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 강의 프리즘 총서 34
루이 알튀세르 지음, 황재민 옮김 / 그린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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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기원˝에 대한 프랑스식 사유. 루소에 대한 징후적 독해를 통해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제시. 인간불평등기원론의 형상이 배경으로 바뀌고, 배경은 형상으로 바뀜. 전제군주제 타도의 외침은 안 보이고, 역사를 우발적 계기에 의해 매개되는 원환들로 보는 관점이 특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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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 -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
테리 이글턴 지음, 전대호 옮김 / 갈마바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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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벌써 30년 전쯤인데,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철학이 완결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역사가 끝났다는 말만큼이나 웃기는 말이지만, 이제 더 이상의 철학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 때는 소련이나 동독의 철학아카데미에서 교과서로 출판한 콘스탄티노프, 스토이스로프, 오이저만 등의 변유”, “사유책들을 읽을 때였다. 요즘 젊은이들이 득템”, “꿀잼”, “아싸”, “ㅂㅂㅂㄱ”, “스벅”, “빠바”, “학식등의 줄임말을 쓰듯, 그 때 학생들도 줄임말을 썼다. “다현사”, “제론”, “사구체”, “BG”, “노급”, “NK”, “PT”, “가투”, “특위”, “CC” .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양에도 “diamat”, “histomat” 같은 말들이 있었으니까. 요즘 쓰이는 줄임말들에 비해, 그 때의 것들은 품위가 있었다고, 요즘 것들이 자본의 외화라면, 그 때의 그것들은 반자본주의적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견강부회일까? 테리 이글턴의 『유물론』은 유물론, 더 정확히 말하면, 복수의 유물론들에 대한 간략하지만 훌륭한 소개이다. 여기에서 소개되는 유물론들은 거의 한 세대 전 내가 접했던 국가 이데올로기화된 맑스주의, “당의 맑스주의”, 그 자체로 완성된 진리인 양 제시되었던 변유”, “사유와는 상관없는 유물론들이다.


1.

물론 전혀 상관이 없지는 않다. 이 책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이 “the” materialism이 아니라, one of them으로 다뤄지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계기를 구성한다. 이 책의 부제는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인데, 원서에는 이 부제가 없다. 분명히 이 4인이 책 전체에 걸쳐 언급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저자가 이들 네 명의 이론에 초점을 맞춰 지면을 균등히 할애하는 것은 아니다. 책 전체로 보면 맑스>니체>비트겐슈타인>프로이트 순으로 비중이 크다. 이글턴은 맑스의 유물론과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이론에 내재해있는 유물론적 계기들간의 순접과 마찰의 지점들을 잘 보여주면서 이들을 재료 삼아 자신의 신체적 유물론(somatic materialism) 혹은 인간적(anthropological) 유물론의 윤곽을 제시한다. 예전의 변유, 사유가 모든 형이상학과 관념론 잡사상을 일소하는 무기로 제시되었듯, 그는 이 신체적 유물론의 잘 벼려진 칼끝을 만물이 인간의 사유에 의해 구성된다고 보는 포스트모던 나르시시즘을 향해 겨누고 있다.


2. 유물론들

1장은 유물론들이라는 제목처럼, 이 긴 역사를 지닌 다양한 조류의 유물론들이 소개된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이후 뉴턴, 스피노자, 18세기 영국 경험론(데이빗 하틀리, 조지프 프리슬리), 셸링, 맑스와 엥겔스, 니체, 베르그송, 에른스트 블로흐 등을 거쳐서 들뢰즈의 생기론적(vitalist) 유물론, 신유물론, 레이몬드 윌리엄즈의 문화적 유물론, 의미론적(semantic) 유물론, 캉탱 메이야수의 사변적(speculative) 유물론 등이 속도감 있게 다뤄진다. 나를 포함하여 스스로를 유물론자라고 생각했던 독자들은 이 유구한 전통과 넓은 폭을 지닌 관점 속에서 자신이 유물론이라고 알았던 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이글턴은 이 유물론들을 모두 긍정하거나, 그것들의 장점들을 조합하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각 유물론들의 궁지들을 드러낸 후, 자신의 신체적 유물론에 대한 소개를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이글턴이 지적하는 기존 유물론들의 궁지들, 혹은 그의 이의 제기들을 조금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변증법적 유물론은 만물에 관한 이론이 되고자 하는 열망(21)을 갖고 있지만,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20)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불분명하다.

2) 물질을 관념화하고 에테르화하는 경향을 보이는 생기론적 유물론은 물질에서 고통을 제거하고 물질의 육중함을 외면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23), 우주적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인간과 물질의 구분을 없애버림으로써 관조적 세계관으로 귀착된다(27). 특히, 생동하고, 창조적이며, 욕망하고, 역동적인 영역과 안정적 물질 형태들의 억압적 영역 간의 대립을 제시하는 들뢰즈의 우주적 생기론은 (모든 사물들을 신 혹은 생명력의 측면들로 보는) 노골적인 반유물론으로 귀착된다. 여기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처럼) 인간은 신에 준하는 존재로 격상되고, 신은 초월성을 잃고 물질적 실재와 융합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전형적 오류 - 존재는 존재를 본딴 것이고, 이에 따라 신은 전능한 Super-Object가 되어버린다 - 라 본 것에 다름아니다(29-30).  

