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지음, 서정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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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사막 혹은 테러의 향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지음, 서정은 옮김, 생각의 나무 (2007년 9월)

 

 




  영국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문학비평가인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그는 대처 정권의 등장과 신보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적ㆍ제도적 공세를 계기로 시작된 1980년대 이래 영국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변화 속에서 좌파적(맑스주의적) 문학비평의 새로운 과제들을 제시하고, 또 그것을 직접 모범적으로 수행해온 이론가ㆍ비평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예컨대, 1980년대 이후로 출간된 그의 일련의 저작들, 즉 『발터 벤야민: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1981), 『문학이론입문』(1983), 『비평의 기능』(1984), 그리고 『결을 거슬러서』(1986), 『미학의 이데올로기』(1990) 등은 변화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론과 실천의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비평을 모색하기 위한 그의 일관된 작업의 산물이었다.

 

  특히 이글턴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부터 문학과 문학적 가치를 도덕적 가치의 지배로부터 분리시키되, 그것에 억압된 정치적인 차원을 되돌려줄 수 있는 정치적 문학비평의 가능성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런 작업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학비평을 소극적으로 비판하고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전제를 폭로하고 파헤치는 데 주력하는 부정적(否定的) 차원의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보다는 “지배 역사의 결을 거슬러 전통 가운데서 현재의 좌파적 이데올로기 투쟁에 쓸모가 있는 유산을 적극적으로 복원하고자 하는 구원의 해석학(redemptive hermeneutics)”을 가동하는 것으로 본격화되었다. 보다 최근에 출간된 그의 저작들인 『The Idea of Culture』(2000), 『우리 시대의 비극론』(2003), 『After Theory』(2003), 『The Meaning of Life』(2007) 등을 통해 우리는 그의 이러한 작업이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9ㆍ11테러 6주년을 맞아 지난 9월에 번역 출간된 그의 2005년 저작인 『성스러운 테러』(원제: Holy Terror, The Meaning of Terrorism) 역시 과거의 전통 속에 존재하는 어떠한 개념 혹은 사상의 혁명적ㆍ정치적 ‘흔적’과 ‘편린’을 기억해내고, 그것을 현재의 맥락 속으로 불러와서 이데올로기의 본질적 요소 및 문화와 정치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어 그 개념이나 사상이 우리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자 하는 그의 문제의식이 직접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는 텍스트이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은 테러 및 테러리즘의 형이상학적 차원의 계보학적 고찰을 담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글턴 자신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최근에 그가 천착해온 형이상학적 혹은 신학적 연구로의 전회(轉回) 가운데서 나온 동시대적 비평작업의 성과물이다. 물론 국내에 소개된 이글턴의 전작(前作)들에 익숙한 독자라면, 맑스주의자라 자처하는 이글턴이 유물론자답지 않게 왜 갑자기 형이상학 혹은 신학 연구의 방향으로 이론적 전회를 한 것인지 의아해할 것이다. 이글턴의 답변은 이렇다. “사탄이나 디오니소스, 죽음이나 악, 희생양과 악마, 숭고, 공포와 자유, 순교와 자살 등의 다분히 신학적이고 신화적인 개념들이 기존 맑스주의 정치학 담론의 유물론적인 개념들 못지않게 ‘테러’라고 하는 현대의 이데올로기적 현상의 본질적 요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글턴은 정치사상으로서 테러리즘이 프랑스혁명과 함께 나타난 근대의 발명품임을 부정하지 않지만, 넓은 의미에서 테러리즘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전근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 문명에는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러한 테러의 양가성은 곧 신성(the sacred)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의 양가성이기도 하다. 이글턴이 ‘최초의 테러리스트 지도자 중 하나’로 지목하는 에우리피데스 희곡 『바쿠스(The Bacchae)』의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는, 이글턴의 해석에 따르자면 “측량할 수 없는 무의식적 활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무자비한 악의와 공격성의 소유자”이며, “(라캉-지젝의 용어로) 외설적 쾌락이라고 하는 섬뜩한 주이상스(jouissance)의 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은 바로 이러한 최초의 테러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와 정면으로 충돌했던 인물인 테베의 왕 펜테우스의 존재이다. 펜테우스는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테베를 찾아와 여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흥청망청 숭배하도록 한 디오니소스에게 적개심을 품고서 상식 밖의 폭력으로 이에 대응한다. 그는 디오니소스의 머리를 베고 쇠지레로 그의 성소를 부숴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심지어 죽음충동의 화신인 디오니소스가 타협을 제안했을 때도 거절하고 도리어 그를 감옥에 가둬버림으로써, 자신이 갖고 있는 문화적 타자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만다.

