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병무 선생과의 인연
지난 2006년 당시 나는 한백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한백교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안병무 선생과 박성준 선생이 공동으로 설립한 평신도중심의 교회로서, 국내의 대표적인 민중신학적 신앙공동체이다. 그때 나는 한백교회 김진호 목사님의 소개로 심원안병무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고 있던 안병무아키브 사업의 기초 작업인 안병무 선생의 저작총목록집 제작을 맡게 되었다.
나는 이 일을 위해 일산의 박영숙 선생(안병무 선생 미망인) 자택을 찾아가 그곳에 보관 중이던 안병무 선생의 저작들, 예컨대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들에서부터 미출간된 논문, 강연, 설교 원고 등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기존에 정리되어 있던 저작목록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심원기념사업회에서 내게 요청한 것이 바로 연대순으로 글을 정리하되, 중복게재 및 동고이제(同稿異題)를 확인 표기해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료를 모으는데 걸린 시간이 4개월 정도 소요되었고, 어느 정도 자료가 모였다고 판단된 시점부터는 모은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목록집을 작성하는 데 역시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렇게 총 8개월에 걸쳐 나는 박영숙 선생 자택과 천안의 옛 한국신학연구소 자료실,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한신대학교 도서관, 수유리 장공도서관, 그 외 안병무 선생을 잘 아는 분들의 댁을 찾아다니며, 선생이 쓴 모든 글을 수집하고 검토하여 선생이 평생 동안 쓴 글에 관한 총체적인 서지목록을 만들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나온 두 종류의 전집 열 세권(한길사판 총 여섯 권과 한국신학연구소판 총 일곱 권)이나 기타 선생의 이름으로 출간된 단행본 어디에도 수록된 바 없는, 그래서 기존의 저작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116편의 글을 새롭게 발굴할 수 있었고, 그것들을 모아 기존 전집을 보완하는 의미의 안병무 저작 선집 세 권을 만들 수 있었다. 『안병무 저작선집 1: 성서의 법정신』(20편), 『안병무 저작선집 2: 그리스도와 국가권력』(51편), 『안병무 저작선집 3: 민중신학에 이르기까지』(45편). 이 책들은 비매품으로서 300부 정도만 제본하여 2006년 10월 안병무 선생 10주기 기념 출판행사 때 공식적으로 소개되었고, 이후 출판에 도움을 준 기념사업회의 몇몇 분들과 전국의 대학 도서관 및 연구소 등에 모두 기증되었다.
나야 안병무 선생이 살아있을 때만해도 아직 어렸기에 그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분을 실제로 뵌 적도 없고,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다. 하지만, 나는 책과 글을 통해 그를 만났고 누구보다 그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2006년 그 한 해 동안 나는 안병무 선생 덕분에 살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던 차에 그 일을 맡아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당시 내면의 혼란을 안병무 선생의 글을 찬찬히 읽는 과정에서 이겨낼 수 있었다.
일제 식민치하였던 1922년에 태어나 간도 용정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청년기에 해방과 전쟁 및 분단을 경험하고, 독일 유학 이후 교수로 지식인으로 7-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며 민중사건을 신학의 언어로 증언하고자 했던 신학자 안병무. 민중신학을 세계적인 신학으로 정초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신학자이자, 여전히 근대라는 시공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근대를 비판하고 근대를 넘어설 수 있는 신학적 사유와 비평의 가능성을 예시하여 준 脫/向의 신학자 안병무. 예수사건론 곧 민중사건론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발본적으로 재해석하고, 체제내화된 교회를 넘어 예수운동을 통해 역사적 예수에게로 가는 지평을 우리에게 보여준 예수 역사학자 안병무.
