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실재의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Empire of the Real!”)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중요성을 부여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실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환기되며, 신비를 환기하는 질서 안에서 ‘사물들’을 결합시키는 사유에 의해 정당하게 환기될 수 있는 ‘신비’입니다.


1966년 5월 23일

르네 마그리트

(미셸 푸코에게 보낸 편지 중)




1. 기다림 그리고 만남


이 소설이 서점에 나오기 며칠 전에 내게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소설의 출간과 맞추어 ‘소설 낭독회’를 개최한다는 ‘김영하 닷컴’(http://kimyoungha.com) 운영자로부터의 메일이었다.

그러나 낭독회가 열리기로 한 8월 10일에 공교롭게도 내겐 중요한 일정이 잡혀 있었다. 당시 내가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와 관련한 지방출장이 하필이면 그날 잡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책이 출간되는 것과 동시에 곧바로 내게 배송이 되도록 인터넷 서점에서 미리 주문을 해두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되던 무렵부터 난 이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단 4회 연재를 끝으로 이 소설은 갑자기 연재가 중단되었고, 그로부터 약 1년이 경과한 시점인 지난 8월에 390페이지 정도의 두툼한 장편소설의 모습을 하고 출간이 된 것이다. 책을 받아보던 날, 약간의 흥분을 느끼며 박스를 뜯던 기억이 난다. 책을 꺼냈을 때, 일단 디자인부터 눈길을 끌었다. 책 꺼풀이 책을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꺼풀을 벗겨보면 책의 앞뒤 표지가 벨기에의 화가 Réne Magritte(1898-1967)의 1954년 작 ‘빛의 제국’으로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작가가 소설의 제목을 그 ‘빛의 제국’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문득 미셸 푸코가 쓴 마그리트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도 생각나고, 전에 읽은 김연수의 단편소설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4」도 생각나는 것이 어째 마그리트라는 이름만으로도 이 소설에 대한 흥미는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현대 초현실주의 회화 계열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마그리트는 모든 세계와 사물을 결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정의 내리려는 시도에 반대해서 신비의 불명확성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연작은 같은 시간대·같은 장소에서 하늘은 청명한데 땅은 어두운, 말 그대로 모순 된 현상이 너무나도 조화롭게 결합된 기이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분명 모순적인 현실이지만 우리는 별 다른 의식 없이 그럴싸하게 느낀다. 마치 꿈에서라도 본 듯한 장면이다.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에서 인지된 또 하나의 현실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몇 편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처음 그의 그림과 대면하는 순간 받았던 충격을 잊지 못할 것이다. 마그리트는 충격과 역설을 통해서 사고의 신비함을 드러냈으며, 상식적으로 전혀 예측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대상을 병치시키며 현실과 환상 간의 긴장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이 소설의 내용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작가는 소설의 제목을 그것에서 빌려 온 것일까? 증폭되는 내 호기심에 대한 답변은 소설의 독서과정 속에서 직접 찾기로 했다.

한편, 또 하나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다. 책의 앞뒤를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는 그 꺼풀의 앞면에 위 아래로 다시 덧 씌워진 작은 꺼풀, 거기에는 소설의 제목과 함께 이런 문구가 세로쓰기로 적혀 있었다. “기억하라,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지금 당장 나의 메신져를 로그인하면 발견할 수 있는 누군가의 메신져 대화명이기도 하고, 포털 사이트에서 명언 혹은 격언을 검색하면 개인 블로그나 미니홈피 등에서 쉽게 발견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문장 안에 들어간 단어들이 약간씩 다른, 몇 개의 버전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공히 이 말의 주인은 ‘폴 발레리’로 돌려지고 있다. 발레리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적인 자극이 중요할 뿐이다.

