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거울에 비친 몸을 본다. 치골에서 쇄골까지 내 시선은 애정없는 연인처럼 무심하게 몸을 더듬는다. 체지방이 늘어 근육의 윤곽선의 희미해지고 근 매스가 줄어 볼륨감이 떨어졌다. 체중도 줄었다.
기울어진 선반에 올려놓은 샤워타월이 떨어진다. 눈으로 보면서도 잡지 못한다. 반사신경이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한다. 심폐지구력, 근지구력, 유연성, 스트렝스. 신체 능력을 판단하는 지표 전 분야에서 내 신체의 기능이 현저히 저하 된 것을 느낀다.
하지만 건강검진 결과는 체내의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고 말했다. 초음파도, 심전도도, 혈압, 엑스레이도 내 몸에 흐르는 이상 징후를 잡아내지 못했다.
왼쪽 가슴 언저리를 더듬어 본다. 심장이 맥동할때 마다 싸 한 느낌이 퍼져 나간다. 뭐라고 딱 집어 얘기하긴 곤란한데. 아무튼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했다.
#. 2
과장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귀에 웅웅하고 울린다. 어디 안 좋으세요? 하고 그가 묻는다. 묻는 그의 얼굴이 척추 부러져 울던 그 녀석의 얼굴과 겹친다. 괜찮아. 라고 했지만 정신은 여전히 혼미하다. 뭐 부터 해야 할지,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다. 보고서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전화가 울린다. 과장님. 회의 들어오시랍니다. 과장님? 순간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야, 이 새끼야 그런 직함으로 불러대면 월급 존나 많이 받는 것 같잖아. 과장님! 그는 다시 나를 부른다. 익숙한 목소리다. 잘린 제 손가락 한 마디를 들고 얼어붙어 있던 그 녀석의 목소리. 회의 들어오시랍니다. 나는 어질한 머리를 감싸쥔다.
메일을 열기가 두려울 정도로 일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끊임없이 서류들이 문으로 들락거렸고 하루 세번 회의하는 시간보다 자는 시간이 짧았다. 용량을 늘릴대로 늘린 약이 듣지 않았고, 약 기운에 하루 종일 비몽사몽해 일을 할 수 없었고, 거지같은 인수인계에 업무파악조차 되지 않은 신임 과장은 일주일이 넘도록 야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난 주. 토요일을 꼬박 새고 일요일 오전.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급기야 사단이 나고 말았다.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와 대화를 하고 있는 나. 이런, 젠장.
나는 처음으로 나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 3
닥터는 약을 바꿀 것과, 입원치료를 받을 것을 제안했다. 그녀는 멋드러진 병명을 붙여줬지만 내 증상은 예민한 신경줄과, 업무 스트레스, 과로에 따른 약간의 정신과적 질환, 약물 오 남용에 따른 피로누적 정도가 전부였다. 어쨌거나 shut down. 업무는 불가능한 상태. 놀란 보스는 당장 치료를 받을 것을 종용했고 보스 재량에 의해, '아마' 연가를 까지 않은 무기한 병가를 받았다. 전화도 하지 말란다, 걱정도 하지 말란다, 심지어 과장도 하지 말란다. 내 공석도 내가 알 바 아니란다. 터프한게 멋지고, 배려가 감사하긴 하지만. 안 봐도 훤하다. 나 없는 자리. 개판 오분전.
내내 마음이 무겁다. 일신의 병환을 이유로 책임을 헌신짝 버리듯 하다니. 18세기 사무라이였다면 할복으로 사죄할만한 송구스러움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마음 편하게 회복하기는 글렀다. 아, 눈 딱 감고 씨발, 그냥 한번 콱 그어?
#. 4
몸에 난 숱한 자상과 창상의 흔적, 피부에 아로새겨진 화려한 그림이 그들의 화려했던 과거를 말한다. 내 신상명세를 꼬치꼬치 캐 묻던 그 중 하나가 내가 묻는다. "어이 미잘이! 내 동생이 사십인데 자네한테 말 놔도 되나?" 아, 혈압. 씨발. 그게 말이 돼? 나는 거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공손하게 말 했다. "네."
하지만 그들은 매우 친철하다. 밥 먹기 싫어하는 나를 위해 끼니마다 밥을 가져다 주고, 커피며 과자등 온갖 주전부리를 제안한다. 싫다고 말 하기도 지쳐서 다 받아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나 없을 때 그들은 종종 옹기종기 모여서 내 얘기를 한다. "왜 걔 있잖아. 미잘이. 걘 얼굴도 이쁜데 아픈게 참 아까워." "밤에 잠도 못 자더라." "바둑은 못둬." "티비도 안 보던데?"
간호사가 혼자 쓸 수 있는 병실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가격이 비싸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귀찮기도 하고. 또 낮에는 재활훈련으로 셋 다 나가버려 조용하므로 당분간은 여기에 있기로 했다.
#. 5
겁이 난다. 날 수 밖에 없다. 2주만에 훌훌 털고 일어 날 수 있을지, 또 같은 증상이 반복되는 것은 아닐지, 동료들의 눈초리, 그리고 정신과 입원 전력이 내 경력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그런 고민들이 입원하고 있는 내내 머릿속에 가득하다.
하지만 그대로 죽을 수는 없었어. 하고 애써 위안을 삼지만, 이미 나는 나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핵폭발 뒤 피폭 중심지를 그라운드 제로라고 한다. 어쩌지? 가엾은 미잘, 그라운드 제로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