」, 『카프카연구』제13권, 서울: 한국카프카학회, 2005, pp.133-134 참조


 

10) 김재희,「탈경계의 사유: 카프카를 통해 본 해체와 탈주의 철학」, 『철학사상』제20집, 서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5, pp.131-132 참조


 

11) 김석, 『에크리: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서울: 살림, 2007, pp.160-16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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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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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욕망과 감각의 잔혹극”

―조경란 장편소설『혀』, 문학동네 2007년 10월



 



 




  우선 소설의 내용보다 출간된 책의 표지에 관한 얘기부터 해야겠다. 위의 사진이미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요리사로 짐작되는 어떤 여자가 시선을 내리깐 채 무엇인가를 집으려고 하는 장면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대체 무엇을 집으려 하는 것일까? 지금 이 여자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힌트는 그녀가 요리사라는 것. 그렇담 요리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당연히 요리 또는 요리 중인 음식물일 터. 책 제목이 인쇄되어 있는 보라색의 표지를 바깥쪽으로 펼쳐 내면 그림 속의 여인이 집어 올리려고 하는 그 무엇인가가 드러난다. 그러니 학교 도서관에 책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지 마시고, 직접 서점에서 가서 확인해보시라. 도서관에서는 모든 책의 표지를 벗겨낸 채 소장하기 때문에 확인이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표지를 넘겨서 책의 본문으로 들어가면, January부터 July까지 총 7개로 된 각 장(章)의 첫 머리마다 음식 또는 요리와 관련된 다양한 제사(題詞, epigraph)가 나온다. 그런데 그 제사들과 함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그림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이 그림은 표지 속에 감추어진 그림의 다음 장면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표지 안쪽에 감추어져 있던 그림 속에 등장하던 두 음식물(?) 중 하나는 음식 안으로 완전히 가라앉아 버렸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고, 다른 음식물 하나를 요리사가 국자로 퍼 올리고 있는 것! 사실 이 두 그림만 이해하면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다 이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이제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자.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 ‘노베’의 젊은 여자 요리사 정지원은 이탈리안 요리학교 ‘아펜니노’를 졸업하자마자 이곳에 취직되었다. 그녀는 입사 이래 육 년 동안 총주방장의 수제자로 인정받으며, 식당이 번창하는 데 기여해왔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의 요리연수 중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 성공한 젊은 건축가 한석주가 한 달 뒤 식당으로 찾아와서 지원에게 요리를 주문함으로써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지원은 한석주의 권유로 수석주방장이 된 지 일 년도 안 돼 독립해, 자신만의 쿠킹 클래스인 WON'S KITCHEN을 오픈했고 ‘노베’의 단골손님들 중 일부가 그녀의 WON'S KITCHEN에 가 음식을 먹거나 파티 음식 케이터링을 부탁한다. 입소문을 타고 지원의 쿠킹 클래스가 강남 일대에서 유명해질 무렵, 한석주에게 다른 여자가 생기게 되고 둘은 헤어진다. 불행하게도 지원의 쿠킹 클래스의 수강생이자 유명한 전직 모델 출신인 이세연이 한석주의 새 여자이다. 폴리라는 이름의 늙은 개 한 마리와 남겨지게 된 지원은 쿠킹 클래스를 접고 다시 ‘노베’로 돌아온다.

  본격적인 소설의 서사는 사랑과 행복이 상실되고 결핍된 이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별 이후 다시 돌아온 ‘노베’에서 7개월 정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오로지 상상의 힘으로 상실과 결핍의 공백을 메우려고 몸부림친다. 그녀에게 있어 사랑의 욕망은 요리사로서의 욕망이 개시되는 순간과 완벽하게 동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그녀는 사랑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뭐 먹고 싶은 것 없어?”라고 묻거나 “뭐 좀 먹어야지”라고 권한다. 이런 발언과 행동들은 그녀의 무의식의 증상에 다름 아니다. 그녀는 사랑을 잃어버린 여자인 동시에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어줄 미식가를 잃어버린 요리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원은 스피노자/들뢰즈적인 감각의 존재론을 전형화하고 있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스피노자/들뢰즈에게 있어 ‘감각’(sensation)은 ‘지각’(perception)보다 원초적인 것 즉 감관에서 정신을 거치지 않고 바로 몸으로 내려가는 존재론적 현상이다. 지각이 정신의 코기토라면, 감각은 마치 유기체의 몸과 바깥의 환경이 접하는 삼투막에서 진동처럼 발생하는 어떤 유물론적 사건과도 같은 것으로서, ‘신체 혹은 육체의 코기토’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지원의 자아는 의식이나 지각이기 이전에 우선 감각이며, 그중에서도 미각, 즉 입속의 혀인 것이다. 그녀는 입의 혀를 통해서 사랑의 대상인 타자를 받아들였고, 또 혀를 통해서 자신을 요리사로서 인정해주는 고객에게 선사할 음식을 미리 맛본다.