전에 한 번은 내가 알고 있는 그 프랑스 상징시(象徵詩) 계열의 대표자 폴 발레리(Paul-Toussaint-Jules Valéry)와 후기자본주의의 기업가적 주체담론을 특징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이 격언이 얼핏 봐도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이 말이 정말 발레리의 시편에 들어 있는 말인지 일부러 찾아 본 적이 있다. 역시나 찾을 수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발레리의 시집과 그에 대한 연구서는 물론이고 도서관이나 웹상에서 찾을 수 있는 관련된 연구 논문들을 아무리 뒤져봐도 발레리의 시에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자기계발의 주문에 걸려 살아가는 탈근대 자본주의의 시민들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황금률’로 즐겨 사용하는 이 말을 왜 냉소적 아이러니의 활력으로 넘치는 소설을 쓰는 데 주력해온 작가 김영하가 인용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할 뿐이었다. 냉소적 허무주의자 김영하와 후기자본주의적 계몽주의자 ‘발레리’(실존했던 시인이자 평론가 Paul Valéry가 아닌 네티즌들의 ‘상상’ 속의 그 폴 발레리!)라니?! 이 둘의 조합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 조그맣게 쓰여 진 책 소개의 문구, “단 하루 동안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산 한 남자의 이야기”. 짐작컨대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산다는 것은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을 순식간에 회복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잃어버린 기억이 현재의 나의 삶과 그다지 별로 충돌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면, 그런 건 애초부터 소설의 꺼리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뭔지 몰라도 분명 현재의 내게는 잊고 싶은 그런 류의 끔찍한 기억, 즉 충분히 소설의 소재가 되고도 남을 만큼 충격적인 과거와의 대면을 다루고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책의 표지에서부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과 발레리 아닌 발레리의 ‘문장’이 역시 나의 심상치 않은 예감 그대로 이 소설을 읽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어 주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소설의 서사를 중심으로 그 얘기를 해볼까 한다. 자, 나의 『빛의 제국』 ‘독후감상문’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2. 명령의 귀환, ‘실재’의 귀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즉시 귀환하라. 이 명령은 반복되지 않는다.” (39쪽)


이 한 마디의 문장 속에서 주인공 ‘그’(김성훈도 김기영도 아닌 ‘실재’의 ‘그’)의 과거가 드러나는 것과 동시에 이 소설의 중심 서사가 비로소 실체를 드러낸다. 20년 동안 그저 조금 위험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고만 믿었던 한 남자에게 2005년 3월 15일 아침 8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각에 갑자기 암호문 하나가 스팸 메일을 가장하여 날아온다. 명민한 ‘그’는 그 암호가 4번 명령을 의미함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4번 명령은 위에 보다시피 다름 아닌 본국으로의 귀환 명령이었다. 그렇다. ‘그’의 과거는 북에서 남으로 ‘옮겨 심어진’ 사람, 곧 김기영이란 이름으로 살았던 남파간첩 김성훈이었던 것이다. 3월 16일 밤 세시에 좌표 3674828에서 접선해야 한다면 이제 남은 시간은 대략 18시간 정도. 아! 이제 ‘그’는 하루 동안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 가족, 사랑, 직업과 추억,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

20년 간 자신이 김기영이라 믿고자 노력했고 최근 10년간은 정말로 그렇게 믿어버렸던 한 남자가 이제 그 김기영이라는 이름의 원래 주인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은 그 껍데기를 잠시 빌려 입은 ‘육체’일 뿐임을 만천하에 공개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것은 ‘그’의 육체가 전에 갖고 있던 이름인 김성훈 곧 평양출신의 남파간첩이라는 본래의 신분을 회복해야만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명령문에서 유독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귀환’과 ‘명령’이라는 두 단어였다. ‘귀환’하라는 명령이 주인공에게 내려졌다. 그리고 이 명령은 10년 만에 다시 내려온 명령이었다. 이 명령이 내려짐으로써 소위 386출신 영화 수입업자 김기영으로 살아오던 ‘그’의 삶 속에 잃어버렸던 과거가 한 순간에 되살아난 것이다. 다름 아닌 남파간첩 김성훈. 김기영이 잊고 지냈던 혹은 그러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 신분이자 이름이다.