 

  바로 이러한 디오니소스와 펜테우스의 충돌 서사에서 이글턴은 쾌락원칙 너머, 치명적 엑스터시의 영역에 존재하는 디오니소스(신성한 광기, 테러, 아나키, 리비도의 반란)가 펜테우스(합리성, 문명, 독재, 억압, 국가 테러리즘)의 외부적 타자가 아니라 바로 펜테우스 안에 잠복한 위험한 가능성으로서, 그로부터 배척당하고 거부당한 자아의 또 다른 중심이라는 해석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고대 신화에 대한 해석은 현대의 일상화된 정치적 테러의 형이상학적 본질을 이해하는 준거로 기능한다.

 

 이글턴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신성한 것 곧 성스러운 테러가 그 자체로서 양면적 속성을 가진 권력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삶을 창조하는 힘이자 죽음을 야기하는 힘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 제전으로부터 우리를 산산조각 내는 숭고함의 무서운 매혹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신학, 철학과 미학, 정신분석학과 정치학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이글턴의 현란한 사유의 모험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역시 문명에 내재하는 신성함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근대 후기에 이 신성한 힘은 무엇보다도 무의식과 죽음충동, 또 실재 등의 이름을 통해 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실재(the Real)에 대한 열정’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이야기는 결국 자기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은 괴물적 결여를 두려워하는 문명이 알 수 없고 기형적인 존재에게서 이 두려운 실재의 이미지를 발견한 뒤에 그를 자신의 문밖으로 내치려고 하는 시도들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치 디오니소스와 펜테우스의 충돌이 21세기의 벽두에 탈레반 출신과 텍사스 출신의 두 근본주의들 간의 충돌로 재연되었듯이 말이다. 어쩌면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말마따나, 9ㆍ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은 우리의 환상의 공간을 산산조각 내버린 ‘실재’의 침략적 귀환이자 오늘날 디지털화된 제1세계와 ‘실재의 사막’인 제3세계를 경계 짓는 배경에 대한 공격으로서, 우리는 스펙터클로 실연된 CNN 뉴스채널의 비행기 폭격 영상과 마주함으로 드디어 ‘문명의 밤’ 혹은 ‘실재의 사막’에 발을 딛게 되었다 할 수도 있으리라.

 

  현대철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읽기에는 쉬운 책이 결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시대 테러리즘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폭넓은 인문학적 해석을 기대하는 명민한 독자라면, 이 책에 절대 실망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며 일독을 권한다.

 

 

 

 

 

함께 읽을 만한 책:

○ 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개마고원, 2004) - 이방인과 희생양, 괴물과 유령, 신 등을 중심으로 타자성 개념에 대한 풍부한 철학적ㆍ비교문학적 고찰을 담고 있음.

 

○ 브루스 링컨, 『거룩한 테러』(돌베개, 2005) - 테러리즘 및 대(對) 테러전쟁에 내재하는 종교적 최대주의의 이원론적 세계관 및 무의식적 폭력성에 관한 종교학적 연구를 담고 있음.