  소설 속에서, 사랑이 제공하는 기쁨을 상실한 후 요리사로서 음식을 향유하는 미각까지도 상실한 주인공이 공허감과 결핍을 메우기 위해 상상하는 것이 “크고 깊은 구멍”과 그 구멍 속으로 들어오는 “뻣뻣하고 거칠고 검붉은 혀”와 그 다양한 변형의 모습들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혀’는 자신이 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었던 한 미식가의 혀이자,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젊은 건축가의 혀이며, 한때는 찬사와 예찬으로 이루어진, 내 몸을 읽고 더듬던 친밀하고 잘 빚어진 연인 한석주의 혀였다. 그리고 또한 그 미식가에게 해줄 음식의 맛을 다시금 행복하게 느낄 수 있는 요리사의 혀이자, 연인 한석주와 키스를 하며 사랑을 나누는 자신의 혀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찾아온 친구 문주의 가방 속에서 집어든 잡지에서 한석주와 이세연의 인터뷰 기사를 읽게 되고, 그녀는 자신의 혀와 한석주의 혀가 ‘행복하게’ 다시 만나는 일은 더 이상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한석주와의 최후의 만찬을 준비한다. 한석주와 자신의 혀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요리의 맛과 혀로 나누는 마지막 키스의 달콤함을 상상하며 요리 재료로 특별한 ‘육류’를 선택한다. 이러한 그녀의 마지막 행동이 과연 윤리적으로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그녀의 욕망이 과연 결여라는 부정의 원리에서 출발한 악무한의 인정투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예적 욕망인지, 아니면 새로운 생성의 원천으로서 긍정의 원리에서 출발하여 자기 보존을 선택한 자연스러운 신체적 표현의 욕망인지, 요컨대 그녀의 마지막 행동을 기율하는 욕망의 메커니즘을 명확하게 규명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독자들 스스로가 알아서 판단할 몫으로 넘기겠다.

 

  그나저나 최후의 만찬을 위해 그녀가 선택한 요리의 재료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답은 소설 안에 있다. (물론 당신의 입 안에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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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한 여인이 지금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혼자 있다.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과 팔에 상처가 났다.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 하나를 발견한다. 그 안에 들어서자마자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보고 만다.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어 버린 채로, 그녀는 그 끝없는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또 헤친 끝에 그곳을 겨우 빠져 나온다. 그 고깃덩어리들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려서, 수많은 가족들이 소풍을 즐기고 있는 광경 앞에 다다랐을 때 마침내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의 입에 피가 묻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 헛간에서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 먹었다는 사실을. 헛간 바닥, 핏물이 가득한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눈이 일순간 날카롭게 번쩍였다는 사실까지도 그녀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아무리 그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지우려해도 그것은 끊임없이 기억 속으로 틈입해 들어온다. 그러나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도, 분명 날고기를 이빨로 씹을 때의 그 감촉까지 기억하고 있는데도, 그녀는 그 장면 속의 얼굴이 자기 얼굴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설명할 수 없는, 익숙하면서 낯선 그 느낌,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그 느낌을 그녀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생생하였기 때문에. 그러나 그녀가 다시 한 번 말하건대, 그녀는 결코 자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상은 ‘영혜’라고 하는, 남편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그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악몽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혜’는 소설가 한강(韓江)이 새로 낸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의 title role을 맡은 여인이다. 소설가 한강은 10년 전 나무가 되고 싶어 결국 나무로 화분에 심긴 여자 이야기(「내 여자의 열매」)를 썼다. 그 여자가 마음에 맺혀 7년 뒤 연작소설로 되살려내게 되었다고 한다. 한강은 여자에 관한 세 편의 중편(‘채식주의자’ 2004,‘몽고반점’ 2004,‘나무불꽃’ 2005)을 발표했고, 그것을 다시 최근에 한 편의 연작소설로 묶어 늦은 책 『채식주의자』를 펴냈다.

