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모든 인간은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러한 불사(不死)의 존재가 될 능력이 있다. 거창한 정황에서건 작은 정황에서건, 중요한 진리를 위해서건 부차적 진리를 위해서건 상관없이 말이다. 그 모든 경우에 주체화(subjectivation)는 불사의 것이고, 인간을 만들어 낸다. 주체화를 제외할 때, 단지 생물학적인 하나의 종(種)이 남을 뿐이다. 그 미적 매력이 결코 자명하지 않은 ‘날개 없는 두 발 달린 짐승’이 바로 그것이다.”1)




1. 역사와 인간의 종언 그 이후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시대, 포스트역사 이후의 인간에 대한 가장 설득력있는 정의 중 하나를 나는 헤겔주의자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eve)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헤겔독해입문』1968년도 수정판의 한 각주에서 역사의 종말에 도달한 최후의 인간을 ‘동물화한’ 아메리카적 인간과 일본적 ‘스놉(snop)’, 즉 속물로 나누어 설명한다. 코제브에 의하면 소련과 중국은 근본적으로 미국과 다른 체제라기보다는 덜 발전된 미국, 아직 가난한 미국이다. 그들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선택하게 될 삶의 양태 역시 미국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인데, ‘역사’가 종언한 이후에 가능한 인간 삶의 형식은 결국 평범한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인 ‘동물로 회귀한 삶’일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런데 나는 (1948년에서 1958년 사이에) 미합중국과 소련을 여러 번 여행하고 비교해 본 결과, 아메리카인에게서 풍요롭게 된 중국인이나 소비에트인 같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소비에트나 중국인이 아직은 가난하지만 급속히 풍요롭게 되어갈 아메리카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적 생활양식은 포스트역사 시대의 고유한 생활양식으로, 합중국이 현실로서 세계에 현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인류전체의 ‘영원히 현존하는’ 미래를 예시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동물로 되돌아가는 것은 더 앞으로 닥칠 장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현전하는 확실성으로서 나타났다. 역사의 종언 이후 인간은 그들의 기념비나 다리나 터널을 건설한다고 해도, 그것은 새가 집을 짓고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며, 개구리나 매미처럼 콘서트를 열고 새끼 동물이 노는 것처럼 놀며 다 자란 짐승이 하는 것처럼 성욕을 발산하는 것과 같으리라.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러한 행위들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신 이렇게 말해야 한다. 풍요와 안전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될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 이후의 동물들은 그들의 예술적, 성애적, 유희적 행동들을 통해서 만족을 느낄 것이다.

내가 이에 대한 견해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최근 일본을 여행한(1959년) 후이다. 나는 거기서 유일무이한 사회를 볼 수 있었다. 왜 유일무이한가 하면, 일본이 (농민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봉건제’가 청산되고, 원래 무사였던 그의 후계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쇄국이 구상되어 현실화된 후) 거의 300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역사의 종말’이란 시기의 생활을, 즉 어떤 내전도 대외적인 전쟁도 없는 생활을 경험한 유일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무사의 현존재는 자기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결투에서조차) 그만두면서, 그렇다고 노동을 시작했던 것도 아니어서, 그 상태로 완전히 동물적이 되었다.

