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휴가를 내고 서점을 다녀왔다. 아줌마한테 해랑 호랑 다 맡겨놓고, `엄마는 일하러 가야한다`며 나왔다. 종로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생겼대서 진즉부터 한 번 가보고 싶기도 했고, 

간만에 광화문 교보도 들러보겠다는 욕심에 둘러대는 말도 술술.  

 

알라딘에서는 책 한 권 건지지 못했고,공기는 여전히 싸르르했지만, 교보로 걸어 가는 길은 왠지 설렜다. 

 

광화문 일대는 복잡다단한 만감이 교차하는 그런 곳. 그래서 좋아하는 곳이다.

먼저, 교보문고. 백수였을 때는 그만한 놀이터도 없었다. 혼자서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먹고 책 보고. 고작 8개월 직장생활을 한 게 다였고, 불안한 때였지만 서점을 다녀오는 날만은 어쩐지 `보람찬 하루`를 보낸 것만 같아 미소를 머금고 걸었던 것도 같다. 지금은 하늘나라로 간 친구와 후배와 밤늦도록 맥주(x)/안주(o)를 먹던 곳이었고, 회사사람들과 주 4일을 술 먹고 돌아다니던 그 시절, 고갈비와 막걸리로 시간가는 줄 몰랐던 곳이기도 하다. 학원들의 홍보문구들이 가득한 곳이었고, 아직 `아무 것`도 되지 않았던 내 20대가 부유하던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K와 함께 저녁을 먹었던 국세청 건물은 여전히 아찔했다. 바라보기 아플만큼.

이런 저런 생각으로 걸어가느라 어제의 내 오후는 참 길고도 찬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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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에서 박경철의 [자기혁명]을 읽었다. 어차피 책도 내 상황에 맞게 울려대는 법인지라,

"상황에 몰려서(기대서) 판단하지 말라."는 조언이 가슴에 쿵하고 박혔다. 더불어, 내게 그 무엇이 취미 이상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면 취미 이상이 되도록 (시간) 투자를 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리라 맘 먹고 조금씩 준비하고 있다. 우공이 산이 옮기는 것처럼, 그리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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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 가는 길, 오는 길, 커피 마시면서 심윤경의 [달의 제단]을 다 읽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고 주변사람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작가였는데, 그이의 두 번째 작품을 나는 이제서야 읽는다. 나는 [달의 제단]이 나온 줄도, [이현의 연애]도 [서라벌 사람들]이 나온 줄도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왠지 아껴두었다고나 할까, 혹시 실망하면 어쩌나하고 겁을 먹어서라고나 할까. 실망하면 널리고 널린 작가 중에서 찾아내서 또 읽으면 될텐데, 왠지 나는 그 사람을 다 알아버릴것만 같아서, 아쉽고 아쉬워서 가끔 그런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어이없게도 그 작가의 작품을 하나 혹은 겨우 둘을 읽었을 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애정에 가득찬 목소리로 그들에 대해 얘기한다. 하여, 이제 다른 두 작품도 읽어볼 요량이다. 작가의 말처럼 간만에 뜨거운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쌀쌀맞은 냉소나 쓴웃음이나 재기발랄한 위트나 가벼움 말고, 뜨거운 옛날 소설을 읽은 것 같은 아득하고 아련하고 익숙한 느낌이 새삼스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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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종무식을 하는구나.

내일은, 내년의 일들을 좀 적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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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30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광화문 교부문고 근처에 있었는데,
어쩜 북극곰님이랑 한 공간을 스쳐지났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신기합니다.

오늘 종무식하셨겠네요.
내년에 건강하시고 좋은 일 가득하세요.

북극곰 2012-01-02 09:36   좋아요 0 | URL
마고님, 새해인사 먼저 드리고 싶었는데.^^ 코알라랑 나누는 대화를 읽으면서 나도 나중에 내 딸이랑 아들이랑 저럴 수 있음 좋겠다.생각하곤 해요.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 공부도 잘 되시고, 건강하세요! 저는 내년에도 마고님 글 열심히 읽을게요. ㅎㅎㅎ

2012-01-01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2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주 2012-01-0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 서울은, 살라고 하면 절대로 못 살 것 같은 도시이지만
가끔은 서울의 지명들은 시 제목이나 소설 제목처럼 느껴져요.
광화문 연가를 부른 이문세 때문인지 광화문-이라는 발음도 노래처럼 운치있고요..
모처럼의 휴가를 보람차게 잘 보내셨군요^^

북극곰 2012-01-03 16:57   좋아요 0 | URL
서울 끄트머리에 살고 있어요. 내년엔 저도 서울을 벗어날지도 모르겠어요. 광화문에서는 더 먼 곳이 되겠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