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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 우리시대의 신앙이 되어버린 '발전'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
질베르 리스트 지음, 신해경 옮김 / 봄날의책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올해 상반기에 내가 신학 및 종교 분야에서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책. 물론 이 책은 그 분야에서 검색하면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인 질베르 리스트는 독일의 볼프강 작스와 더불어 유럽의 발전학을 대표하는 연구자이고, 실제로 현재 스위스의 발전학대학원에서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는 사회인류학자이다. 그래서 이 책 역시 넓게는 사회과학, 좁게는 발전경제학 분야의 책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제목에서 이미 암시되고 있듯이 이 책은 '발전'이라는 신앙, 또는 '발전주의'(저자는 그것을 근대성 그 자체로 보고 있다)라는 종교에 관한 사회과학적 분석과 인문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을 반드시 신학책으로 분류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어거스틴, 다윈, 스미스, 마르크스, 로스토에 이르기까지 서구 역사에서 발전의 관념이 형성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경제학과 역사학, 사회주의, 사민주의, 마르크스주의, 발전국가론, 근대화론, 식민주의, 제국주의, 신자유주의, 세계체계론을 넘나들며 '발전' 개념이 의미하는 바를 드러내는 저자의 내공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저자에 따르면, ‘발전(development)’이란 관념은 근대성의 핵심 요소로서 “사회의 재생산을 위해 자연환경과 사회적 관계를 전반적으로 변형하고 파괴할 것을 요구하는, 때에 따라서는 상충돼 보이는 일련의 실행들로 구성되며, 교환이라는 수단을 통해 유효수요와 맞물린 상품(재화와 용역)의 생산을 증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 헤게모니는 이중의 환상을 통해서만 구축될 수 있다.” 하나는 “‘저발전’이라는 개념의 구축과 유포에 결부되어 있는 의미론적 환상”이고, 다른 하나는 “‘발전’은 분명히 한정된 자원을 끊임없이 수탈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성장은 풍요의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보편적인 결핍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얼버무리는 실체적인 환상이다.” 결국 ‘발전’이란 것은 “하나의 사회집단이 공유하는 논박할 수 없는 특정 진실에 대한 믿음”이며, “의무적인 행위들을 규정함으로써 해당 집단의 사회적 결속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일종의 ‘종교’라 해도 무방하다. 좀 더 간단하게, 그는 종교를 “사회라는 특별한 존재가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라 정의내리고 있는데, 이는 다른 물신주의적 믿음의 대상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3판을 번역 출간한 영문판과 달리 최근에 불어로 출간된 제4판을 직접 번역했다는 점부터 일단 마음에 들고(영문판에 없던 챕터가 새로 추가되었음), 전문 번역가의 손을 거친 덕분에 번역 상태도 매우 좋고, 책의 전체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는 하승우 선생의 해제도 매우 유익하다.
왠만하면, 책 추천 잘 안 하는데, 이 책은 주변에, 특히 신학이나 종교학 하는 분들께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