3) 사변적 유물론자 퀑탕 메이야수는 이성적 사유의 무한성을 강조하며, 우연성을 실재의 근본적 진실로 간주한다(44). 그러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의 사유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글턴은 신의 존재 가능성을 주장하는 특이한 유물론자다.)


이글턴의 이러한 비판은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준거에 의해 수행된다. 그는 이 유물론을 인간과 관련해서 가장 확실하게 손에 잡히는 것 인간의 동물성, 실천적 활동, 신체 구조 - 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정리하고 있다(50-51).


1장에서 검토되는 유물론의 제 조류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까 싶다가, 유물론인데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이글턴의 논리가 매우 궁금해진다. 당분간 짬 날 때마다 이글턴의 다른 저작들을 읽어봐야 하겠다.


2장에서는 그의 신체적 유물론의 이론적 단초들이 검토된다. 이 책의 부제에 들어가있는 니마비프 4인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몸에 대한 통찰들이 논의된다. 부제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2장의 주인공인데, 책 전체로 보면, 이글턴은 프로이트보다 더 많은 지면을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할애하는 것 같다. 이글턴은 아퀴나스가 신체적 유물론자일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유물론자이며, 그와 맑스의 인식론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71). 내가 아퀴나스를 볼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이글턴의 아퀴나스 사랑은 다른 저작들에서도 반복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중요한 것은 아퀴나스가 훗날의 니체처럼 신체와 감각을 주변화해버린 철학들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https://blog.aladin.co.kr/eroica/11402694)를 읽으면서는 니체와 아리스토텔레스적 계기가 순접되는 것을 읽고,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는데, 이 『유물론』을 읽으면서 니체와 아퀴나스의 공통적 입장이 병치되어 제시되는 것을 보면서 그 때와 동일한 당황/흥미/쾌감(?)를 느꼈다.


3. 맑스의 신체적 유물론

3장에서는 맑스의 초기 저작들을 중심으로, 맑스가 인간을 생각하는 사물이 아니라, 활동하는 몸으로 보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까지 간과되었던 몸에 관한 맑스의 관심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맑스와) 이글턴은 감각을 지닌 몸으로 살며 실천하는 인간 행위자에 초점을 맞추고, 이 몸은 자연 현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산물(86)이며, 자연과 역사의 영역 모두에 속하는 것(89)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류의 역사의 근저에는 몸이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는 인간이 역사적 본성과 자연적 역사를 동시에 갖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글턴은 여기에서 역사를 갖는다는 말의 의미를 훌륭하게 풀어낸다(89-97). 맑스가 유적 존재라고 칭한 인간의 물질적 본성에는 자신의 실존 조건들을 바꾸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고, 이것이 역사를 갖는다는 말이 뜻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 역사를 가져야 한다는 결정은 (자연의 일부인) 몸이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기반해서 맑스에게 몸(으로 수행하는 노동과 몸과 떼어서 논할 수 없는 섹슈얼리티)은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지점이다(98-99).


이글턴의 논리 전개가 뛰어난 것은 신체적 유물론자로서의 맑스의 모습을 소묘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역사적 유물론과 연결되는지를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교환가치와 도구적 합리성은 감각이 그 자체로 인식하는 대상의 특수한 질(사용가치)을 탈물질화하는 힘(86)으로서, 생산자의 몸을 그 자체의 감각 능력을 지닌 것으로 보지 않고, 노동하는 도구로 격하시킨다(101). 베버가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찬양하였던 금욕주의는 사람의 몸에서 실체를 빨아들이는 흡혈귀인 자본의 마수에 걸린 소외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102). 이처럼 자본주의는 인간을 자신의 몸으로부터 소외시킨다”(103, 『경제학-철학수고』). 따라서 사회주의의 목표 중 하나는 몸이 강탈당한 역량들을 몸에게 돌려주어 감각들이 제구실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103-104).


3장은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에서 제시된 많은 주제들을 다른 앵글에서 잡은 샷들을 보여줘서 더 재미있는데, 그 중 하나가 토대-상부구조에 관한 논의이다. 그 책에서 토대-상부구조를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탁월하게 재해석해냈는데, 이번에도 이와 관련된 흔한 오해를 정정하며, 새로운 해석을 선보인다(109-112).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말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처럼 행동이 사유를 결정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여기에서 의식에 대한 존재의 선차성은 사유가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몸과 욕구의 산물이라는 점을 뜻한다. 그리고 의식은 법, 예술, 정치, 이데올로기 같은 상부구조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활동에 내재하는 사유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은 맞지만, 행동이 사유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애당초 의식은 사회적 존재의 한 부분이므로, 존재로부터 독립적인 의식을 상정할 수 없다. 이 분리 불가능성은 선차성이 결코 아닌 것이다. 사유가 물질적 실재로부터 자유롭다는 착각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라는 물질적 토대를 갖고 있는 것이다(117-118).


