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거울에 비친 몸을 본다. 치골에서 쇄골까지 내 시선은 애정없는 연인처럼 무심하게 몸을 더듬는다. 체지방이 늘어 근육의 윤곽선의 희미해지고 근 매스가 줄어 볼륨감이 떨어졌다. 체중도 줄었다.   

기울어진 선반에 올려놓은 샤워타월이 떨어진다. 눈으로 보면서도 잡지 못한다. 반사신경이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한다. 심폐지구력, 근지구력, 유연성, 스트렝스. 신체 능력을 판단하는 지표 전 분야에서 내 신체의 기능이 현저히 저하 된 것을 느낀다.  

하지만 건강검진 결과는 체내의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고 말했다. 초음파도, 심전도도, 혈압, 엑스레이도 내 몸에 흐르는 이상 징후를 잡아내지 못했다. 

왼쪽 가슴 언저리를 더듬어 본다. 심장이 맥동할때 마다 싸 한 느낌이 퍼져 나간다. 뭐라고 딱 집어 얘기하긴 곤란한데. 아무튼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했다.

#. 2 

과장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귀에 웅웅하고 울린다. 어디 안 좋으세요? 하고 그가 묻는다. 묻는 그의 얼굴이 척추 부러져 울던 그 녀석의 얼굴과 겹친다. 괜찮아. 라고 했지만 정신은 여전히 혼미하다. 뭐 부터 해야 할지,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다. 보고서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전화가 울린다. 과장님. 회의 들어오시랍니다. 과장님? 순간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야, 이 새끼야 그런 직함으로 불러대면 월급 존나 많이 받는 것 같잖아. 과장님! 그는 다시 나를 부른다. 익숙한 목소리다. 잘린 제 손가락 한 마디를 들고 얼어붙어 있던 그 녀석의 목소리. 회의 들어오시랍니다. 나는 어질한 머리를 감싸쥔다.  

메일을 열기가 두려울 정도로 일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끊임없이 서류들이 문으로 들락거렸고 하루 세번 회의하는 시간보다 자는 시간이 짧았다. 용량을 늘릴대로 늘린 약이 듣지 않았고, 약 기운에 하루 종일 비몽사몽해 일을 할 수 없었고, 거지같은 인수인계에 업무파악조차 되지 않은 신임 과장은 일주일이 넘도록 야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난 주. 토요일을 꼬박 새고 일요일 오전.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급기야 사단이 나고 말았다.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와 대화를 하고 있는 나. 이런, 젠장.  

나는 처음으로 나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 3 

닥터는 약을 바꿀 것과, 입원치료를 받을 것을 제안했다. 그녀는 멋드러진 병명을 붙여줬지만 내 증상은 예민한 신경줄과, 업무 스트레스, 과로에 따른 약간의 정신과적 질환, 약물 오 남용에 따른 피로누적 정도가 전부였다. 어쨌거나 shut down. 업무는 불가능한 상태. 놀란 보스는 당장 치료를 받을 것을 종용했고 보스 재량에 의해, '아마' 연가를 까지 않은 무기한 병가를 받았다. 전화도 하지 말란다, 걱정도 하지 말란다, 심지어 과장도 하지 말란다. 내 공석도 내가 알 바 아니란다. 터프한게 멋지고, 배려가 감사하긴 하지만. 안 봐도 훤하다. 나 없는 자리. 개판 오분전.   

내내 마음이 무겁다. 일신의 병환을 이유로 책임을 헌신짝 버리듯 하다니. 18세기 사무라이였다면 할복으로 사죄할만한 송구스러움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마음 편하게 회복하기는 글렀다. 아, 눈 딱 감고 씨발, 그냥 한번 콱 그어? 

#. 4     

몸에 난 숱한 자상과 창상의 흔적, 피부에 아로새겨진 화려한 그림이 그들의 화려했던 과거를 말한다. 내 신상명세를 꼬치꼬치 캐 묻던 그 중 하나가 내가 묻는다. "어이 미잘이! 내 동생이 사십인데 자네한테 말 놔도 되나?" 아, 혈압. 씨발. 그게 말이 돼? 나는 거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공손하게 말 했다. "네." 

