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세상을 움직이는 책 34
E. H. 카 지음, 박종국 옮김 / 육문사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대화’로서의 ‘역사’는 가능한가?

―E. H Carr의『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I. 요약

 

제1장. 역사가와 사실

Carr는 19세기 역사학과 20세기 역사학의 차이점을 다루면서 자신의 논의를 출발한다. Carr에 따른다면, 19세기 역사학은 랑케(Ranke, Leopold von)의 실증사학(實證史學)이 wloq하던 시대로 사실숭배(事實崇拜)의 시대였다. 역사가의 임무는 오직 사실만을 존중하고 자신의 주관을 배제하며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라고 랑케는 주장했다. 그러나 Carr는 이러한 사실 숭배의 오류를 타함으로써 20세기 역사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Carr는 역사적 사실이 단순히 과거 사실의 재현이 아니며, 역사가가 그 사실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해석에 따라 재구성함으로써 마침내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사가의 해석은 자신의 현재 입장과 가치관의 반영이므로 역사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해석의 결합으로 성립된다. 바로 이것이 Carr가 생각하고 있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다. Carr는 자신이 제기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역사란 “역사학자와 그의 사실들의 상호 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답변을 제시한다. 이 답변이 Carr의 역사에 관한 정의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 아니라, 가장 흔히 인용되고 있는 역사에 관한 가장 대중적인 혹은 ‘상식적인’ 정의이기도 하다.

 

제2장. 사회와 개인

Carr는 역사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사는 사회 속에 놓인 인간의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고, 사회는 개인의 의도를 초월한 힘과 움직임을 나타내므로 역사가의 관심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역사가에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데, “역사가 자신이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사회에 속해 있으므로 그 시대, 그 사회의 정신과 가치로부터 영향을 받아 역사를 해석하기 마련이라는 것”과 “역사가의 연구는 항상 과거의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현재 사회와 과거 사회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제3장. 역사와 과학과 도덕

Carr는 역사를 과학이라 부르는 것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다섯 가지 관점, 즉 ① 역사는 전적으로 독특한 것을 다루고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② 역사는 아무런 교훈도 가르치지 않는다. ③ 역사는 미래를 예언하지 못한다. ④ 역사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⑤ 역사는 과학과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내포한다.

Carr는 이러한 논점을 하나씩 차례로 검토하는데, ①에 관해서는 “역사는 일반화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것”이라는 반론을 편다. 역사의 일반화의 문제는 ②와도 관련이 되는데, “일반화를 통해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려고 하고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다른 일련의 사건에 적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확인한 경험적 사실 앞에서도 이미 충분히 논박이 가능하다. ③에 관해서는 “역사가는 과거의 사건을 일반화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일반화를 하면서 역사가는 특수한 예언은 아닐지라도 미래의 행동을 위해 타당하고 유용한 일반적 지침을 제시한다”고 Carr는 주장한다. ④에 대해서도 지식사회학의 논의에 기대어 “역사학을 포함한 모든 사회과학은 주관과 객관으로서의 인간, 연구자와 연구대상으로서의 인간과 관련되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을 엄격히 분리하는 인식론 자체가 이미 파산했다”는 주장을 편다. 덧붙여 자연과학 역시 관찰자의 주관 및 그가 속한 사회적 조건에 의해 실험의 결과가 항상 변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⑤에 대한 답변으로 Carr는 “역사가는 그의 문제 즉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신이나 초역사적 힘, 헤겔의 ‘세계 정신’,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등에 의지하지 말고 해결해야 하며, 역사는 말하자면 조커 없이 노는 트럼프 놀이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4장. 역사에 있어서 인과관계

Carr에 따르면, 역사가의 임무는 역사의 인과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의 연쇄를 선택하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선택의 기준은 역사가 자신의 해석에 달려 있고, 어떠한 해석이 가장 좋은가 하는 것은 가장 유익한 일반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합리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Carr가 말하는 일반화는 “모든 사건에 하나 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에 어떤 변화가 없는 한, 어떠한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신념”으로 정의되는 역사결정론을 거부하는 동시에, “역사는 어느 모로 보나 우발적인 원인의 소치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우연론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에서 인과관계를 다루는 열쇠를 마련해주는 것은 바로 목적이라는 관념이라고 Carr는 주장한다. 역사에 있어서의 해석은 언제나 가치판단과 결부되고, 인과관계는 해석과 결부되기 마련이다.