이처럼 맑스는 철학을 철학 너머의 영역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한다. 니체와 비트겐슈타인도 다른 방식으로 이를 수행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발리바르가 반철학자로 부른 유형에 해당하는 인물들인 것이다.


4. 니체: 보이스카웃 정신으로 가득찬 개인 트레이너

3장도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맑스와 니체가 이글턴의 뇌 속에서 때로는 어깨동무도 하고 때로는 주먹다짐도 하는 모습이 제시되는 4장이 가장 재미있었다.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를 읽으면서 일었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니체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생긴 몇몇 의문들도 해소할 수 있었고, 니체에 대한 나의 미심쩍음의 정당함의 근거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니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 단지 니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ㅎㅎ..


먼저 맑스와 니체의 공통점부터 보자. 두 명 다 고귀한 것이 저속한 것에 기원을 둔다고 보며, 앎이 본질적으로 실천적이고 몸이 앎의 토대라고 보는 유물론자이다.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둘 다 권력에 관심을 기울이며, 관념론의 위로를 경계하는 비도덕주의자이며, 인류 역사를 폭력, 갈등, 억압의 피비린내 나는 서사시로 이해하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역사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역사주의자이다. 이글턴이 보기에, 이들은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보다 나은 미래가 오리라는 희망으로 그 공포조차 직시하는 비극적 사상가들이다. 이 두 사람이 다 받아들이는 낭만주의적 자기실현의 윤리에 따르면, 좋은 삶이란 자기 역량의 자유로운 표현이다. 또 이 둘은 추상적인 평등관을 거부한다.

 

양자는 신체적 유물론이라는 저자의 관심을 공통적인 기반으로 삼고 있지만,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요소들을 갖고 있다. 이글턴은 이를 다음처럼 잘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다.


1) 맑스라면 세계를 몸들이 다른 몸들을 지배함으로써 성장하고 번창하려는 장소로 보는 니체의 관점, 곧 권력의지에 대한 논의를 일종의 우주적 자본주의로 일축했을 것이다(126),

2) 맑스는 역사로부터 이해가능한 패턴을 식별해내려고 하는 반면, 니체는 역사를 무의미와 우연의 섬뜩한 지배로 본다(127).

3) 인류의 역사는 니체에게 극소수의 초인이 도래함으로써 극복되는 반면, 맑스에게는 공산주의라는 더 보편적인 구원이 상정된다(128).

4) 맑스는 종교를 이데올로기와 똑같이 일축했지만, 니체는 종교를 장황하게 공박한다.

5) 삶을 도덕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생각한 니체는 대부분의 도덕이 다루고 있는 인간의 번영(human flourishing)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반면, 맑스는 행위자의 역량을 상호적으로 타인들의 유사한 자아실현 안에서 또 그것을 통해서 실현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권장할만한 기준으로 갖고 있다(148).


맑스(1818-1883)는 니체(1844-1900)를 몰랐고, 니체는 여러 저작에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표시하면서도 정작 맑스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듣보잡였을까? 맑스가 니체를 몰랐던 것은 이해가 가지만, 니체가 맑스를 몰랐다는 것은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두 사상가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은 걸출한 학자들 베버, 푸코, 들뢰즈 등 도 정작 양자를 비교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못 봤다. 그러므로 나는 맑스와 니체의 이러한 비교 자체가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글턴이 제시한 벤다이어그램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비극적 역사관을 지닌 신체적 유물론자라는 교집합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을 보라」의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1015828)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표시한 바 있다.

19세기 말 니체는 도덕을 비판하였다그렇다면 오늘날 21세기에 니체 혹은 니체주의가 비판하는 것은 무엇인가그것도 도덕인가? 그렇다면 오늘날의 도덕은 무엇이고, 아니라면, 도덕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가?”


이글턴은 그 때의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줬다. 니체에게 도덕은 삶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으로서, 사람들을 길들이고, ⓑ진실을 부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144). 다 니체의 저작 어디에선가 본 말들인데, 이 책을 보기 전까지 저렇게 간단히 정리할 수 없었다. 오늘날의 도덕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올 수가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어떤 기능을 수행해야 도덕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실마리를 얻은 것 자체로 큰 수확이다.


이글턴은 맑스와 니체 사이에서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니체 저작의 급진성들을 상당히 잘 정리하면서도 초인이라는 니체의 정치적 해법에 대해 부정적이다. 아마도 이는 그가 숙적으로 삼고 있는 포스트모던 나르시시스트들이나 들뢰즈를 비롯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니체 사랑이 못 마땅하기 때문인 것 같다. 두 가지만 보자. 먼저, 이글턴은 높은 산을 홀로 오르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니체의 저술들에서 보이스카우트 증후군을 읽고, 그가 개인 트레이너처럼 몸의 건강, 정신의 쾌활함, 힘 등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니체가 대학생 시절 매독에 걸린 덕일지도 모른다고 야유한다(136). 이글턴의 조롱과 야유는 니체 특유의 조롱과 야유의 뺨을 친다. 둘째, 이글턴은 니체의 저작에 대중의 끔찍한 복수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다고 본다(131). 니체를 따르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니체의 정치학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회피한다(132). 니체의 극우파적 기질에 대한 변호는 그가 독일 민족주의와 반유태주의를 혐오했다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약자들과 체질이 나쁜 자들은 소멸할 것이라는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가 한 말을 오버해서 악의를 갖고 해석해보자면, 기저질환자들에게 더욱 치명적인 오늘날의 코로나19바이러스 팬데믹이 바로 니체가 바라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혁명적 좌파는 니체와 싸울 수밖에 없다고 이글턴은 주장한다.