김기영 아니 김성훈은 평양외국어대 영어과 재학 중 차출되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원반(구 695부대 130연락소)에서 4년간 대남 공작원 교육을 받은 뒤 스물두 살이던 1984년 서울로 남파되었다. 당의 명령에 따라 대학입시를 치르고 ‘1986년’ (그러니까 작가 김영하가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바로 그 해에) 연세대 수학과에 입학하고 곧바로 NL 계열의 학생운동그룹에 잠입한다. 그때 그가 경험하는 것은, 공작원 교육까지 받은 자신이, 소위 주사파라고 하는 남한의 철부지 꼬마 혁명가들에게 김일성 ‘주체사상’을 학습 받는 희극적인 상황이다. 위장 재외동포나 고정간첩, 자생적 공산주의자 위주의 공작원 양성 방식에 변화를 꾀하고 있던 당시의 평양은 잘 훈련된 엘리트 출신 공작원을 남한 대학의 신입생으로 입학시켜 학생운동세력과 함께 커나가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김기영이 된 김성훈은 그 실험 모델이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영화수입업을 하며 남파된 스파이들에게 그럴듯한 전사(前史)를 만들어주는 이른바 ‘포스트’로 암약한다.

그런데 그런 김기영 뒤의 감춰진 김성훈의 이름과 신분이 다시 돌아온 것과 동시에 현재의 김기영은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김기영의 삶 속으로 남파간첩 김성훈이라는 존재가 귀환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저 간명한 명령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명령의 귀환은 곧 (잃어)버린 자기존재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귀환 혹은 명령의 귀환이라고 하는 이 기표는 그 속에 단 하나의 기의만을 담고 있다. “너의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당장 귀환하라!”

이처럼 10년 만에 내려온 명령, 10년 만에 ‘그’에게 귀환한 그 명령은 곧 다른 어떤 곳으로도 아닌 오직 ‘북한’으로의 귀환만을 요구하는 명령이었다. 적어도 그것은 단순히 간첩 임무를 재개하라는 평범한 명령이 아니었다. 이는 소설 속에서 아이러니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부분이다. 10년 동안 주인공은 나름대로 잘 나가는 영화 수입업체의 사장이자 외제차 폭스바겐 딜러의 남편이며 천재소리를 듣는 소녀 바둑기사의 아빠인 김기영이라는 이름 뒤에서, 자신이 남파간첩 김성훈이라는 사실을 점차 망각해버리고 김기영을 오로지 ‘실재’의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인데, 평생 동안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두통을 느끼게 된 어느 날 아침 한 순간에 그 죽었던 남파간첩 김성훈이 다시 살아난 것도 모자라 지난 시절 김기영의 이름으로 만들어온 ‘그’의 삶의 모든 것이 다 파괴될지 모르는 상황이 온 것이다. 명령의 귀환이 김성훈의 귀환이며 북으로의 귀환의 명령이자 김기영의 죽음을 요구하는 명령이라는 이 끔찍한 상황 앞에서 ‘그’는 비로소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던 지난 10년간의(1996-2005) 비교적 편안했던 김기영‘만’으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명령을 수행하던 (김기영과 김성훈이 공존했던) 간첩으로서의 13년 세월(1984-1996)과 나아가 명령과는 무관했던 즉 남파되기 이전 북에서 김성훈으로‘만’ 살았던 시간들(1963-1984)까지 단 하루 동안 통째로 ‘복습’하게 된 것이다.

이후 전개되는 소설 속의 ‘그’의 힘겨운 하루 여정은 이렇다. 자신의 기록이 삭제되었으리라 믿고 있던 ‘그’는 명령의 전달 경위를 추측하며 고민에 휩싸인 채 서울 곳곳을 방황한다. 올라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에게 시간은 속절없이 점점 흘러간다. 한가로이 앉아서 사태를 관망하며 대책을 마련할 그런 여유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망각의 강 저 편에 있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아무런 예고와 절차도 없이 불쑥불쑥 ‘그’의 의식 한 가운데로 넘어 온다. 어머니의 자살로 얼룩진 불행했던 평양에서의 어린 시절, 자신보다 앞서 주체사상을 냉소하고 북한의 파국을 예상했던 아버지의 모습, 첫 사랑 정희와의 가슴 아픈 이별과 우연한 재회, 서울의 종로5가를 본뜬 평양의 세트장에서 치렀던 마지막 시험, 연세대 재학 시절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어린 친구들과 월미도로 놀러 가 나누었던 혁명에 관한 대화들, 대학 후배 소지현과 비밀을 공유하면서 나눈 섹스, 배신한 동료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기도 했던 악몽 같은 임무 수행의 기억들 속에서 ‘그’는 점점 촉박해지는 시간과 뒤따라오는 미행의 강박에 동시에 쫓기며 허둥댄다.