 

제5장. 진보로서의 역사

Carr는 과학과 경험을 통해 역사의 일반화를 주장하고 이를 다시 제1장에서 도출한 테제와 연관시켜,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과의 대화일 뿐 아니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이기도 하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미래의 목적들은 당연히 진보이며 과거의 사건들도 진보의 기록이다. 미래에 남겨진 또는 이미 과거 곧 역사에 기입해 놓은 진보라는 관념을 기준으로 하여 과거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의 주관성을 객관성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Carr가 말하는 객관적인 역사학자란 사회와 역사 속에 제한되어 있는 시야를 넘어 설 수 있는 능력 즉 미래에 시야를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역사학자이다. “역사에서의 객관성이란 ....... 오직 미래에 남겨진, 그리고 역사 과정이 전진함에 따라 발전하게 되는 그러한 기준에 의존하거나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제6장. 넓어지는 지평선

Carr는 현대의 특징을 인간의 자기의식 발달, 즉 역사의식의 발달에서 찾는다. 현대인들은 이성의 확대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개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는 과학, 기술,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전지구적으로 거대한 혁명이 일어난 시대이다. 역사학의 외부에 존재했던 대륙(아시아, 아프리카 등의)과 국민과 계급이 역사 속에 등장하여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II. 질문

 

1. Carr는 이 책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근대 이전의 사람들만 하더라도 근대 혹은 후기 근대(탈근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너무나도 다른 인생관 및 세계관을 가졌지 않는가? 그들이 세계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우리와 현저히 다를 텐데, 어떻게 그들과 우리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과거인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과거인들이 당시 그들의 삶 속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의 코드를 결정했던 그들 삶의 의미체계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Carr는 무작정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했는데, 대체 어떤 코드를 통해서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못하고 있지 않은가?

 

2. 그리고 대화란 대화에 참여하는 양자 혹은 다자가 상호 작용을 통해 상호 변화를 기대하고 이루어지는 것인데, 사실상 말이 없는 역사 속의 과거인들과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진정한 대화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묻고 우리가 답하는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Carr의 주장처럼, 어떤 사건이 역사적 사실로서의 지위를 갖느냐의 여부가 어디까지나 역사학자의 ‘해석’에 달린 것이라면, 역사학은 결국 해석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학자가 과거의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과거의 사실은 이미 역사학자에 의해 전유된 사실로서만 존재하게 되며, 결국 역사가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는 것 아닌가? Carr가 말하는 ‘해석’으로서의 역사라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실상 역사학자(인식 주체)에 의한 과거의 사실(대상)의 ‘지배’ 밖에 더 되는가? Carr가 말하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란 과거에 대한 현재(역사학자 자신)의 자문자답을 통한 과거의 ‘지배’에 다름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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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동아시아의 반란성’ 회복을 위한 미지(未知)의 역사 탐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2007년 5월

 