5.

마지막 5장의 주인공은 비트겐슈타인인데, 잘 모르고 별 관심도 없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넘어갔다. 이 책 전체에 걸쳐서 이글턴은 맑스, 니체, 아퀴나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를 신체적 유물론자로 보면서 자신의 관점을 정립하고 있다. 위에서도 썼듯, 나에게는 맑스와 니체에 대한 이글턴의 통찰이 돋보였다.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 더 관심이 있는 이들은 또 다른 느낌을 갖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맑스는 잘 모르지만 니체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꽤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대학교 1, 2학년 때 "변유", "사유" 읽은 것으로 스스로를 유물론자로 칭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유물론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하는 고민을 안 하게 해준 것은 물론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은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였지, 실제로 어떤 지적 문제를 해결해주었을까? 아니 그러려고 노력한 적이 있나? 물론 그 때까지 나를 오래 짓누르던 종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했고, 이 진리가 나를 자유케 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고의 투철함으로 이어졌던 것 같지는 않다. 이글턴은 내게 유물론의 내용뿐만 아니라, 유물론자의 지적 투철함까지도 보여 준 것 같다.


나를 매료시킨 이글턴의 책들을 당분간 읽어나갈 생각이다그리고 이글턴 읽기보다는 좀더 힘든 니체 읽기도 지금 당장은 못 해도 짬짬이 해나갈 것이다아마 다음에 니체를 읽을 때에는 니체를 읽으면서 느끼는 내 불편함에 조금은 더 자신감이 생길 것 같다.


6. 번역

번역은 전반적으로 훌륭하다. 긴 문장을 짧게 잘 끊어 번역하면서도 이글턴의 유머 감각을 옮기려고 한 점이 엿보인다. 그런데 번역자가 헤겔 전공자여서 그런지, object / objective / objectification을 무조건 객체”/”객체적”/”객체화로 번역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 “객관적”, “대상화라고 옮기는 것이 더 나아 보이는 때가 간혹 있었다. mode도 거의 양태로 옮기는데, “양식으로 옮겨야 맞거나 더 자연스러운 곳도 있었다. 반면, 15-16쪽에서는 mind spirit을 구분하지 않고 다 정신으로 옮겨 놓았다. 이해할 만한 번역의 어려움인데, 뭐라 번역하면 더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음은 내가 읽기에 오역 같은 것들 아니면 좀 어색한 부분들이다.


p.29: 들뢰즈는 제약(constraint)을 부정적으로만 본다. 이 관점은 저잣거리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반영한다. 시장 이데올로기 (marketplace ideology): 자유방임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p.30: 전능한 주체-객체 (an all-powerful Super-Object): 하이데거의 개념 중에 Supergegenstand라는 것이 있나 본데, “초대상쯤 될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떻게 번역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저 주체-객체는 오역 같다.


p.35: 비개인적 힘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들도 우리를 방해한다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에게 부과된다?) (They, too, weigh in upon us like impersonal powers,)


p.49: “세계가 환상이라면앞에 “(속류 힌두교의 주장처럼)” 누락.


p.72: “역사적 생산양태와 같은” → 역사적 생산양식과 같은


p.85: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포이어바흐에 관한 첫 번째 테제


p.87: (commodification)


p.90: (bearers)


p.106: 후자의 상태를 상태를


p.126: 세계를 모든 물체모든 물질적 신체 (every material body)


p.127: 도덕 도덕주의자


p.127 / p.173: 분쟁 갈등(conflict)


p.137 11: “반영한다.”사물에사이에 한 문장 누락. The strongest will is one that can dispense with the myth of inherent meaning. 가장 강한 의지는 내재적 의미라는 신화 따위는 필요없는 의지인 것이다.


p.155: 볼 일 없는 특색 없는(nondescript)


p.166: 거품 찌꺼기 인간 쓰레기 (scum)


p.168: 존적인 인지 양의지할 만한 (dependable) 인지 양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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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4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balmas님의 "루이 알튀세르 - 루소 강의 출간"

발마스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제가 발마스님의 권유를 받아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 아마도 원서를 갖고 계실 듯하여 여쭙습니다. 한국어판 20쪽 7번째 줄에 ˝홉스와 로크에게 사회란 자연상태에서 연역해낸 것˝이라는 구절인데요.

