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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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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역사를 거스르는 단 하나의 사랑 그리고 밤의 노래”

달력이 5월에서 6월로 넘어가고 있던 그날 밤, 그곳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인터넷 뉴스에서는 친절하게도 그날이 처음 물대포가 등장한 날이라고 알려준다. (나중에 책을 사보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모 일간지의 요청으로 취재를 나온 길이었고, 나는 시청 앞에서 집회를 마치고 양산동으로 돌아오려던 차에,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친구의 “여기 혁명전야야!”라는 흥분된 전화 한 통을 받고, 발걸음을 되돌려 시청에서부터 안국역을 지나 경복궁 동십자각을 향해 숨 가쁘게 뛰어가던 길이었다.

2008년 5월 31일 밤, 청와대를 향하고 있던 촛불의 흐름은 크게 세 갈래였다. 사직터널 쪽에서 내려오는 촛불이 효자동 길로 향하면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고, 안국동에서 동십자각으로 향하던 시민들도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또 청운동 길로 향하는 촛불도 경찰과 대치중이었다. 10만 인파가 청와대 길을 완전 포위한 형태였다. 내 기억에 우리가 만났던 곳은 대략 경복궁역 근처 효자로 입구쯤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그를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의 소설이 나올 때 마다 꼭 사서 읽어보는 4만 열혈 독자 가운데 한 명이었을 뿐. 당시 나와 같이 있었던 사람은 우리 학교 문창과를 졸업한 선배였는데, 나는 그에게 “방금 봤어? 김연수가 지나갔어!”라고 말했었다. 김연수 작가와 잠깐 인사를 나누고, 양해를 구해 사진을 한 장 같이 찍었다. 김연수 작가에게는 그날 우리의 만남이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 순간이 앞으로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작가는 소설의 후기에서, 그날 밤 촛불시위대와 함께 연좌하는 중에 전경들 앞에서 대중가요를 부르며 춤추던 젊은이들을 보았다고 술회한다. 그 젊은이들의 모습은 그에게 “이것이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계라면, 반드시 복수할 필요는 없다. 당장 내 눈 앞에서 정의가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는 긍정적 세계관을 갖도록 했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날 밤 효자동에 그와 함께 있었고, 그와는 조금 다르지만 혁명과 우리네 일상의 삶에 관해 내 나름대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밤이 노래하는’ 것을 함께 들었고, 그것은 (작가가 자주 말하는 대로)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열망 가운데서 하나의 세계로 연결된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김연수가 누구던가. 그는 스스로를 “소설을 쓰는 소설가이다. 프로 소설가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소설에 인생을 건 진짜 소설가라는 것. 더불어 어느 젊은 평론가의 무덤덤한 증언대로, 1~2년에 한 권씩 책을 내는데, 그러고 나면, 당신이 책 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상이 주어지고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그런 부류의 작가이다. 소위 89학번 세대의 가장 지성적인 작가이자, 그 세대의 감각과 문제의식을 누구보다도 첨예하게 드러내온 작가 김연수가 학부생 시절부터 구상해온 주제를 다듬고 또 다듬어 이제야 완전한 버전으로 세상에 공개했는데, 그것이 바로 장편소설『밤은 노래한다』이다. 김연수의 팬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를 ‘21세기 한국문학의 블루칩’이라고 평가하는 문단에서 그토록 오래 기다려온 작품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누구는 이 소설이 가슴 뜨거웠던 어떤 젊은이들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고, 어떤 이는 조국광복과 계급해방이라고 하는 숭고한 꿈을 품은 채 일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혁명에 투신했던 젊은이들의 엇갈린 운명이 빚어낸 참혹한 비극의 역사를 소설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는 “친구를 죽일 수 없는 아이의 세계에서, 친구라도 죽일 수 있는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자 그런 성장의 중심에 놓여있는 사랑에 관한 낭만소설이라고 말한다. 아무려면 어떨까? 이 소설 안에는 혁명도 있고, 이념도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도 있다. 그리고 그 혁명과 이념의 역사를 통과했던 젊은이들의 성장과 운명도 있으며, 그 모든 역사와 운명마저 거스르고자 했던 처절한 사랑도 들어 있다.