 지난 세기말부터 한국 인문학 및 사회과학계를 뜨겁게 달궜던 화두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동아시아 담론’이다. 다소 무리가 따르겠지만, 현재까지 한국 지성계에서 통용되는 동아시아 담론은 크게 세 종류로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한편으로 세계화에 적응하고 이 물결을 활용할 목적으로 ‘동아시아’ 혹은 ‘동북아시아’를 말하는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 민족국가 단위를 넘어선 문명의 차원에서 세계화의 획일화 논리에 저항하는 거점으로서 ‘동아시아’를 논하는 입장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이와 다른 시각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공통된 문화적 특징으로서 ‘유교’를 들고 서구의 근대성과 다른 동아시아의 ‘유교 자본주의/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세 번째 입장이 있다. 이렇게 내포와 외연이 각각 상이하여, 그 문제의식의 기원이나 실천의 방향성이 일관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는 동아시아 고유의 역사, 문화, 제도적 특질에 주목하면서 이로부터 대안적 세계 인식 및 실천의 준거를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 동아시아 담론의 출발점이자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왜 동아시아 공동체 혹은 동아시아적 삶의 방식이 다른 문화권의 삶의 방식, 특히 서구적 근현대의 삶의 방식에 대한 ‘바람직한 대안’ 후보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 앞에서 설득력 있는 답변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동아시아 문화’나 ’동아시아 역사’가 세계의 다른 지역과 주민들을 향해 인류의 미래적 삶의 방식에 관해 말해줌에 있어 물질적 번영이나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한에서의 ‘문화적 코드’나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의 부정적 근거로서 ‘역사적 트라우마’ 이외에 질적으로 다른 대안적 근거를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기에는 여전히 무엇인가 많이 부족한 듯하다. 그래서 어쩌면 이러한 빈약한 문화적 역사적 근거를 표면에 내걸고도 동아시아 담론이 하나의 실체로서 지금까지 학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실질적인 이유는 기존의 국가적인 중심을 강화하는 도구로서 동아시아 담론이 국가에 의해 정치경제학적인 의도로 함께 제기되어 왔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당장 한국의 노무현 정권만 하더라도 ‘동북아 균형자론’을 주장하며, 한-미 FTA를 그토록 막무가내로 서둘러 체결했던 것이며 앞으로 한-중 FTA, 한-일 FTA의 체결도 목표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기존의 유교 자본주의와 같은 동아시아 담론에서 말하는 아시아적 가치로서 가족주의, 공동체주의, 가부장적 관계 등은 이런 동아시아의 정치경제학적인 이권 획득을 목표로 설정한 가운데서 추천되는 가치, 즉 그 기저에 국가주의 및 경제성장의 논리가 자연스럽게 깔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담론 현상에 이의를 제기하며 21세기의 바람직한 동아시아의 모습과 동아시아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동아시아에서 국경을 비롯한 온갖 경계선을 극복하는 방법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책이 바로 박노자 교수의 신간,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이다. 이 책의 부제는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서”이다. 박노자 교수는 이제 ‘동아시아 담론’이 학자들만의 추상적인 논의를 벗어나 동아시아 민중들의 가장 현실적인 당면과제를 실감나게 묶을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감추어져 있었던 대안적인(혹은 좌파적인) 동아시아의 반란적 정체성을 새롭게 발굴하여, 돈과 국적이 모든 ‘관계’의 불가피한 매개가 되는 현실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의 근거로 선사하고 있다. 그는 동아시아 시대는 어떤 면에서 이미 도래했고, 어떤 면에서는 현재진행형임을 인정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지역화의 추세 역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인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지역화의 사회․정치․문화의 정체를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의 주체로서 시민인 우리 모두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의 ‘동아시아’를 원하고 있는가?

 

 저자는 반란의 뿌리를 동아시아의 다양한 저항적 역사의 전통에서 확인한다.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의 모습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진실이라 믿어온 동아시아의 감추어진 역사적 실재들, 현재와 같은 우리의 왜곡된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해온 이데올로기적 상식들을 비판하고 부정할 것을 주문한다. 중국 근세(명조)의 급진적 개인주의의 원조 격으로 ‘천고의 이단아’, “나는 쉰 이전엔 정말 한 마리 개였다”고 고백한 이지(이탁오), 승려의 몸으로 국왕에게 절할 일이 없다며 동아시아 역사에서 최초로 ‘종교 자유 선언’을 해버린 동진의 혜원, 만인의 욕구가 자유롭게 대변․충족되는 ‘공(公의 사회’를 꿈꾸며 군주 전제를 가혹하게 비판한 〈명이대방록〉의 저자 황종희, 병역거부와 반국가주의를 주창한 아나키스트의 원조 톨스토이를 등장시키고 그런 톨스토이 급진적인 사상을 ‘개인 수양의 이념’ 따위로 탈바꿈시킨 이광수와 최남선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각종 규율로 우리의 안팎을 구속하는 한편, ‘소비’라는 달콤한 당근과 ‘대중문화’라는 신종 ‘아편’으로 우리를 부단히 유혹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순치되어” 상실해 버린 “주체적 인간의 뿌리인 ‘반란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래로 우리 사회에 잔존해 있는 전근대적인 폐습, 군사주의와 국가주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부단한 저술 작업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노동의 도살을 막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복지사회로 점차 나아갈 것을 주장해온 박노자이기에 이 책 역시 우리에게 혁명을 위한 ‘의식의 준비’를 요청하고 있다. 차별과 폭력을 넘어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참에 박노자와 함께 ‘동아시아의 반란성’ 회복을 위한 역사 탐험에 나서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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