 


  남편의 시선으로 서술되는 1부「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행동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말 그대로 미친 짓이었다. 남편에게조차 그녀는 이제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다.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한편, 육식을 거부하는 딸의 뺨을 때리고 입에 고깃덩어리를 억지로 쑤셔 넣는 아버지는 폭력적 남성성의 화신 그 자체를 상징한다(바로 이 아버지가 그녀에게 트라우마틱한 ‘원환상’을 제공하는 인물로 전체 소설 속에서 암시되고 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쳐 영혜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식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고 만다.

  2005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2부「몽고반점」은 속물적인 비디오아티스트인 영혜의 형부를 화자로 등장시켜 영혜가 남편과 이혼한 후 혼자 살아가는 시점(時點)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고 있다. 처제의 몸에 몽고반점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푸른 멍이 상징하는 숭고한 식물성을 도착적으로 탐미하나 그의 예술적 추구는 사회적 도덕의 금기를 위반하면서 끝내는 윤리적인 자기 파멸로 치닫고 만다.

  3부「나무 불꽃」은 동생 영혜와의 일이 있은 후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어린 아들 지우를 키워 나가는 언니 인혜의 시점(視點)에서 ‘식물-되기’를 갈망하는 동생 영혜의 남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채식주의자 영혜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것으로써 글을 마치겠다. 앞서 소개했듯이, 영혜는 악몽 속에서 고깃덩어리 즉 육식(肉食)으로 상징화된 남성적인 세계의 폭력들과 날마다 섬뜩하게 대면한다. 그래서 악몽에서 깨어난 그녀는 이제 그 날것의 실재(Real)에 직접적으로 압도당하지 않고자 현실에서 철저한 채식주의를 수행한다. 악몽에서 끊임없이 깨어나고자 선택한 일종의 환상적 현실이 바로 채식주의였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현실’에서 벌이고 있는 채식주의가 그녀만의 환상에 의해 구조화된 것이라면, 그 현실은 실재와의 대면으로부터 도피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악몽과 현실의 대립에서 환상은 현실의 편에 있으며, 그녀가 외상적인 실재와 대면하는 것은 바로 악몽에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악몽이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그녀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녀가 자신들의 이웃과 대립하며 채식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현실 자체가 자신의 꿈을(악몽에서 드러나는 실재를) 감당할 수 없는 그녀 자신을 위한 현실주의적 선택이라는 의미이다. 그녀가 악몽 속에서 대면하게 된 것은 현실보다 훨씬 더 강한 감응을 일으키는 외상(어린 시절 자신의 다리를 물었던 개를 아버지가 무참히 죽였던 그리고 그 죽은 개의 고기로 만든 국밥을 맛있게 먹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실재를 회피하기 위해 현실 속으로 ‘깨어’난 것이다.

  여기서 꿈이란 단순히 문자적으로 “수면 중에 일어나는 일련의 시각적 심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꿈이란 실재와의 대면을 피하기 위해 그것을 환상화하는 것일진대, 그녀는 계속 꿈(환상적으로 지각되는 현실)을 꾸기 위해 역설적으로 꿈(실재의 외상과 만나는 보다 현실적인 그것)에서 깨어난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How to read Lacan』, pp.89-93 참조)

 


  이렇듯 모든 종류의 육식을 끊고자 하는 철저한 채식주의를 거쳐 마침내는 스스로 식물이 되고자 했던 그녀의 제스처는 악몽 자체의 실재성, 환영적인 스펙터클의 형태로 출현하는 실재를 회피하기 위한 절망적인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영혜의 행위는 실성한 모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에 외상적인 기억으로 짙게 드리우고 있는 육식의 폭력성을 씻어버리기 위한 자기구원의 몸짓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 이러한 소설 속 대비구조는 거칠게 정리하자면, ‘고기=육식=동물성=남성성=폭력=파괴의 실재성’에 대비되는 ‘채소=채식=식물성=여성성=비폭력=구원의 현실주의’의 정점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적 성정치학의 관련성에 관한 논의는 이 분야의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캐럴 J. 아담스 (Carol J. Adams)의 『 육식의 성정치 - 페미니즘과 채식주의 역사의 재구성』 (The Sexual Politics of Meat , 1991) 을 참조하라)