1930년대 초반 만주 혹은 간도지역의 항일운동사 혹은 공산주의 혁명사의 한 귀퉁이에서 민생단 즉 일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동지들의 손에 죽어나간 500여명의 혁명전사들이 있었다. 적군인 일본군이나 이민족인 중국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같은 조선인들에 의해 그것도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식민지 조국을 해방시키고 무산계급이 독재하는 공산주의국가를 함께 세우고자 동고동락했던 혁명동지들의 손에 몇 년에 걸쳐 조직적으로 숙청되었다면 그보다 더한 비극이 또 있겠는가? 단순히 야만적이었고 혼란스러웠던 시대적 조건의 탓으로 돌리기엔 무엇인가 섬뜩한 보편적 역사의 진실이 감추어져 있을 것만 같지 않은가? 작가는 그 역사의 진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진실 뒤에 가려진 더 놀라운 삶의 진실을 슬그머니 보여준다. 작가는 그것을 두 여인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나를 데려가우. 이번에는 진짜 바다를 내게 보여줍소.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며 어떠한 사람으로 되며 사람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잘 압지. 그러니 내게 진짜 바다를 보여줍소. 그럼 나는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당신의 바다로 들어가는 작은 오솔길이 되겠슴둥.” (149~150쪽)

“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은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 ....... 사랑이라는 게 우리가 함께 봄의 언덕에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이라는 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이겠네요. 그런 뜻일 뿐이겠네요.”
(324~325쪽)


이 작품과 더불어 이제 소설의 이야기로 역사를 수집하는 아키비스트(archivist) 김연수의 작업은 정점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김연수에게 있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역사를 거슬러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 속의 주체가 그렇게 새로운 자신만의 고유한 역사를 구축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역사를 대체한 픽션으로의 역사 즉 '사랑'의 계보학을 구축함을 의미한다. 김연수 단편 중 최고의 걸작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후회는 없어"라는 외침으로 유서를 끝맺은 그녀가 그러했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남양군도까지 끌려갔던 할아버지가 남겨준 한 장의 사진, 그리고 이번에 나온 『밤은 노래한다』의 이정희가 김해연에게 남긴 편지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바로 역사 뒤에 숨겨진 하나의 진실, 곧 사랑에 관해 노래하는 꿈의 조각들이었던 셈이다. 소설가 김연수에게 역사의 실천은 사랑을 향한 픽션의 절차이다. 그 픽션의 절차 가운데서 그는 타인의 이야기에 다가가는 문학의 윤리를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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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맛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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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맛있고, 소설은 재밌어야 한다”
―오현종 소설집, 『사과의 맛』(문학동네 2008년 9월)

우리는 흔히 동화라고 하면 순수한 어린이들이 읽는 교훈적이면서 감동적인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동화의 역사를 알고 나면 동화란 것이 그저 어린 아이들이 읽고 받아들이는 문화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20세기 역사학의 거장 필립 아리에스(Phillip Aries)가 가족 사회학을 혁명화한 저작 『어린이의 세기』에서 잘 밝혔듯이 어린이를 하나의 독립적인 생애 주기로 개념화하고, 그에 따른 어린이만의 고유한 의상과 놀이, 그리고 그들에게 ‘적합한’ 교육적 실천의 형성은 철저히 17세기 이래의 서구 역사의 산물이었다. 이 어린이의 탄생 시기에 맞추어 함께 등장한 문화적 산물이 바로 동화라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고전으로 분류되는 동화의 문제점을 체계적으로 성찰함으로써 고전 동화가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 가치로 믿게 했던 것들이 사실은 불의하고 부당한 세상에 순응하게 만드는 은밀한 이데올로기였음을 폭로하는 연구들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저명한 동화 연구자 잭 자이프스(Jack Zipes)에 따르면, 동화는 문명화 과정을 따르는 동시에 전복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문명화 과정 중의 담론투쟁의 산물로서, 동화는 아이들을 사회화함으로써 그들을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시민으로 만드는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동화는 문명화 과정에 내포된 정치와 윤리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급진적인 문학 장르이기도 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가령 『행복한 왕자』 등의 동화를 지은 오스카 와일드는 안데르센의 이야기를 역전시킨 동화들 속에서 안데르센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뒤집고, 성서의 리듬과 어법을 차용해 오히려 기독교의 엄격한 규약에 반기를 든다. 프랭크 봄도 『오즈의 마법사』 속 유토피아를 통해 문명화 과정의 모순을 꼬집었다.