하지만 그들은 매우 친철하다. 밥 먹기 싫어하는 나를 위해 끼니마다 밥을 가져다 주고, 커피며 과자등 온갖 주전부리를 제안한다. 싫다고 말 하기도 지쳐서 다 받아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나 없을 때 그들은 종종 옹기종기 모여서 내 얘기를 한다. "왜 걔 있잖아. 미잘이. 걘 얼굴도 이쁜데 아픈게 참 아까워." "밤에 잠도 못 자더라." "바둑은 못둬." "티비도 안 보던데?"  

간호사가 혼자 쓸 수 있는 병실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가격이 비싸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귀찮기도 하고. 또 낮에는 재활훈련으로 셋 다 나가버려 조용하므로 당분간은 여기에 있기로 했다.  

#. 5 

겁이 난다. 날 수 밖에 없다. 2주만에 훌훌 털고 일어 날 수 있을지, 또 같은 증상이 반복되는 것은 아닐지, 동료들의 눈초리, 그리고 정신과 입원 전력이 내 경력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그런 고민들이 입원하고 있는 내내 머릿속에 가득하다.  

하지만 그대로 죽을 수는 없었어. 하고 애써 위안을 삼지만, 이미 나는 나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핵폭발 뒤 피폭 중심지를 그라운드 제로라고 한다. 어쩌지? 가엾은 미잘, 그라운드 제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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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1-05-3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심플하게 Hi~ 인사나 하렵니다.

뷰리풀말미잘 2011-06-01 07:48   좋아요 0 | URL
Hi- 좋은 아침이에요.

2011-05-31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1 0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1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2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11-05-3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따라 하이~

뷰리풀말미잘 2011-06-01 07:49   좋아요 0 | URL
굿모닝. 오랫만이에요.

가시장미 2011-06-01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우연히 보게 된 글인데, 손가락을 움직이게 되네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산발적으로 흩어진 생각들을 어떻게 모아야 할지...고민중입니다.

전 소아정신과에서 아이들을 상담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전공이 심리학이라.. 어찌어찌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지요. 큰 병원은 아니지만, 다양한 케이스를 접하다 보니,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심각한 생물학적 결함에서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어요. 선천적으로 이상이 있는 경우는 조금 예외일 수도 있겠지만, 감기나 바이러스성 질병을 앓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정시간이 지나 상황이나 심적인 요인이 변화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더라구요.

사실 님에 대해 잘 알지 못 하는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누구나 님이 처한 상황에서 힘들고 고단한 일들을 모두 떠안고 오랜시간을 보내왔다면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에 시달렸을테고, 지금 님이 아픈것처럼 똑같이 아팠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님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이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여러요소들을 같이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을 드리고 싶네요. 의사가 입원을 하라고 하는 경우는 병적인 상태의 심각성을 고려해서 일 수도 있겠지만, 상황과의 격리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지금 님이 처한 상황에서 격리되지 않으면 호전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입원을 권하셨을지도 몰라요.

입원을 하셨으니, 님의 빈자리로 인해 생길 일들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잊고 그동안 못하셨던 수면, 독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는데에만 몰두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사실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걱정하신다고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 일들이 님의 건강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으니 지금 상황에서는 주변사람들 말대로 신경 뚝 끊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모두 다 내려놓으시고 나면 정말 님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실지도 몰라요. 불안해하지 마시고, 좋은 생각, 편안한 생각만 하시길 바랄께요.

사실 님이 다 아시는 이야기라는 거 알아요. 그런데 가끔은 내가 다 아는 이야기라도 누군가의 입을 통해, 글을 통해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일 때가 있어요. 님에게 충고나 조언을 해드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 글이 마음을 놓으시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었으면 해서.. 그 마음을 남겨요. 아무쪼록 건강관리 잘 하시고, 힘내시길 바랄께요.

뷰리풀말미잘 2011-06-01 09:5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가시장미님. 큰 힘이 되네요. 저는 물론 제 상태와 환경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때론 부담이 되기도 하지요. 상담사는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서도 내담자에게 넌 거지같은 자식이라고 말 하지는 않지요. ㅎㅎ 예, 저는 참 피곤한 사람이고 위안을 얻기 힘든 성격입니다.
 