 

  현(現) 시기 한국의 젊은 소설이 열어젖히고 있는 실재와 현실의 위상학이 어느 수준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수작(秀作)이라 생각하며 주저함 없이 친구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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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모든 인간은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러한 불사(不死)의 존재가 될 능력이 있다. 거창한 정황에서건 작은 정황에서건, 중요한 진리를 위해서건 부차적 진리를 위해서건 상관없이 말이다. 그 모든 경우에 주체화(subjectivation)는 불사의 것이고, 인간을 만들어 낸다. 주체화를 제외할 때, 단지 생물학적인 하나의 종(種)이 남을 뿐이다. 그 미적 매력이 결코 자명하지 않은 ‘날개 없는 두 발 달린 짐승’이 바로 그것이다.”1)




1. 역사와 인간의 종언 그 이후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시대, 포스트역사 이후의 인간에 대한 가장 설득력있는 정의 중 하나를 나는 헤겔주의자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eve)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헤겔독해입문』1968년도 수정판의 한 각주에서 역사의 종말에 도달한 최후의 인간을 ‘동물화한’ 아메리카적 인간과 일본적 ‘스놉(snop)’, 즉 속물로 나누어 설명한다. 코제브에 의하면 소련과 중국은 근본적으로 미국과 다른 체제라기보다는 덜 발전된 미국, 아직 가난한 미국이다. 그들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선택하게 될 삶의 양태 역시 미국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인데, ‘역사’가 종언한 이후에 가능한 인간 삶의 형식은 결국 평범한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인 ‘동물로 회귀한 삶’일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런데 나는 (1948년에서 1958년 사이에) 미합중국과 소련을 여러 번 여행하고 비교해 본 결과, 아메리카인에게서 풍요롭게 된 중국인이나 소비에트인 같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소비에트나 중국인이 아직은 가난하지만 급속히 풍요롭게 되어갈 아메리카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적 생활양식은 포스트역사 시대의 고유한 생활양식으로, 합중국이 현실로서 세계에 현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인류전체의 ‘영원히 현존하는’ 미래를 예시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동물로 되돌아가는 것은 더 앞으로 닥칠 장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현전하는 확실성으로서 나타났다. 역사의 종언 이후 인간은 그들의 기념비나 다리나 터널을 건설한다고 해도, 그것은 새가 집을 짓고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며, 개구리나 매미처럼 콘서트를 열고 새끼 동물이 노는 것처럼 놀며 다 자란 짐승이 하는 것처럼 성욕을 발산하는 것과 같으리라.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러한 행위들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신 이렇게 말해야 한다. 풍요와 안전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될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 이후의 동물들은 그들의 예술적, 성애적, 유희적 행동들을 통해서 만족을 느낄 것이다.

내가 이에 대한 견해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최근 일본을 여행한(1959년) 후이다. 나는 거기서 유일무이한 사회를 볼 수 있었다. 왜 유일무이한가 하면, 일본이 (농민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봉건제’가 청산되고, 원래 무사였던 그의 후계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쇄국이 구상되어 현실화된 후) 거의 300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역사의 종말’이란 시기의 생활을, 즉 어떤 내전도 대외적인 전쟁도 없는 생활을 경험한 유일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무사의 현존재는 자기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결투에서조차) 그만두면서, 그렇다고 노동을 시작했던 것도 아니어서, 그 상태로 완전히 동물적이 되었다.