이러한 동화가 갖고 있는 이중성의 미학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보여주고 있는 요즘 소설이 바로 오현종의 신작 소설집 『사과의 맛』이다. 물론 오현종의 소설은 어린이용 동화가 결코 아니며, 차라리 성인용(?) 동화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듯싶다. 우리에게 친숙한 어린이용 동화, 이를테면 안데르센의 동화인 『라푼젤』과 『인어공주』, 그림 형제(Jacob Grimm & Wilhelm Grimm)의 『헨젤과 그레텔』, 동양의 고전 『서유기』, 그리스로마 신화 중 하나인 「판도라의 상자」 등을 서사 구조상 거의 유사하게 패러디하되, 등장 인물들의 성격을 바꾸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현재 한국의 일상적 공간 안으로 이동시켜 동화가 갖고 있던 이데올로기적 판타즘을 충격적으로 전복하는 식이다. 소설가 오현종에 의해 원작 동화가 그 내적인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만 본래 위치하고 있던 맥락인 낭만적 세계를 벗어나는 순간 이제 이야기는 불륜과 사생아 탄생, 십대들의 성적 일탈, 고부간 갈등, 농촌으로 시집온 이방인 여성들의 학대받는 삶, 장애인들을 착취하는 사회, 가부장주의, 사채업의 폐해, 채무관계로 뒤얽힌 가족, 노인 유기, 성매매 등을 다루고 있는 포스트모던 리얼리즘 소설의 단계로 진입한다.

사실 소설가 오현종은 이미 지난해 발표한 장편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에서 헐리우드 영화 <007 시리즈>를 패러디해 여성의 자아 찾기를 독특하게 소설화하여 많은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소설적 재미는 물론이거니와 그 주제의식도 묵직한 작품이었는데, 이번의 신작 소설집에서도 아홉 편의 단편작품을 통해 그 저력을 더욱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어릴 적 추억 속에 세계명작동화로 남아 있는 『라푼젤』을 패러디한 단편 「상추, 라푼젤」에서 라푼젤과 왕자(왕씨 성을 가진 ‘자’라는 이름의 소년)의 사랑은 고등학생들의 일탈적 ‘불장난’으로 탈-낭만화된다. 라푼젤의 어머니의 방해를 따돌리며 긴박하게 나누던 뜨겁던 사랑은 결혼과 동시에 금세 식어 버린다. 왕자는 “머리를 짧게 자른 라푼젤은 꼴도 보기 싫다”면서 나이트클럽 인어쇼에 넋이 나가 있다. 그런데 그 인어쇼의 인어는 가족과 남편에게 버림받고 지중해 나이트클럽에서 노예처럼 착취당하며 춤을 추고 있는 한 장애인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 뒤에 실린 단편 「수족관 속에는 인어가」를 통해 확인된다. 그리고 그 장애인 여성의 자매는 알고 봤더니 어촌의 노총각 어부 집에 시집왔지만, 탐욕스러운 시어머니에 의해 우물에 갇힌 채 날마다 진주로 된 눈물을 흘려내야만 하는 가련한 이방인 여성이었음을 또 다른 단편 「연못 속에는 인어가」가 보여준다.

오현종의 동화 전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에 공포영화로도 패러디된 바 있는 그림 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제목 그대로 리메이크한 단편 「헨젤과 그레텔」은 한 집안의 장녀가 경제력이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 동생을 놀이동산에 유기하는 내용이다. 사실 그림 형제의 원작 동화도 부모에 의해 버림받은 아이들의 복수극이었는데, 작가는 이를 당대 한국적 맥락에서 사채로 인한 가정경제의 파탄으로 인한 노부모 및 장애인 유기 사건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다른 소설들 역시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이 아닌 영화나 SF소설 등의 보다 대중적인 서사 양식들을 차용하되 그것을 현실감있는 사회사 속에 위치시켜 본래의 서사가 갖고 있던 이데올로기를 내파하고 새로운 윤리적ㆍ정치적 성찰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미학적으로 성공한 소설 즉 재미있는 소설만이 정치적으로도 성공한 소설이라는 아도르노의 격언이 그대로 들어맞는 사례라고나 할까. 장담하건대, 올 가을에 읽지 않으면 정말 후회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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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핑거
김윤영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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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소설”