 

○ 슬라보예 지젝,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 - 원제는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9ㆍ11 테러에 관한 지젝의 이데올로기적 분석의 진수를 접할 수 있음(단, 국역본의 경우 오역이 심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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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1
강도영 지음 / 문학세계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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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 이후’ 세대들의 ‘5ㆍ18 트라우마티즘’ 읽기

-강풀 만화 『26년』, 미디어다음 연재(2006. 4. 3 ~ 2006. 10. 13),

 

나는 1980년생이다. 5ㆍ18과 함께 혹은 그 이후에 태어난 나의 세대가 저마다의 경험을 거쳐 민주공화국의 시민(市民)으로 성장하기까지 걸린 지난 세월들은, 5ㆍ18이 권력에 의해 은폐되고 조작되는 음모에 맞서 기억되고 증언되다가 마침내 국가적으로 기념되고 애도되는 영광을 거쳐 요즘처럼 여권(與勸)의 이데올로기적 도구 내지는 경제적 수익을 창출하는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는 그 모든 역사의 흔적들과 고스란히 마주해온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의 세대가 공유하는 5ㆍ18과 관련한 일련의 기억들은 어디까지나 5ㆍ18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가 사후에 그것을 교육받는 위치에서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 경험들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 세대는 한번도 5ㆍ18 희생자들의 자녀들, 즉 1980년 이후 ‘나’와 동일한 시간대를 살아가며 ‘나’와 함께 이 나라에서 자라왔을 또래의 그들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져 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는 1980년 광주의 5월이 ‘나’의 삶과는 무관한 역사책 속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던 그 인식의 한계를 깰 수 있게 해준 어떠한 역사적 사건도, 하다못해 그들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문화적 텍스트도 우리에게는 부재했던 탓이기도 하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삶에 5ㆍ18이 스치고 지나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이들에게 5ㆍ18은 그저 역사 속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올해 나온 김지훈 감독의 영화「화려한 휴가」는 1980년 5월 이후에 출생한 우리 세대를 직접적으로 겨냥해 5ㆍ18의 비극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재현해준 ‘친절한’ 작품이고, 이보다 먼저 나온 강풀의 만화『26년』은 5ㆍ18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가 부모 세대의 트라우마를 물려받아 겪게 되는 복합적인 트라우마티즘(traumatism)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연령과 상관없이 5ㆍ18의 비극을 현재진행형으로 간직하고 있는 또래의 친구들이 우리 주변에 유령처럼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도발적인’ 작품이었다. 사실 두 작품은 장르의 성격이나 텍스트 내에서 다루어진 현실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5ㆍ18의 해결이 물질적 보상과 기념사업, 그리고 책임자에 대한 미완의 형사처벌로 귀결되고 있는 ‘민주화 이후’ 시대의 사회적 정황 속에서, ‘5ㆍ18’을 직접 겪지 못한 세대들을 주된 독자(혹은 관객)로 겨냥하여 그것의 기억을 요청하는 텍스트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평론가들의 해석과 비평이 충분히 나온 상태이고, 또 내게 주어진 지면의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여기서는『26년』을 중심으로 동시대 문화적 텍스트 속에서 드러나는 ‘5ㆍ18 이후’ 세대들의 ‘5ㆍ18 트라우마티즘’에 대한 성찰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작년 4월부터 10월까지 인터넷포털 ‘미디어다음’에 연재되어 하루 조회수가 200만건을 넘고, 매회 2천여개 이상의 댓글이 달릴 정도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던『26년』은 5ㆍ18 당시 계엄군이었던 김갑세라는 인물과, 도청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시민군들의 아들, 딸들이 26년이 흐른 후에 모여 법이 응징하지 못한 ‘전범’ 전두환을 단죄한다는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다. 5ㆍ18 당시 가해자의 처지에 있었던 김갑세와 같은 계엄군 출신 인물들이 갖게 된 죄의식의 트라우마티즘은 이미 영화「박하사탕」등에서 깊이 다루어진 바 있다. 그보다 ‘5ㆍ18 이후’ 세대를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인물들로서, 김갑세가 기획한 암살 계획에 동참하는 주인공들의 면면이 중요한데, 5ㆍ18 당시 자신이 보는 앞에서 남편을 사살한 계엄군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진 어머니를 둔 광주지역 조직폭력배 진배, 도청 앞에서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아버지와 단둘이 살며 복수심을 키워온 사격선수 미진, 5ㆍ18 때 부모를 모두 잃은 슬픔을 묻어둔 채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5ㆍ18때 고아가 된 여성을 만나 결혼을 약속하고 새 삶을 꾸리려 하는 흉상조각가 치영, 갓 돌이 지난 한 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여 지금은 자신의 아버지를 그때 그곳에서 죽게 만든 전직 대통령의 바깥나들이를 돕기 위해 교통신호를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관 정혁, 그리고 계엄군으로 광주에 내려가 5월 27일 전남도청을 최후까지 사수하고 있던 치영과 진배의 아버지를 죽인 김갑세의 아들 주안 등으로, 다들 부모 세대가 겪은 비극을 불가항력적인 유산으로 물려받아 평생 고통으로 일그러진 삶을 견뎌온 이들이다.