‘포스트역사의’ 일본문명은 ‘아메리카 생활양식’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아마 일본에는 더 이상 ‘유럽적’ 혹은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종교도 도덕도 정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는 생생한 스노비즘이 ‘자연적’ 또는 ‘동물적’인 소요를 부정하는 규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그 효력에서 일본이나 다른 나라들에서 ‘역사적’ 행동을 통해 태어난 그것, 즉 전쟁과 혁명의 투쟁이나 강제노동에서 태어난 규율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과연 노가쿠能樂나 다도茶道나 꽃꽂이華道 등과 같은 일본 특유의 스노비즘의 정점(이에 필적할 것은 어디에도 없다)은 상층 부유계급의 전유물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집요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모두 예외없이 완전히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하여, 즉 ‘역사적’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적’인 내용을 모두 상실한 가치에 기초하여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어떤 일본인도 원리적으로는 순수한 스노비즘에 의해 완전히 ‘무상無償한’ 자살을 행할 수 있다 (고전적인 무사의 힘은 비행기나 어뢰로 바뀔 수 있다). 이 자살은 사회적 정치적 내용을 가진 ‘역사적’ 가치에 기반하여 수행되는 투쟁 속에서 무릅쓰게 되는 생명의 위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최근 일본과 서양세계 사이에 시작된 상호교류는 결국 일본인을 다시 야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인도 포함한) 서양인을 ‘일본화한다’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2)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코제브가 ‘동물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동물적’ 상황과는 반대이다. 도리어 그것은 타인의 욕망밖에 없는 또다른 의미의 ‘인간적’ 상황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했을 때, 아메리카적 생활양식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첫 번째 단락의 ‘동물’과 일본의 스노비즘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세 번째 단락의 ‘동물’은 다른 것이다. 이는 두 번째 단락에 일본적 상황을 설명할 때 ‘완전히 동물적이 되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단락에서의 ‘동물’이란 가라타니의 말처럼 특정한 ‘인간적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고, 세 번째 단락에서의 ‘동물’이란 ‘자연적 상황’, 즉 순수한 의미에서의 ‘동물적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라타니처럼 일본의 스노비즘을 아메리카적 생활양식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적 생활양식’의 극단적인 형태로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할 것이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코제브가 미국에서 본 ‘동물적인 삶’이란 1950년대의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사회 속에서 형성되는 그리고 리스먼(David Riesman)이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1950)에서 말한 바 있는, 소위 ‘타인지향적인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3)

타인지향적인 삶은 성찰적 내면이 결여된 삶이다. 타인의 욕망에 의해 주체의 욕망이 계획되고, 추동되고, 소비되는, 오직 타인의 욕망만이 지배하는 그러한 유형의 자아는, 타자와의 대립과 투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근거를 정립하는 헤겔적인 주체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 종언을 고했다는 주장에는 인간이 탈역사적 ‘동물’이 되어 버렸다는 것, 즉 더 이상 고통이나 불행의 변증법을 알지 못하며, 오직 그러한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러야만 소위 ‘행복’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모르는 ‘내면성의 상실’의 상황에 이르렀다는 코제브의 시각이 담겨있다.

코제브의 주장에 의지하면서, 가라타니가 자신의 “근대문학의 종언”론에 대한 증거로 제시하는 ‘타인지향형’ 인간이란 것도 물론 ‘인정욕망’이 여전히 강한 상태의 인간을 가리킨다.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에도 부정성은 이전보다 어쩌면 더 강력한 형태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가라타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기에는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오로지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타인을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강한 자의식은 있지만 내면성이 전혀 없는 타입의 사람이 많습니다. 최근 젊은 비평가들은 그런 사람뿐입니다”라는 말을 통해, 그러한 ‘타인지향형’에는 내면성이 없는 부정성의 인정욕망만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인즉슨,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의사사건(pseudo-event)은 자아의 내면을 상실하게 만드는 허구의 산물일 뿐이며, 이러한 것이 보편화된 세계에서 더 이상은 근대적 인간의 내면성 따위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중소비사회의 영향(전세계의 아메리카화)에 따른 내면성의 상실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그것에 의해서만 오로지 추동되는, 주체성이 없이 부유하는 ‘타인지향형’ 인간만을 낳았을 뿐이라는 것이다.4) 

 