인간은 “세계의 무대 속에서 바라보이는 존재”이다, 라고 말한 것은 라캉이었다. 이 말은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결코 바라볼 수 없으며 그래서 또한 나의 주체를 형성하는 동안은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나’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계 속에는 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이 나의 바깥에 존재하며 나의 존재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바로 그런 우리네 삶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러나 매우 유쾌하게 보여주는 소설이 있다. 건조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로 사랑이나 헌신이라는 외피의 안쪽에서 들끓는 또 다른 욕망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김윤영의 세 번째 소설집 『그린 핑거』에 실린 두 편의 단편 소설(「그린 핑거」, 「전망좋은 집」)과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내게 아주 특별한 여인」1~5)을 일컬음이다.

지금까지 소설가 김윤영이 상재한 두 권의 작품집(『루이뷔똥』, 『타잔』)에 담긴 소설들은 대부분 ‘행복에 관한 강박’에 사로잡힌 자본주의의 우울증 환자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여기에는 불행의 종합선물세트라 해도 좋을 생활고, 소통 불능, 단자화된 삶, 고독과 비애 등 온갖 불행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물론 이러한 불행한 인생의 단면은 『그린 핑거』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제 작가는 우리를 행복/불행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이중적 삶의 구조로 인도하는 타인의 시선을 정면으로 문제 삼아 개개인의 욕망의 향배를 넘어 사회적으로 구조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교환구조를 투시하고 있다. 나아가 그렇게 자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이 만나고 어긋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삶의 또 다른 이면을 발견한 주체들의 진로에 대한 성찰을 정교한 서사적 틀 속에 잘 담아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소설집의 표제작인「그린 핑거」의 써니와 「전망 좋은 집」의 혜령은 모두 스위트 홈의 꿈 즉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로 구성된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간직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을 취하는 여성들이다. 선천성 기형을 가지고 태어나 성형수술로 그 콤플렉스를 극복해온 언청이 써니 아니 순희나,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출산한 아이를 잃고 남편마저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혜령이나, 아무리 모두가 부러워하는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어도 여전히 그 내면의 세계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결핍을 규정하고 또 그 결핍을 채우고자 욕망하는 불행한 영혼들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 허나 우리가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녀들에게 그 시선마저 없었다면 그녀들의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그녀들이 인지하는 보이지 않는 어떠한 것이 그녀들로 하여금 욕망을 촉발시켰고 또 그렇게 삶을 구성하고 조율할 수 있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들은 그러한 보이지 않는 시선을 통해 시선 너머의 어떤 것을 자신의 욕망으로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시선으로 인해 자신을 욕망의 주체로 구성할 수 있었다. 김윤영의 소설이 드러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삶의 역설적인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대상을 바라보듯이 대상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아는 것, 즉 나의 바깥에 있는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며 그의 시선이 나의 존재 자체를 구성할 수도 있음을 아는 인식의 차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블루오션 연애학」, 「너무 고결한 당신」, 「Heartbreaking Love」, 「초콜릿」, 「모네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연작소설「내게 아주 특별한 연인」1~5는 타인의 시선 가운데 자신의 자아를 수립했던 주체들이 그 시선을 의식하면 할수록 오히려 타인의 시선을 넘어서는 복합적인 인물이 되어 감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겠다. 타인의 시선 너머로 주체가 상상하는 채워질 수 없는 어떤 대상으로 인한 영원한 결핍이 주체의 욕망을 형성하는 가운데 그 욕망을 통해 김윤영 소설의 주인공들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이다. 최초의 이야기에서 서술자에게 있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 그려지는 인물이 다음 이야기에서는 다른 서술자에게 미처 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다음 이야기에서는 어긋나 버린 두 남녀의 사랑 뒤에 감추어진(당사자들도 잘 몰랐던) 서로의 진실이 드러나는 식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물들의 변화와 진화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삶 앞에서 겸손해지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랑이야기는 맞는데 (기존의) 연애소설과는 좀 다르고, 여성의 자의식에 관한 소설이라고도 하지만, 소설 속 여성들의 자의식을 붙들어 놓는 것이 다름 아닌 사회적 시선이므로 그 시선의 이데올로기를 사회학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작가 말대로 다 집어치우고 그냥 낄낄거리면서 읽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유쾌하게 다 읽고 보니 가슴에 남은 건 인생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작가의 날카로운 메시지랄까.