인간에 의해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에 따라 행해진 5ㆍ18 폭력의 비극은 한국 사회의 제도적 민주화를 계기로 하여 물질적 보상과 정치적 복권으로 한 필의 천을 짜낸 듯 보이지만, 실상 그 천의 가로줄과 세로줄 사이에 여전히 잘 짜여지지 못해 생긴 커다란 틈들이 보이는데, 이 틈들 사이로 억압된, 치료되지 못한 과거 기억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라는 고립된 한 지방 도시에서 발생한 비극이지만, 5ㆍ18이 기억의 방을 여전히 점유하면서 살고 있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 기억들이 5ㆍ18 학살의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들은 물론 그 가족들과 우리 모두에게 현재까지 육체적ㆍ심리적으로 엄청난 비용의 지불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 만화가 갖는 가치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만화가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인물들이 모두 5월 27일의 전남도청 최후 학살에서 희생된 이들 즉 국가의 정규군을 상대로 벌인 최후의 전투에서 사망한 시민군들의 자녀들이라는 점은 작가의 정치적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5ㆍ18은 피해자들에 대한 경제적 보상, 기념사업, 명예회복 등으로 마무리가 되어가고, 역사적 사건의 차원에서 볼 때도 5ㆍ18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해결이 된 과거의 일이라는 식의 국가/시민사회 간의 합의된 의도적 망각이 이루어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 가운데서, 이 만화는 5ㆍ18의 보상, 명예회복, 진상규명 노력, 민주화운동 세력의 집권 등의 결과가 과연 우리에게 진정으로 ‘5ㆍ18 트라우마티즘’의 불안을 제거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나아가 5ㆍ18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5ㆍ18 이후’ 세대들에게까지 각인시킨 심리적 외상들을 작품 속의 인물들의 이력에 상상적으로 투영시켜, 결과적으로는 5ㆍ18에 관한 성찰의 지평을 총체적인 ‘5ㆍ18 트라우마티즘’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비록 전두환 개인을 상대로 한 복수극이라는 플롯을 채택함으로써, ‘5ㆍ18 이후’ 세대가 겪은 트라우마티즘의 현실을 보다 깊이 묘사하지 못하고, 전두환 암살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만 극의 초점을 맞추는 흥미 위주의 결말로 나가고 말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무모한 암살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그간 한국 사회에서 ‘5ㆍ18 트라우마티즘’을 겪고 있는 피해의 당사자들이 그 치유의 해결책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징후적으로 드러냈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즉, 학살의 책임자 전두환의 상징적, 정치적 죽음조차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그의 육체적 생명을 실제로 거두고자 하는 모종의 움직임이 만화 속에서나마 실현되고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5ㆍ18 트라우마티즘’을 성찰하는 방식에 있어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독자로 하여금 역사적 사건에 대한 냉철한 판단보다는 감정을 자극하는 복수극의 플롯을 취했다는 비판을 이 작품에게 던지기 전에, 그보다 먼저 왜 우리는 ‘5ㆍ18 이후’ 세대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못해 그들이 직접 전두환을 암살하려들 수밖에 없도록 내버려두었는가 하는 물음부터 진지하게 되새겨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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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에서 여이연이론 4
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태혜숙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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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박이 말하는 해체론의 정치적 활용 가능성

