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클래식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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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주의적 관점에서 읽는 카프카의 『성(城)』

 

 

 




1. 들어가며

 

1) 카프카의 「법 앞에서」와 『성(城)』

프란츠 카프카의 산문 중에서 그가 ‘전설’(legend)이라고 지칭한 「법 앞에서」라고 하는 짧은 우화가 있다. 이 우화의 주인공 ‘시골에서 온 사람’은 ‘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여기(법 앞)에 찾아온 것이며, ‘법’ 안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으로 시간과 정력을 모두 낭비하게 된다. ‘시골에서 온 사람’은 그러나 결코 지난 시절의 생각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결코 회상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왔으며, 이전에는 무엇을 했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마치 그의 삶은 그가 여기에 도착한 순간에 시작된 것 같다. 과거는 하나의 빈 공간으로 녹아버린 것이다. 거인으로 성장하는 ‘문지기’의 호감을 사기 위한 어리석은 노력으로 자신은 더욱더 작아지며 마침내는 명멸하고 만다. 그러나 죽기 전에 그래도 ‘법’의 꺼지지 않는 광채가 그에게 비쳐 옴을 본다. 하나의 유사한 상황을 우리는 소설 『성(城)』에서 본다.1)

 

카프카의 저작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독문학자 박환덕은 『성(城)』의  측량사 K와 「법 앞에서」의 주인공이 다음의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그들은 하나같이 자의에 의하여 찾아온 점이다. K가 자의에 의하여 성(城) 마을에 찾아와서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음은, ‘시골에서 온 사람’이 자의에 의하여 법 앞에 찾아와서는 끝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둘째, K가 성(城)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점은 ‘시골사람’이 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셋째, 문지기가 ‘시골사람’의 뇌물을 받으면서도 들여보내지 않는 것은 K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넷째, 토지측량사도 역시 ‘시골사람’이다. 토지측량사는 직업상 땅을 만지는(측량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정확한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이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유형적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일체의 것, 보통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제한, 즉 신체상의 특징, 자연환경, 가족관계 등이 일체 제거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일체의 장소, 일체의 역사 밖에 놓여 있음으로써 현실과 허구에 관계없이 다른 어떤 인간보다도 더 고독하다.2) 박환덕은 이런 의미에서 두 작품의 주인공은 공히 현대인의 전형적인 상황(고향 이탈과 방향 감각의 상실), 중심이 결여된 세계에 내던져진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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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이러한 박환덕의 실존주의적 해석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낀다.  예컨대, 실존주의적인 해석은 두 작품의 주인공이 대면하고 있는 법의 문 또는 성(城)이라고 하는 불가해한 미지의 권력을 명확히 규명해내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환덕과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두 작품을 비롯한 카프카의 모든 소설들에서 주제화되는 권력의 문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류가 처한 보편적 상황을 형상화 한 것이라며 그 해석을 독자들의 주관적 관점에 맡기고 말기 때문에, 카프카의 소설에 우리가 다가가는 것을 오히려 더욱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법 앞에서」의 시골에서 올라온 남자는 법의 문에 가로막혀 무시무시한 사물(법)에 접근하지 못하다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듣게 된다. 거기 있는 그 문이 처음부터 자기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법에 포함되어 있었다, 법은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물이었을 뿐 아니라 항상-이미 그와 시선을 교환했다, 라는 이야기이다. 라캉주의적 관점에서 지젝은 이것이 법의 문에 대한 카프카 식의 비틀기로서 실재계를 포착하는 ‘시점의 이행’을 보여주는 예라고 해석한다. 지젝에 따르면, (라캉의) 실재계는 직접적인 접근이 불가능한 사물인 동시에 직접적 접근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요,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사물인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놓치게 만드는 왜곡의 장막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실재계는 첫 번째 관점에서 두 번째 관점으로 이행하는 시각의 변화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법의 문’ 자체가 실재계가 아니며, 이 ‘법의 문’이 사실은 이미 원래부터 오직 나만을 위한 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이행의 순간, 즉 법의 문과 나를 분리하는 간극이 이미 법의 문에 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 시점에서 드러나는 현실의 찢어진 틈새와 같은 것이다.3) 지젝이 재해석하는 라캉의 실재계는 또 다른 현실이 아니라 현실 내부의 오작동이다. 비유컨대 현실이 어떤 그물망 같은 것이라면, 그 그물망의 어딘가가 찢어질 때 그 망의 틈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 혹은 찢어짐이라는 사건 그 자체가 실재다. “실재란 상징적 네트워크로의 포획에 저항하는 외재적 사물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이다.”4)