‘포스트역사의’ 일본문명은 ‘아메리카 생활양식’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아마 일본에는 더 이상 ‘유럽적’ 혹은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종교도 도덕도 정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는 생생한 스노비즘이 ‘자연적’ 또는 ‘동물적’인 소요를 부정하는 규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그 효력에서 일본이나 다른 나라들에서 ‘역사적’ 행동을 통해 태어난 그것, 즉 전쟁과 혁명의 투쟁이나 강제노동에서 태어난 규율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과연 노가쿠能樂나 다도茶道나 꽃꽂이華道 등과 같은 일본 특유의 스노비즘의 정점(이에 필적할 것은 어디에도 없다)은 상층 부유계급의 전유물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집요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모두 예외없이 완전히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하여, 즉 ‘역사적’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적’인 내용을 모두 상실한 가치에 기초하여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어떤 일본인도 원리적으로는 순수한 스노비즘에 의해 완전히 ‘무상無償한’ 자살을 행할 수 있다 (고전적인 무사의 힘은 비행기나 어뢰로 바뀔 수 있다). 이 자살은 사회적 정치적 내용을 가진 ‘역사적’ 가치에 기반하여 수행되는 투쟁 속에서 무릅쓰게 되는 생명의 위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최근 일본과 서양세계 사이에 시작된 상호교류는 결국 일본인을 다시 야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인도 포함한) 서양인을 ‘일본화한다’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2)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코제브가 ‘동물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동물적’ 상황과는 반대이다. 도리어 그것은 타인의 욕망밖에 없는 또다른 의미의 ‘인간적’ 상황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했을 때, 아메리카적 생활양식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첫 번째 단락의 ‘동물’과 일본의 스노비즘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세 번째 단락의 ‘동물’은 다른 것이다. 이는 두 번째 단락에 일본적 상황을 설명할 때 ‘완전히 동물적이 되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단락에서의 ‘동물’이란 가라타니의 말처럼 특정한 ‘인간적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고, 세 번째 단락에서의 ‘동물’이란 ‘자연적 상황’, 즉 순수한 의미에서의 ‘동물적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라타니처럼 일본의 스노비즘을 아메리카적 생활양식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적 생활양식’의 극단적인 형태로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할 것이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코제브가 미국에서 본 ‘동물적인 삶’이란 1950년대의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사회 속에서 형성되는 그리고 리스먼(David Riesman)이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1950)에서 말한 바 있는, 소위 ‘타인지향적인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3)

타인지향적인 삶은 성찰적 내면이 결여된 삶이다. 타인의 욕망에 의해 주체의 욕망이 계획되고, 추동되고, 소비되는, 오직 타인의 욕망만이 지배하는 그러한 유형의 자아는, 타자와의 대립과 투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근거를 정립하는 헤겔적인 주체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 종언을 고했다는 주장에는 인간이 탈역사적 ‘동물’이 되어 버렸다는 것, 즉 더 이상 고통이나 불행의 변증법을 알지 못하며, 오직 그러한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러야만 소위 ‘행복’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모르는 ‘내면성의 상실’의 상황에 이르렀다는 코제브의 시각이 담겨있다.

코제브의 주장에 의지하면서, 가라타니가 자신의 “근대문학의 종언”론에 대한 증거로 제시하는 ‘타인지향형’ 인간이란 것도 물론 ‘인정욕망’이 여전히 강한 상태의 인간을 가리킨다.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에도 부정성은 이전보다 어쩌면 더 강력한 형태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가라타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기에는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오로지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타인을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강한 자의식은 있지만 내면성이 전혀 없는 타입의 사람이 많습니다. 최근 젊은 비평가들은 그런 사람뿐입니다”라는 말을 통해, 그러한 ‘타인지향형’에는 내면성이 없는 부정성의 인정욕망만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인즉슨,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의사사건(pseudo-event)은 자아의 내면을 상실하게 만드는 허구의 산물일 뿐이며, 이러한 것이 보편화된 세계에서 더 이상은 근대적 인간의 내면성 따위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중소비사회의 영향(전세계의 아메리카화)에 따른 내면성의 상실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그것에 의해서만 오로지 추동되는, 주체성이 없이 부유하는 ‘타인지향형’ 인간만을 낳았을 뿐이라는 것이다.4) 

 