북한의 연평도 폭격으로 인한 사태의 추이는 천안함 사태를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미 7함대와의 합동훈련 이후로 북한도, 언론도, 여론도 잠잠해 질 것 같습니다. 대북정책은 오늘 대통령 담화문 대로 강경기조를 유지하겠지만 이미 더 이상의 어떤 조치가 남아있는지 의문입니다. 다만 군사적인 대응을 강화시키는 정도겠지요. 

관련해서 연평도에 MLRS가 들어온 모습이 언론에 포착됐네요. 그런 것도 국민의 '알 권리'에 속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최소한 알려주려면 제대로 알려주던가 해야죠. 동아일보 홍진환 기자의 기사입니다. 요즘 동아일보, 이렇게 일 해도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나봐요.   

http://news.donga.com/Politics/3/00/20101129/32945431/1   

혼란스러우실 거에요. 정리해 드릴게요.

한국에는 두 종류의 MLRS(Multiple Launch Rocket System)가 있습니다. 독자개발한 k-136 130mm 다련장과 미 육군에서 들여온 M270 MLRS. 먼저 기자가 얘기한 130mm 다련장은 군단 및 여단급 부대에 130여기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36연장으로 0.5초당 1발 18초에 36발 사격이 가능한 무기입니다. 몇 발에 축구장 초토화. 요즘 언론에서 이런 얘기 좋아하던데 오히려 이해하기가 어렵게 들리더군요. k-136의 한발당 유효 살상범위는 45m입니다. 이 k-136은 전술적으로 연평도에 배치 될 일도 없고, 기자가 올린 사진에 해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k-136

사진은 M270 MLRS네요. 12연장으로 227mm. 약 k-136의 두배 구경을 사용합니다. k-136의 업그레이드된 형태라고 보면 될 것 같네요. 사거리도 10Km 가량 더 길고, k-136은 고폭탄(내장된 화약의 힘으로 '인마'를 살상하죠)을 사용하는데 비해 M270 MLRS는 DPICM탄을 사용합니다. DPICM(이중목적 고폭탄)은하나의 탄두에 수백발의 자탄子彈이 들어있는 형태의 탄인데 '인마' 뿐 아니라 102mm의 철판을 관통할 수 있습니다. 적 기갑무기에 쥐약이죠. 살상범위가 축구장이 어떻고 하는 얘기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M270 MLRS

그럼 왜 연평도에 k-136이 아닌 M270 MLRS가 배치되었을까요? DPICM으로도 갱도에 들어있는 대포를 잡을 수는 없는데.  답은 M270 MLRS로 DPICM탄 외에 ATACMS(전술 지대지 미사일)를 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TACMS는 북한이 개머리 등지에서 운용하고 있는 갱도포병을 잡을 수 있는 유도탄 기능과 충분한 위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죠.   

또 다른 의문.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서해 5도에 MLRS가 배치되지 않았을까? M270 MLRS는 일반 포병부대가 아닌 유도탄 사령부에서 운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해병에도 포병 병과가 있지만 MLRS를 운용할 줄은 모르죠. '연평도=해병'이라는 고정관념. 그리고 세계최강의 자주포 K-9이 해답이라는 단순함이 전술적 실수를 만들어 낸 겁니다. 굴 속에 있는 두더지를 돌멩이로 잡을 수 없다는 건 상식인데 말이죠.     

체크메이트.

M270 MLRS의 연평도 배치, 한미합동군사훈련. 자, 이제 북한은 꼼짝없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지금 정부의 후속조치는 당분간 서해에서 대북 억지력을 발휘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쪽은 방송으로 나불거리는 것 외에 군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당장은 뭔가 움직일 말이 없어보이네요. 하지만 이것이 곧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사실 남한이 자체적인 군사력으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차지한 것은 이미 꽤 오래 된 이야기 입니다. 국지적으로 전투력을 증강시킨들 그게 전체 판도에 어떤 심각한 영향을 끼칠까요? 관점을 바꿔 볼 필요가 있을것 같네요. 왜 남측은 충분한 정치, 군사, 경제적 억지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빈번한 도발과 테러를 허용하는걸까. 그건 억지력이 사태의 키-포인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뭔가 잘못 흘러왔고,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부 정책이든 동아일보의 엉터리 기사든 뭐든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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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11-30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사이익을 노리는 단체나 개인은 숨어서 빙그레 웃고 있을 것이 뻔할 뻔자...기회는 이때다 묻어버릴 껀 빨리 묻을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노골적으로 보이다 보니..

