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 우리시대의 새로운 지적 대안담론 프런티어21 20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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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분이 오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잠시 오셨다가 다시 돌아가셨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시점에는 그분이 한국을 방문 중이지만, 독자들께서 이 리뷰를 읽고 계실 때쯤에 그분은 이미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안 계실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프랑스 파리8대학 철학과 명예교수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가 지난 11월 30일에 입국하여 12월 2일부터 12월 5일까지 서울대, 홍익대, 중앙대 등에서 차례로 강연을 하고 돌아갔다. 조중동과 같은 보수언론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중앙일간지가 그에 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이번 강연 소식을 전했고, 그 가운데 한겨레와 경향신문 그리고 연합뉴스는 비교적 상세한 인터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랑시에르라고 하면 여전히 ‘듣보잡’이라고 말할 분들이 많을 것 같다. 하여 간단히 소개하자면, 그는 최근 한국의 인문학계에서 알랭 바디우, 에티엔느 발리바르, 조르지오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안토니오 네그리 등과 함께  포스트-푸코 혹은 포스트-들뢰즈의 일환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유럽의 철학자 중 한명이라 할 수 있다.

랑시에르는 1940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그 세대의 다른 급진적인 청년들처럼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의 전쟁을 경험한 후 정치적 각성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최고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파리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erieure)에 입학하면서 철학적으로는 ‘샤르트르의 아이들’에 속했던 그에게 전환의 계기가 닥친다. 바로 현대 마르크스주의 이론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루이 알튀세르를 만나면서 철학적으로 일대 회심을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1969년 벵센느 자유대학에 철학과를 설립하는 와중에 알튀세르의 제자들과 커리큘럼을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하게 된다. 랑시에르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이 이론적 실천이라는 명분하에 ‘아는 자’ 즉 지식인과 ‘모르는 자’ 즉 대중들을 구분했기 때문이라는 것. 결국 1974년에 『알튀세르의 교훈』이라는 책을 통해 알튀세르를 ‘기성 엘리트 권력의 옹호자’라고 비판하면서 스승 및 동료들과 떠들썩하게 절연했고, 이후 어느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자신만의 독창적인 학문 활동을 벌여왔다.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19세기 유럽 노동자들의 문서고를 살피기 시작했고, 그 작업의 결과물을 1975년부터 1985년까지 『논리적 반란(logical revolt)』이라는 이름의 잡지를 통해 속속 발표한다. 여기서 ‘논리적 반란’은 억압받고 지배당하는 자들의 정치적 저항 혹은 반란이란 언제나 철저히 논리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뜻하며,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후 랑시에르의 작업에서 ‘정치적 주체화’라는 기획으로 확대되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지배 담론 안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이단적 주체들을 지식인의 이름으로 대신하거나 또는 대표하여 이들의 목소리를 찾고 이를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침묵하는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들릴 수 있도록 하는 것, 이 목소리를 공적 담론장 안에서 유통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랑시에르의 일관된 연구 기획인 것이다. 그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저작이 바로 이 책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이다.

12월 4일 중앙대에서 <동시대 세계의 정치적 주체화 형태들>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면서 랑시에르는 이 책에 담겨 있는 정치적 주체화에 관한 자기 생각의 핵심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2005년 가을 프랑스에서 일어난 방리유 이주노동자 젊은이들의 반란을 예로 들어, 이주자들ㆍ실업자들ㆍ거주지가 없는 자들 그리고 한국과 프랑스에서 모두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는 대학생들은 ‘사이에-있는’ 존재임을 주장한다. 이들은 자신들을 다양한 명목으로 차별하고 배제하는 사회를 향해 자신들도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그 사회 안에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배제한 사회와 자신들이 배제된 그 공간의 ‘사이’ 혹은 ‘틈'에서, 새로운 시민권(성)을 적극적으로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로부터 할당받은 몫이 없는 자들로서 그녀/그들은 “너희들이 전체에 기여하는, 너희들만이 가진 탁월한 능력을 보여 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에게 이 사회가 줄 몫은 없다”라고 말하는 사회를 향해 자신의 집단의 특수성이나 이해관계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특수성이 거부되든, 관용되든 그것은 이미 전체와 맺는 모종의 ‘합의’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몫 없는 자들은 “우리는 공통 특성을 갖고 있다. 정치는 특정한 능력이 아니라, 말하는 존재들의 평등을 참조한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몫 없는 자들은 그들의 집단을 공동체 전체와 같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랑시에르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은 ‘몫 없는 자’ 혹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서 스스로를 ‘전체’라고 긍정하는 능력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것에 관한 새로운 사유는 세계의 낡은 감각적 분배를 파괴하고 다른 종류의 분배로 변환시킴으로서 삶의 새로운 형태들을 발명하는 것과 직결된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감각적 체제에서 예술을 식별하는 활동이 결국 정치의 조건에서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는 능력과 정확히 조응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정치와 예술은 공히 감각(감성)적인 것을 새롭게 나누는 활동, 즉 감성적 혁명을 추구하는 활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다 상세한 것은 이 책과 함께 이미 출간된 그의 책 『감성의 분할』(오윤성 옮김, 도서출판 b, 2008년 2월)이나 향후 단행본으로 출간될 방한 강연문 모음집을 참고하기 바란다.] 