2. 남한산성: 자연화된 동물들의 세계

한편, 아감벤(Giorgio Agamben)의 경우, 앞서 코제브와 가라타니가 말한 ‘동물’이 영위하는 삶을 비오스(bios)가 파괴된 순수한 조에(zoē)로서의 삶으로 설명한다. 조에로 축소된 삶 혹은,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삶(la nuda vita)의 궁극적인 목표는 구원이나 주체화가 아니라 오직 ‘생존’이다.5) 그것은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던 유대인들의 상태이며, 바로 오늘 내가 읽은 김훈 소설 『남한산성』에서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조선의 ‘왕실’과 ‘묘당’들과 ‘백성’들의 상태라 할 수 있다. 김훈이 바라보고 있는 인간세계의 본질적인 상황으로서 ‘남한산성’은 비오스의 가능성이 폭력적으로 파괴되어버린 비극적이고도 불행한 탈역사적 ‘동물’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코제브가 말한 탈역사적 ‘동물’의 세계는 미국에서 시작된 몸만들기(physical fitness)에서 볼 수 있듯이 스스로의 몸을 조형하고, 성형하고, 개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자발적으로 조에로 축소시킨 전형적인 후기자본주의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훈의 소설도 결국은 병자호란 중의 ‘남한산성’이라고 하는, 젊음 혹은 생명을 가능한 한 연장할 것인가 아닌가라는 극단적인 선택의 분기점 앞에 놓여 있던 특정한 역사적 시공간을 도려내어 서사의 무대로 삼음으로써, 인간 삶의 본질을 ‘동물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전제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아무도 부정할 없을 것 같은 인간의 동물성에 대한 안쓰러운 긍정이, 그리고 그것에 뒷받침된 나날의 비루한 개체적 삶의 존엄에 대한 긍정이 궁극에는 거꾸로 스스로 옹호해 마지않는 바로 그 삶 자체와 삶의 존엄을 상실하게 만드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소설의 구조 심층에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김훈의 명백히 이데올로기적인 서사화의 전제 부분에서부터 이미 윤리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신하는 임금의 몸을 막아서서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 살아남은 백성들이 농장기를 들고 일어서서 아비는 아들을 죽인 적을 베고, 아들은 누이를 간음한 적을 찢어서 마침내 사직을 회복하리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하지만 적들은 이미 임진강을 건넜으므로 그 말의 크기와 높이는 보이지 않았다.”6)

 

김훈은 전쟁이라는 공간, 그것도 성안에 갇혀서 예정된 패배를 기다리고 있는 약소국 백성들의 삶을 통해서 인간 삶의 본질이 동물성 또는 자연화된 상태에 근본적으로 내던져져 있음을 강변한다. 자,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자 그 문제를 중심으로 한 세계의 현실 그 자체이기도 한 ‘남한산성’은 대체 어떤 곳인가? 그 산성은 병자호란 때 대피한 조선왕실이 10만 적군에 둘러싸여 있던 돌로 된 수갑이었다. 조선은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밖으로 나가 투항할 수도, 구원을 기다리고 앉아있을 수도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공간이다.

“참혹하여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다만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이다.”7)

다만 당면할 뿐, 다른 방책이란 있을 수 없는, 무력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공간이다. 주전(主戰)과 주화(主和)를 놓고 즉 임금을 향해 대의와 현실 사이에서 최종적인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서로 대립하는 조정의 신료들이지만, 어떻게 하더라도 결론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부딪혀서 싸우거나 피해서 버티거나 맞아들여서 숙이거나 간에 외줄기 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 터이고, 그 길이 모두 뒤섞이면서 세상은 되어지는 대로 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8)

최명길의 주화론은 현실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자연화된 육체의 생존을 확보함으로써만 가능한 지극히 동물적인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논리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9)

 

최명길은 치욕의 길을 죽음을 무릅쓰고 주장하는 비장미를 선보이지만, 막상 누군가가 청나라의 볼모로 끌려가는 상황 앞에서는 애꿎은 젊은 선비들의 의연한 선택을 수수방관하면서, 그 자신은 볼모의 대열에서 교묘히 빠져나온다. 김훈은 이런 최명길의 길을 결국 인조도 따라가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최명길과 극명하게 대립하며 척화주전론을 외쳤던 김상헌의 경우에도 일관되게 장엄한 운명의 길이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남한산성에서 빠져 나온 후에는 자신이 죽지 않기를 잘했다고 자위하는 다소 어이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훈은 김상헌과 최명길의(그리고 인조의) 길 중 자신은 “아무 편도 아니다. 다만 고통 받는 자의 편이다”라고 작가 서문에서 이미 밝히고 있지만, “김상헌은 성 안에서 목을 매달았을 때 죽지 않기를 잘했다”고 서술한 대목을 볼 때, 죽음을 불사함으로써 대의명분을 비타협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김상헌의 급격한 내면적 변화는 결과적으로 주화파 최명길의 노선에 그가 동화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데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김훈의 해석과 우의적 가치판단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김훈은 성 안에서 격렬한 노선투쟁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과는 무관하게 결국 강물처럼 덧없이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결국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생존에의 본능적 의지일 뿐임을 승인할 것을 독자들에게 은밀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애초부터 김상헌의 저항이라고 하는 것도 기실 새로운 사대주의를 낡은 사대주의로 고수하는 데 머물 뿐인, 속물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서 소설 속의 김상헌은 앞서 설명했던 코제브의 일본적 속물성의 김훈 식 버전일 뿐이라고 나는 본다.