그러나 저러나 어쨌건 결론은 이 가을에 경쾌하게 읽을 수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성찰의 여지를 남겨주는 김윤영의 소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우리에겐 ‘블루오션’의 독서임에 확실하다는 것. 그거면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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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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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홍규, ‘소설적 진실’의 용기

―손홍규 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2008년 4월)











문학이론가로 자신의 이력을 시작한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첫 저서인『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에서 소설 속 등장인물의 대상을 향한 욕망이 타자(혹은 대상) 자체가 아닌 타자와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중개자를 통해 갖게 된 ‘모방적’ 성질의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소설적 진실’로, 반면에 욕망이 중개자에 대한 모방적이 아닌 자발적이라고 믿는 태도를 ‘낭만적 거짓’으로 명명했다. 이후의 지라르는 문학에서 인류학으로 그 관심을 이동해갔고 사실 소설보다는 성서, 신화, 고대 비극, 인류학적 기록지 등을 통해 의식들의 심리적 투쟁인 모방욕망이 문명 형성의 원리가 되는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회적·집단적 폭력이 동반되는 것을 발견한다.



적어도 문화인류학자 혹은 신학자로 변모한 후기 지라르의 사유까지 염두에 둔다면, 초기에 그가 문학이론가로서 말한 ‘소설적 진실’의 궁극적 함의는 “주체의 모든 욕망이 대상 그 자체가 아닌 중간의 매개자를 모방하는 데서 비롯된 것임을 현시하”는 것을 넘어선 보다 복합적인 층위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소설적 진실과 낭만적 거짓의 대립구도가 후에는 성서적 진실과 신화적 거짓의 대립구도로 대체되는 데서 확인되듯이, 사회적·집단적 폭력을 야기한 잠재적 원천으로서의 모방욕망과 그러한 모방욕망에서 기인한 폭력의 현실태로서 희생양 제의 즉 사회적 배제와 차별의 메커니즘이야말로 그가 말한 인간사의 문화적 진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일찍이 문학비평가이자 불문학자인 김현은 지라르의 이론에 관해 ‘모방욕망’과 ‘희생양’이라는 두 키워드를 묶어 그 핵심을 ‘폭력의 구조’라고 말한 바 있다(『폭력의 구조』, 김현 문학전집 제10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소설적 진실’로서 폭력의 구조에 대해 궁금했지만 감히 지라르에게 묻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 답해주는 소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4월에 출간된 손홍규의 두 번째 단편집 『봉섭이 가라사대』에 실린 10편의 소설들을 일컬음이다.



소설가 손홍규는 누구인가? 자주 인용되는 프로필대로라면 그는 이런 소설가이다. “2001년에 등단해 소설집 『사람의 신화』와 장편 『귀신의 시대』를 출간하여, 공동체적인 삶이 파괴된 채 약육강식의 원칙만이 존재하는 폭력적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으나 내면 깊이 변혁 의지를 품은 인간 군상을 희화화하고 풍자적으로 그려낸 작품들을 발표해온 75년생의 젊은 소설가” 그런데 그와 동년배 어느 비평가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우리 세대가 아닌 것만 같습니다.”(신형철, 「비인(非人)의 인간학, 신생(新生)의 윤리학」) 또 다른 어느 젊은 비평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손홍규 소설을 잘 읽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젊음과 문학의 젊음(새로움)을 거의 등치시키는 관습적 사고, 그리고 과거 리얼리즘 미학의 계보로 환원시키고 싶어지는 정치적 무의식과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김미정, 「비루함과 존엄 사이, 도약하는 반인간·비인간」). 궁금하지 않은가? 도대체 어떤 소설이기에....



이 소설집에는 2005년부터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발표한 단편 10편이 실려 있다. 한 편 한 편이 그야말로 주옥같다. 길어봐야 40 페이지, 짧게는 30 페이지 내외의 소설들로만 엮었음에도 한 편씩 읽고 나면 어지간한 장편소설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묵직한 현실감과 삶에 대한 성찰의 중압감을 경험하게 된다. 마음 같아서야 열 편 모두를 상세히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 제약 상 그럴 수는 없고, 필자가 보기에 이 소설집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판단되는「이무기 사냥꾼」을 중심으로 손홍규의 소설이 드러내는 ‘소설적 진실’의 의미를 간략히 짚어보고자 한다.