2. 남한산성: 자연화된 동물들의 세계

한편, 아감벤(Giorgio Agamben)의 경우, 앞서 코제브와 가라타니가 말한 ‘동물’이 영위하는 삶을 비오스(bios)가 파괴된 순수한 조에(zoē)로서의 삶으로 설명한다. 조에로 축소된 삶 혹은,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삶(la nuda vita)의 궁극적인 목표는 구원이나 주체화가 아니라 오직 ‘생존’이다.5) 그것은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던 유대인들의 상태이며, 바로 오늘 내가 읽은 김훈 소설 『남한산성』에서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조선의 ‘왕실’과 ‘묘당’들과 ‘백성’들의 상태라 할 수 있다. 김훈이 바라보고 있는 인간세계의 본질적인 상황으로서 ‘남한산성’은 비오스의 가능성이 폭력적으로 파괴되어버린 비극적이고도 불행한 탈역사적 ‘동물’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코제브가 말한 탈역사적 ‘동물’의 세계는 미국에서 시작된 몸만들기(physical fitness)에서 볼 수 있듯이 스스로의 몸을 조형하고, 성형하고, 개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자발적으로 조에로 축소시킨 전형적인 후기자본주의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훈의 소설도 결국은 병자호란 중의 ‘남한산성’이라고 하는, 젊음 혹은 생명을 가능한 한 연장할 것인가 아닌가라는 극단적인 선택의 분기점 앞에 놓여 있던 특정한 역사적 시공간을 도려내어 서사의 무대로 삼음으로써, 인간 삶의 본질을 ‘동물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전제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아무도 부정할 없을 것 같은 인간의 동물성에 대한 안쓰러운 긍정이, 그리고 그것에 뒷받침된 나날의 비루한 개체적 삶의 존엄에 대한 긍정이 궁극에는 거꾸로 스스로 옹호해 마지않는 바로 그 삶 자체와 삶의 존엄을 상실하게 만드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소설의 구조 심층에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김훈의 명백히 이데올로기적인 서사화의 전제 부분에서부터 이미 윤리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신하는 임금의 몸을 막아서서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 살아남은 백성들이 농장기를 들고 일어서서 아비는 아들을 죽인 적을 베고, 아들은 누이를 간음한 적을 찢어서 마침내 사직을 회복하리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하지만 적들은 이미 임진강을 건넜으므로 그 말의 크기와 높이는 보이지 않았다.”6)

 

김훈은 전쟁이라는 공간, 그것도 성안에 갇혀서 예정된 패배를 기다리고 있는 약소국 백성들의 삶을 통해서 인간 삶의 본질이 동물성 또는 자연화된 상태에 근본적으로 내던져져 있음을 강변한다. 자,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자 그 문제를 중심으로 한 세계의 현실 그 자체이기도 한 ‘남한산성’은 대체 어떤 곳인가? 그 산성은 병자호란 때 대피한 조선왕실이 10만 적군에 둘러싸여 있던 돌로 된 수갑이었다. 조선은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밖으로 나가 투항할 수도, 구원을 기다리고 앉아있을 수도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공간이다.

“참혹하여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다만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이다.”7)

다만 당면할 뿐, 다른 방책이란 있을 수 없는, 무력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공간이다. 주전(主戰)과 주화(主和)를 놓고 즉 임금을 향해 대의와 현실 사이에서 최종적인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서로 대립하는 조정의 신료들이지만, 어떻게 하더라도 결론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부딪혀서 싸우거나 피해서 버티거나 맞아들여서 숙이거나 간에 외줄기 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 터이고, 그 길이 모두 뒤섞이면서 세상은 되어지는 대로 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8)

최명길의 주화론은 현실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자연화된 육체의 생존을 확보함으로써만 가능한 지극히 동물적인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논리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9)

 

