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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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아버지가 내 졸업 파티에 참석했다. 나는 졸업 파티 무대에 오를, 졸업반 학생들로 구성된 소규모 밴드에서 기타 연주를 맡았다. 파티에서 우리 밴드는 컨트리음악을 연주했다. 어머니가 약간 눈물을 보였다. 그날 어머니는 몸이 많이 아팠는데도-당연히-참석해야 한다며 왔다.

어머니는 사람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처음으로 나를 지켜볼 수 있어서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집에 있는 나를, 유고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서, 어쩌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내 자신감에, 또 그것을 해내고 그 대가로 박수갈채를 받고 있어서, 태어나 처음으로 양복을 입어서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아니면 당연한 일이라곤 별로 없는 우리의 삶에서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슬퍼서 그냥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p.287)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이민을 가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가급적이면 영어권 국가이면 좋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학창시절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니 영어권 국가를 가는쪽이 그나마 언어 공부하는데 시간을 덜 들일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세계 여러나라를 여행하면서는 굳이 영어권 국가일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기존에 내가 알던 영어로는 생활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고 어느 나라 어떤 언어가 됐든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 가 살기로 한다면 가장 먼저 언어를 배워야 할 것이었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그곳의 모든 생활방식을 배워야 할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마트에 가 계산을 하는 것도, 운전을 하는 것도, 이웃과 어떻게 지내는 게 실례가 아닐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하며 내가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든 것들을 다 알아보고 새로 시작해야 할 것이며 살아가는 내내 무엇도 완전히 익숙해지진 않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20년간 근무했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 갔을 때 얼마나 유의미할까. 나는 그저 어느 나라를 가든 외국인 노동자에 다름 아닐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이면서 언어를 할 줄 모른다면 보수가 낮은 직업을 고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내가 이럴진데 우리 부모님은 어떨까. 나보다 더 늙으신 부모님, 나보다 더 배움이 짧으신 부모님이 갑자기 외국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가 힘든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드실 것이다. 언어를 익히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익숙해지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운전까지 하게 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이웃들과 인사를 하게 되기까지는?




사샤 스타니시치는 십대 시절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거주지를 옮긴다. 아니, 옮겨야 했다.  언어를 새로 배워야했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아이들과 친해져야 했다. 외국에 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환경으로 공부를 하며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그 당사자에게 매우 스트레스가 큰 일일것이다. 매일 학교에 가기 싫다고 울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아이대로 낯선 곳에서 적응해야 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부모는 아마 더할 것이다.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는 인텔리였지만 외국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어떤 일이 주어지든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 살아야 하니까. 사샤 스타니시치 부모는 몸을 다쳐가며 새로운 나라 독일에서 적응하려고 한다. 살아가는 집도 형편없지만, 필요한 가전기구도 어디서 주워오지만, 어쨌든 여기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참에 아들이 이 이국땅에서 학교를 졸업하게 되는거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 고국을 떠나왔던 일, 그리고 아들이 이 낯선 나라에서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는 일. 그걸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샤의 부모는 그러나 독일에서 추방당한다. 사샤는 독일에서 대학을 다닐 것이고 또 직업이 있음을 증명하면서 독일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이 책, [출신]은 그런 사샤 스타니시치의 삶의 기록이다. 사샤의 가족이 독일에 살고 싶어서 독일에 온 게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독일로 온 것이다. 부모는 추방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돌아갈 곳은 없다. 그들이 돌아갈 나라가 없다. 사샤와 사샤의 가족 그리고 여기의 내가 또 다른 세상 어디의 누구라도 '낯선 나라에서 사는 건 힘들것이다'는 공통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샤와 내가 다른 건 '돌아갈 곳'의 유무였다. 나는 낯선 나라 어디를 가서 적응하려 하다가도 너무 힘이들면 다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샤가 떠나온 곳, 유고슬라비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면, 돌아갈 곳이 없다. '낯선 곳 적응 힘들어, 익숙한 곳으로 돌아갈래' 라는 생각이 들어도 돌아갈 곳이 없다. 내가 출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그러나 사샤가 출신에 대해 책을 쓸 수 있었던 건, 그 '더이상 존재하지 않음'에 있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완전히 새로운 다른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설레이고, 낯선 곳에 도착해 새로운 것들을 맞닥뜨리는 것도 기쁨이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집으로 돌아갈 때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떠나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안정감을 준다. 아, 이제 집에 간다, 하는 평안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 나는 여행을 하는게 아닐까를 돌아올 때마다 생각한다. 그래서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막막한 기분이 된다. 그렇다면 그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샤가 유고슬로비아에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샤는 출신을 묻는 말들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를 갈등하게 된다. 식구들은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살며 만나기 위해서는 각자 서로 다른 나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유고슬로비아 출신이었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해 살고 있다. 독일, 스웨덴, 뉴질랜드, 터키의 여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들은 자신을 어느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잘 모르겠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다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한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다. 그들이 돌아갈 곳은 없지만, 그러나 그들이 각자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살아가면서, 그들은 그들의 아이들에게 돌아올 곳을 마련해주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에 있어서 뭐가 더 나아진걸까. 잘 모르겠다. 누군가 출신이 어디냐 물으며 지도를 펼쳤을 때, 그 지도에서 어느 한 곳을 가리킬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역시 나는 모르겠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과 질문들로 시간이 오래 걸린 힘든 독서였다. 

내가 알 수 없는 것,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에 대한 기록이 이 책이다. 

사샤 스타니시치가 쓸 수밖에 없었고 사샤 스타니시치만이 쓸 수 있는 기록이다.



나는 함부르크에 살고 독일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낯선 산 너머에 있다. 친숙한 엘베강 가에서 달린 거리를 계산하는 앱을 켜놓고 일주일에 두 번 조깅을 하는 나는 길을 잃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 P48

늘 홀로 증조부를 먼발치에서만 지켜보던 증조모님은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언제부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노랫소리로 술리오를 유인했지. 그때까지도 술리오는 자기가 내 거라는 걸 몰랐지!" 그러나 증조모는 이미 알고 있었다. - P106

어느 날 우리는 어린아이들과의 교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라힘 부모님이 자녀 네 명을 키워낸 일과, 내가 어린 사촌 동생 두 명을 귀찮게 여긴 일이 화제에 올랐다. 그날 내가 한 말이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라힘 부모님이 와인 잔을 손에 들고 내 맞은편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있는 모습,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은 기억이 난다. 보통 어떤 사람이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당신은 그 사람과 충분히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 P251

1998년, 부모님은 독일을 떠나야 했다. 혹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면 부모님에게 하이델베르크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 점에서 생각해보면 하이델베르크는 부모님이 지금도 좋아하는 도시 중 하나다. 세상은 부모님이나 나와 같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도망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꽉 차있다. 고향을 떠나온 난민의 자녀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자녀를 두고 있고, 그 아이들은 스웨덴, 뉴질랜드, 터키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이기적인 한 사람일 뿐인 나는 가족과 가족의 단결보다 나 자신을 더 돌보았다. - P289

어머니와 할머니가 가방에 옷, 블라우스, 속옷을 차례로 챙겨 넣는다. 어머니는 겨울용 코트도 넣으며 말한다. "이번 생에서 얼마나 더 세상 밖을 돌아다닐지 누가 알겠어요." 그 말에 두 사람은 며칠만에 처음으로 웃는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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