전례가 없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듯 거듭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정말이지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기존 전집의 출전이나 목록에 나와 있지 않았던 원고를 우연히 새롭게 발견하면서 맛본 그 벅찬 감격과 환희 때문에 점점 안병무라고 하는 인물의 삶과 글쓰기의 세계 속으로 나도 모르게 빠져 들어갔다.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잡지를 네 개나 창간했고, 그 중 하나는 매회 직접적으로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실은 탓에 검열과 절취의 탄압을 당해야만 했으며 급기야는 강제로 폐간당하기까지 했다. 유학 전에 이미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했고, 유학 이후 한국신학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그 학교를 당시 한국에서 아니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역동적인 신학교육을 수행하는 학교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그러나 학자로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를 이루게 되는 현장은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의 강단이나 연구실이 아닌 차디찬 감옥과 격렬한 투쟁의 시위현장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강제 해직의 기간 동안 그는 민중사건 속으로 더욱 깊이 자신을 침윤시켰으며 그때의 그 경험들-민중과의 만남-이 그를 민중신학자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사후에 「안병무는 정말 그리스도인이었는가」라고 하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단 논문까지 나올 정도로 그는 평생을 제도권 교회 및 주류적인 기독교 신앙/신학과 대립했던 급진적인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평생 네 개의 각기 다른 지향성을 가진 교회(명동향린교회, 갈릴리교회, 강남향린교회, 한백교회)와 국내 최초의 개신교수녀공동체(디아코니아자매회)를 창립한 인물이기도 했다. 교회를 비판하고 거부하며 교회를 넘어 이제는 갈릴래아 예수-오클로스의 예수운동을 민중운동으로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가 평생 교회를 떠나지 않은 것도 모자라 결정적인 시기마다 새로운 실험을 모색하는 교회들을 창립해왔다는 것은 내게도 매우 역설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비단 그것들뿐이겠는가. 한국신학의 세계화 및 주체화를 위해 대학 밖의 독립적인 신학연구소를 세웠고 재야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기독교민중운동, 민중교회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던 그의 삶을 어떻게 간단히 몇 줄로 정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적어도 내가 분명히 확인한 것은 어쨌든 그는 그저 글로서 말하고 글로서 생각하며 글로서 싸웠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안병무아키브 작업을 하던 당시 끊이지 않고 내 머리 속을 맴돌던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미친 듯이 글을 썼을까?"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펜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지금도 나는 내가 그때 이후로 평생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안병무 선생처럼 살 자신은 도저히 없다. 나같은 사람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규모의 삶을 감당해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성장한 토양이나 경험했던 현실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는 정말 알고 싶었다. 그가 그렇게 글을 계속 써야만 했던 이유 말이다. 그가 왜 그렇게 써야만 했는지를 내가 가슴으로 분명히 알게 될 때까지는 함부로 내 삶을 포기할 수 없을 듯 싶었다. 죽은 안병무 선생이 산 내게 남겨 준 것은 그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의 글들이었다. 그 글들 속에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도 담겨 있으리라 생각했다.
평전에 대한 독후감을 써야하는데 자꾸만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 안병무 선생이 갖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거리두기가 좀처럼 되지 않았고, 내가 경험하고 이해한 안병무의 모습과 작가가 복원한 안병무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겹쳐져서 비평적인 관점에서의 독서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민망하지만 내가 작업한 『안병무저작 총목록집』의 발간으로 국내의 안병무 연구는 진일보할 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 분명 사실이고, 바로 이 목록집과 저작선집을 참조하여 안병무 평전도 출간될 수 있었다. 내가 편집한 자료들이 출간되던 2006년 10월 선생의 10주기 기념행사와 시기를 맞추어 안병무 평전 출간 사업이 비로소 추진되기 시작했고, 그 필자로 소설가 김남일 선생이 선정되었다는 소식까지도 들었다. 그리고 1년 만인 작년 10월에 드디어 안병무 평전이 사계절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안병무라는 이름으로부터 아직 자유로움을 느낄 수 없었던 탓인지 책을 구입해놓고도 선뜻 평전을 읽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더구나 내 나름대로 1년 가까이 작업을 하면서 선생의 글을 읽었고, 그를 만났다는 생각 때문인지 굳이 다른 사람이 쓴 평전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신학윤리 수업에 제출할 평전 독후감 과제의 대상 도서를 찾다가, 문득 이 책이 생각났다. 굳이 새로운 책을 찾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결국 읽어야 할 책이었는데, 이제야 그 시기가 온 것이라 생각하며, 책을 구입한지 1년 만에 드디어 나는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앞서 안병무 선생에게서 가졌던 그 물음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비록 글로서만 그분의 생애를 더듬어 갔지만, 이 평전의 작가인 김남일 선생은 안병무가 거쳐 온 모든 공간들과 만난 사람들을 다 찾아다니며 그분의 생애 전체를 보다 선명하게 복원한 것이었다.