 


 

「법 앞에서」에 대한 이러한 라캉주의적 해석을 참조하면서, 이 글에서는 기존의『성(城)』연구들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고 있는 법과 성(城)의 복합적 위상을 라캉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중심으로 탐구하고, 나아가 이 작품에서 발견되는 실재로서의 초자아와 대상 a, 자아, 주체의 소외, 응시와 시선의 주제 등을 중심으로 작품을 해석해보고자 한다.

 




2) 데리다와 들뢰즈의 카프카, 그리고 라캉의 카프카

히벨은 욕망과 권력관계의 작용에 주목하여, 카프카에 의해 묘사되는 인간의 전존재가 “에로스에 부합되는 동경과 이것을 부수고자하는 욕구로서 타나토스에 부합되는 충동” 사이에 위치하는 “삶과 죽음의 유예”를 통해 규정된다고 해석했다.5) 히벨에 의하면, 삶을 파괴시키는 타나토스로 규정되어 왔던 억압이 유예를 통해 규정되어 왔던 문화와 동일한 근원을 갖는다고 할 때, 인간의 자기 지배는 동시에 주체의 절멸을 수반하였던 바, 그 이유는 자기유지를 위해 해소되어진 억압된 실체가 바로 “생동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법을 억압 내지는 유예의 장소로서 해석하는 이 같은 입장은 이미 데리다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카프카 해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데리다는  법이 명하는 진입금지가 법이 자신에게 부과하는 금지로서 작용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이 같은 자기모순적인 법의 ‘자기금지’는 금지에도 불구하고 진입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결정을 가능케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법 앞에서 현상함으로써 법 앞에서 법의 주체가 되지만, 법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법 이전에 있기도 한 그는 마찬가지로 법 바깥에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의 주체가 법의 바깥에 있음으로써, 법은 끝없이 진입될 수 없는 대상이 되며, 법의 주체는 진입될 수 없는 법을 욕망함으로써 자유로운 자기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6)

 


 

데리다가 주목하는 카프카 사유의 독특한 이미지는 ‘소송’이다. 소송은 경계 안에서 벌어진 경계의 위반이며, 최종판결의 무제한 연기 속에서 전개되는 능동적인 어떤 과정이다. 데리다는 이 ‘소송’을 문학과 법 사이에 설정된 ‘법-앞에-있음’의 이중 구속적 상황으로 읽는다. 이는 보편적인 것과 독특한 것 사이의 비-관계적인 관계 맺음이다. 문학의 경계를 보장하는 법은 그 기원에서 이미 허구적 서사성에 물들어 있으며, 문학이 생산할 더 나중에 도래할 법에 의해 대체가능하다. 법은 문학에 의존한다. 문학은 법을 넘어서는 법을 생산하는 독특성의 법이다. 반면, 법 그 자체, 보편적인 본질로서의 법은 ‘법이란 현전불가능하고 접근불가능한 것으로서 남아있어야만 한다’, 라는 법이다. 문학은 이러한 법 앞에서 결코 법과 접촉하지 못한 채 법 그 자체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법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문학은 법을 존중하며 법에 예속되어 있다. 따라서 법과 문학은 서로의 유사-초월론적 조건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해서 데리다의 카프카 읽기는 문학과 법 사이의 탈경계적 관계를 보여주었다.7)