이쯤 되면 이 명령의 귀환은 단순한 귀환의 명령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 명령의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인가? ‘그’는 알 수 없었다. 독자인 나도 소설의 마지막까지 그것이 궁금했지만 작가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명령이 내려온 이유와 명령을 내린 주체도 알 수 없는 불확실성 그 자체의 명령, 그러나 4번 명령이라는 명령의 형식만으로도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명령. ‘그’를 따라 우리도 다시 한 번 그 명령을 되새겨 보자. “모든 것을 청산하고 즉시 귀환하라. 이 명령은 반복되지 않는다.”

한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에게 내려진 이 죽음의 귀환 명령인 4번 명령이 라캉의 ‘실재’(the Real)에 관한 다소 대중적인 정의에 비교적 잘 부합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실재’ 그것(物, the Thing)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다. 명령은 ‘그’가 온전한 김기영이 되어 지난 날 김성훈으로서의 신분과 정체성을 철저히 잊고 지냈던 사이에 ‘그’의 일상을 찾아냈으며, ‘그’의 힘과 지식으로는 그것의 정확한 기원이나 내막도 알 수가 없다. 한편, 우리는 ‘실재’가 우리 앞에 다가올 때 그것을 거부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다. ‘그’ 역시 명령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며, 또 무력하지 않는가? 그리고 한 가지 더, ‘실재’는 때로 상징적 질서(the symbolic order)의 경계를 완전히 침범해 들어오는, 위협적인 그 무엇이다. 명령은 ‘그’의 김기영으로서의 모든 삶을 송두리째 파괴해버리려 한다. 모든 것을 ‘청산하라’ ― 너 스스로 너의 아내와 딸과 사업을 ‘모두 파괴하라’. 귀환의 명령인 4번 명령은 결국 ‘그’가 김기영의 이름으로 있던 지난 22년간 남한에서 일구어 온 삶의 모든 것들을 삼키려 하는 죽음의 명령 그 자체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에서 ‘그’에게 전달되는 명령이 정확히 ‘실재’적인 것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명령의 귀환, 그것은 곧 ‘실재’의 귀환이었던 것이다. 이 명령의 귀환을 통해 ‘그’는 처음으로 김기영 이전의, 나아가 김성훈마저 너머 선 ‘그’ 자신의 ‘실재’적인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김성훈 혹은 김기영이라고 하는 상징적 이름을 가진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 이전에 피와 뼈와 살로 이루어진 ‘날 것’ 그 자체의 인간성 말이다.

라캉 정신분석학에서는 현실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구별을 중요시한다. 주체는 복잡한 언어적·상징적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스스로 ‘현실’이라고 상상적으로 믿고 있는 어떤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상징적 질서는 그의 주체의 존재 조건이며, 상상적인 것은 그의 버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세계 혹은 ‘현실’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무언가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의 세계 속으로 상징화되어 포섭될 수 없는 은폐된 그 무엇을 정신분석학은 외상(trauma)이라고 부른다. 주체가 드러내는 증상에는 이 외상이라는 ‘실재’가 그 ‘증상의 뿌리’로서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주체의 ‘현실’ 이면에 있는, 그 현실의 ‘실재’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실재’의 귀환 앞에서 그것을 외면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반드시 환상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다르다. 환상을 동원하여 외상과의 대면을 피하기는커녕 처음부터 ‘실재’에 맞서며 즉 명령에 정면으로 저항하다가 마침내는 결국 그 외상의 한 가운데로 직핍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인지 소설의 서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자.  