최명길과 인조가 다만 살아남는 것이 목전의 과제가 되어 버린 동물에 다름 아닌 인간들로서, 자기보존의 자연화된 본능 앞에 무기력하게 투항하는 존재들일 뿐이라면, 김상헌의 경우는 철저하게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하여, 즉 ‘역사적’ 의미에서 ‘인간적’인 내용을 완벽하게 박탈당한 그러한 가치에 기초하여 살아가고 있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김상헌과 같은 속물적 인간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이 오직 전시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결국 타인지향적인 삶의 구조에 종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속물은 실존이 없으며, 고통도 쾌락도 행복도 불행도 모두가 타인의 시선 내지는 사회의 상징적 도덕(즉 이데올로기)에 의해 매개될 뿐이다. 김상헌의 자살기도가 아무리 숭고한 자기파괴처럼 보여도 그것은 사실상 타인지향적인 그리하여 비어있는 속물적인 퍼포먼스에 불과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3. 동물/속물에서 주체화된 인간으로

그렇다면, 오로지 인조가 외쳤던 “나는 살고자 한다”가 이 소설의 진정한 주제라고 했을 때, 결국 전쟁과도 같은 세상에서 오직 가치있는 것은 살아남는 일이라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한, 그러나 즉물적인 메시지를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있을 뿐이라는 결론만이 남게 된다. 이 소설은 단지 생존만이, 오직 유기체의 자기보존 본능만이 절대화된 인간형의 출현, 다만 살아남기(survival) 게임에 종속되어 오직 육체만이 감당할 수 있는 지속에 대한, 다소 히스테릭한 동물적 존재의 출현만을 나에게 시종일관 알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작가 김훈은 45일의 남한산성의 기록의 앞과 뒤를 완벽하게 절단하고, 그것을 영원한 현재로 고정시켜 놓은 채 역사를 자연 상태로 환원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존만을 갈구하는 벌거숭이의 날것 그대로의 삶이라는 것은 결코 문명 이전의 본래적인 자연 상태의 삶과 동일시될 수 없다. 적어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한산성’의 벌거숭이 삶은 본래적 의미의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법질서를 관장하는 정치권력 즉 청나라의 칸과 그 칸의 세계정치 전략에 무지하고 무력했던 조선의 집권층의 공모와 협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문명화된 세계 속에서의 자연 상태, 문명화된 세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자연 상태라 할 수밖에 없다. 문명의 한복판에 예외로서 존재하는 자연. 김훈은 바로 그러한 문명의 예외상태로서의 자연화된 상태를 마치 인간 역사의 본질적인 정상상태로 규정하고, 독자들을 그 세계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자연화된 동물들의 세계에서 그 동물성에 반대하는 김상헌 같은 인물을 대등한 비중으로 등장시키지만, 결국 김상헌은 동물성이 극단화된 속물성을 상징하는 인물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최명길과 인조의 길에 김상헌도 동화되어 함께 가게 되는 길, 급기야는 김류와 같이 시류에 적절히 영합하며 생존을 도모해가는 가장 기회주의적인 인물과 이시백이나 서날쇠같이 침묵으로 일관하며 오직 행동으로서만 말하는 존재들도 동참하는 길, 여기에 이 전쟁의 최후 승자인 칸과 용골대와 정명수까지 최종적으로 합류하게 되는 길, 바로 인간이란 불가피한 죽음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해 겨우 존재하는 것일 뿐인 하찮은 피조물에 불과함을 안쓰럽게 긍정하는 동물/속물들의 길이 이 소설의 궁극적인 목적지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야말로 내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윤리학이다. 나는 소설 『남한산성』에 등장하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이 진정성의 에토스를 상실한, 사는 것이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치욕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래서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나는 살고 싶다”는 동물적인 외침뿐인 그런 존재들로 그려지고 있는 것에 심한 불편을 느꼈다. 