필자는 이번에 서울대와 중앙대 강연을 참석하면서 그를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청중들로부터 쉽게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천장을 한참 바라보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쉴 새 없이 답변을 쏟아내곤 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백발의 노인이 이국의 젊은이들을 향해 정치에 있어 새로운 감성의 질서를 발명할 것을 거듭 촉구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잠시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의 한계가 바닥까지 드러나고 있는 이 시점이야말로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 주체화의 과정 속으로 더욱 과감히 뛰어들어야 할 바로 그때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의 말대로 해방은 인민의 주체적 역량으로만 가능할 것임을 다시 한 번 믿어 보자, 라고 순진하게 되뇌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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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
김만권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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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각 없음(thoughtlessness), 그것이 곧 악(惡)이며 죄(罪)인 것이다”

 

유대계 독일인으로서 20세기 저명한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의 실질적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1960년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받았던 재판을 취재하고 쓴『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의 후기에서 아이히만의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중략) 그는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히 생각 없음'(sheer thoughtlessness)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391쪽)

 

아렌트에 따르자면,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나치 체제를 돌리는 톱니바퀴 중 하나의 ‘톱니’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아이히만은 다른 일반적인 독일 국민들과 다를 바 없이 그저 자신의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한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의 그런 평범함이 그의 진정한 ‘죄명’이다. 즉 나치즘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이성을 가진 인간답게 자신의 언어로써 현실을 말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또 자신의 판단력에 기초해 현실을 판단하지 못하는 ‘생각 없음의 평범함’이 그의 ‘죄악’이었던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넘어 근대성 혹은 서구적 근대문명에 대한 근원적 통찰로 일컬어지는 아렌트의 그 유명한 테제 곧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되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책,『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 역시 아렌트의 저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다. ‘삶의 방식으로서 철학하기(생각하기)’라는 주제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서양철학사 전반에 적용하여 현실 사회와 정치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는 데 선구적 단초가 되어 준 철학적 화두 17개를 분석하고 있다. 아이히만과 같이 생각 없는 평범한 이들로 살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와 사회 세계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시민의 태도를 유지했던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현대의 다양한 철학자들이 품었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화두를 다시 살펴보는 작업을 통해, 독자들이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타자와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두 개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볼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좀 살펴보자. 제1부에서는 고대와 중세에 철학하는 삶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물음들이라 할 수 있었던 것들, 예컨대 철학하기의 본위로서 진리라는 문제설정, 그 연장선상에서 제기된 진리와 권력의 결합 문제,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 종교와 철학의 상관관계 등의 주제와 관련해서 소크라테스와 아렌트, 플라톤과 푸코, 아리스토와 아감벤 그리고 아렌트,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렌트가 호출되고 있다. 제2부에서는 신들이 퇴장하고 인간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근대의 여명기를 다루면서, 마키아벨리와 그람시, 홉스와 투키디데스, 로크와 노직을 통해 도덕과 정치가 분리되는 역사적 기원에서부터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 과정과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정당화하는 담론의 역사를 살펴본다. 제3부에서는 근대성 탐구의 본격적인 기초를 놓은 대표적 철학자들인 칸트와 헤겔을 중심으로 계몽과 도덕 형이상학 그리고 이성적인 것의 현실성 등을 깊이 탐구하고 있다. 제4부에서는 근대성에 내재한 위기와 비극을 예언했던 루소와 니체 그리고 맑스와 베버의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인간 사회의 불평등과 자본주의적 합리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계급 적대 및 인간 소외, 물화(物化) 등의 근대적 '실재'(實在, the Real)와의 대면을 주선하고 있다. 마지막 5부에서는 20세기 이후, 이성의 극단적 비이성화라는 근대성의 자화상과 이런 시대에 맞선 철학자들의 상이한 문제 해결 방식을 소개한다. 근대성은 끝나지 않은 계몽의 기획이라 외치며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구축을 통해 체계의 생활세계 식민화에 저항하고자 하는 하버마스, 인간은 정치에 참여함으로써만 비로소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고 주장했던 아렌트, 기본적 자유의 동등한 보장을 통해 정치적 평등을 실현코자 했던 롤즈, 해체를 통해 한 사회가 새로운 개념ㆍ방법ㆍ사유 등과 조우하면서 새로운 사회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한 데리다가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이 책은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들이 기본적인 철학적 지식을 맛보면서 모든 학문하기의 출발점인 철학적 사유의 방법을 익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또한 서양의 정치사상사에 대한 일목요연한 개념 정리가 다시 한 번 필요한 재학생들도 정독하면 새로운 시각에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성숙한 시각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기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기억하라,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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