작가가 소설 속에서 얘기하고 있듯이, 『빛의 제국』의 주인공 ‘그’는 북한과 1980년대의 남한 그리고 21세기의 남한사회를 모두 경험하는 인물이다. ‘그’가 남파되던 1980년대 당시의 남한은 21세기의 현재 남한보다는 오히려 그때나 지금의 북한과 더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시스템, 국민들의 사고방식, 정치상황, 교육환경 등 모든 면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남과 북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였다. 그러나 21세기의 남한은 1980년대의 남한과는 사실상 ‘다른 나라’이다. 후자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2005년 서울이라는 시공간에 소속된 김기영은 이미 자본주의사회에 완벽히 적응한 인물이다. “배는 불룩 나오고 가슴은 빈약하며 팔에는 물살이 출렁대는, 남한의 평균적인 중년 남성이 되어가고 있는”중으로, “하이네켄 맥주와 빔 벤더스의 영화를 좋아하”고 “일요일 오전엔 해물 스파게티를 먹고 금요일 밤엔 홍대 앞 바에서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이다. 누가 봐도 간첩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지금 북한으로 돌아간다 해도 과거의 ‘김성훈’이 결코 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386세대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인물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떨어진 귀환 명령. 그것은 자신이 본래 “공작원이고 당과 수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노동당원”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동시에 일상에 함몰된 채 살아가던 권태로운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계기가 된다. 이 명령 앞에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완전한 ‘김기영’이라고 우길 수도 없게 된다. 명령의 귀환 앞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명령은 가르쳐준다. ‘그’에게 자본주의란 절반은 ‘학습’한 것이고 절반은 ‘체득’된 것일 뿐이라는, 즉 ‘그’에게 22세 이전의 남한 사회는 아무리 학습을 통해 다다르려 해도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미지의 것임을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원히 ‘그’가 자본주의 남한 사회의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서글픈 진실’을 말해줄 뿐이다. ‘그’는 단 하루 동안 인생의 전부를 반추하고 회의하며 ‘복습’한다. 영원한 국외자. 이것이 김기영도 김성훈도 될 수 없는 ‘그’의 ‘실재’인 셈이다. ‘그’가 자신의 이러한 ‘실재’를 부인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는 ‘실재’에 맞서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실재’로서 명령이 숨기고 있는 ‘그’의 외상 한 가운데로 직접 돌입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이상 남한의 김기영이나 북한의 김성훈이라는 상상적 주체의 환상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실재’와 정면으로 대면하기 시작한 것에서 ‘그’는 이미 윤리적 주체가 되는 한 가능성을 찾은 것이 아닐까? 그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할 것이다.

한편, 바로 여기서 내가 최초에 가졌던 한 가지 호기심의 실마리도 쉽게 풀렸다. 소설의 제목으로 쓰인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소설의 결말에 거의 당도한 시점인 밤 3시에 접선하기로 한 어느 좌표지점에 서서 ‘그’는 보이지 않게 존재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자신을 귀환시키기 위해 내려 온 잠수정의 동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면서 ‘그’는 자신의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한다.  감히 말하건대, 이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스무 살이었고, 평양에 두고 온 가족과 여자를 그리워했고, 다가올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했”던 그때의 ‘그’는 “인간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된 인간들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아주 잠깐이지만, 믿었”다. 그러나 “지금, 이 태안반도의 한 귀퉁이에서 자신이 그런 것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새삼 실감하”고 있으며, “맥라이트의 신호를 통해 그는 이십 년 전의 자신과 해안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그의 목전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조명탄으로 인해 하늘은 검은데 세상은 밝아진 모습, 그것이 지금 그가 마주하고 있는 해안선의 광경이자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속 이미지이며 결국 이 모든 것이 “혼자만 어둠 속인 혹은 혼자만 대낮인, 그런 세상”을 살아온 주인공 ‘그’의 삶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삶이 다름 아닌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연작이었다. 그 연작 속의 세계는 조심스럽게 뒤집혀 있다. 마그리트의 다른 그림처럼 대놓고 부조리하지 않고 자세히 살펴봐야 무엇이 이상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하늘은 청명한데 땅은 어둡다. 가로등이 켜진 거리, 나무들은 검은 그림자에 묻혀 있다. 집의 창문에서는 램프의 불빛이 은은히 비쳐 나오지만 밖은 엄연히 낮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사는 세상이 바로 그런 곳이 아닐까. 혼자만 어둠 속인 혹은 혼자만 대낮인, 그런 세상. 그러다 갑자기 어느 하루, 그것마저도 뒤바뀐다. 슬라보예 지젝을 패러디하여 말해본다면, ‘빛의 제국’은 그런 의미에서 정확히 ‘실재의 제국’인 것이다.