이 평전 덕분에 나는 내가 그토록 궁금했던 것 혹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즉 민중신학자 안병무로 하여금 그토록 평생 많은 글을 그것도 목숨 걸고 쓰게 한 그 이유와 동력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민중과의 만남. 물론 내가 여태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다만 이 평전을 통해 즉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나는 안병무에게 있어서 이 민중과의 만남이야말로 그의 신학의 핵심이자 그의 신학을 윤리학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전거가 된다고 본다. 이 평전의 내용을 확인해나가면서 그 부분을 짚어보고자 한다.
2. 예수를 찾아 간 성문 밖에서 민중예수를 만나다
사전적인 정의대로 하자면, 평전(評傳)은 단순히 비범한 한 인간의 일생을 다룬 ‘전기'(biography)가 아니라 그 인물에 대한 집필자의 일정한 평가와 해석이 담겨 있는 ‘비평적 전기’(critical biography)를 의미한다. 물론 그 어떤 전기이든 해당 인물에 대한 일정한 평가와 해석이 들어 있기 마련이지만, 일반적인 전기와는 달리 그 인물에 대한 뛰어난 업적과 더불어 한계와 인간적인 약점도 함께 드러내는 것이 올바른 의미의 평전이다.
나아가 ‘평전’은 문제적 개인의 일대기를 사실적으로 재구성하면서도 거기에 평전 작가의 서사적 상상력이 상당부분 개입하는 이른바 ‘사실적 허구’의 양식이다. 이러한 두 가지 특성 때문에 평전은 평전 작가의 비평적 해석과 평가가 깊이 매개될 수밖에 없는 인물 비평 양식인 것이다. 좋은 평전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의 중요한 인물을 둘러싼 사상 ․ 철학 ․ 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그 인물의 생각과 행동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 변동하는 양상에 대한 평전 작가의 날카로운 비평적 안목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남일이 쓴 이 평전은 역사의 격랑을 헤쳐나간 한 인물로서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삶과 신학, 그리고 그가 맞닥뜨렸던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들을 잘 그려내고 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대로, 자연인 안병무를 민중신학자 안병무로 만든 것은 ‘어머니 곧 선천댁’, ‘역사의 예수’, ‘한국의 민중’이었다. 안병무는 바로 그 타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을 극복하고 역사의 공간으로 뛰어들어 민중신학자가 되었다.
이 평전은 크게 보아 연대기적으로 서술되긴 했지만, 첫 장을 안병무 선생이 마지막으로 쓴 책인 『선천댁』(범우사, 1996)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점에서부터 보통의 전기와는 다른 점을 보여주고 있다. 『선천댁』은 본명 정원숙이란 이름 대신에 평생을 ‘선천댁’이라 불리며 살다간 안병무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녀야 말로 안병무가 평생을 쫒아 온 민중이었다. 물론 안병무는 그 민중을 통해 자신이 찾아 헤맸던 역사의 예수의 현존을 경험했다. 예수-민중-오클로스, 다시 오클로스-민중-선천댁으로 이어지는 안병무의 신학적 탐구의 여정은 고스란히 타자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신을 갈구하던 실존주의자 시절에 예수를 만나길 갈망했고, 그 예수를 찾아 불트만이 있는 독일로 갔었다. 하지만 그는 불트만으로부터 “역사적 예수는 찾을 수 없다”는 소위 역사적 예수에 관한 불가지론적 답변만 듣고 돌아왔다. 신을 만나기 위해 예수를 찾았고, 예수를 찾기 위해 독일까지 갔지만, 결국 독일에서 경험한 것은 엄혹한 조국의 현실이었고, 조국의 현실로 돌아와 그는 다시 예수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어느 날 그의 눈 앞에 ‘전태일’로 돌아온다.