루소는 이들이 자연상태를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회의 모습으로부터 부당하게 연역했다고, 따라서 그들의 자연상태 -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사적 소유의 존재 -는 모두 자연상태가 아니라, 문명 발생 이후의 상태라고 비판합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저 부분은 ˝홉스와 로크에게 자연상태란 사회로부터 연역해낸 것˝이 맞는 말 아닌가요?

그런데 또 그 다음 부분을 읽어보면, 저 문장은 루소의 비판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그냥 홉스와 로크의 입장을 기술한 것 같기도 하구요.

잘 모르겠어서 여쭤봅니다. 혹시 확인해주시면 정말 감사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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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 -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
테리 이글턴 지음, 전대호 옮김 / 갈마바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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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함, 통찰력, 독창성, 글솜씨, 이 모든 것을 함께 갖춘 멋진 꼰대 마르크스주의자가 있다면 그가 테리 이글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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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4 : 육체의 고백 나남신서 201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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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코로나19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리뷰인지도 모르겠다. 지루했지만 꾸역꾸역 읽어서 어쨌든 끝까지 보았는데 역병이 창궐하지 않았다면 리뷰 쓰려고 이 책을 더 붙잡고 있었을지 의문스럽다. 읽는 동안은 과연 이 책 전체에서 푸코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또 지금 읽는 부분이 앞의 논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보게 되든 어떻든 일단 파편적 요약이나마 그냥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몇 자 적는다.


1. 육체 (la chair)

이 책의 제목에 들어있는 육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관성(주체성)의 형식이고, “주체화의 한 방식이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존재 방식이면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인식 방법인) 동시에 자기변화의 도식으로 이해되는 경험형식이다(84-85). 성생활 규범은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2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세례 이후 지은 죄에 대한 속죄의 규율 – ‘두 번째 속죄’(116-7; 13, 부록3) - 3세기 말부터 실시된 수도사의 고행(14) 같은 새로운 개인의 테크놀로지가 등장하면서 근본적 변화를 겪었다(83-84). 이는 단순히 느슨했던 성모럴이 빡세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변화를 통해 이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자기와 자기 사이의 어떤 관계 방식”, 새로운 경험양식이 출현했음을 뜻한다. 1장에서 살펴보는 것은 대략 4세기 경 확립된 수도원에서 등장한 새로운 경험 형식이다. (불어를 모르고, 영어 번역본은 아직 안 나와서 la chair육체로 번역한 것에 대해 논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다.)


2. 성찰-고백 (examination – confession)

고대 철학의 양심성찰과 책임지도의 관습은 수도원 제도가 만들어진 이후부터 기독교에 의해 수용되어 새롭게 발전했다(178). 5세기 초 카시아누스(360/65-430/35 CE.)의 저작들은 당시 수도생활의 모습을 짐작케 해주는데, 수도원에서 행해진 지도와 복종의 실천은 이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경험양식이 출현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도생활은 스승 혹은 고참의 지도를 필수적으로 수반하는데, “지도는 복종을 가르치는 엄격한 훈련이며, 이를 통해 수련 수도사는 타인의 의지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다. 이 지도를 통해 수련 수도사가 배우는 것은 순종, 인내심, 겸손함이다. 순종이란 타인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것이고, 인내심이란 원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 자신의 의지가 다른 사람의 의지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고, 겸손함이란 아예 원하기를 원하지 않기,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기이다(193). 이러한 수도원의 지도는 그리스 철학의 지도와 다르다. 그리스에서 지도의 목표가 지도받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적 의지 행사의 조건을 확립하는 것이었다면, 기독교적 지도의 목표는 개인의 의지 포기이다(195).


자기 의지의 포기와 그것을 타인의 의지로 대체하는 것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자기성찰과 끊임없는 고백의 훈련이 필수적이다”(186). 곧 지도는 고해라고 불리는 성찰-고백의 영구적 실천을 중요한 도구로 삼는다”(204). 기독교적 성찰 또한 스토아주의적 성찰과 다르다. 스토아주의적 성찰이 정념의 변화에 대한 이성의 통제를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견해가 올바른 것이었는지를 검증하는 것이었음에 비하여, 기독교적 성찰은 내게 떠오르는 생각은 과연 누구의 생각인가, 혹시 나의 영혼을 공격하려는 악마의 소행 아닐까 하는 식이다. 곧 스토아주의적 성찰은 생각의 대상 과거의 행동 - 에 대한 것이지만, 기독교적 성찰은 (현재의) 생각의 주체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성찰은 그 성찰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성찰 주체가 확신할 수 없으므로 그 자체로서 불완전하며, 이로부터 고백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자기에 대한 자기의 시선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말하기와 끊임없이 연결되어야하는 것이다(218). 곧 기독교의 고해 장치에는 영혼의 내면에 무한히 몰두해야 할 의무가 타인에게 자신의 내면을 말로 표출해야 한다는 의무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 자기 자신의 진실 말하기란 근본적으로 자신의 포기라는 목적에 종속된 것에 불과하다(221). 이는 자기통제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적 의지 행사의 조건 확립을 목적으로 삼았던 스토아주의적 양심성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170, 195).