3. ‘냉소적 허무주의’의 진실: ‘나’는 생각하지 않거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그는 운명을 잊고 있었지만 운명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200쪽)


“이 소설의 기본적 지향점은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그리고 인간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서 한치 앞을 모르는 눈 먼 인간들의 운명을 다루고 싶었다.” 작가 김영하가 『빛의 제국』의 출간 직후 어느 문예지에 기고한 신작산문 가운데서 한 말이다. 앞서 나는 발레리의 시구로 일컬어지는 저 정체불명의 격언과 『빛의 제국』의 작가 김영하의 이미지가 쉽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 내가 김영하의 전작(前作)들을 읽어본 바로도 그렇고 그의 작품세계를 논하고 있는 여러 평론가들의 글을 읽어봐도 그런 것이, 김영하는 냉소적 허무주의를 세계관으로 가진 작가라는 것이다. 데뷔작인 단편소설 「거울에 대한 명상」(『호출』, 문학동네, 1997)에서부터 첫번째 장편소설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1996)를 거쳐 최근의 장편 『검은 꽃』(문학동네, 2003)이나 단편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창비, 2004)에 이르기까지 김영하 소설들은 한결같이 그 어떤 실존적인 무게도 실려 있지 않은 것처럼, 작가 자신이 소설쓰기에 대해 매우 가벼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작품의 주인공들이 제 아무리 진지하여도 정작 그것을 바라보는 최종적인 작가의 시선은 냉소적이기 이를 데 없었으며, 그것이 어쩌면 김영하의 소설이 작품의 내용과 무관하게 독자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활기였는지 모른다.

예컨대, 김영하가 변했다고 평가받기 시작한 장편 『검은 꽃』의 결말을 생각해보자. 작품의 거의 후반부에 가면, 국가에 복속되기 보다는 영원한 혁명을 지속하고자 했던 주인공 김이정이 괴상한 논리를 대며 과테말라에서 ‘신대한’이라는 국가의 건설을 제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이정의 논리인즉슨,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국가를 세워야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유 끝에 그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가를 작가는 친절히 설명해주는데, 예컨대 이런 것이다. “개인이 국가를 선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국가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는 일은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국가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다. 그런데 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국가가 있든 없든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지? 있든 없든 상관없다면 있어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하나쯤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우리 모두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어.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국민으로 죽은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무국적이 되려 해도 나라가 필요한 거라구.” (『검은 꽃』, 305-306쪽)

아무리 다시 읽어봐도 정말이지 “이정의 논리는 어려웠다”. 그런데 과연 김이정의 이러한 궤변에 가까운 발언이 작가의 목소리를 대언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과연 김영하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종국에는 역사허무주의나 역사에 대한 냉소주의를 포기하고 있는 징후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무엇이었던가? “그러나 그곳을 거쳐 간 일단의 용병들과 그들이 세운 작고 초라한 나라의 흔적은 발굴되지 않았다.” (『검은 꽃』, 321쪽) 자, 그렇다면 김영하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국가주의의 망령, 즉 ‘근대’와 ‘국가’가 만들어내는 담론의 힘이 한 개인의 삶과 정치적 태도에 얼마나 깊이 얼마나 끈질기게 관여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평론가 김영찬의 해석을 빌리자면, 김이정이 그토록 필요하다고 강변했던 그 국가는 결국 죽은 자조차도 제대로 호명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지는 그런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소설의 논리 속에 작동하고 있는 것은 물론 민족 또는 국가주의(nationalism)의 환영(幻影)을 짐짓 슬쩍 발 걸어 뒤집어버리는 작가의 허무주의적 냉소일 뿐이다. (「한국문학의 증상들 혹은 리얼리즘이라는 독법」,『창작과 비평』, 2004년 가을). 김영하는 그런 작가였다. 자신이 창조한 주인공마저 냉소하는 작가.