「이무기 사냥꾼」에는 사면발이와 동거하며 일용잡부직을 전전하는 용태와, 밀입국자이면서 불법체류자인 알리가 등장한다. 알리는 파키스탄에 있을 때 죽은 척하면서 목숨을 부지했던 경험이 있다. 알리가 ‘죽은 시늉’을 통해 캐나다 입국심사장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아파트 건설현장의 두둑한 일당을 챙기는 것을 목격한 용태는, 급기야 그 재주를 이용해서 함께 사업을 벌일 생각을 하게 된다. 이주노동자를 배제하는 악랄한 사회적 법망의 틈새를 이용하여 불법으로 돈을 버는 일을 해가던 두 사람은 끝내 서로를 배신하는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한편, 용태의 독백을 통해 알려지는 용태의 부모의 삶과 그 내력은 그야말로 우리 시대 민중의 사회적 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용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누이라 생각했고, 따라서 그들을 ‘상피붙은 자식’이라는 딱지를 붙여 마을로부터 완전히 배제시킨다.



그러나 기실 그것만이 배제와 폭력의 근거는 아니었다. 근친상간의 혐의는 표면적인 것이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의 증오심의 심층에는 용태의 부모들이 빨치산과 그 빨치산의 자식을 보호한 이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레드컴플렉스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적대감은 다시 이들이 가진 땅을 선망하는 공동체의 탐욕과 결합되어 매우 합리적인 그러나 잔혹한 폭력으로 자행된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역사와 집단적 레드컴플렉스(그리고 이면의 물질적 탐욕)는 ‘상피붙은 자식’이라는 ‘다른 사람’ 즉 이방인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는 동력으로 기능한다. 용태의 부모는 공동체의 위기와 붕괴를 막고 이들의 결속감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필요한 희생양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용태의 아버지는 죽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음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폭력을 견뎌내고, 어머니는 흙집에 시체처럼 누워 말없이 눈물만 흘린다. 이것이 이들이 택한 그들만의 생존법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용태 부모의 이야기와 알리의 이야기는 용태를 중심으로 매개된다. 그렇다면 “힘없고 나약한 것들은 일쑤 이처럼 죽은 체하게 마련”(73쪽)이라지만, 살아남기 위해 그저 “개새끼맨키로 납작 엎져서”(84쪽) 삶을 견뎌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과연 인간다운 삶이란 가능할 것인가? 이런 이들이 자발적으로 인간이 아닌 ‘동물-되기’나 윤리정치학적 ‘탈주선’을 그리고 있다는 식의 긍정적 전망을 내놓는 것은 사회적 배제보다 더한 담론적 폭력을 가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손홍규의 인물들이 택한 반인간 혹은 비인간으로서의 동물 되기는 사회적 폭력에 의해 강제된 조건 속에서 주체들이 선택한 불가피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손홍규의 소설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저러한 유형의 비정상적이고 비일반적인 ‘사람’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공동체 밖의 공간 즉 “개인 외부에 있고, 강제적 힘을 부여하며,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통제하는 행위양식, 사고양식, 감정양식의 총체”로서 발명된 우리의 ‘사회’ 그 자체라는 것이다. 나아가 바로 이러한 ‘사회’가 작동시키는 은밀한 합리적 폭력의 기원과 메커니즘을 탐사하고 있는 것이 그의 소설이다.