최명길은 치욕의 길을 죽음을 무릅쓰고 주장하는 비장미를 선보이지만, 막상 누군가가 청나라의 볼모로 끌려가는 상황 앞에서는 애꿎은 젊은 선비들의 의연한 선택을 수수방관하면서, 그 자신은 볼모의 대열에서 교묘히 빠져나온다. 김훈은 이런 최명길의 길을 결국 인조도 따라가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최명길과 극명하게 대립하며 척화주전론을 외쳤던 김상헌의 경우에도 일관되게 장엄한 운명의 길이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남한산성에서 빠져 나온 후에는 자신이 죽지 않기를 잘했다고 자위하는 다소 어이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훈은 김상헌과 최명길의(그리고 인조의) 길 중 자신은 “아무 편도 아니다. 다만 고통 받는 자의 편이다”라고 작가 서문에서 이미 밝히고 있지만, “김상헌은 성 안에서 목을 매달았을 때 죽지 않기를 잘했다”고 서술한 대목을 볼 때, 죽음을 불사함으로써 대의명분을 비타협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김상헌의 급격한 내면적 변화는 결과적으로 주화파 최명길의 노선에 그가 동화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데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김훈의 해석과 우의적 가치판단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김훈은 성 안에서 격렬한 노선투쟁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과는 무관하게 결국 강물처럼 덧없이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결국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생존에의 본능적 의지일 뿐임을 승인할 것을 독자들에게 은밀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애초부터 김상헌의 저항이라고 하는 것도 기실 새로운 사대주의를 낡은 사대주의로 고수하는 데 머물 뿐인, 속물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서 소설 속의 김상헌은 앞서 설명했던 코제브의 일본적 속물성의 김훈 식 버전일 뿐이라고 나는 본다.

최명길과 인조가 다만 살아남는 것이 목전의 과제가 되어 버린 동물에 다름 아닌 인간들로서, 자기보존의 자연화된 본능 앞에 무기력하게 투항하는 존재들일 뿐이라면, 김상헌의 경우는 철저하게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하여, 즉 ‘역사적’ 의미에서 ‘인간적’인 내용을 완벽하게 박탈당한 그러한 가치에 기초하여 살아가고 있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김상헌과 같은 속물적 인간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이 오직 전시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결국 타인지향적인 삶의 구조에 종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속물은 실존이 없으며, 고통도 쾌락도 행복도 불행도 모두가 타인의 시선 내지는 사회의 상징적 도덕(즉 이데올로기)에 의해 매개될 뿐이다. 김상헌의 자살기도가 아무리 숭고한 자기파괴처럼 보여도 그것은 사실상 타인지향적인 그리하여 비어있는 속물적인 퍼포먼스에 불과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3. 동물/속물에서 주체화된 인간으로