 


 

한편,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에서 카프카의 작품에 등장하는 법과 법에 이르려는 욕망은 동일한 구조기능을 수행한다고 본다. 즉 욕망이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욕망, 파시즘적 욕망’ 등과 같이 일정하게 결정체를 이루고자 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그것을 해체하며 다시금 고개를 들듯이, 법 역시 한편으로는 “초월적이고 편집증적인 법”으로서 일정한 법적 결정체를 다시금 해체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결국 욕망이나 법 자체는 텅 빈 내재성(혹은 내재적 형식)일 뿐 “언표 되면서만 결정되고 처벌행위를 통해서만 언표된다”는 것이다.8)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의 ‘소송’을 내재성의 장 안에서 초월적인 법과 선분적 권력에 포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탈영토화하는 욕망의 연속적 운동으로 읽는다. 욕망은 근원적인 결핍도 아니고 죄의식에 고개 숙인 억압된 충동도 아니다. 욕망은 막 다른 골목에서도 출구를 찾는 능동적인 생산이고, 모든 배치를 가로지르는 창조적인 탈주선이다. 욕망은 정의이고, 권력이며, 욕망이외의 어떠한 초월적 심급도 없는 내재성의 장 그 자체이다. 욕망은 끊임없이 경계들을 움직이고, 한계들을 대체하며, 인접한 다른 삶의 계열로 이어지는 탈경계적 연속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카프카는 리좀이자 탈주선으로서 탈경계적 문학기계로 작동한다.9)

 



 

데리다가 경계를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유사-초월론적 조건을 드러냄으로써 탈경계를 사유하고 있다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경계의 유동성과 변환을 생산하며 끊임없이 탈주하는 욕망의 실재적 운동을 통해서 탈경계를 사유하고 있다. 데리다에게 텍스트의 바깥이 없듯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내재성의 장에는 초월적 심급이 없다. 데리다와 들뢰즈(그리고 가타리)에게는 경계 바깥으로의 완전한 초월이 아니라, 매번 독특하게 이루어지는 해체와 탈주의 무한한 내재적 초월이 있을 뿐이다.10) 이처럼 데리다나 들뢰즈(그리고 가타리)에게서 카프카의 법 개념은 실증적인 법 이전에 혹은 이것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근원적인 규정기능과 내재적 형식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이 보완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라캉의 이론이야말로 이러한 법의 기능과 법이 작용하는 공간, 그리고 이 법의 작동과 관계를 맺는 주체의 위상을 가장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해석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라캉과 더불어 카프카의 『성(城)』을 읽어 나가면서 그것을 확인해보기로 하자.

 


 







2. 라캉주의적 관점에서 읽는 『성(城)』

 

1) 법과 초자아 그리고 성(城)과 대상 a

소설에서 주인공 K가 갖고 있는 성(城)에 대한 지식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은 성(城)은 이미 하나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城)은 보는 이에 따라서 달리 보인다. 성별에 따라 지적ㆍ사회적 수준에 따라 성(城)은 항상 다른 모습으로 표상된다. 따라서 성(城)은 성별, 사회적 계층 등의 수만큼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비록 하나의 대상인 성(城)에 대해서이긴 하나, 각자는 서로 다른 성(城)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이다. 사실상 이들이 전하는 그 내용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城)에 대하여 파고들면 들수록 도리어 성(城)은 K에게서 더 멀어진다. K는 사실상 기대하고 있던 하나의 통일을 거기에서 찾을 수 없다. 그가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다양한 것, 변하기 쉬운 것이었고, 이처럼 질이 서로 다른 여러 진실은 그것의 의미를 완전하게 총계를 내는 경우에도 그 참뜻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성(城)은 돌연의 계시를 받아 파악할 수 있는 ‘전체’가 아니고, 가산(加算)을 끝까지 하지 않는 한, 일부만을 알 수 있을 뿐인 ‘어느 한 전체’인 것이다. 측량사는 실제로는 성(城)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은 하나의 성(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자기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성(城)에 들어가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뿐이다. 「법 앞에서」의 마지막 부분을 연상케 하는 상황이다.

