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한 여인이 지금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혼자 있다.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과 팔에 상처가 났다.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 하나를 발견한다. 그 안에 들어서자마자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보고 만다.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어 버린 채로, 그녀는 그 끝없는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또 헤친 끝에 그곳을 겨우 빠져 나온다. 그 고깃덩어리들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려서, 수많은 가족들이 소풍을 즐기고 있는 광경 앞에 다다랐을 때 마침내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의 입에 피가 묻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 헛간에서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 먹었다는 사실을. 헛간 바닥, 핏물이 가득한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눈이 일순간 날카롭게 번쩍였다는 사실까지도 그녀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아무리 그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지우려해도 그것은 끊임없이 기억 속으로 틈입해 들어온다. 그러나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도, 분명 날고기를 이빨로 씹을 때의 그 감촉까지 기억하고 있는데도, 그녀는 그 장면 속의 얼굴이 자기 얼굴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설명할 수 없는, 익숙하면서 낯선 그 느낌,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그 느낌을 그녀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생생하였기 때문에. 그러나 그녀가 다시 한 번 말하건대, 그녀는 결코 자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상은 ‘영혜’라고 하는, 남편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그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악몽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혜’는 소설가 한강(韓江)이 새로 낸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의 title role을 맡은 여인이다. 소설가 한강은 10년 전 나무가 되고 싶어 결국 나무로 화분에 심긴 여자 이야기(「내 여자의 열매」)를 썼다. 그 여자가 마음에 맺혀 7년 뒤 연작소설로 되살려내게 되었다고 한다. 한강은 여자에 관한 세 편의 중편(‘채식주의자’ 2004,‘몽고반점’ 2004,‘나무불꽃’ 2005)을 발표했고, 그것을 다시 최근에 한 편의 연작소설로 묶어 늦은 책 『채식주의자』를 펴냈다.

 


  남편의 시선으로 서술되는 1부「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행동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말 그대로 미친 짓이었다. 남편에게조차 그녀는 이제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다.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한편, 육식을 거부하는 딸의 뺨을 때리고 입에 고깃덩어리를 억지로 쑤셔 넣는 아버지는 폭력적 남성성의 화신 그 자체를 상징한다(바로 이 아버지가 그녀에게 트라우마틱한 ‘원환상’을 제공하는 인물로 전체 소설 속에서 암시되고 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쳐 영혜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식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고 만다.

  2005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2부「몽고반점」은 속물적인 비디오아티스트인 영혜의 형부를 화자로 등장시켜 영혜가 남편과 이혼한 후 혼자 살아가는 시점(時點)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고 있다. 처제의 몸에 몽고반점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푸른 멍이 상징하는 숭고한 식물성을 도착적으로 탐미하나 그의 예술적 추구는 사회적 도덕의 금기를 위반하면서 끝내는 윤리적인 자기 파멸로 치닫고 만다.

  3부「나무 불꽃」은 동생 영혜와의 일이 있은 후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어린 아들 지우를 키워 나가는 언니 인혜의 시점(視點)에서 ‘식물-되기’를 갈망하는 동생 영혜의 남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채식주의자 영혜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것으로써 글을 마치겠다. 앞서 소개했듯이, 영혜는 악몽 속에서 고깃덩어리 즉 육식(肉食)으로 상징화된 남성적인 세계의 폭력들과 날마다 섬뜩하게 대면한다. 그래서 악몽에서 깨어난 그녀는 이제 그 날것의 실재(Real)에 직접적으로 압도당하지 않고자 현실에서 철저한 채식주의를 수행한다. 악몽에서 끊임없이 깨어나고자 선택한 일종의 환상적 현실이 바로 채식주의였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현실’에서 벌이고 있는 채식주의가 그녀만의 환상에 의해 구조화된 것이라면, 그 현실은 실재와의 대면으로부터 도피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악몽과 현실의 대립에서 환상은 현실의 편에 있으며, 그녀가 외상적인 실재와 대면하는 것은 바로 악몽에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악몽이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그녀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녀가 자신들의 이웃과 대립하며 채식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현실 자체가 자신의 꿈을(악몽에서 드러나는 실재를) 감당할 수 없는 그녀 자신을 위한 현실주의적 선택이라는 의미이다. 그녀가 악몽 속에서 대면하게 된 것은 현실보다 훨씬 더 강한 감응을 일으키는 외상(어린 시절 자신의 다리를 물었던 개를 아버지가 무참히 죽였던 그리고 그 죽은 개의 고기로 만든 국밥을 맛있게 먹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실재를 회피하기 위해 현실 속으로 ‘깨어’난 것이다.

  여기서 꿈이란 단순히 문자적으로 “수면 중에 일어나는 일련의 시각적 심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꿈이란 실재와의 대면을 피하기 위해 그것을 환상화하는 것일진대, 그녀는 계속 꿈(환상적으로 지각되는 현실)을 꾸기 위해 역설적으로 꿈(실재의 외상과 만나는 보다 현실적인 그것)에서 깨어난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How to read Lacan』, pp.89-93 참조)

 


  이렇듯 모든 종류의 육식을 끊고자 하는 철저한 채식주의를 거쳐 마침내는 스스로 식물이 되고자 했던 그녀의 제스처는 악몽 자체의 실재성, 환영적인 스펙터클의 형태로 출현하는 실재를 회피하기 위한 절망적인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영혜의 행위는 실성한 모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에 외상적인 기억으로 짙게 드리우고 있는 육식의 폭력성을 씻어버리기 위한 자기구원의 몸짓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 이러한 소설 속 대비구조는 거칠게 정리하자면, ‘고기=육식=동물성=남성성=폭력=파괴의 실재성’에 대비되는 ‘채소=채식=식물성=여성성=비폭력=구원의 현실주의’의 정점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적 성정치학의 관련성에 관한 논의는 이 분야의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캐럴 J. 아담스 (Carol J. Adams)의 『 육식의 성정치 - 페미니즘과 채식주의 역사의 재구성』 (The Sexual Politics of Meat , 1991) 을 참조하라)

 

  현(現) 시기 한국의 젊은 소설이 열어젖히고 있는 실재와 현실의 위상학이 어느 수준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수작(秀作)이라 생각하며 주저함 없이 친구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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