김훈은 살아남는다는 일이 불가피한 치욕을 통과해야만 현상유지가 가능한,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전(全) 일상이 포획된 한국 사회의 생존 본능의 전형화(典型化)된 모델을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비장하면서도 참혹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극단적 상황에 처한 인간의 조건을 성찰할 여지를 충분히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이 또 다른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여 독자에게 동물 혹은 속물로서의 삶을 그저 허무주의적으로 체념하라고 은밀히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독자 리뷰들을 훑어보면, 3-40대 남성 독자들이 이 소설을 가장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남성들은 늘 선택을 강요받으며,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하며, 밥벌이 지겨움에 몸서리치는 건 아닐까?”라고 하는 어떤 독자의 말처럼, 많은 이들이 이 소설에서 재현되는 서사적 현실을 실재 세계의 현실로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서사가 일정 부분 삶의 진실성을 담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당위적 현실이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나는 김상헌과 최명길 중 어느 편에 속하는가”, “그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살고 싶을 뿐이다”, 라고 외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성의 존엄과 진정성을 회복하는 길을 찾는 것, 역사와 현실을 수용소나 포위된 성첩과 같이 정의가 해체된 예외상태(혹은 비상사태)로부터 구원하여 정상상태로 이행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꿈꾸어야 할 미래가 아닐까? 생존의 본능적 욕구 충족에만 집착하는 자연상태의 동물화된 삶을 거부하는 것과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환상 가운데 존재하는 허구적 가치에 종속된 김상헌의 자살처럼 어떠한 내용도 지니지 못한 공허한 형식을 반복하는 속물적인 부정성의 활동도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화의 길을 이제 우리는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소설 『남한산성』은 그러한 상상의 경지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인간이 동물/속물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이 주체가 되는 순간에서라고 생각한다. 주체화의 순간은 진리와의 대면의 순간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김훈이 소설 『남한산성』을 통해 주장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외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탈(脫)이데올로기의 시대에서 인간은 여전히 동물 내지는 속물적인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말 필연적 현실일까? 아무리 그러한 현실이 우리를 압도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도 주체가 된 인간이 여전히 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가령, 정치적 혁명의 사건, 종교적 성스러움의 체험, 예술적 숭고의 경험, 아가페적 사랑의 교감, 학문적 탐구의 열정 등의 진리 사건과 인간이 대면할 때 인간은 주체화될 수 있으며, 죽음의 존재라는 동물의 운명을 따르지 않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인간의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아가 속물적 삶을 주조하는 이데올로기의 환상을 횡단함으로, 사회라는 대타자가 나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면서 강제하는 습속인 ‘도덕’을 넘어,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인 ‘윤리’를 창안해 나가는 그런 주체로의 전환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주
1)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윤리학(L’éthique)』, 이종영 역, 동문선, 2001년 11월, p.20

2) Alexandre Kojève,『Introduction to the Reading of Hegel (헤겔독해입문)』, 1947/1968, pp.436-437

3) 가라타니 고진,『근대문학의 종언』, 이성민 역, 도서출판 b, 2006년 4월, pp.70-72

4) Ibid., p.73

5) 양창렬,「생명권력인가 생명정치적 주권권력인가―푸코와 아감벤」,『문학과 사회』통권75호, 2006년 가을호, pp.242-243 참조

6) 김훈,『남한산성』, 학고재, 2007년 4월, p.19

7) ibid., p.39

8) ibid., p.16

9) ibid.,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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