 

대체 이 성(城)은 무엇인가? 성(城)은 K라는 주체가 그리고 이 마을에 살아가는 다양한 주체들이 각자 자신의 내면에서 만들어낸 이상적 자아로 해석할 수 있다. 주체의 무의식적 충동이 성(城)을 욕망의 대상으로 키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도덕적 의식은 이 성(城)을 다시 진압한다. 성(城)은 욕망의 대상이자 원인으로서 실재를 대리하는 대상 a인 것이다. 사실상 그들이 욕망하지만 그에 도달할 수 없는 실재의 대상은 성(城) 너머에 존재하는 법체제이다. 법이 곧 실재이며, 성(城)은 그 법의 대상 a로 기능하는 것이다. 예컨대, 올가는 성(城)의 관리 조르티니의 구애와 “추잡한 편지”를 무시한 까닭에 벌을 받아 가족들까지 모두 마을에서 배척 당하게 된다. 성(城)은 본질적으로 조르디니의 고매한 도덕적 초자아뿐만 아니라 그 밑의 추잡한 하인인 조르티니의 성적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성(城)의 본질인 법체제는 그런 의미에서 초자아이자 실재로서, 내게 불가능한 요구를 퍼붓고 그것을 해내지 못하는 나를 조롱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작인이자, 내 ‘죄스러운’ 분투를 억누르고 그 요구들에 응하려 하면 할수록 그 시선 속에서 나를 점점 더 죄인으로 만드는 그런 작인이다. 이것은 정확히 법의 기능이다. 이 법이 K와 마을 사람들의 상상계의 차원에서 이상화된 분신 이미지로 작동하고 있는 것, 즉 대상 a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성(城)인 것이다.




2) 주체의 소외

문제는 주인공 K가 마을 사람들과 달리 이러한 성(城)에 대한 자신의 상상이 철저하게 오인에 근거하고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데서 발생한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달리 성(城)으로의 진입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법이라고 하는 사회적 초자아가 작동하면서, 불러일으키는 죄책감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억압된 ‘쾌락’을 무의식 속으로 추방했다가 그것을 성(城)이라는 낯선 형상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있으며, 이 성(城)을 중심으로 한 환상적 현실 속에서 나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방인인 K는 이 환상적 현실의 중핵으로 진입하여 실재와 직접적인 대면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과 그는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며, 자신의 오인을 자신도 모르게 종식시키려고 하는 무의식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城)으로의 입장은 거듭 실패하고, K는 측량사에서 학교급사로 마지막에는 말 관리사의 신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실패의 사건을 거치면서 비로소 K는 마을에 안착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고용되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이 마을을 찾아온 측량사로, 다음에는 아무런 일이 주어지지 않은 채 마을을 전전하다가 프리다와 약혼하게 되고, 결국 면장과의 타협 끝에 학교 급사가 되어 마을이라고 하는 사회에 정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을 우리는 라캉의 소외 이론에 맞추어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이 마을에 온 것은 사회로의 출생을 의미한다. 출생과 동시에 인간은 모체로부터 분리되고 이때 최초의 소외를 경험한다. 주인공 K역시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의 사람들에게 낯선 이방인으로 인식되어 소외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역시 성(城) 아래 마을이라고 하는 환상적 현실에 동참하여 성(城)을 이상적 자아로 인식하고, 그것을 함께 욕망한다. 바로 이 단계가 상상계로 진입하여 자아를 형성하는 ‘거울단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어를 배워 상징계로 진입하여 기표적 주체가 될 때 그 직전 단계의 주체들로부터 소외되며, 이 순간들에 무의식이 생겨나며 진정한 주체는 그러한 무의식의 연쇄 가운데서 출현한다. 그는 상상계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상징계로 넘어오지 못하고 끊임없이 성(城)의 실재를 찾아 방황한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성(城)으로의 진입 시도는 번번히 실패하고, 그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함으로써 마을의 질서에 순응한다. 그것이 바로 상징계로의 진입인 것이며, 그가 기표적 주체 즉 마을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한 언어적 주체가 되는 단계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있어 진정한 무의식적 주체의 출현은 바로 성(城)으로의 진입을 시도하던 그 직전의 단계에 있었던 것이다.