이 평전에서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내가 선생의 아키브작업을 하면서 발견한 것 중에 흥미로운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것이 1970년 11월 13일이고, 당시 안병무는 『현존』이라고 하는 잡지를 내고 있었는데, 이 잡지의 11월호 편집후기에 전태일에 관한 글이 발견되었다. 잡지에는 발행일이 11월 1일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전태일에 관한 글이 있을까 신기했었다. 아마도 재판을 찍으면서 급하게 끼워 넣은 듯싶었다. 그만큼 그에게 그 사건이 충격으로 남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전태일이 그에게 예수로 다가왔고, 다시 그 전태일을 통해 그는 한국의 민중들에게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 민중을 통해 다시 성서를 읽으면서 <마르코복음>에서 예수와 오클로스를 발견했고 민중신학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그에게서 신앙과 윤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윤리가 행위 혹은 실천의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서, 영원히 중단될 수 없는 주체의 존재양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윤리적 주체로서 "그리스도인-되기" 또한 현실 속에서 늘 새로운 타자, 새로운 진리의 발견이라는 사건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사후적으로 추체험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전면(前面)에 인간됨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결정적인 반면(反面)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구원을 일시적으로 허락하는 '복음'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는 고통에 겨운 얼굴로 우리 앞에 현현하며 그것을 통해 하나의 지평, 즉 윤리의 지평이 열린다. 타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대하기 전에 주체는 단지 먹고, 마시고, 즐기는 향유(jouissance)의 존재, 또는 경제적 존재일 뿐이다. 자기의 거주와 향유 안에 고립된 주체는 어떤 윤리적 책임도 느낄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주체는 타자의 고통에 책임적으로 반응하는 윤리의 주체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신학자 안병무 역시 민중을 통해 예수를 발견했고, 신을 발견하며 자신의 신앙을 실천해나갔다. 신앙의 실천 과정이 곧 윤리적 실천의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감옥에서 친구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종교적 행위가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삶 가운데서 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만든다…” 본회퍼가 그랬던 것처럼 안병무에게서 그리스도인되기는 세상과 분리된 신을 향한 일방적인 경건이 아니라 신이 현존하고 있는 이 고통의 세계, 그 신의 현현이라 할 고통당하는 이 땅의 모든 예수들과 함께 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 평전은 “성문 밖에 예수를 말하”기 위해 여전히 “성문 밖에서 우리들의 이웃의 모습으로 고난당하고 있는 예수들을 찾아 갔던” 안병문의 일생을 속도감 있는 필치로 잘 그려내고 있었다. 더욱이 신학에 무지하고 기독교인도 아니라고 하는 작가가 그 어떤 신학자들보다도 안병무의 신학세계를 깊이 꿰뚫고 있다는 사실도 그저 놀라웠다.
3. 신학의 윤리-정치학적 과제에 관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안병무의 그 신학적 실천을 계승해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의 신학에 대한 주석달기가 아닌 그의 작업을 오늘의 맥락 속에서 재현해내는 것, 즉 우리가 이제 그가 했던 것처럼 민중신학적 실천, 신학윤리적 실천을 반복해내가는 것이 필요하리라.