김영하의 『검은 꽃』이 그런 방식으로 역사, 국가, 민족, 근대 주체 등의 자명성을 유희적으로 뒤집어버리는 것은 작가가 한국사회의 근대적 현실을 대면하는 인식의 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그 이후 출간된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창비, 2004)를 들여다보더라도 분명한 것이었다. 이 소설집에 일관되게 흐르는 인식적 기조는 단순하게 정리하면 세상은 항상 개인의 진의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배반하면서 굴러가게 마련이라는 생각이다. 김영하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세상의 무겁지 않은 진실을 시종 그 안도 바깥도 아닌 경계선상에서 짐짓 시치미 떼면서 무관심한 척 건드리고 지나간다. 이러한 김영하의 태도가 현실과 역사에 지나치게 덧씌워진 엄숙한 환상을 탈각시키는 효과를 가지며, 그동안 한국소설에서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 온 역사주의와 국가(민족)주의, 좌파 이데올로기 등을 상대화하여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문제는 역설적이게도 역사와 근대, 국가와 주체 등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상대화하는 아이러니의 유희 자체가 거꾸로 그에 대한 더 이상의 집요한 사유와 성찰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어쩌면 작가가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을 그 ‘아이러니의 질주’에 지나치게 탐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인 동시에 작가 자신은 유일하게 그 활기찬 탐닉의 향유 속에서, 탈환상의 아이러니 속에서 제외되어 작중 인물들이 벌이는 ‘아이러니의 질주’마저도 결국은 허무한 것에 불과하다며 냉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냉소적 허무주의는 『빛의 제국』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더 급진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검은 꽃』의 김이정은 모든 불변의 가치에 대한 믿음과 환상이 언젠가는 결국 모두 멸(滅)하는 것에 불과한다는 사실을 믿은 ‘환멸’의 주체였다. 이는 페터 슬로터다이크 식으로 말하자면, 계몽된 냉소적 이성의 주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멸이 다가오고 있다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새로운 가치가 만병통치약처럼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시대는 냉소적이 되었고, 이 새로운 가치도 단명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누구나 당사자가 될지 모른다는 당혹감, 시민 가까이 숨쉬는 것, 평화 보장, 삶의 질, 책임 의식, 환경 친화, 이 모든 것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적절한 때를 기다릴 수는 있다. 냉소주의는 그런 우리 뒤에서 장황한 회담이 끝나고 사태가 진행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맥 빠진 근대성도 ‘역사적으로 사유할’ 줄 알지만, 우리 자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의미 있는 역사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다.” (『냉소적 이성 비판』1, 에코리브르, 2005)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세상의 모든 가치와 이데올로기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계몽된 근대적 주체들이 유일하게 냉소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나르씨시즘적 애착이건 아니건 간에, 세계와 자기 자신의 냉소적 거리를 확보해주고 지탱해주는 동력은 결국 자기 자신의 계몽된 ‘이성’이다. 냉소적 이성만이 행사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환멸은 환멸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이 예외적인 존재 곧 자아가 전제되어야만 작동이 가능하다. 『검은 꽃』의 주인공 김이정은 이미 오래 전에 개인은 국가를 선택할 수 없다는 말 속에서 국가-시민 사이에 설정된 강한 이데올로기적 폭압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국가로부터의 완전한 탈주를 꿈꾼다. 그러나 결국 국가라고 하는 것이 불가항력적인 인간적 삶의 조건이라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앞에서 그가 택한 논리가 다름 아닌 국가가 있건 없건 간에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나’의 존재 가능성이었다. “나라가 있든 없든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지? 국가가 계속 되건 아님 사라지건 간에 ‘우리’는 하여튼 영원할 것인데 무엇이 걱정인가? 그러니 국가를 세우는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러한 김이정의 논리 속에는 ‘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전제되고 있다. 강요된 가치의 바깥에서 오직 자기 자신만의 이성으로 세계의 부정성에 침해당하지 않는 ‘나’를 정립하고 영원히 존속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 말이다.