3) 시선과 응시

카프카는 주인공 K가 추구하는 성(城), 다시 말해 라캉적 대상 a가 주체의 환상의 산물일 뿐임을 잘 보여준다. 라캉적 관점에서 볼 때, 성(城)의 초청장은 주인공의 욕망의 시선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것의 그의 욕망의 시선을 통해 생겨나며 세력을 확장한다. 라캉은 시선과 응시를 구분했는데, 나의 시선을 단지 한 지점으로부터만 보게 되는 반면 나는 모든 면들에서 보여진다. 내 주관적인 시선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응시가 있는 것이다. 대상을 보는 시선의 주체의 편에 있는 반면 응시는 대상의 편에 있는 것이다. 내가 대상을 볼 때 대상은 내가 그것을 볼 수 없는 지점으로부터 항상 이미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K는 성(城)을 계속 관찰한다. 그는 클람이 투숙하는 헤른호프의 방 문 앞에서 문구멍으로 클람을 유심히 들여다 본다. 그는 여관의 각 방으로 배달되는 엄청난 서류들도 밤새도록 관찰하며, 여주인의 옷도 관찰하고, 조수들의 동태를 감시하며, 프리다의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관찰한다. 그는 성(城)을 향한 자신의 시선을 고수하며, 성(城)에서 자신에 관한 객관적 기록을 발견하길 희망한다.

 

그러나 면장과 만났을 때 면장이 그의 서류를 계속 찾지만 아무 것도 찾지 못한다. 물론 성(城)안에도 그에 관한 서류가 존재하지 않는다. 서류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클람으로부터 그가 받은 작업허가 공문서도 면장이 해석한 바에 의하면, 결국 빈 종이 위에 서명만 대충 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결국 성(城)은 K 자신의 주관적 시선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성(城)의 공허한 모습 속에서 사물의 응시를 발견하게 된다. 클람과 면장의 육화된 공허는 죽음이라는 실재를 예감케 한다. 주인공 K도 그러한 응시를 종종 경험하지만, 그는 나르시시즘에 너무 강하게 빠져 있는지라 좀처럼 그것을 중요하게 인식하진 못한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K는 그런 초자아의 심판의 응시를 어렴풋이 감지한다. 간밤에 서류가 배달되고 다음날 아침에 그는 여주인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당하고, 자신이 “무감각하고, 단단하며, 그 어떤 존경심에 의해서도 물러지지 않는 심성”이었던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작품 자체가 미완성인 까닭인지는 몰라도 K는 프로이트적인 쾌락충동과 도덕적 죄책감 사이에서 진동할 뿐, 이 운동 자체에 대한 주체적 반성은 수행하지 못한다. 

 

 




3. 나가며

라캉은 거울단계를 통해 상상계의 기만적 본성에 대해 말할 때부터 이미 자아와 주체의 구분을 강조했다. 라캉의 시니피앙 논리에 따르면, 주체는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되면서 상징적 질서 속에서 존재성을 획득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주체의 사라짐을 가져온다. 여기서 라캉은 주체의 분열을 말한다. 주체가 한 곳에서 의미로서 나타날 때 다른 곳에서 주체는 사라짐처럼 소실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주체는 현존과 부재의 동시성 속에서만 진정한 본성이 파악된다. 주체의 현존이 없다면 부재도 없는 것이다. 부재의 효과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상징계로, 상징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상징계는 그 속성상 주체 상호간 구조에서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된 언표주체를 진정한 주체처럼 설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과 무의식의 논리에서는 사라지는 주체가 더 본질적인 주체이다.11)

