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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
김만권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생각 없음(thoughtlessness), 그것이 곧 악(惡)이며 죄(罪)인 것이다”
유대계 독일인으로서 20세기 저명한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의 실질적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1960년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받았던 재판을 취재하고 쓴『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의 후기에서 아이히만의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중략) 그는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히 생각 없음'(sheer thoughtlessness)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391쪽)
아렌트에 따르자면,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나치 체제를 돌리는 톱니바퀴 중 하나의 ‘톱니’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아이히만은 다른 일반적인 독일 국민들과 다를 바 없이 그저 자신의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한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의 그런 평범함이 그의 진정한 ‘죄명’이다. 즉 나치즘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이성을 가진 인간답게 자신의 언어로써 현실을 말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또 자신의 판단력에 기초해 현실을 판단하지 못하는 ‘생각 없음의 평범함’이 그의 ‘죄악’이었던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넘어 근대성 혹은 서구적 근대문명에 대한 근원적 통찰로 일컬어지는 아렌트의 그 유명한 테제 곧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되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책,『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 역시 아렌트의 저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다. ‘삶의 방식으로서 철학하기(생각하기)’라는 주제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서양철학사 전반에 적용하여 현실 사회와 정치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는 데 선구적 단초가 되어 준 철학적 화두 17개를 분석하고 있다. 아이히만과 같이 생각 없는 평범한 이들로 살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와 사회 세계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시민의 태도를 유지했던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현대의 다양한 철학자들이 품었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화두를 다시 살펴보는 작업을 통해, 독자들이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타자와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두 개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볼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좀 살펴보자. 제1부에서는 고대와 중세에 철학하는 삶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물음들이라 할 수 있었던 것들, 예컨대 철학하기의 본위로서 진리라는 문제설정, 그 연장선상에서 제기된 진리와 권력의 결합 문제,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 종교와 철학의 상관관계 등의 주제와 관련해서 소크라테스와 아렌트, 플라톤과 푸코, 아리스토와 아감벤 그리고 아렌트,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렌트가 호출되고 있다. 제2부에서는 신들이 퇴장하고 인간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근대의 여명기를 다루면서, 마키아벨리와 그람시, 홉스와 투키디데스, 로크와 노직을 통해 도덕과 정치가 분리되는 역사적 기원에서부터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 과정과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정당화하는 담론의 역사를 살펴본다. 제3부에서는 근대성 탐구의 본격적인 기초를 놓은 대표적 철학자들인 칸트와 헤겔을 중심으로 계몽과 도덕 형이상학 그리고 이성적인 것의 현실성 등을 깊이 탐구하고 있다. 제4부에서는 근대성에 내재한 위기와 비극을 예언했던 루소와 니체 그리고 맑스와 베버의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인간 사회의 불평등과 자본주의적 합리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계급 적대 및 인간 소외, 물화(物化) 등의 근대적 '실재'(實在, the Real)와의 대면을 주선하고 있다. 마지막 5부에서는 20세기 이후, 이성의 극단적 비이성화라는 근대성의 자화상과 이런 시대에 맞선 철학자들의 상이한 문제 해결 방식을 소개한다. 근대성은 끝나지 않은 계몽의 기획이라 외치며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구축을 통해 체계의 생활세계 식민화에 저항하고자 하는 하버마스, 인간은 정치에 참여함으로써만 비로소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고 주장했던 아렌트, 기본적 자유의 동등한 보장을 통해 정치적 평등을 실현코자 했던 롤즈, 해체를 통해 한 사회가 새로운 개념ㆍ방법ㆍ사유 등과 조우하면서 새로운 사회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한 데리다가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이 책은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들이 기본적인 철학적 지식을 맛보면서 모든 학문하기의 출발점인 철학적 사유의 방법을 익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또한 서양의 정치사상사에 대한 일목요연한 개념 정리가 다시 한 번 필요한 재학생들도 정독하면 새로운 시각에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성숙한 시각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기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기억하라,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