 
1. (데리다의) 해체론은 배제되거나 주변화된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인식을 확대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의 해방(혹은 '목소리 내기')을 도울 수 있다.
=>그런데 어차피 이것은 사이드가 푸코에게서 발견했던 바로 그 가능성이다. 굳이 데리다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하나의 이론이나 텍스트가 일관된 논리와 타당한 권위를 지닌 서사로 확립되는 과정에서 억압되고 무시된 것에 주목하는 스피박의 태도는 지배적 사회계층이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방식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녀의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이 두 가지 태도의 핵심은 주체가 규정부정되는 '묵살의 여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2. 해체론은 지배 담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분법적 체계를 전복할 수 있다.
=>이것도 굳이 데리다만의 작업이 아닐텐데..푸코의 계보학 역시 지배 담론이 지식권력으로 작동하는 양상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3. 해체론은 급진적 정치강령이나 전복적 문화분석이 비판의 대상인 지배 담론의 가치와 전제를 재생산하는 것을 막는 '정치적 안전장치'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스피박이 '단절 속의 반복'이라고 지칭하는 이러한 재생산의 위험은 저항 담론이 지배 담론의 역전에만 그치는 데서 비롯되며(이를테면,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의 위계질서를 뒤바꾸려는 목적으로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 결국 저항 담론은 지배 담론의 논리에 여전히 갇혀 있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소위 말하는 남한 사회의 진보적 우파 즉 민족주의 진영이 떠올랐다. 지난 세월 그들은 철저한 민족주의적 신념에 근거하여 민족적 정통성이 없는 정권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반공이데올로기를 민족주의를 우회하여 정면으로 돌파하지는 못했다.
 
4. 스피박은 역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 역전에는 반드시 대립항 자체의 즉 구조 자체의 해체가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거리두기가 보완되지 않으면 대립하는 두 입장은 끊임없이 서로를 정당화할 것이다."
=>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스피박은 지배 담론에 맞대응하는 역헤게모니적 담론은 '치고 빠지는' 혹은 '마구 헤집고 다니는' 식의 게릴라전보다 오히려 지배 담론에 의해 상쇄되거나 재전유될 위험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스피박이 지배 담론을 내부에서 공략하는 '타협'과 '비판'의 방식을 선호하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은 지배 담론과 타협하는 것이 과연 지배 담론과 저항 담론이 대립하는 구조 자체를 해체하는 데 얼마나 공헌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지배 담론을 내부에서 비판하는 것이 지배 담론의 성숙한 자기 완성의 길에 조력하는 것이 되고 말지 않을까? 지배 담론은 저항 담론이 지배 담론 안으로 들어와 자신을 비판할 때 과연 그것을 지배 담론 내부의 자기 성찰 움직임으로 왜곡하지 않을까? 소위 말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나 "지속가능한 발전의 논리", "사회적 안전망 확충", "다수자 내에서의 소수자 배려 문화" 등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모순의구조 자체를 해체시키기 보다는 그것의 약점을 보완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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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6-01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뵙겠습니다. 스피박 흔적이 있어서 남깁니다. 요즘 관심이 있어 이어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혹 함께 나눌 부분이나 도움될만한 코멘트 나눌 수 있으면해서요. 직장인이구 취미삼아 보는 정도입니다.
 
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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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에 각인된 습속을 통해 바라본 한국인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장담컨대, 적어도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대학에 들어간 세대 가운데 인터넷에 글줄 꽤나 쓴다는 젊은이들치고 자신 있게 진중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 말할 수 있는 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999년 3월 진중권이 계간지 <당대비평> 봄호에 기고한 장장 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지배의 언어, 탈주의 언어”라는 글이 있다. 진중권 본인의 대학원 시절 문제의식에 대한 언어철학적 자기해답서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글에서 NL(민족해방)진영의 인식은 ‘맹목적 추종’으로, 이진경 고길섶 등으로 대표되던 <문화과학> 진영의 소위 ‘탈근대-맑스주의’는 ‘맹목적 거부’라는 이름으로 거세게 질타 당한다. NL 진영의 언어를 전대협의『불패의 신화』라는 책을 통해 ‘해체-비평’하면서 NL이 ‘시대의 변화에 초연한 영원한 언어’를 쓴다며 맹공을 퍼붓는다. 과학적 논리가 아닌 눈물, 감동, 품성 등 봉건적 언어를 통해 ‘불패의 신화’를 만들고, ‘남한의 식민지성’ 등 비과학적 현상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 PD 진영의 언어는 이진경의 글을 통해서 해체-비평 한다. 그에 따르면 이진경은 근대 비판의 형식으로 과거의 반성을 대충 얼버무리고 있으며 유토피아적 열망에서 디스토피아의 절망으로 이행함으로써 구체적ㆍ현실적 희망의 모색을 포기하고 있으며 가장 큰 문제는 아직도 프랑스산 원전을 숭배하는 낡은 ‘습속’에서 ‘탈주’하기를 거부하는 수행적 모순을 범하고 있다는 것. 진보진영에서는 그간 비판이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던 전대협-한총련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모자라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이진경을 그토록 가혹하게 비판한 덕분에 그는 한때 좌파 사회에서 소외-고립되기도 하였다.

