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만해의 싯구처럼 침묵이 공간을 감싸고 돌았다. 아직 밤 공기는 서늘했고 테이블에 둘러 앉은 다섯 남자의 사이엔 최후까지 당겨진 기타줄 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다섯 남자는 전국 체전에서 명성을 떨친 유도의 마스터 ‘손 본좌’. 일본의 용담호혈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검도 국가대표 상비군출신 ‘문 검객’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어떤 상대든 제압할 수 있다는 합기도의 ‘박 달인’. 무패의 동네 챔피언, 복싱의 ‘말 고수’. 그리고, 응용식물학과 공학용 계산기의 달인 ‘전 나부랭이’.

우리는 武 란 무엇이며, 道 란 무엇인가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인가, 혹은 야만의 소치일 뿐인가에 대한 철학적 논점부터, 일본의 고류 유술과 현대유도의 계통과 맥락을 탐구하는 역사적 논점, 날선 검을 들지 않는 검도의 리치가 과연 무적을 담보하는가. 혹은 무에타이를 포괄하는 복싱 체계 이외의 다른 타격 체계가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기술적 논점까지 그 범위는 한정이 없었다.

쟁론은 격해졌고 급기야 손 본좌는 솥뚜껑만한 손으로 테이블을 후려치며 소신을 밝혔다. 과연 가운데 놓인 거대한 족발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힘이었다.

“하여간 효도르보다 센 놈은 없다니까!”

손 본좌의 무례한 언동에 박 달인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고, 문 검객은 손가락 마디를 우두둑 소리가 나게 꺽었으며, 말 고수는 고함을 질렀고, 전 나부랭이는 족발을 집어먹었다.

쩝쩝.

순간 살벌하게 얼어붙은 장내의 분위기. 무려 여덟개의 시선이 전 나부랭이의 오물거리는 입과, 입술에 묻어 번들거리는 돼지 기름을 주목했다.  

손 본좌는 말문이 막혔고, 문 검객은 하, 하는 실소를 터트렸으며, 박 달인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족발이 빈 접시의 귀퉁이를 가르켰고, 말 복서는 고함을 질렀다. 거의 울듯한 표정의 전 나부랭이.

그가 저 귀퉁으로 정리된 건 그야말로 순식간. 그리고 족발이 식을세라 다시 논쟁은 불꽃을 튀겼다. 그런데 그때, 심후한 내공의 소유자 박 달인이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끼고 창 쪽으로 시선을 뿌린다. 갸웃.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손 본좌, 다시 주장을 전개하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뭔가 시커먼 형체가 우리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곤충강 나비목의 그 괴생명체. 우리끼리 '팅커벨'이라고 부르는 그것. 어른 손바닥 이상의 압도적인 사이즈를 자랑하는 그걸 우리는 나방이라 쓰고 괴물이라 읽는다. 터져나온 문 검객의 외마디 비명.

“으아아아악!”

훌끗 봤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사이즈였다.  

손 본좌는 거의 주저앉았고, 문 검객은 미친년 널뛰듯 상 위의 나무젓가락을 목검처럼 휘둘렀으며, 손만 대면 무엇이든 제압할 수 있다는 박 달인은 문고리를 제압하기 시작했고, 말 복서는 고함을 질렀다. 

아아, 그 때 나선 것이, 응용식물학과 공학용 계산기의 달인 전 나부랭이. 저 구석에서 비쩍 골은 몸을 일으킨 그는 놀라운 스피드로 공학용 계산기를 휘둘러 녀석을 격추시켰고, 바닥에 묻지 않을 정도의 배려 넘치는 강도로 녀석을 지그시 밟아 제압했다. 그리고 가볍게 집어서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깨끗한 솜씨였다. 창 밖으로 던지기 전에 손 본좌쪽으로 한번 휘둘러 그를 자지러지게 하는 센스마저 잊지 않았다. 

아직까지 젓가락을 휘두르고 있는 전 국가대표 상비군, 문 검객을 진정시키는 것을 끝으로 사태는 정리됐고, 전 나부랭이는 상석을 차지했다. 다 식은 족발은 별로 맛이 없었고. 

그날, 우리는 아무도 '무'나, '도'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 2

- 야, 너 손만 대면 뭐든 제압할 수 있데매.

- .....

- 근데 문고리도 제압을 못하더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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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5-3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시골에서 무협지 읽으시냐능 ㅎㅎ

여긴 지금 한 서너시간째 폭설이 내리고 있네요.

뷰리풀말미잘 2010-05-30 11:06   좋아요 0 | URL
여긴 폭설이 그리운 날씨에요. 책 읽을 시간이 잘 없네요. ^^ 6월에 눈싸움을 할 수 있다니. 멋진 나라네요.

Mephistopheles 2010-05-30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근래 읽었던 동화 중에 가장 감명깊은 '동화' 였어요.

뷰리풀말미잘 2010-06-04 21:29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 암요 이 모든 이야기는 동화이지요!

다락방 2010-05-3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나방도 못잡는 남자사람이로군요! 실망이에요!

뷰리풀말미잘 2010-06-04 21:2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저는 평화주의자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