 

[2020. 5. 20. 추기: 1974-75년 강의록 『비정상인들』의 2월 19일 강의(박정자 역, 206-208)에서 푸코는 고백은 9-11세기경 널리 퍼졌고, 서방 교회에서 고백이 의무화된 것은 대략 6세기경부터 아일랜드에서 고백성사를 통해 죄의 경중에 따라 보속을 주게 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강의가 이뤄지고 7-8년쯤 후에 쓰여졌을 이 『육체의 고백』에서 고백의 기원은 더 과거로 올라가 5세기 초 수도원에서 이미 행해지던 것이라고 쓰고 있다.]

 

여기까지가 제1장의 내용인데, 부록2를 먼저 읽고 2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부록2에서는 1 4절에서 다뤄진 성찰-고백(examination – confession), (‘고백고해라고 이상하게 번역된) exomologesis exagoruesis, “악행(wrong-doing)”진실 말하기(truth-telling) 등의 문제가 『안전, 영토, 인구』나 “Omnes et Singulatim” 등에서 다뤄진 사목권력과의 연결 속에서 논해지기 때문이다. 본문은 사목권력에 대해서 177쪽에서 살짝 언급만 한다. 양떼를 규합하고, 인도하고, 양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돌보고, 위험으로부터 구해주고, 양떼를 책임지는 목자의 형상(555-564)으로 표현되는 사목권력은 군주, 행정관, 가장, 귀족, 지배층, 교사가 행사하는 권력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고, 인간을 지도하며, 인간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사목권력은 기존권력과 달리, “개인의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통치한다(565-566). 양떼 전체를, 하지만 동시에 양 한마리 한마리를 돌보는 목자는 전체 공동체를 하나의 절대적 진실(↔오류; 이단)로 결합시켜야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마음 속 진실, 비밀,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이 숨기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죄를 알아야 한다. 이 권력관계에서 진실은 전체적으로 주입되면서도, 개인적으로 캐내진다. 이 진실에 대한 강요가 사제와 신자들의 관계를 구성한다(572). 진실에 대한 강요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이 사목권력은 고대 그리스에는 존재하지 않던 기독교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3. 동정의 기술: 자기에 관한 테크놀로지

이처럼 1장에서 고대 그리스의 양심성찰과 책임지도가 4세기 이후 기독교 사목권력의 성찰-고백을 통해 변용된 것을 살펴봤다면, 2장에서 푸코는 기독교적 동정(virginity)이 고대 그리스의 금욕(continence)과는 어떻게 다르며, 그것이 어떠한 용도로 개발, 사용되어 왔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이제 문제는 쾌락을 추구하는 성적 행위의 금지, 절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동정이라는 실천이 갖고 있는 긍정적 성격의 부각이 중요해진 것이다. 3세기에 나온 키프리아누스, 테르툴리아누스, 메토디우스 등의 저작들에서 동정은 단지 악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자신을 헌신하는 태도로서, 자신의 영혼을 공격할지도 모르는 악마에 대한 영적 투쟁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4세기에 들어오면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00: “자기와의 관계에 대한 반성적이고 열성적인 실천의 기술”],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02: 동정녀는 포위당한 도시국가처럼 사방에서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며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암브로시우스[277: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결혼과 달리 동정은 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안키라의 바실리우스[310-319: (영혼과 육체의) “접촉을 피하라”], 카시아누스[334-342: 악령(spirits)과의 영적 전투; 자기 자신에 대한 극기 훈련; 유혹은 타자의 의지의 결과, 승부가 결정되지 않은 투쟁, 분석이 필요한 주제] 등은 동정을 어떤 기술(art)로 정립하였다. 곧 동정을 세밀하게 조정된 생활방식, 독자적인 절차와 기술, 자기 자신과 맺는 일종의 관계유형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266). 이 동정의 실천은 감각, 영상과 잔상의 효과, 사유의 활동과 같은 것을 아우르는 내적 인식과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타인의 권력과의 관계 속에존재하게 된다. 카시아누스는 이러한 자기에 관한 테크놀로지로서의 동정의 기술을 수도생활이 수반하는 (수음, 리비도, 육욕에 대한) 영적 투쟁과의 관련 속에서 정립하였다(360).  이 동정의 실천은 개인의 예속화(subjectivation / subjectification?)와 동시에 개인의 내면성의 객관화(objectification)를 표시하는 시선과의 관계 속에 들어가게되면서 육체와 영혼 모두를 관통하게 된다(320-1). 이제 주체화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절제가 아니라, 주체화가 자기의 무한한 객체화를 전제하고, 타자와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서 실행된다는 것이다(362-3). 이처럼 자기 자신의 진실을 찾고 말해야 하는 의무가 주체화를 핵심적으로 규정하게 된 것은 초기 기독교 수도생활을 통해서였다.