 

 물론 그 외에도 그가 벌인 싸움은 한 두 개가 아닌지라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인식의 기초이고, 벤야민은 내 영감의 원천”이라고 자주 말하는 진중권은 그간 파시스트 박정희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사회의 정치적 국가주의와 경제적 자유지상주의와 문화적 보수주의에 대한 비판적 통찰력을 선보이는 다양한 스타일의 수많은 글들을 써왔다. 특히 지난 1∼2년간은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숱한 논란의 한가운데서 누구보다 많은 안티 세력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지난해 여름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그만두면서 공적(정치적) 글쓰기를 잠시 중단하겠다고 밝힌 그가 최근 인문학자, 문화평론가로 돌아와 한국인을 조망한 책『호모 코레아니쿠스』를 펴냈다.

 

 “한국 사람들의 독특성을 추적한 책입니다. 정체성이나 국민성은 매우 이념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하비투스’(habitus)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살펴봤습니다. 우리말로 ‘습속’이라 번역되는 하비투스는 특정 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인을 다룬 기존의 책들이 자화자찬이나 비하가 많은데, 지금 우리에겐 무엇보다 냉정한 자기인식이 필요합니다.” (2007년 1월 19일 국민일보 인터뷰)

 

 진중권이 명명한 호모 코레아니쿠스(homo coreanicus)는 근대화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들의 자화상을 일컫는다. 서구에선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 사이에 비교적 큰 시간차가 있지만 유례없이 압축ㆍ성장해온 한국에선 이 세 가지 시간대가 공존한다. 한국인의 몸 역시 세 가지 층위가 동시대에 존재한다는 것이 진중권의 지적이다.

 

 이에 따라 과시와 체면, 수직적 예법과 가부장적 생활을 여전히 받아들이면서도 인터넷 상에서 미디어의 주체가 되어 여론을 주도하는 기이한 현상이 연출된다는 것이다. 책은 한국의 근대화를 다룬 1부, 근대화 속에 내재된 전근대성을 해부하는 2부, 전근대성이라는 모순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생겨난 탈근대성을 분석하는 3부로 크게 나뉜다. 저자는 ‘박정희’ ‘국가대표’ ‘황우석’ ‘양반’ ‘명품’ ‘카리스마’ ‘된장녀’ ‘회사인’ ‘군대’ ‘놀이’ ‘짝퉁’ ‘디지털’ ‘문맹’ 등의 요소를 통해 한국인의 이미지를 냉정하게 그려낸다. 그는 이러한 한국사회의 분석을 통해 마지막으로 “너 자신을 디자인하라”라고 주문한다. 즉 압축된 한국의 급속한 근대화를 통해 미처 따라가지 못한 정신과 의식의 재배치 또는 디자인을 하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니체 식의 “너 자신을 발명하라”로 요약되는 존재미학적 삶의 방식은 이주노동자나 비정규직으로 표상되는 권력의 새로운 생체공학에 여지없이 포획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진중권의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미셸 푸코의 자기 통치의 개념이 존재한다. 푸코가 말년에 고민했던 것 즉 지배적인 관계에 의해 포섭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지배관계를 구성하지도 않는 일종의 생명윤리의 한 방식으로서 자기의 테크놀로지. 이 책을 읽으면서, 진중권과 더불어 그리고 푸코와 더불어 신체를 기계화하는 고통스러운 근대의 ‘군대화’적 습속을 해체하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미학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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