그렇다면, 오로지 인조가 외쳤던 “나는 살고자 한다”가 이 소설의 진정한 주제라고 했을 때, 결국 전쟁과도 같은 세상에서 오직 가치있는 것은 살아남는 일이라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한, 그러나 즉물적인 메시지를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있을 뿐이라는 결론만이 남게 된다. 이 소설은 단지 생존만이, 오직 유기체의 자기보존 본능만이 절대화된 인간형의 출현, 다만 살아남기(survival) 게임에 종속되어 오직 육체만이 감당할 수 있는 지속에 대한, 다소 히스테릭한 동물적 존재의 출현만을 나에게 시종일관 알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작가 김훈은 45일의 남한산성의 기록의 앞과 뒤를 완벽하게 절단하고, 그것을 영원한 현재로 고정시켜 놓은 채 역사를 자연 상태로 환원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존만을 갈구하는 벌거숭이의 날것 그대로의 삶이라는 것은 결코 문명 이전의 본래적인 자연 상태의 삶과 동일시될 수 없다. 적어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한산성’의 벌거숭이 삶은 본래적 의미의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법질서를 관장하는 정치권력 즉 청나라의 칸과 그 칸의 세계정치 전략에 무지하고 무력했던 조선의 집권층의 공모와 협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문명화된 세계 속에서의 자연 상태, 문명화된 세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자연 상태라 할 수밖에 없다. 문명의 한복판에 예외로서 존재하는 자연. 김훈은 바로 그러한 문명의 예외상태로서의 자연화된 상태를 마치 인간 역사의 본질적인 정상상태로 규정하고, 독자들을 그 세계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자연화된 동물들의 세계에서 그 동물성에 반대하는 김상헌 같은 인물을 대등한 비중으로 등장시키지만, 결국 김상헌은 동물성이 극단화된 속물성을 상징하는 인물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최명길과 인조의 길에 김상헌도 동화되어 함께 가게 되는 길, 급기야는 김류와 같이 시류에 적절히 영합하며 생존을 도모해가는 가장 기회주의적인 인물과 이시백이나 서날쇠같이 침묵으로 일관하며 오직 행동으로서만 말하는 존재들도 동참하는 길, 여기에 이 전쟁의 최후 승자인 칸과 용골대와 정명수까지 최종적으로 합류하게 되는 길, 바로 인간이란 불가피한 죽음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해 겨우 존재하는 것일 뿐인 하찮은 피조물에 불과함을 안쓰럽게 긍정하는 동물/속물들의 길이 이 소설의 궁극적인 목적지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야말로 내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윤리학이다. 나는 소설 『남한산성』에 등장하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이 진정성의 에토스를 상실한, 사는 것이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치욕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래서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나는 살고 싶다”는 동물적인 외침뿐인 그런 존재들로 그려지고 있는 것에 심한 불편을 느꼈다. 김훈은 살아남는다는 일이 불가피한 치욕을 통과해야만 현상유지가 가능한,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전(全) 일상이 포획된 한국 사회의 생존 본능의 전형화(典型化)된 모델을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비장하면서도 참혹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극단적 상황에 처한 인간의 조건을 성찰할 여지를 충분히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이 또 다른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여 독자에게 동물 혹은 속물로서의 삶을 그저 허무주의적으로 체념하라고 은밀히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독자 리뷰들을 훑어보면, 3-40대 남성 독자들이 이 소설을 가장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남성들은 늘 선택을 강요받으며,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하며, 밥벌이 지겨움에 몸서리치는 건 아닐까?”라고 하는 어떤 독자의 말처럼, 많은 이들이 이 소설에서 재현되는 서사적 현실을 실재 세계의 현실로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서사가 일정 부분 삶의 진실성을 담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당위적 현실이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나는 김상헌과 최명길 중 어느 편에 속하는가”, “그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살고 싶을 뿐이다”, 라고 외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성의 존엄과 진정성을 회복하는 길을 찾는 것, 역사와 현실을 수용소나 포위된 성첩과 같이 정의가 해체된 예외상태(혹은 비상사태)로부터 구원하여 정상상태로 이행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꿈꾸어야 할 미래가 아닐까? 생존의 본능적 욕구 충족에만 집착하는 자연상태의 동물화된 삶을 거부하는 것과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환상 가운데 존재하는 허구적 가치에 종속된 김상헌의 자살처럼 어떠한 내용도 지니지 못한 공허한 형식을 반복하는 속물적인 부정성의 활동도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화의 길을 이제 우리는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소설 『남한산성』은 그러한 상상의 경지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인간이 동물/속물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이 주체가 되는 순간에서라고 생각한다. 주체화의 순간은 진리와의 대면의 순간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김훈이 소설 『남한산성』을 통해 주장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외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탈(脫)이데올로기의 시대에서 인간은 여전히 동물 내지는 속물적인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말 필연적 현실일까? 아무리 그러한 현실이 우리를 압도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도 주체가 된 인간이 여전히 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가령, 정치적 혁명의 사건, 종교적 성스러움의 체험, 예술적 숭고의 경험, 아가페적 사랑의 교감, 학문적 탐구의 열정 등의 진리 사건과 인간이 대면할 때 인간은 주체화될 수 있으며, 죽음의 존재라는 동물의 운명을 따르지 않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인간의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아가 속물적 삶을 주조하는 이데올로기의 환상을 횡단함으로, 사회라는 대타자가 나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면서 강제하는 습속인 ‘도덕’을 넘어,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인 ‘윤리’를 창안해 나가는 그런 주체로의 전환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주
1)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윤리학(L’éthique)』, 이종영 역, 동문선, 2001년 11월, p.20

2) Alexandre Kojève,『Introduction to the Reading of Hegel (헤겔독해입문)』, 1947/1968, pp.436-437

3) 가라타니 고진,『근대문학의 종언』, 이성민 역, 도서출판 b, 2006년 4월, pp.70-72

4) Ibid., p.73

5) 양창렬,「생명권력인가 생명정치적 주권권력인가―푸코와 아감벤」,『문학과 사회』통권75호, 2006년 가을호, pp.242-243 참조

6) 김훈,『남한산성』, 학고재, 2007년 4월, p.19

7) ibid., p.39

8) ibid., p.16

9) ibid.,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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