손홍규의 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들은 모든 공동체들의 바깥이라고 할 수 있는, 즉 공동체들의 사이의 공간에서 살아 있으되 죽은 존재와 다름없는 이른바 ‘산주검’(un-dead)으로 남겨져 있는 이들을 증언하고, 그들을 그렇게 배제하고 침묵케 하는 사회적 폭력의 메커니즘을 추적하여 폭로하는 ‘소설적 진실’을 성취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쓸 수밖에 없었는가, 라는 물음이 들 수밖에 없는 그의 소설들, 부조리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전복과 위반을 도모하는 ‘반(反)영웅’도 되지 못한, 결코 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 그의 소설 주인공들이다. 어느 비평가의 지적대로 비유컨대 이것은 ‘카니발’은 커녕 차라리 ‘비참극(悲慘劇)’에 가까운 뉴-웨이브 리얼리즘 소설이라 해야 할 것이다(김영찬, 「비루한 동물극장」, 『비평극장의 유령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이 우리네 삶의 엄혹한 진실인 것을. 폭력의 구조를 은폐하고 현실을 기만하는 이데올로기적 수사로 가득찬 요즘 소설들의 ‘낭만적 거짓’의 길을 거부하고, 비루한 존재들의 빈곤과 절망, 가학―피학, 침묵과 망각, 배제와 차별의 망상으로 버무려진 비참극 속에서 숨길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실재를 대면하는 ‘소설적 진실’을 선택한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테리 이글턴이 말했듯이, 비극이라고 하는 장르는 운명의 관철을 통해서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밖에 존재하는, 존재의 엄엄한 힘을 보여주는 가장 탁월한 문학적 재현양식이다.



비극적 장르의 시각에서 무언가 비틀린 상태를 성찰한다는 것은 성찰을 통해 그 비틀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지만, 그 비틀림의 힘은 성찰의 과정을 비틀리게도 할 만큼 심층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소설적 진실과 마주하는 소설가의 그런 비틀린 태도에는 역설적으로 성찰적인 측면과 정직의 측면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 사회의 비틀린 상태를 정직하게 성찰하는 소설적 진실을 향한 비극적 사유의 용기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진실과 마주할 용기 있는 자만이 이 소설집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 준비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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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주제 사라마구, 『눈 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를 읽고

 





 


1. 모두 눈이 멀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진다. 달리던 차들이 일제히 멈춘다. 잠시 후 파란 불이 켜지고 다시 차들이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중간 차선의 선두에 있던 차 한 대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뒤쪽에 늘어선 차들은 미친 듯 경적을 울려대고, 급기야 일부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멈춰 선 차의 창문을 거세게 두드려댄다. 안에 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리고 한 마디, 아니 정확히 세 마디를 내뱉는다. “눈이 안 보여!”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눈이 멀어버린 최초의 그 남자로부터 그와 접촉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실명에 빠지기 시작한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소위 “백색실명의 공포”가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다. 그렇게 눈먼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소에 격리시키기 만 할 뿐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집단, 눈먼 이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폭력적인 군인들, 눈먼 사람들 각자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동물성의 행태들, 무기를 소유함으로써 수용소 안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범죄 집단, 도시에 넘쳐나는 약탈과 쓰레기들, 아내가 보고 있음에도 본능에 따라 다른 여자와 몸을 섞고 마는 의사 등 자본주의 현대문명의 이면에 존재하던 야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눈 먼 자들의 도시”는 말 그대로 지옥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단 한 사람, 안과 의사의 아내만이 눈이 멀지 않는다. 이 세상 모두가 눈이 멀었는데 단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만일, 신이 있다면 그녀의 눈만 멀지 않은 것이 과연 신의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그녀는 아직 볼 수 있어 운이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게 되어 가장 불행한 사람인가? 답은 본다는 것과 보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해명하는 데서 찾아질 것이다.

 

 


2. ‘보는 것’이란 무엇인가?

 