나는 우리가 사회 밖에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혹은 비시민, 사회적 무능자, 주변인, 배제당한 자들, 소수자, 하위주체, 민중 등으로 부를 수 있는)의 입장에 서지 못하는 한, ‘사회'에 대해 혹은 ‘교회’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이 위선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사회적 약자의 당파성을 취하지 않는 모든 신학의 구원론은 정치적 중립을 가장하여 결국 상이한 이해관계, 상이한 입장을 가진 집단들로 이루어진 사회 속에서 지배를 향유하는 집단, 특권을 향유하는 집단의 입장에 서는 것이고, 그리하여 사회 속에서 관철되고 있는 모순들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는 ‘그들만의 천국’ 이야기가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정치학에서는 ‘잊어버림'(즉 망각)의 정치라고도 한다. 따라서 잊어버림의 정치를 작동시키면서 ‘민주주의' 혹은 ‘하느님나라’를 운운하는 것은 언제나 위선일 수밖에 없다. 포스트맑스주의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했듯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모순적으로 결합된 현대국가에서 조화로운 '사회'는 언제나 불가능한 것이며, 실재의 차원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현실의 모든 담론이 기실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말 그대로 현실 그자체이다.
그렇다면 사회에 대한 과학적 비판담론은 오로지 우리가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섬으로써만 그 성립 계기를 갖게 된다. 그래야지만 사회 속에 관철되고 있는 모순들이 전모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기초적 조건이 갖추어지기 때문이다. 모순을 숨기지 않고 말함으로써만, 즉 부정성과 대면할 때만이 가장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에 대한 과학적 비판담론의 위상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면, 비시민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배제를 당하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 예컨대 비정규 여성 노동자, 비정규 이주노동자, 비정규 청소년 노동자, 비정규 장애인 노동자, 도시빈민, 몰락 농민, 성적 소수자들, 실업계 고교생, 미취학 아동, 독거노인, 일급 지체 장애인, 감금된 정신병자, 화교,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 학교를 다니지 않는 비학생 청소년들, 전과자, 실업자, 일용직 노동자, 노숙자, 신용불량자(금융 채무불이행자), 매매춘 여성, 소위 이단적 소종파 종교인들(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 미자립 이혼여성, 소년소녀가장 등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단지 현상적으로만 기술하고 보고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그러한 차별과 배제를 생산시킨 숨겨진 메커니즘에 대한 원리적 해명으로까지 우리의 분석을 진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메커니즘에 시민사회와 국가, 자본 등이 어떻게 연합적으로 공모하고 있는지를 밝혀내고, 또 그들이 각각 어떠한 이익을 구조적으로 누리고 있으며, 반대로 차별과 배제를 당하는 자들이 겪는 희생과 고통을 인과적으로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배제와 차별의 기원, 망각과 재생산의 장치 혹은 기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해관계, 담론적 정당화, 윤리적 기술 등에 대한 세밀하고도 정교한 분석 없이는 대항담론을 만들어낼 수도 없으며, 국가정책을 시정할 수 있도록 시민사회를 운동의 동력으로 포섭해낼 수도 없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특수성은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경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이란 결국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발전 및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의 발전 경로와 역시 매우 밀착되어 있다. 시민사회가 갖고 있는 독특한 이중성 즉 이데올로기가 자율적으로 자기 운동을 벌이면서 생산되는 장소로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공간이라는 특성과 다른 한편으로 이해관계의 대립 속에서 더 큰 이익 또는 특권을 향유하기 위해 비시민적 타자들을 억압 차별 배제하는 행위들이 행해지면서 그러한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담론들이 부단히 생산하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렇다면 비시민의 편에 서서 시민들과 때로는 연대하고 때로는 비판하며 시민사회를 넘어 국가 및 자본을 향한 해방적 담론투쟁을 전개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 민중신학적 실천의 본령이 아닐까? 『안병무 평전』이 내게 가르쳐준 새삼스러운 신학의 윤리-정치학적 과제가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