그런데 『빛의 제국』의 주인공 ‘그’는 이와 다르다. 그는 허무함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인간이다. 그의 그러한 허무의 근원에는 세계와의 냉소적인 지적 거리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주체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고 있다. ‘나’를 결정하는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닌 ‘나’가 통제할 수 없는 ‘나’ 바깥의 운명적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주체에게, 그 세계 바깥에서 대타적으로 정립되는 ‘나’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김이정과 김기영(혹은 김성훈)이 전혀 다른 주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난다. 후자의 주체는 세계 바깥의 상상적 ‘나’의 정립이란 한낱 자기기만이나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알아버린 주체인 것이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그’는 운명을 잊고 있었지만 운명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명령의 귀환 아니 ‘실재’의 귀환을 통해서 주체의 운명적 진실 곧 ‘허무’를 깨닫게 된 것이다.

계몽된 자아의 냉소적 이성을 자랑하고 과신하며 이 세계로부터 유아독존이 가능한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상상했던 『검은 꽃』의 주인공 김이정에게 작가 김영하가 선사한 냉소의 반전이 『빛의 제국』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김영하 소설의 주인공은 『빛의 제국』에서 이렇게 또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냉소적 이성 혹은 환멸의 주체에서 냉소적 자아 혹은 허무의 주체로. 예컨대, 『검은 꽃』의 김이정이 소설의 서두에서 이미 죽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소설의 맨 뒤 부분에 나오는 김이정의 희망찬 ‘건국 선언’도 작가에게는 여지없는 냉소의 소재일 뿐이었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제 『빛의 제국』의 ‘그’에게 작가가 보이는 태도는 어떤 것인가? 사실상 ‘그’에게는 작가의 냉소가 필요조차 없는 것 아닌가? 이미 ‘허무’를 경험한 주체이니 말이다. 명령이 귀환한 그날 하루 동안 ‘그’가 배운 것은 바로 이 ‘허무’가 아니었을까? 명령의 부정을 통한 ‘나’의 정립이 마지막 도달하는 곳에는 ‘김기영’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김성훈’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 오로지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그래서 그곳이 ‘빛의 제국’ 혹은 ‘실재의 제국’이라는 것을 깨달은 주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따라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는 라캉의 새로운 코기토(cogito) 선언은 바로 이러한 무의식적 주체의 조건을 일컬어 한 말이 아닐까?



4. ‘윤리적 존재’로 다시 사는 하루를 위해.


윤리적 존재로의 길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유와 책임을 다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면, 그 자기 자신과의 관계 정립이란 결국 나르씨시즘적인 상상적 공간의 바깥으로 걸어 나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세계 자체의 진실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주체의 고통스런 자기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정립된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자유와 책임의 긴장을 항시 유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인간 곧 윤리적 존재로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빛의 제국』의 ‘그’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막강한 세계의 질서를 우선 승인하되, 한편으로 현실 너머의 실재 앞에서는 현재의 모든 상상적 ‘나’가 해체되고 만다는 허무주의적 체념을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고, 그러나 다시 그것이 ‘나’의 결승점이 아니라 출발점임을 직시하면서, 마침내 그렇게 고통스럽게 정립한 나 자신과의 관계에 이제 자유와 책임을 다해 충실하게 임함으로써 윤리적 인간의 존재양식을 창안해나가는 여정.  놀랍게도 그런 윤리적 인간의 존재양식이 창안되는 예가 바로 이 소설 속에 이미 있었던 것이 아닌가? 명령이 귀환한 그날 하루 동안 ‘그’가 전(全) 인생을 다시 살며 마침내 ‘빛의 제국’을 보기까지의 그 여정 속에 말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6-21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과 타자간의 대화를 통한 윤리적 실천들. 종결불가능성의 자아와 세계라는
바흐친의 이론..과 닮아있네요. 님의 리뷰만으로도 책을 한권 읽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