 

『성(城)』에서 성(城)의 환상적 현실 가운데 존재하면서, 마을로의 정착 즉 상징계로의 주체와 마을 위에 존재하는 성(城)으로의 진입 즉 실재와의 대면 사이에서 갈등하던 K의 주체 중 후자의 주체가 바로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 윤리적인 욕망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 주체는 단순히 프로이트가 무의식적 실체처럼 언급하는 이드나 욕망의 동력인 리비도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존재는 상징계가 작동할 때마다 그곳에서 무(無)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주체의 빈 자리이다. 이 빈 자리가 마을 안에서의 K에게서 마을 사람들이 겪게 되는 당혹감과 낯설음이 생겨나는 자리인 것이다. 욕망은 언제나 그 자리를 향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불가능한 욕망을 향한 정신분석학적 윤리의 주체가 출현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그려낸 너무나도 ‘실재’적인 소설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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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정신분석학적인 카프카 해석의 개척자로 인정되는 조켈(W. H. Sokel)은 그의 주저 『F. 카프카 - 비극과 아이러니』에서 소설 『성(城)』의 기본적인 구조가 우화 「법 앞에서」와 매우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덧붙여 그는 「법 앞에서」가 『소송』이나 『성(城)』뿐 아니라 카프카 전체 작품 이해의 주요한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조켈은 이 텍스트를 통해 카프카 전체 작품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법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푸는 실마리를 찾고 있다. 즉 법에 대한 시골사람의 행동방식과 법을 대행하는 문지기의 대응방식에서 법에 대응하는 카프카의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조켈에 따르면 『성(城)』의 핵심적인 의미는 성(城)과의 투쟁에서 주체의 주관적인 요구, 즉 주체의 오만함과 고집이라는 것이다. 특권을 기반으로 세우고자 하는 주인공의 언제나 위협받는 존재론적인 계획인 실현되는 곳으로서, 성(城)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가족 구조에서 아버지의 권력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투쟁의 장(場)이라는 것이다. 


 

2) 박환덕, 「카프카의 <성(城)> 연구 - 작품의 구조(構造)를 중심으로」, 프란츠 카프카, 『성』, 박환덕 옮김, 부록․4, 서울: 범우사, 2001, pp.471-473


 

3) 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김정아 옮김, 서울: 도서출판 길, 2007, pp.126-127


 

4)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박정수 옮김,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07, p.112


 

5) 김윤상, 「법은 악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계몽의 기획에 대한 재평가 I」, 『뷔히너와 현대문학』제24집, 서울: 한국뷔히너학회, 2005년 5월, pp.21-45, 여기서는 p.35에서 재인용


 

6) 문광훈, 「법 앞의 물음: 데리다의 카프카 읽기로부터」, 『카프카연구』제8권, 서울: 한국카프카학회, 2000, pp.93-94 참조


 

7) 박은주, 「카프카의 ‘법 앞에’ 서 있는 데리다의 “법 앞에서”」, 『카프카연구』제5권, 서울: 한국카프카학회, 1996, pp.170-173 참조


 

8)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이진경 옮김, 서울: 동문선, 2001, p.107


 

9) 박은주,「카프카의 탈영토화하는 글쓰기 - 들뢰즈와 가타리의 카프카론」, 『카프카연구』제13권, 서울: 한국카프카학회, 2005, pp.133-134 참조


 

10) 김재희,「탈경계의 사유: 카프카를 통해 본 해체와 탈주의 철학」, 『철학사상』제20집, 서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5, pp.131-132 참조


 

11) 김석, 『에크리: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서울: 살림, 2007, pp.160-16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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