뷰리풀말미잘 2010-11-30 22:21   좋아요 0 | URL
굿 이브닝! 오랫만이에요 메피님. 날씨 쌀쌀한데 감기 조심하세요!

다락방 2011-01-01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1, 총 26129 방문


2011년 말미잘님 서재의 첫 방문자는 다락방임.
해피 뉴 이어.

뷰리풀말미잘 2011-01-05 22:2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해피뉴이어! ^^ 다락방님 신나는 한해 되세요!

다락방 2011-02-26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1, 총 26665 방문


나 스토커같다. 그쵸. 히히

뷰리풀말미잘 2011-02-27 00:31   좋아요 0 | URL
ㅎㅎ 세상에는 아직도 신기한 것 투성이에요.

nlboe 2011-03-18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예요!
방명록을 남기고 싶었는데, 회원가입 하라고 해서..
알라딘에 회원가입을 했다간 큰 사고를 치게 될 것이므로
걍 요런 방법을 택했어요 흑흑흑
이히히 요 댓글을 보면 좀 두려우시겠지 우후후후훗

2011-03-20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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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0-09-06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누구야, 누구~ 미사리 아닌감.

그런데 미잘! 날다, 아니에요?


뷰리풀말미잘 2010-09-10 21:57   좋아요 0 | URL
미잘은 헤엄을 치죠. ^^

pjy 2010-09-06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선명한 대비라니^^ 노오란 쌰쓰입고, 도대체 몇번이나 폴짝거린건가요?ㅋㅋㅋ

뷰리풀말미잘 2010-09-10 21:58   좋아요 0 | URL
한 번 입니다. 반갑습니다. PJY님. ^^

다락방 2010-11-2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6, 총 25732 방문


9월초에 글을 올리고 그 뒤로 올라온 글이 없는데도 누군가 꾸준히 뷰리풀말미잘님 서재에 들어오네요.
늘 한명은 나일텐데, 지금 이시간 나머지 다섯명은 누구일까요?
글도 써주지 않는 미잘님을 대체 왜 이렇게 찾아오는걸까요?

뷰리풀말미잘 2010-11-29 21:34   좋아요 0 | URL
어디에서 링크를 타고 기웃거리는 이방인들인것 같은데요. :) 오랫만에 글 하나 썼어요. 저는 그간 좀 실어증 같은거에 걸렸던 것 같아요.
 

#. 1 

만해의 싯구처럼 침묵이 공간을 감싸고 돌았다. 아직 밤 공기는 서늘했고 테이블에 둘러 앉은 다섯 남자의 사이엔 최후까지 당겨진 기타줄 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다섯 남자는 전국 체전에서 명성을 떨친 유도의 마스터 ‘손 본좌’. 일본의 용담호혈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검도 국가대표 상비군출신 ‘문 검객’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어떤 상대든 제압할 수 있다는 합기도의 ‘박 달인’. 무패의 동네 챔피언, 복싱의 ‘말 고수’. 그리고, 응용식물학과 공학용 계산기의 달인 ‘전 나부랭이’.

우리는 武 란 무엇이며, 道 란 무엇인가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인가, 혹은 야만의 소치일 뿐인가에 대한 철학적 논점부터, 일본의 고류 유술과 현대유도의 계통과 맥락을 탐구하는 역사적 논점, 날선 검을 들지 않는 검도의 리치가 과연 무적을 담보하는가. 혹은 무에타이를 포괄하는 복싱 체계 이외의 다른 타격 체계가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기술적 논점까지 그 범위는 한정이 없었다.

쟁론은 격해졌고 급기야 손 본좌는 솥뚜껑만한 손으로 테이블을 후려치며 소신을 밝혔다. 과연 가운데 놓인 거대한 족발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힘이었다.