 

4. 성의 리비도화: 욕망하는 주체와 법적 주체의 동일화

마지막 3장에서 푸코는 시선을 세속 사회의 부부생활로 옮기면서, 리비도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론들을 중심으로 욕망하는 주체와 권리를 지닌 법적 주체가 어떻게 중첩하여 등장하였는지를 추적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결혼생활에 대해 제시된 규범들을 다루는 1, 2절 은 정말 지루하다. 요점은 동정만큼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결혼도 나름 가치를 갖는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결혼이 (수도생활의 동정처럼) “육욕의 관리술로 다뤄진다는 것이다(402). 이제 결혼생활도 사목의 대상으로 편입된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부부 사이의 의무를 부채로 파악하면서 부부관계를 법적경제적 관계로 접근한다(405). 의무를 방기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고, 상대방이 육욕을 남용하는 죄를 짓게 하는 결과를 갖고 올지도 모른다. 이는 생식만을 결혼의 온당한 목적으로 생각했던 이전의 사고와는 다른 것이고(394-7), 제국의 행정과 교회의 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 이뤄진 사목상의 변화가 반영된 것이다(370-373, 412).


마지막 절 3절에서 푸코는 리비도개념이 보여주는 것은 성행위의 통치가능성이라고 주장한다(495). ‘리비도개념은 펠라기우스파인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비판에서 등장하였다. 율리아누스에게는 죄(과도한 행위)가 악에 선행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악(리비도)이 죄(허용되지 않는 성행위)보다 선행한다(522). “한 덩어리의 경련현상”, “무의지적인 욕망의 형태”, “의지를 초월해서 우뚝 솟아오르는 것인 리비도는 명확한 육체적 결과를 야기하지만, 주체로 하여금 주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게 만드는 것이다(494-5, 501). 이제 육욕의 책임을 의지에게 돌릴 수 없다(504).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리비도 개념을 통해 (훗날 프로이트가 그랬듯) 주체 내부에 의지적인 것과 무의지적인 것 간의 분할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육욕을 주체의 실제적 구조 속으로 편입한다(501-3). 이 성적 욕망은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된 것의 결과이며, 성행위를 통해 원죄의 현재성이 끊임없이 전달된다(507). 따라서 리비도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담긴 죄의 현재성과 원죄를 연결하는 초역사적 굴레이다(508). 주체에 아로새겨진 육욕이라는 죄는 주체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으므로 이제 끊임없는 경계와 성찰-고백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푸코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작업을 이후 천 년 넘게 서구인의 성생활을 관장한 규범을 마련한 규범화 작업으로 보면서, 동시에 육욕을 법적 준거체계 속에 올려놓음으로써 욕망의 주체와 (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리의(법적) 주체를 하나로 생각하게 만든 일이라며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513-8). 이제 규범화된 결혼은 제도적신체적이면서, 법적성적인 것이 된다(519).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우리는 법적 주체에 중심을 둔 성윤리의 단계로 들어간다”(522). 부부 관계에서 두 가지 목적 생식과 상대편의 죄를 면하게 하는 방법이외의 모든 성행위는 허용할 수 없는 것이고, 그 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 것이다(523). 이에 따라 성행위의 이론적 위상이 변화한다. 고대의 성행위는 한 덩어리로 쾌락의 절정을 지향하는 행위혹은 몸의 경련이 수반되는 일체성으로 이해되었다. 반면, 기독교에서 이런 일체성은 욕망, 타락, 죄에 대한 일반 이론에 의해 분리된다. 생활규범, 자기 자신의 올바른 처신, 다른 삶에 대한 지도기술, 성찰의 테크닉, 고백의 방식들로 분리된 것이다. 그런데 이 분리된 요소들이 의무적 요소가 되어 새로운 일체성 - 욕망과 주체에 관한 문제 으로 재조합된다. 이로부터 성, 진실, 권리()가 더욱 팽팽하게 서로를 조이게 되는 일체적 관계가 오늘날 서구문화의 특징이라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


5. 단상

푸코는 이 책을 포함한 말년의 작업에서 욕망하는 주체의 계보학을 구성하기 위하여 (내게는 넘사벽이었던) 고대 그리스, 로마와 초기 기독교 문헌들을 치밀하게 독해하였다. 15세기 이전의 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나는 『쾌락의 활용』 이후 푸코의 작업들의 가치를 잘 몰랐었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대략 서로마 몰락(476 CE.)부터 동로마 몰락(1453 CE.)까지의 중세 역사도 모르는데, 그 전의 역사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먼 옛날 이야기일 뿐, 지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역사도 모르는데, 교부들의 기독교 문헌이라니카시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 등이 도대체 어떤 이들인지 몰라서 계속 인터넷을 찾아보면서 읽다 보니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갈 듯도 싶었다. (이들에 관한 간단한 소개: http://m.cpbc.co.kr/paper/view.php?cid=678880&path=201704)


