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퀴즈쇼』 이후 굉장히 설레는 마음으로 김영하의 다음 장편을 기다렸다. 전작과 달리 뭔가 삶을 긍정할 만한, 희망이라 부를만한 걸 기대한 건 당연히 아니었다. 김영하는 그런 맛을 가진 작가가 아니다. 그런 건 다른 소설가한테 기대하면 된다. 기다렸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궁금증 때문이었다. 『퀴즈쇼』 이후에 김영하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한국근현대를 다 훑은 다음(『검은꽃』―근대에의 접속/『빛의 제국』―근대화 또는 현대화/『퀴즈쇼』―근대화 이후),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어디일까?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받자마자 두 번 읽은 후 솔직한 내 심정은, 뭐랄까, 약간 어리둥절한 마음이다. 김영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정말 뜻밖에도 가출과 혼숙, 폭주를 즐기는 ‘일탈’ 청소년들이었다. 음―, 이게 뭘까.

쉽게 이해하면 이렇다. 소설을 읽으며 ‘와, 리얼하다’라는 생각과 동시에 혀를 끌끌 차게 만드는 이 ‘비행’청소년들의 세계는 누가 만든 것인가. 만약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기형적인 것이라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기성세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우리들? 그래서 ‘너의 목소리’를 들어야 되고 고통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 안아야 한다는 사실? 다음은 이 소설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구름 위로 올라간 마술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의 조수를, 마술사가 사라진 뒤 내시의 피로 흥건했을 현장에 홀로 남겨졌을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한다.(p.9)

하지만 이런 건 너무 식상한 주장이고 패턴이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소설은 이런 질문을 던지려고 만든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럼 뭘까, 김영하의 의도는?

또 다시 실패의 이야기
소설의 주인공 제이는 세상으로부터 두 번이나 버림받는 불쌍한 놈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가지게 된 능력―주위의 사물/인간과 공감하는 능력을 통해 남다른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능력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한다.

너희들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로 인해 아프다.(p.141)

허나 제이는 그 공감하는 능력으로 무언가 바꾸는 일에 하나같이 실패한다. 그는 다리 저는 붉은 도사견을 완전히 구출하지 못했고, 비행청소년들의 삶을, 악행을 바로잡는 일은 커녕, 지적장애를 가진 피해자 한나의 인식조차 바꾸지 못한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동규와 목란의 삶도 지켜주지 못했고, 그를 따른 추종자들을 다 거두지도 못했다. 주인공 제이는 추종자들을 데리고 대폭주를 이끌며 ‘도시의 거리에 굵고 힘찬 붓질’을 하지만 그건 동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너무나 무력한 시위다. 대폭주가 일회성을 넘어서는 행사가 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처지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의 클라이막스에서 제이는 대폭주 도중에 예수처럼 승천(昇天)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격한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날의 대폭주는 잊혀진 추억이 되어버린다. 제이의 행적은 여러모로 예수의 행적을 빼닮았지만 예수와 달리 아무도 제이의 뜻에 따라 살지 않는다.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들(동규, 목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베드로나 바울의 삶을 살지 않는다. 

김영하는 왜?
이런 실패의 이야기를 통해 김영하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검은 꽃』처럼 세계 앞에 유한한 인간자의 슬픔? 『빛의 제국』과 같이 잘못 끼워진 단추에 대한 한탄? 아니면 『퀴즈쇼』와 같이 약육강식, 승자독식 사회에 대한 분노? 어쩌면, 
이 처절한 실패로부터 얻게 되는 무력함과 패배감이야 말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 김영하가 우리에게 던지고 싶은 공이었는지 모르겠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10대 반란의 실패 스토리인 동시에 ‘미친 세상’에 지독히도 외롭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세상은 너무나 비정하다. 패배는 용납되지 않고, 연대는 설 곳을 잃었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내몰며, 따뜻한 시선 대신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가 지배한다. 그 속에서 우리들은 하루하루를 각개분투하며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분명히 잘못된 현실, 잔인한 세상. 하지만 너무나 단단한 성(城)과 같은 현실에서 ‘한낱’ 작가가, ‘한낱’ 소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희망을 이야기하기에, 해결을 이야기하기에, 그것은 너무 무력하지 않은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도 이런 일을 막지 못했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었다. 소설은, 그러니까 소설가는 도대체 뭘 할 수 있는 것일까. (p.245)

그래도, 목소리만큼은 들어(들려)줄 수 있잖아
생각해보면, 작년 초 김영하와 평론가 소조와의 논쟁과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작 『옥수수와 나』의 공통점은 ‘작가는 누구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김영하는 답한다. 작가는 결과나 보상과는 상관없이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라고, 닭들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라는 주문을 끊임없이 되놰야 하는 존재라고. 그리고 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김영하는 마치 이렇게 주장하는 듯하다. (제이가)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절망에 빠진 한 인간(Y)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처럼 소설(작가) 역시 거창한 무엇을 주장하고 변혁하지는 못할 지라도, 이렇게 목소리만큼은 들어(들려)줄 수는 있지 않는냐고. 낱낱의 개인으로서 무력하고 패배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너와 나의 목소리는 여기 이렇게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이런 이유로 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 는 김영하의 어느 장편소설보다 ‘덜’ 절망적이다. 적어도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리니까. 나의 목소리도 들리니까 말이다.

p.s. 이런 맥락에서 비슷한 시기에 나온 김연수의 『원더보이』와 비교해볼 것.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 선언적으로 마무리 짓는 김연수에 비해 김영하의 소설은 좀 더 겸손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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