“하여간 효도르보다 센 놈은 없다니까!”

손 본좌의 무례한 언동에 박 달인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고, 문 검객은 손가락 마디를 우두둑 소리가 나게 꺽었으며, 말 고수는 고함을 질렀고, 전 나부랭이는 족발을 집어먹었다.

쩝쩝.

순간 살벌하게 얼어붙은 장내의 분위기. 무려 여덟개의 시선이 전 나부랭이의 오물거리는 입과, 입술에 묻어 번들거리는 돼지 기름을 주목했다.  

손 본좌는 말문이 막혔고, 문 검객은 하, 하는 실소를 터트렸으며, 박 달인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족발이 빈 접시의 귀퉁이를 가르켰고, 말 복서는 고함을 질렀다. 거의 울듯한 표정의 전 나부랭이.

그가 저 귀퉁으로 정리된 건 그야말로 순식간. 그리고 족발이 식을세라 다시 논쟁은 불꽃을 튀겼다. 그런데 그때, 심후한 내공의 소유자 박 달인이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끼고 창 쪽으로 시선을 뿌린다. 갸웃.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손 본좌, 다시 주장을 전개하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뭔가 시커먼 형체가 우리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곤충강 나비목의 그 괴생명체. 우리끼리 '팅커벨'이라고 부르는 그것. 어른 손바닥 이상의 압도적인 사이즈를 자랑하는 그걸 우리는 나방이라 쓰고 괴물이라 읽는다. 터져나온 문 검객의 외마디 비명.

“으아아아악!”

훌끗 봤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사이즈였다.  

손 본좌는 거의 주저앉았고, 문 검객은 미친년 널뛰듯 상 위의 나무젓가락을 목검처럼 휘둘렀으며, 손만 대면 무엇이든 제압할 수 있다는 박 달인은 문고리를 제압하기 시작했고, 말 복서는 고함을 질렀다. 

아아, 그 때 나선 것이, 응용식물학과 공학용 계산기의 달인 전 나부랭이. 저 구석에서 비쩍 골은 몸을 일으킨 그는 놀라운 스피드로 공학용 계산기를 휘둘러 녀석을 격추시켰고, 바닥에 묻지 않을 정도의 배려 넘치는 강도로 녀석을 지그시 밟아 제압했다. 그리고 가볍게 집어서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깨끗한 솜씨였다. 창 밖으로 던지기 전에 손 본좌쪽으로 한번 휘둘러 그를 자지러지게 하는 센스마저 잊지 않았다. 

아직까지 젓가락을 휘두르고 있는 전 국가대표 상비군, 문 검객을 진정시키는 것을 끝으로 사태는 정리됐고, 전 나부랭이는 상석을 차지했다. 다 식은 족발은 별로 맛이 없었고. 

그날, 우리는 아무도 '무'나, '도'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 2

- 야, 너 손만 대면 뭐든 제압할 수 있데매.

- .....

- 근데 문고리도 제압을 못하더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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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5-3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시골에서 무협지 읽으시냐능 ㅎㅎ

여긴 지금 한 서너시간째 폭설이 내리고 있네요.

뷰리풀말미잘 2010-05-30 11:06   좋아요 0 | URL
여긴 폭설이 그리운 날씨에요. 책 읽을 시간이 잘 없네요. ^^ 6월에 눈싸움을 할 수 있다니. 멋진 나라네요.

Mephistopheles 2010-05-30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근래 읽었던 동화 중에 가장 감명깊은 '동화' 였어요.

뷰리풀말미잘 2010-06-04 21:29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 암요 이 모든 이야기는 동화이지요!

다락방 2010-05-3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나방도 못잡는 남자사람이로군요! 실망이에요!

뷰리풀말미잘 2010-06-04 21:2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저는 평화주의자라서요..
 




창문을 벌컥 열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하늘이 있을거에요.  

다락방님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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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3-2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뷰리풀말미잘 2010-03-20 23:02   좋아요 0 | URL
오, 이 득달같은 댓글이란. ㅎㅎ 즐거운 주말 저녁입니다.

2010-03-21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1 0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