이 책을 왜 읽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몇십년만에 빛을 보았다는 푸코의 유작이라는 말에 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끝을 맺지 못하였으므로, 제대로 된 결론과 서론이 존재하지 않는 미완성 유고의 특성상 푸코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알지 않는 한, 이 책을 읽고 큰 의미를 깨닫거나 하는 일은 없을 듯 싶다. 다만 여기에서 푸코가 하는 이야기들은 그의 다른 작업의 여기저기에 파편처럼 흩어져 존재하고 있고, 그 파편들을 모아 푸코가 하는 이야기를 『성의 역사』라는 푸코의 연작 시리즈의 맥락 안에서 재구성하는 것은 의미가 큰 일일 것 같다. [관련 문헌: 1) “윤리학의 계보학에 대하여: 진행 중인 연구에 대한 개관드레퓌스라비노우,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서우석 역, 나남); 2) On the Government of the Living: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9-1980; 3) Wrong-Doing, Truth-Telling ] 이것이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해보고 싶은 푸코 공부 중 한 가지이다. 다른 하나는 니체와 푸코 말년의 작업들 간의 연관 및 차이에 관한 것이다. 죄와 부채, 이것이 『도덕의 계보』 제2논문의 주제인데, 니체의 글은 영감으로 가득차 있지만, 경험적 고증이나 사회제도 분석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면, 푸코의 이 책 『육체의 고백』은 같은 주제들이 역사적 맥락과 함께 등장한다. 또한 수도생활에서의 자기 의지 포기나, 무의지적인 리비도와 의지의 대립 같은 것은 니힐리즘에 대한 니체의 논의를 푸코가 자신의 방식으로 전유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당장은 할 여유도 능력도 없지만 나중을 위해 이렇게 글로 남겨둔다.


6. 번역에 관한 불만

불어를 모르는 나는 오역을 지적할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진 번역 때문에 책읽기가 힘들었던 부분들이 상당히 많았다. 오역 지적은 푸코 전공자의 몫이고, 내게는 주제 넘는 일이지만, 이 책의 구매자이자 상당히 정성을 들여 읽은 독자로서 넋두리는 좀 해야 하겠다.


(1) exomologesis exagoreusis (17, 22, 114, 140, 531, 536, 543, 550, 615)

내 생각에 이 책 번역의 가장 큰 문제는 exomologèse고해, exagorèse고백으로 옮긴 것이다. 일상적인 한국어 용법상 고백은 고해를 포함하는 단어이다. 죄는 고백하고 고해하지만, 마음, 사랑, 비밀은 고백하지, 고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해고백의 부분집합이다. 그런데 역자는 전혀 다른 지시 대상을 갖고 있는 exomologèse exagorèse고해고백으로 옮겨놨다. 150-151쪽에 나오는 "말로 표현된 것", "구두 진술", 곧 고백이 exagorèse이고, "태도로 표현된 것", "속죄를 나타내는 일련의 몸짓, 태도, 눈물, 겉옷, 외침의 소리"가 exomologèse이다.

 

“Exomologesis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manifestation)이다. 그것은 죄인이 죄인으로서 진실을 잊지 않고 드러내는 것(alethurgy)이다. 반면 exagoreusis는 진실을 잊지 않고 자신을 담론으로 드러내는 다른 방식이다”(On the Government of the Living, 12, p. 307). Exomologesis가 눈물, 제스쳐, 복장, 행위 등으로 참회와 속죄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exagoreusis는 자신의 죄를 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이것을 어떻게 고해고백으로 옮길 수 있나? 더군다나 confessioris (143)고백으로 옮겨놓아서, exagoreusis와 같이 쓰일 때는 문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On the Government of the Living  영어판처럼 원어를 그대로 놔두든가, 굳이 번역하려면 속죄(참회)행위고백으로 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2020. 5. 20. 추기: 1974-75년 강의록 『비정상인들』의 2월 19일 강의는 참회(penance)와 고백(confession)을 구분하는데, 이 구분에 따르면, exomologesis가 "참회"이고, exagoreusis는 "고백"이다. 여기에다 쓸 말은 아니지만 박정자 번역도 웃기는 것이 앞에서는 penance를 "참회"(205)로 번역했다가 뒤에서는 "회개"(209), "고행"(212), "고백"(212), "처벌"(277)로 번역한다.]


(2) “서평의뢰서”(10, 11, 23)

서평의뢰서라는 황당한 번역어도 웃긴다. 같은 나남출판사에서 나온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역자서문(p. 11)은 이것을 당시 책 속에 끼워진 안내란으로 옮겨놓았다. 그저 책이 출판된 뒤 책장 사이에 끼어넣은 안내문인데, “서평의뢰서라니이 책의 옮긴이나 출판사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몰랐으니까 황당한 번역을 했겠지... 무책임하다.


(3) “우유” (80-81)

사람의 젖이 어떻게 우유? “이 이상하다면 모유라고 했어야지


(4) 동의(consensus)와 사용법(usus) (513-523)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욕망의 주체와 법적 주체의 중첩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논의인 것 같다. 이 개념들을 이해하려고 애써도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이것이 번역 문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옮긴이가 이전에 번역한 『감시와 처벌』은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오역이 더 늘어나는 웃기는 경우인데, 아마도 『육체의 고백』은 『감시와 처벌』만큼 잘 팔릴 책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번역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 확률은 낮다는 것에 안도해야 하는가? 출판사도 옮긴이도 반성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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