이 소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질문 꺼리로 던져준다.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 어느 지역, 어느 국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에 보편적으로 해당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장소 등의 명칭을 보통명사로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도 그러한 구체적 개별성의 흔적을 철저히 지우고,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를 보편적인 층위에서 자리매김하려는 작가의 의도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인간들이 모두 ‘눈이 멀었다’는 사실 그 자체일 뿐이다. 도대체 인간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가? 눈이 멀었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이 멀기 이전 상태 즉 인간이 ‘눈을 통해 사물을 본다’는 것의 문제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의 의미가 먼저 분석되지 않고서는 ‘눈이 멀어 볼 수 없다’라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약간의 사회과학적 상식 혹은 철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다’는 것의 의미가 자연스럽고 생리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보는 행위는 신체 기관으로서의 눈이 수행하는 시지각 이상의 것으로서, 그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내용들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고, 이에 따라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회는 사람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일정한 ‘보는 방식’(way of seeing)을 규정한다. 따라서, 시각 또는 보는 방식이란 항상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학습되는 것이란 측면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눈이 멀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신체 기능의 일부인 시력의 감퇴 혹은 상실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적어도 눈이 멀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그동안 지녀왔던 모든 사회적 능력을 상실했다는 의미이며, 어쩌면 현대사회 안에서 만들어진 특정한 종류의 인간이 완전한 죽음을 경험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각의 능력 자체가 사회 문화적으로 매개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개인을 일정한 방식으로 주체로 구성하는 사회적 과정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는 것인데, 만일 그 능력이 상실된다고 한다면 개인은 더 이상 사회 속에서 자신을 주체로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체란 인간 개인의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다양한 현실적 관계들 속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이상 자신의 눈에 지각되는 가시적 세계 안에서 자신을 시각적 주체로 위치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곧 주체화의 실패를 의미하며, 그 결과는 주체의 소외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인간이 시각의 능력을 통해 접하는 가시적 세계 속에서 주체 위치란 주체가 가시적 대상들을 바라볼 때 획득되는 위치이다. 이 위치를 많은 철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은 ‘시점’(the point of view)로 정의해 왔는데, 시각이 사회 문화적으로 매개되고 주조된다는 것은 특정한 시점이 개인에게 해당되고 이 시점에서 가시적 대상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개인이 ‘보는 주체’(the seeing subject)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는 행위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며 가시적 세계 속에서 ‘보는 주체’를 구성한다면, 우리는 이 소설을 시각의 정치학적 견지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소설은 시각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의 도시가 처한 위기와 혼란을 통해 그동안 인간이 얼마나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회의 지배적이고 당연시된 ‘보는 방식’에 길들여져 있었는가를 문제제기하고, 나아가 이데올로기가 특정한 방식으로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듯이, 보는 방식 역시 특정한 방식으로 주체를 구성해왔음을 철저히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을 상실한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서 있었던 모든 주체의 기반을 상실했던 것이며, 이것은 육체적 차원의 죽음이 아닌 사회적 의미에서 주체의 죽음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와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이 “두려움이 실명의 원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이 두려움은 지금까지 소유해 온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다름 아니다. 본다는 것은 항상 “~을 본다”는 것이므로, 그 대상을 필연적으로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제 대상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시각을 통해 대상의 직접적 소유를 확신해왔던 인간은 그 모든 것이 부재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겪을 수밖에 없다. 본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안다는 것으로 이어지며, 다시 안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지 못함은 내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물질(자본 및 상품)에 대한 사적 소유는 필수불가결의 기본적인 생존 양식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물질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와 자신들이 소유한 물질의 허구적 가치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재를 확인하게끔 의식화해왔다. 맑스주의자들은 바로 그것을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눈이 먼 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동안 인간이 사회 속에서 주체를 형성하고 타자 혹은 대상과의 관계를 형성해왔던 방식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3. ‘인간’이란 무엇인가?

 


시각을 상실한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소유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닌 전혀 다른 조건에서의 인간으로서의 주체화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이 소설이 근본적으로 실험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인간화의 길의 가능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둠은 물지도 않고 공격하지도 않”지만 어둠 속에 갇힌 인간들은 서로를 물어뜯고 난도질하는데, 과연 인간은 자신들 앞에 닥친 이 어둠의 백색 공포를 이겨내고 인간으로서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작가는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소설의 거의 끝부분에서 나오는 장면인 베란다에서 “세 여인, 세상에 처음 왔을 때처럼 벌거벗은 세 여인은 마치 미친 것 같이” 목욕하는 장면은 시각의 능력을 상실한 이후에 인간이 이제 새로운 의미와 조건에서 인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에덴동산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껏 갖고 있었던 모든 때를 씻어 내며 다른 차원과 다른 조건에서 새롭게 인간되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보는 것의 상실 이후에 그리고 소유하고 있던 것의 부재를 경험한 이후에도 과연 인간은 인간일 수 있을까. 작가의 대답은 물론 지극히 회의적이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눈이 먼 사람들은 눈이 멀고 나서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스스로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사람인 의사의 아내였고, 그녀는 이제 사람들이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이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지 않는 진짜 눈 먼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본다는 것은 결국 시각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다시 말해 대상을 지배하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닌 새로운 차원에서 사물과 타인 그리고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쩌면 모두가 비자발적으로 눈이 멀었을 때, 유일하게 스스로 눈이 멀어버렸던 의사의 아내만이 이 새로운 차원의 시각 능력을 조금씩 터득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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